국내성지순례기

“우리도 한 때 저와 같은 개 이었다”천장사송년법회(3)

담마다사 이병욱 2016. 12. 26. 16:09

 

우리도 한 때 저와 같은 개 이었다천장사송년법회(3)

 

 

오후 2시 천장사 일요법회시간에는 죽림정사 이야기를 독송했습니다. 독송이 끝나고 나서 별다른 토론이 없었습니다. 이전에 천수경 등 의식이 꽤 길게 진행 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토론할 시간이 부족한 것입니다. 더구나 장엄등에 관한 토론이 있어서 일요법회는 경전독송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홀로그램 장엄등

 

장엄등에 대하여 김화백님이 길게 이야기 했습니다. 미술을 전공한 화백답게 전문가로서 조언한 것입니다. 김화백에 따르면 반드시 장지를 이용한 장엄등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에프알피(FRP)로 만드는 방법도 있고 더구나 홀로그램방식도 있다고 했습니다.

 

장엄등은 덕숭총림 말사에서 말사의 특징에 맞도록 만들기로 했다고 합니다. 부처님오신날을 목표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대략난감한 것입니다. 전문가를 초빙하여 지도를 받으면서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번 참석하는 신도들이 장엄등을 만들기는 무리라 했습니다.

 

김화백에 따르면 차라리 덕숭총림에 장엄등 전담팀을 상시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스님이 장엄등을 직접 제작하는 것이 나을 듯 하다고 합니다. 재가자에게 맡겨 놓으면 인건비가 지출되고, 결국 특정한 사람에게만 의지 하는 결과가 되어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장엄등은 반드시 장지로만 된 전통적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김화백의 홀로그렘 장엄등 이야기를 들으니 그럴 듯 해 보입니다. 사면에 투명 아크릴을 만들어 놓고 이미지를 비추면 쓰리디(3D) 입체 영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영상이 불상이 될 수도 있고 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터넷에는 씨디케이스와 스마트폰을 이용한 홀로그램 만드는 방법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홀로그램 장엄등을 만들면 제작비가 대폭 줄어 들 뿐만 아니라 매우 흥미를 끌 것이라 합니다. 홀로그램 장엄등을 적극 검토하기로 했습니다.

 

 

 

 

 

 

 

 

 

어색하고 어정쩡한

 

장엄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밖에 나가 송년회를 하려 했으나 저녁식사가 준비 됐다고 해서 모두 공양방으로 향했습니다. 식방에 들어 가자 스님들이 보였습니다. 염궁선원 건물이 불에 타 버려서 방이 부족한 관계로 다실은 스님들 침실로 변했습니다. 차도구는 공양방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양방에서 긴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5시 정각이 되자 선방스님들이 모였습니다. 일요법회팀원 12명은 선채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님들은 도착하자마자 스님들끼리 식사를 했습니다. 사전에 준비가 안되었는지 참으로 어색한장면이 연출됐습니다. 식사 도중에 상견례가 이루어졌습니다. 스님들이 식사를 잠시 중단 했습니다. 입승스님이 대표로 상견례 했습니다. 일요법회 팀원들은 스님들에게 일배의 예를 올렸습니다. 참으로 어색하고 어정쩡한 분위기였습니다.

 

 

 

 

 

 

 

 

동안거가 시작 되면서 정식으로 법회팀원과 상견례가 없었습니다. 이날 날을 잡아 정식으로 인사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낯이 익지 않은 스님들과는 어색했습니다. 천장사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안거를 보낸바 있는 효원스님, 길상스님, 탄구스님은 익숙하지만 나머지 선방스님들은 대화 한번 해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의식해서 인지 새로 발령받은 주지스님은 1 1일 일요법회가 끝나고 스님들과 신도들 간의 윳놀이를 제안했습니다.

 

청정한 식사

 

대게 선원은 뚝 떨어져 있습니다. 재가자들이 접근할 수 없는 금단의 영역과도 같습니다. 그래서일까 선원입구에는 이곳은 스님들이 정진중이오니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절 천장사에서는 선원이 한 장소에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재가자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습니다. 물론 공부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봅니다.

 

안거때 천장사를 찾는 스님들은 신도들과 교류해 왔습니다. 이전 주지직을 맡았던 허정스님은 안거 중인 스님들을 차례로 일요법회 법사로 초빙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이어서인지 해제철에도 계속 머무는 스님들이 있는가 하면 다음 안거철에도 방부를 들인 스님들도 많습니다. 선방스님들과 신도들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서로 상견례가 끝난후 식사에 들어 갔습니다. 머리를 삭발한 거사님도 함께 했습니다. 백일기도를 왔는데 머리를 삭발한 모습이 스님처럼 보입니다. 신도석에 앉아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늘 그렇듯이 청정한 식사입니다. 일체 고기가 들어 가지 않은 식단입니다. 준비한 케이크를 잘랐습니다. 크리스마스날이어서인지 케이크에는 “Merry Cristmas”라 쓰여져 있습니다. 이에 어느 법우님이 예수보살 탄생 기념입니다라며 농담 했습니다.

 

 

 

 

 

 

 

 

 

 

 

 

 

공양방에서 스님들과 함께 식사했습니다. 다실이 침실로 변하는 바람에 한자리에서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겸상은 하지 않습니다. 출가자와 재가자는 엄연하게 구별됩니다. 인생관과 가치관이 다른 것이 결정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출가자와 현실을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재가자의 길은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목표는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여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어쩌다 개로 태어났을까?

 

불교에서는 육도윤회를 말합니다. 욕계중생들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천상을 유전하고 윤회함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부처님이 제시하는 그 길을 죽 따라 가면 궁극적으로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수행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알아 들을 수 없는 존재들은 끊임 없이 육도윤회해야 합니다.

 

육도윤회하면 사람이 축생으로 태어날수도 있습니다. 어리석게 살면 개나 돼지 등과 같은 축생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개로도 태어날 수 있습니다.

 

천장사에는 개가 있습니다. 유심히 보니 새끼가 있습니다. 이제 갓 태어난 새끼 두 마리가 개집에 있습니다. 법우님에 따르면 태어난지 이제 3주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절에서 기르던 개에서 태어난 것이라 합니다. ‘낭만이라 불리는 수컷과 바람이라고 불리는 암컷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새끼개들의 이름을 청룡이와 백호로 지었다고 합니다.

 

 

 

 

 

 

 

 

 

 

새끼 개들을 보면 귀엽습니다. 애완견을 좋아 하는 사람들은 사랑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할머니들은 내 강아지 왔는가?”라며 손자들을 귀여워 해줍니다. 그러나 강아지일 때 뿐입니다. 강아지가 개로 되면 본성이 드러납니다. 마치 늑대 새끼가 어른 늑대로 되었을 때 야성을 발휘하는 것과 같습니다.

 

개 같은 인생

 

흔히 못되 먹은 사람을 개로 비유합니다. ‘개같다느니 개판이라느니 하여  개에 빗대어 말합니다. 인간을 개로 비유하는 것은 그다지 도덕적이지 않음을 말합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경에 따르면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할 수 없다면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라고 시설할 수 없을 것이고, 세상은 염소, , , 돼지, , 승냥이처럼 혼란에 빠질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하므로,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다라고 시설하는 것이다.(It.36,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은 개와 같은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인면수심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하고나 관계 맺는 것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개는 아무하고나 붙어서 새끼를 납니다. 그러나 태어난 새끼를 보면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늑대 새끼도 갓 태어나면 귀엽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본성이 발현 됩니다. 개는 개로서 행위를 합니다. 만일 사람이 개처럼 산다면 다음 생에서는 개로 태어날 것입니다.

 

생명은 아름답다

 

새끼 개를 볼 때 마다 측은한 마음이 듭니다. 그것은 어쩌다 개로 태어났을까?”에 대한 것입니다. 육도윤회를 믿는 불자로서 당연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은 아름답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기적 같아서 그 자체만으로도 경외감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축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하찮은 개로 태어 났지만 갓 태어난 새끼는 관심의 대상입니다. 두 마리의 새끼는 부모개를 반반씩 닮은 것 같습니다. 얼룩덜룩한 새끼는 수컷 낭만이를 닮았고, 흰색 새끼는 암컷 보람이를 닮았습니다.

 

 

 

 

 

 

새끼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본능에 의해서 짝짓기가 이루어진 것이라 봅니다. 아무리 천한 축생이라도 일단 태어난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과정이 어떻든지간에 천한 출신의 사람이라도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축복입니다. 그것은 해탈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만이 가르침을 접할 수 있어서 미천한 가문에서 천하게 태어 났어도 축복입니다. 모든 땔감에서 불이 붙듯이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축생으로 태어나면 또다시 윤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한 때 저와 같은 개 이었다

 

이제 갓 태어난 새끼가 개장에서 얼굴을 내밀었을 때 귀엽다기 보다 측은 한 느낌이 앞섭니다. 육도윤회하는 세계에서 태어나 보니 개가 되어 있네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누구나 개로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상윳따니까야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S15)’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돼지로 태어나 돼지가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S15.13) 라 했습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우리는 언젠가 돼지로 태어난 적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경에서는 소, 물소, , 염소, 사슴, , 돼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급된 여덟 가지 축생은 사실상 전체 축생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에아이(AI)조류 독감으로 인하여 닭과 오리가 살처분 되고 있습니다. 그 숫자가 수천만마리라 합니다. 몇 해전에는 구제역이 발생되어 돼지와 소가 살처분 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흘린 피는 엄청날 것입니다. 육도윤회를 믿는 다면 우리도 어느 생에서인가 돼지로 태어났을 수도 있고 닭으로 태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미얀마속담에서는 빛나던 범천도 돼지 우리에서는 꿀꿀거리네라 합니다. 하늘나라 천신들도 공덕이 다하면 축생으로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누구나 축생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축생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 없습니다. 제명대로 살지 못합니다. 닭이나 돼지로 태어나면 인간의 식탁에 올라갈 살코기용이 됩니다. 닭은 불과 30여일만에 출하되고, 돼지는 6개월만에 도축 됩니다. 야생에서는 약육강식입니다. 먹이사슬로 인하여 약자는 강자의 먹이가 될수밖에 없습니다. 언제 잡아 먹힐지 알 수 없습니다. 축생으로 태어나면 제수명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축생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개로 태어나면어느 정도 수명이 보장됩니다. 식용이 아닌 애완용이라면 죽을 때까지 살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절에서 태어난 새끼 개들은 다른 축생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선방에서 수행정진 하는 스님들이 돌 보아 주고 끼니마다 먹이를 주어 보살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새끼 개들을 볼 때 마다 측은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부처님은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볼 때 마다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됨을 말씀 했습니다. 육도윤회를 믿는 불자라면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와 같은 개 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개로 태어나 개가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라고 바꾸어 놓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

 

절이라는 곳은 청정한 공간입니다. 특히 선방스님들이 머무는 공간은 더욱더 청정하고 수승한 공간입니다. 청정한 스님들과 재가신도들은 생활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동일하게 가르침을 추구하는데 있어서는 구별과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수행자로 산적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행복하고 부유하게 산적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불행하고 가난하게 산적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지옥고도 겪었을 것이고 때로는 개로 태어나 목이 잘리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을 것입니다.

 

갓태어난 천장사 새끼 개들은 귀엽고 사랑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한량없는 윤회과정에서 축생으로 태어난 것은 큰불행이라 봅니다. 개로 태어나면 부처님 가르침을 접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행일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S15.11,전재성님역)

 

 

 

 

 

 

2016-12-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