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힘있는 자가 인내 해야 하는가? 승자의 리더십과 자비무적(慈悲無敵)
리더십에 대한 이러저러한 책이 있습니다. 소위 ‘성공학’ 관련 서적입니다. 한때 이런 부류의 책을 열심히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대게 ‘이러이러하게 해라’라 하여 명령체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런 책을 읽고 실천해 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내용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성공학이라기 보다 세상에서 살아 남는 교활한 방법도 소개 되어 있어서 처세학에 더 가깝습니다.
리더십과 관련하여 ‘경청’이 있습니다. 남을 말 잘 듣는다는 뜻의 경청은 한마디로 최고의 리더십일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소통입니다. 자신의 할말만 하고 귀를 닫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경청할 줄 아는 리더십입니다. 경청의 리더십이라면 ‘불통’이라거나 ‘먹통’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경청의 리더십은 소통의 리더십입니다. 잘 들을 줄 아는 자는 잘 말할 줄 아는 자입니다. 또한 잘 경청할 줄 아는 자는 잘 인내할 줄 아는 자입니다. 설령 그가 높은 지위에 있을지라도 약자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약자가 모욕해도 인내할 줄 아는 자입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상윳따니까야 ‘제석천의 모음(S11)’의 ‘잘 읊어진 시에 의한 승리의 경(Subhāsitajayasutta, S11.5)’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경청의 리더십이자 인내의 리더십이고, 일종의 제석천의 리더십입니다. 그렇다면 신들의 제왕이라 불리우는 제석천은 어떤 리더십을 보였을까요?
아주 오랜 옛날 하늘사람과 아수라 사이에
경에 따르면, 아주 오랜 옛날 하늘사람과 아수라 사이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를 신들의 전쟁 또는 하늘사람들의 전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사람들의 전쟁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 줍니다. 여기에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아수라의 제왕 ‘베빠찟띠(vepacitti)’이고, 또 하나는 삼십삼천 신들의 제왕 ‘제석천(sakka)’입니다. 그런데 두 제왕은 치열하게 무기를 가지고 싸우기도 하지만 때로 시로써 겨루기도 합니다.
수바시따자야경에서 두 제왕은 게송으로서 서로 자웅을 겨룹니다. 먼저 아수라의 제왕 베빠찟띠가 “신들의 제왕이여, 잘 읊어진 시로 겨누자.”라고 제안합니다. 시로 승부를 내자는 것은 전에 보지 못하던 것입니다. 아수라들은 늘 싸움꾼이기 때문입니다. 늘 아수라들이 먼저 싸움을 걸어 옵니다. 그러나 그때 마다 아수라들은 패합니다. 이번에는 시를 멋지게 잘 지어서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 승부를 내자는 것입니다. 이에 제석천은 기꺼이 “베빠찟띠여, 잘 읊어진 시로 겨누자.”라고 말합니다.
경에 따르면 아수라는 기본적으로 폭력적입니다. 마치 조폭처럼 힘으로 밀어 부치는 것입니다. 힘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하고 적에 대한 복수를 선호하여 전쟁을 정당화 합니다. 아수라들에게 있어서는 ‘힘이 곧 정의’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제석천은 정 반대입니다. 제석천은 인내와 자비가 최대의 무기입니다. 제석천은 신들의 제왕이라는 최고의 지위에 있음에도 싸움에 져서 포박되어 끌려온 아수라의 제왕 베빠찟띠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이를 인내와 관용의 리더십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제석천의 리더십에 칭찬합니다. 하늘사람들의 전쟁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수행승들이여, 하물며 이와 같이 잘 설해진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출가하여 그대들이 이 세상에서 인내하고 화평해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S11.4) 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는 다름 아닌 제석천의 인내와 화평에 대한 리더십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약자에 대한 강자의 인내에 대한 리더십입니다.
그들은 왜 싸우게 되었나?
아수라의 제왕 베빠찟띠는 이전에 싸움을 걸어 제석천에게 패한 바 있습니다. 싸움으로는 이길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시를 지어서 겨루어 보자고 합니다. 베빠찟띠와 제석천의 시대결 어떻게 결판날까요? 베빠찟띠는 제석천에게 먼저 읊어 보라고 합니다. 이에 제석천은 “그대는 예전의 하늘사람, 베빠찟띠여, 그대가 먼저 시를 읊어라.”라고 말합니다. 마치 형님먼저 아우먼저 하는 것 같습니다. 누가 먼저 시를 읊을 것인지에 대하여 서로 양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석천은 “그대는 예전의 하늘사람”이라 했습니다. 이말은 제석천과 회중들이 삼십삼천에 태어나기 전에 삼십삼천의 주인은 아수라들이었음을 말합니다. 이와 관련하여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마가다 국에 마가(Magha)란 이름을 지닌 보살이 경건한 바라문으로 서른 명의 자신과 비슷한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살다가 그 자신의 공덕으로 동료들과 함께 메루 산의 하늘에 사는 제석천인 싹까로서 태어났다. 그런데 이전에 거기에 살던 존재들이 그들을 술에 취하게 만들어서 해치려고 했다. 그러나 싹까의 충고로 동료들은 모두 술에 취한 척했다. 예전의 하늘사람들은 술에 취해 메루산의 도리천에 떨어졌다. 그 후 그들은 아수라가 되었고 그들은 싹까와 추종자들인 서른 셋 하늘나라의 신들[三十三天: tāvatiṃsadeva]과 전쟁을 하면서 지냈다.”(Srp.I.388, 전재성님 편역)
삼십삼천의 원래 주인은 아수라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영토를 빼앗긴 아수라들은 끊임 없이 영토를 찾기 위해 전쟁을 걸어 옵니다. 이렇게 하여 아수라와 제석천과의 신들의 전쟁은 끊임 없이 벌어집니다.
아수라의 리더십
먼저 도발한 측은 언제나 아수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늘 패합니다. 심지어 아수라의 대왕이 포박되어 제석천 앞에 끌려 나올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 마다 제석천은 인내와 화평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풀어 줍니다. 전쟁으로는 이길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이번에는 시로서 대결하자고 합니다. 과연 누가 이길까요? 예전의 삼십삼천의 주인 베빠찟띠가 먼저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습니다.
Bhiyyo bālā pabhijjeyyuṃ
no cassa paṭisedhako,
Tasmā bhūsena daṇḍena
dhīro bālaṃ nisedhayeti.
[베빠찟띠]
“제어하는 자가 아무도 없으면,
어리석은 자들은 전보다 더욱 화를 내네.
그러므로 강력한 처벌로
현자는 어리석은 자를 눌러야 하리.”(S11.5, 전재성님역)
아수라대왕 베빠찟띠의 게송을 보면 ‘법치주의’를 연상케 합니다. 법과 질서로 세상을 통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쁘게 말하면 ‘힘으로’ 제압하는 것입니다.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힘으로 본 때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과거 유신시대나 5공시대처럼 권위주의 정권이 연상됩니다.
과거 폭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정당하지 권력에 수 많은 사람들이 저항했습니다. 저항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강력한 처벌이 뒤따랐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고 심지어 죽기까지 했습니다. 원한은 원한을 불러 일으켜 임계점이 이르자 대폭발했습니다. 폭력적인 방법이 능사가 아님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힘이 곧 정의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집단에서는 아수라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말을 듣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강력한 처벌로 누르는 것”을 말합니다.
힘에 의한 지배는 오늘날 제왕적 대통령이나 경직화된 관료조직에서 뿐만 아니라, 기업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회사의 소유주인 사장은 그 회사의 제왕이나 다름 없습니다. 회사라는 왕국에서 전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재하기 쉽습니다. 그 결과 불통을 넘어 먹통을 자초하고 말 것입니다. 각종 조직이나 단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힘이 곧 정의인‘아수라의 리더십’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제석천의 리더십
아수라의 게송에 아수라의 무리들은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제석천의 무리들은 침묵했습니다. 아수라의 리더십과 정 반대의 리더십이 제석천의 리더십입니다. 그렇다면 제석천의 리더십은 어떤 것일까요? 아수라의 제왕 베빠찟띠의 게송에 이어 신들의 제왕 제석천은 이렇게 게송으로 응수합니다.
Etadeva ahaṃ maññe
bālassa paṭisedhanaṃ,
Paraṃ saṃkupitaṃ ñatvā
yo sato upasammatīti.
[제석천]
“다른 사람이 화내는 것을 보고
새김을 확립하여 고요히 하면,
내가 생각하건대,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자를 누르는 것이네.”(S11.5, 전재성님역)
제석천의 대응방식은 베빠찟띠와 정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빠찟띠는 자신에게 도전하는 자에게 힘으로 제압하여 굴복시키려 하지만, 제석천은 단지 ‘알아차릴 뿐’이라 했습니다. 화를 내며 싸움을 걸어 오는 어리석은 자를 대하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아수라의 제왕은 ‘강력한 처벌(bhūsena daṇḍena)’이라 했지만, 신들의 제왕은 단지‘새김을 확립하여 고요히 하는 것(sato upasammatī)’이라 했습니다.
제석천은 싸움을 걸어 와도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화를 냈을 때 덩달아 화를 내지 않습니다. 만약 화를 냈다면 상대방과 똑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욕망과 분노로 살아 갑니다. 현자들은 어리석은 자와 반대로 살아 가기 때문에 욕망과 분노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화낸다고 하여 맞대응한다면 어리석은 자와 똑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현자라 볼 수 없습니다. 현자는 단지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제석천은 ‘새김을 확립하여 고요히 하는 것(sato upasammatī)’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제석천의 리더십일 것입니다.
힘의 논리로
대부분 사람들은 욕망과 분노로 살아 갑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마구 화를 냅니다. 그럴 때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본다면 틀림 없이 아수라의 형상일 것입니다. 자신에게 비난하거나 화를 냈을 때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석천은 알아차리고 침묵했습니다. 이런 사실에 대해 신들의 무리들은 기뻐했으나 아수라들은 침묵했습니다. 아수라들은 아수라의 제왕 편을 들고, 삼십삼천의 신들은 제석천을 응원한 것입니다.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제석천은 베빠찟띠에게 시를 읊으라고 말합니다. 2라운드가 시작 된 것입니다. 이에 아수라의 제왕 베빠찟띠는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습니다.
[베빠찟띠]
“그와 같이 인내하는 데서
나는 허물을 본다. 바싸바여,
어리석은 자가 그대를 두고
‘그는 나를 두려워하여 인내한다.’고 생각하면,
소가 도망가는 자에게 맹렬히 달려들 듯,
어리석은 자는 더욱 그대를 좇으리.”(S11.5,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힘에 의한 다스림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국민들은 근본적으로 어리석기 때문에 강압적인 통치가 먹혀 들어 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권위주의 정권시절에 민중들이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하나를 들어 주면 둘을 요구했을 때 더 이상 들어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많은 요구를 했을 때 강압에 의한 통치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흔히 법과 질서, 또는 법과 원칙이라는 명목하에 강하게 억누릅니다. 아수라의 제왕 베빠찟띠의 통치방식은 힘의 의한 권위주의 정권의 방식과 매우 유사합니다.
강자가 인내해야
민심을 천심이라 합니다. 국민들이 어리석은 것 같이 보여도 가장 현명한 자들입니다. 힘으로 정권을 탈취하여 힘으로 국민을 억악하려 할 때 커다란 저항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억압하려 할 것입니다. 이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아수라의 리더십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오로지 힘의 논리에 의존하는 아수라의 리더십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에 제석천은 다음과 같은 긴 게송으로 인내와 화평의 리더십을 보여 줍니다.
1.
Kāmaṃ maññatu vā mā vā
bhayā myāyaṃ titikkhati,
Sadatthaparamā atthā
khantyā bhiyyo na vijjati.
[제석천]
‘나를 두려워하여 그것을 참는다고
제 맘대로 생각하든 말든
참사람이 최상의 이익을 성취하려면,
인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네.
2.
Yo have balavā santo
dubbalassa titikkhati,
Tamāhu paramaṃ khantiṃ
niccaṃ khamati dubbalo.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 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
3.
Abalantaṃ balaṃ āhu
yassa bālabalaṃ balaṃ,
Balassa dhammaguttassa
paṭivattā na vijjati.
어리석은 자의 힘은
힘없는 자의 힘이라네.
진리를 수호하는 힘 있는 자에게
대적할 사람은 없다네.
4.
Tasseva tena pāpiyo
yo kuddhaṃ paṭikujjhati,
Kuddhaṃ appaṭikujjhanto
saṅgāmaṃ jeti dujjayaṃ.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면,
그 때문에 그는 더욱 악해지리.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네.
5.
Ubhinnamatthaṃ carati
attano ca parassa ca,
Paraṃ saṃkupitaṃ ñatvā
yo sato upasammati.
다른 사람이 화내는 것을 보고
새김을 확립하여 고요히 하면,
자신을 위하고 또 남을 위하고
둘 다의 이익을 위한 것이네.
6.
Ubhinnaṃ tikicchantānaṃ
attano ca parassa ca,
Janā maññanti bāloti
ye dhammassa akovidāti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치료하는 사람을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S11.5, 전재성님역)
제석천은 모두 6개의 게송으로 자신의 리더십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키워드는 ‘인내(khanti)’입니다. 이는 두 번째 게송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제석천은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 없는 자에게 인내하네”라 하여,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에게 인내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초불연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힘없는 자는 항상 인욕해야 하도다. (niccaṃ khamati dubbalo)”라며 정반대의 번역을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빠알리 원문을 직역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나 전문번역가에 따르면 시형론을 모르기 때문에 오역한 것으로 봅니다. 시형론에 따르면 부정의 접두사 a가 생략되는 것은 간혹 있는 일이라 합니다. 따라서 adubbalo는 ‘힘없는 자가 아닌 자’가 되어 ‘힘있는 자’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있는 자가 인내하는 것은 문맥상으로도 맞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힘없는 자는 항상 인욕해야 하도다.”라는 번역은 부적절한 것으로 봅니다.
약자는 언제나 인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내는 강자가 해야 합니다. 힘을 가진 자가 인내하지 않고 힘을 행사하려 한다면 다툼과 싸움과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힘이 곧 정의라는 아수라의 리더십입니다. 그러나 제석천은 강자로서 강자의 인내를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제석천의 리더십은 여섯 개의 게송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화내는 이에게 화내지 말라든가, 화내는 것을 알았을 때는 알아차리고 침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모두가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제석천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입니다. 제석천의 인내와 화평에 대한 리더십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리더십입니다.
선과 악의 대결에서
제석천은 여섯 개의 게송으로 말하자 하늘사람들은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아수라들은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이겼을까요? 만일 두 편에서 두 번의 대결에서 자신들이 속한 편만 든다면 2:2 무승부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삼삼십삼천 신들의 무리와 아수라의 무리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무리]
“아수라의 제왕 베빠찟띠가 시들을 읊었는데, 그것들은 폭력에 속하고 무기에 속하고 싸움에 속하고 불화와 전쟁에 속하는 것들이다. 신들의 제왕 제석천이 시들을 읊었는데, 그것들은 폭력에 속하지 않고 무기에 속하지 않고 싸움에 속하지 않고 불화와 전쟁에 속하지 않는 것들이다.”(S11.5, 전재성님역)
신들의 무리와 아수라의 무리들은 공통적으로 아수라는 폭력적이고 제석천은 평화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신들의 제왕 제석천이 잘 읊은 말에 승리가 돌아갔다.”라 했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제석천은 전쟁에서도 승리 했을 뿐만 아니라 시의 대결로서도 승리 했습니다. 인내와 평화가 억압과 폭력을 이긴 것입니다. 선과 악의 대결에서 선신인 제석천이 승리하고 악신인 아수라가 패배한 것입니다.
자비무적
아주 오랜 옛날 신들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아수라와 제석천의 전쟁입니다. 삼십삼천을 빼앗긴 아수라들은 예전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끊임 없이 싸움을 걸어 옵니다. 그때 마다 아수라들은 패합니다. 무력으로 힘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아수라의 패권주의는 인내와 관용으로 대응하는 제석천의 평화주의에 번번히 패합니다.
아수라와 제석천은 정반대의 정치철학을 가진 두 집단입니다. 아수라는 힘에 의한 패권, 즉 힘이 곧 정의라는 패권주의 입각하여 침략을 정당화 합니다. 그리고 저항하는 자들에 대하여 강력하게 응징하는가 하면 반드시 복수로 갚음을 합니다. 이는 “제어하는 자가 아무도 없으면, 어리석은 자들은 전보다 더욱 화를 내네. 그러므로 강력한 처벌로 현자는 어리석은 자를 눌러야 하리.”(S11.5)라는 게송이 잘 말해줍니다. 반면 제석천은 정의롭게 지배하고 적에 대해 인내하고 잘못한 자에게 관용을 베푸는 정치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싸움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이 화내는 것을 보고 새김을 확립하여 고요히 하면, 내가 생각하건대,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자를 누르는 것이네.”(S11.5)라는 게송에서 잘 드러납니다.
서로 상반된 정치철학을 가진 두 집단의 특징을 보면 폭력과 인내입니다. 아수라는 폭력으로 억압하려 하지만, 제석천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참고 견디어 냅니다. 아수라는 약자의 인내를 강요하지만, 제석천은 강자가 인내해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 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 (S11.5) 라 했습니다. 힘 있는 자는 그 넘쳐 나는 힘을 행사하고 싶어 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러나 힘 있는 강자가 인내한다면 최상의 인내라 하여‘참으로 힘있는 자’라 했습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자비로운 자가 가장 힘이 센 자임을 말합니다.
흔히 자비무적이라 합니다. 자애와 연민을 갖춘 자는 이 세상에서 무서울 것이 없음을 말합니다. 그 바탕에는 인내가 있습니다. 아무리 모욕을 당해도 참고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네.” (S11.5) 라 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먼저 화를 내고 흥분하는 쪽이 지게 되어 있습니다. 참고 인내하는 것이 결국 이기는 것입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했을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수호하는 힘 있는 자에게 대적할 사람은 없다네.” (S11.5) 라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자비의 가르침입니다. 자비의 가르침에 대적할 자 없습니다. 자비무적입니다.
승리자의 리더십
아수라의 리더십은 힘에 기반합니다. 그러다 보니 소통이 되지 않아 불통과 먹통이기 쉽습니다. 아수라의 리더십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기인합니다. 대게 권위적 통치방식이 아수라의 리더십일 것입니다.
제석천의 리더십은 인내에 기반합니다. 강자로서 제석천은 약자에게도 인내했습니다. 잘못한 자에게도 관대하게 대했습니다. 이는 소통을 말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하는 것입니다. 제석천의 리더십은 ‘관용’과 ‘자애’와 ‘지혜’입니다. 그런 제석천의 리더십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리더십입니다.
오늘날 수 많은 성공학이나 처세학이 난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제석천의 경청의 리더십과 소통의 리더십입니다. 가장 먼저 잘 들어야 합니다. 어떤 말이든지 경청했을 때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다음으로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경청하고 소통하고 인내 했을 때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새김을 확립하여 고요히 하는 것(sato upasammati)”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제석천의 리더십은 결국 승리자의 리더십입니다.
2017-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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