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도 유익하고 타인에게도 유익한
힘이 있어야
부처님의 열 가지 힘이 있습니다. 이를 ‘여래십력’이라 합니다. 부처님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을 말하며 여기에는 육체적인 힘과 정신적인 힘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입니다. 어느 누구도 부처님의 힘에는 당할 자가 없습니다.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정신적인 힘으로서 ‘처비처지력’ 등 열 가지 힘에 대하여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에도 여래십력에 대한 경이 있습니다. ‘열 가지 힘의 경(S12.21)’이라 합니다. 경에 따르면 “여래는 열 가지 힘을 모두 갖추고 네 가지 두려움 없음을 함께 지니며 모우왕의 지위를 차지하고 무리 가운데 사자후를 하며 하느님의 수레바퀴[梵輪]를 굴린다.”(S12.21) 라 되어 있습니다. 힘을 갖춘 상태에서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릴 수 있음을 말합니다.
힘이 있어야 공부도 할 수 있고 수행도 할 수 있습니다. 공부나 수행은 가급적 힘이 있는 젊은 시절에 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이렇게 힘을 갖추어야 사자후를 토하며 법의 바퀴를 굴릴 수 있습니다. 경에서는 오온의 생생과 소멸,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chinnapilotika’번역에 대하여
열 가지 힘을 갖춘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정진할 것을 당부합니다. 가르침에 대하여 추호도 의심을 갖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Evaṃ svākkhāto bhikkhave, mayā dhammo uttāno vivaṭo pakāsito chinnapilotiko.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나에 의해서 가르침은 잘 설해지고 밝혀지고 개현되고 설명되었으며 베일이 벗겨졌다.”(S12.2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가르침에 대하여 ‘잘 설해지고(uttāno)’, ‘밝혀지고(vivaṭo)’, ‘개현되고 설명되었으며(pakāsito)’, ‘베일이 벗겨졌다(chinnapilotiko)’ 라 했습니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분명하게 설했고 드러내었고 밝혔고 군더더기를 잘라 내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두 번역에서 차이 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chinnapilotiko’에 대한 번역입니다. 전재성님은 ‘베일이 벗겨졌다’라 했고, 반면에 각묵스님은 ‘군더더기를 잘라 내었다’라 하여 달리 번역했습니다.
전재성님은 ‘chinnapilotika’에 대하여 “pilotika는 베일과 같은 천”이라 했습니다. 자따까(Ja.II.96)에도 나오는 단어라 합니다. 빠알리어 ‘Makkhipilotika’는 방충용 천이나 아니면 액체를 여과시키는 천이라고 각주 해 놓았습니다. 각묵스님은 “군더더기(pilotika)란 헤어지고 낡은 옷을 이리저리 꿰메고 덧댄 것을 말한다.”(158번 각주) 라고 설명합니다.
빠알리어 ‘pilotika’에 대하여 빠알리사전 PCED194를 찾아 보았습니다. 찾아 보니 ‘a rag; an old clothe’라 되어 있습니다. 걸레, 누더기의 뜻입니다. ‘chinnapilotika’에서 ‘chinna’는 ‘cut off, destroyed’의 뜻입니다. 따라서 chinnapilotika는 직역하면 ‘누더기가 제거되다’의 뜻이 됩니다.
각묵스님이 번역한 ‘군더더기를 잘라 내었다’는 직역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을 인용하여 “온전한 천으로 만든 옷을 입는 자가 군더더기를 잘라낸 옷을 입는 자이다, 법도 이러하니 속임수 등과 함께 꿰메거나 덧대지 않았기 때문이다.”(158번 각주) 라고 각주해 놓았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와서 보라’고 합니다. 드러난 것으로 비밀이 없음을 말합니다. 장막에 가려져 애매한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chinnapilotika’에 대하여 “베일이 벗겨졌다”라거나, “군더더기를 잘라 내었다.”라고 번역합니다. 빅쿠보디는 "Bhikkhus, the Dharnma has thus been well expounded by me, elucidated, disclosed, revealed, stripped of patchwork”라 하여 ‘chinnapilotika’에 대하여 ‘patchwork(조각누비이불)’라고 번역했습니다. 초불연번역과 일치 합니다. 또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Chinnapilotika. Spk: Patchwork (pilotika) is an old cloth, cut up and torn, that has been sewn and stitched here and there. If one does not wear this, but is clothed in a sheet of uncut cloth, one is said to be "free of patchwork." This Dhamma is similar, for in no way is it sewn up and
stitched together by deceitful means, etc.
(CDB Vo1, 60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의 각주는 초불연 각주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장부다운 vs 남자다운
부처님은 열 가지 힘을 이야기하면서 가르침이 잘 설명되었고 잘 밝혀졌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의심 없이 믿고 따르고 실천해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당부합니다.
kāmaṃ taco ca nahāru ca aṭṭhi ca avasissatu, sarīre upasussatu maṃsalohitaṃ, yaṃ taṃ purisatthāmena purisaviriyena purisaparakkamena pattabbaṃ na taṃ apāpuṇitvā viriyassa saṇṭhānaṃ bhavissati.
“참으로 나의 몸에 오로지 피부와 근육과 뼈만 남고 피와 살은 고갈되어도 좋다! 나는 장부의 용맹, 장부의 정진, 장부의 용맹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을 성취할 때까지 정진을 계속하리라!”(S12.22, 전재성님역)
이 게송과 관련하여 초불연과 빅쿠보디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피부와 힘줄과 뼈가 쇠약해지고 몸에 살점과 피가 마르더라도 남자다운 근력과 남자다운 노력과 남자다운 분발로써 얻어야 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정진을 계속하리라.”(S12.22, 각묵스님역)
“'Willingly, let only my skin, sinews, and bones remain, and let the flesh and blood dry up in my body, but I will not relax my energy so long as I have not attained what can be attained by manly strength, by manly energy, by manly exertion.” (S12.22, 빅쿠보디역)
게송에서 ‘장부’와 ‘남자다운’, ‘manly’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들은 빠알리어 ‘Purisatta’의 번역어입니다. 이는 manhood의 뜻으로 남자다운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사내대장부’라는 말이 있듯이 ‘장부다운’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봅니다.
빠알리 문장은 장부에 대하여 ‘purisatthāmena purisaviriyena purisaparakkamena’ 이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번역하면 “장부다움 (purisatta), 장부다운 정진(purisaviriya), 장부다운 용맹(purisaparakkama)”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재성님의 번역을 보면 “장부의 용맹, 장부의 정진, 장부의 용맹”이라 했는데, 장부의 용맹이 두 번 나옵니다. 첫 번째 장부의 용맹은 ‘장부다움’으로 번역해야 올바른 번역이라 봅니다. 이와 관련하여 상윳따니까야 합본에서는 ‘장부의 힘’이라고 바로 잡았습니다.
각묵스님은 “남자다운 근력과 남자다운 노력과 남자다운 분발”이라 했습니다. 남자다운 근력이라는 말은 purisatthāmena의 번역어인데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남자다움이라 하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그런데 빅쿠보디 역시 ‘manly strength’라 하여 ‘남자의 힘’이라 번역했습니다. 역시 적절치 않은 번역이라 봅니다. 남자다운 이라는 말이 자칫 성차별적 논란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즐기는 것에는 게으르지 않다
경전에서 한 문구를 보고 공감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게으름과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문구에 자극받았습니다.
dukkhaṃ hi bhikkhave, kusīto viharati vokiṇṇo pāpakehi akusalehi dhammehi.
“수행승들이여, 게을러 나태한 자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에 빠지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며 위대한 이상을 버린다.”(S12.22, 전재성님역)
게을러 나태한 자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게으른 자는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자와 같음을 말합니다. 반대로 부지런한 자, 근면한 자, 정진하는 자는 감각적 욕망을 뿌리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열심히 정진하는 자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멀리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며 위대한 이상을 실현한다.”(S12.22, 전재성님역) 라 했습니다.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게으른 자는 결코 게으르지 않습니다. 먹는 것을 즐기는 자에게 있어서 게으름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게으른 자는 아무리 바빠도 즐기는 것에는 게으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게으른자와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자는 동의어라 볼 수 있습니다.
전재성님의 번역 “게을러 나태한 자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에 빠지고”라는 구절에 강하게 자극받았습니다. 자연스럽게 게으른자와 즐기는 자는 동의어라는 연상작용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초불연 번역 “나쁘고 해로운 법들과 섞여 지내는 게으른 자는 괴롭게 머물며”라는 말에는 연상작용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번역하는 사람에 따라 전달 강도가 다름을 여실히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빅쿠보디는 “the lazy person dwells in suffering”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머물다라는 뜻의 ‘dwell’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빠알리어 ‘viharati’에 대한 번역어로 ‘lives; abides; dwells’의 뜻입니다. ‘머물다’라는 말보다 ‘산다’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술은 아무리 청정해도
번역 비교를 하다 보면 같은 빠알리어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번역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문장도 그런 케이스에 해당됩니다.
Na bhikkhave, hīnena aggassa patti hoti aggena ca kho3 aggassa patti hoti maṇḍapeyyamidaṃ bhikkhave, brahmacariyaṃ, satthā sammukhībhūto.
“수행승들이여, 열등한 것으로 최상에 도달할 수 없으며, 수승한 것으로 최상에 도달할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청정한 삶은 최상의 제호이다. 그리고 여기에 스승이 있다.”(S12.22, 전재성님역)
각묵스님과 빅쿠보디역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비구들이여, 저열한 것으로는 으뜸가는 것을 얻지 못한다. 으뜸가는 것으로 으뜸가는 것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청정범행은 최상의 음료이고 또한 스승이 그대들의 면전에 있다.” (S12.22, 각묵스님역)
“It is not by the inferior that the supreme is attained; rather, it is by the supreme that the supreme is attained. Bhikkhus, this holy life is a beverage of cream; the Teacher is present.” (S12.22, 빅쿠보디역)
빠알리어 ‘maṇḍapeyyam’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최상의 제호(醍醐)’ 라 했습니다. 제호는 ‘우유에서 정제한 최상의 음료’라는 뜻입니다. 각묵스님은 ‘최상의 음료’라 했고, 빅쿠보디는 ‘a beverage of cream’이라 했습니다. 청정한 삶 또는 청정범행이라 일컬어지는 브라흐마짜리야가 최상의 음료라는 뜻입니다.
최상의 제호라 칭하는 ‘maṇḍapeyyam’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Srp.II.50에 따르면, 제호(醍醐:maṇḍa)는 아주 청정하게 위에 뜨는 양질의 술을 뜻한다고 한다. 하느님의 삶 또는 청정한 삶[梵行]을 양질의 술에 비유한 것에 관해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논의하고 있다.
‘술은 아무리 청정해도 마셔서는 안될 것이다. 술을 먹고 나서 큰 길에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어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된다면, 그 술이 아무리 양질이라고 해도 마셔서는 안된다.’
그러나 왜 청정한 삶이라는 양질의 술을 마실 수 있는 까닭은 용맹정진하는 ‘스승이 여기에 있다.’때문이라는 것이다.”(118번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주석을 인용하여 제호는 양질의 술이라 했습니다. 청정한 삶을 양질의 술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술은 아무리 순수하고 청정하다 해도 마셔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막걸리나 양주자 술은 술이기 때문입니다.
양질의 술을 마실 수 있는 것은 스승이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환자는 의사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얼마만큼 약을 복용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의사가 앞에 있어 그가 약을 마셔야 한다면, 그의 앞에서 의심하지 않고 마실 수 있다.”라 했습니다. 이는 스승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뜻합니다. 그 양질의 술은 다름 아닌 ‘청정한 삶(Brahmacariya)’라는 술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서로 다른 각주
만다(maṇḍa)에 대한 각주를 보면 전재성님과 각묵스님은 다르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석서는 maṇḍa를 깨끗함(pasanna)으로, peyya를 마실 것(patabba)로 설명하고 있어서(S.A.ii.50)이렇게 풀어 옮겼다. 일반적으로 maṇḍa는 우유의 크림 혹은 진수를 뜻한다.”(162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의 각주에 따르면 주석을 인용하여 문자풀이식으로 설명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유크림이라 했습니다. 이런 각주는 전재성님이 만다에 대하여 주석을 인용하여 최상의 술이라 한 것과 차이가 납니다. 빅쿠보디는 어떻게 각주했을까요? CDB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Spk explains mandapeyya as a compound of manda in the sense of clear (pasanna) and peyya in the sense of what is to be drunk (pstabba). It seems that manda originally meant the best part of milk or butter, i.e.; the cream, and like the English word came to signify the essence or finest part of anything.”
(CDB Vol1 64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는 mandapeyya에 대하여 문자적으로 풀이한 해석방법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와 같은 문자풀이는 초불연 각주와 똑같습니다. 그런데 초불연에 없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술’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peyya in the sense of what is to be drunk (pstabba)”라 했습니다. Peyya는 ‘a drink’의 뜻으로 음료나 음주를 뜻합니다. 그러나 술의 의미로서 maṇḍa에 대한 설명은 각묵스님이나 빅쿠보디의 각주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전재성님은 주석서를 인용하여 상세하게 언급한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스승은 청정한 삶의 구현이다”
부처님은 여래십력을 설명하면서 부처님을 믿고 따르라고 합니다. 그래서 “스승이 여기에 있다.”라 했습니다. 이 문구에 대한 빠알리구문은 “satthā sammukhībhūto”입니다. 전재성님은 “스승은 청정한 삶의 구현이다.”라고 각주 해 놓았습니다. 빠알리어 sammukhībhūta는 ‘met with’의 뜻입니다. 따라서 “스승을 만나라”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구문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스승이 그대들의 면전에 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빅쿠보디가 “the Teacher is present”라고 한 것과 동일합니다.
“두 겹의 전열을 뚫고 들어 가는 것처럼”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여래십력을 믿고 따르고 실천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주문합니다.
evaṃ no ayaṃ amhākaṃ pabbajjā avañjhā5 bhavissati, saphalā saudrayā, yesaṃ6 mayaṃ paribhuñjāma cīvarapiṇḍapātasenāsanagilānapaccayabhesajjaparikkhāraṃ, tesaṃ te kārā amhesu mahapphalā bhavissanti mahānisaṃsā
“우리들의 출가는 헛되지 않아 열매를 맺고 과실을 얻을 것이다. 사람들이 제공한 의복과 탁발음식과 와좌구와 필수약품을 우리가 사용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그 보시는 그들 자신에게 커다란 과보와 커다란 공덕이 될 것이다.”(S12.2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았을 때 그 과보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재가자의 보시에 대하여 “그들 자신에게 커다란 과보와 커다란 공덕이 될 것이다”라 했습니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수행승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보시하든가 실제로 만들어서 공급하려면 마치 전쟁에서 두 겹의 전열을 뚫고 들어 가는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에게 어렵다.”(Mrp.II.92) 라고 주석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깨달은 자에게 보시하기가 쉽지 않음을 말합니다.
주석에서는 보시에 대하여 “전쟁에서 두 겹의 전열을 뚫고 들어 가는 것처럼”이라 하여 성자에게 보시할 수 있는 것이 매우 희유한 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빅쿠들에게 청식하려면 순서를 한참 기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자들에게 청식할 수 있는 청식권을 갖는다면 커다란 공덕을 짓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서로 다른 번역
위 문구와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보디스님의 제안대로 tesaṃ vo kārā amhesu mahapphalā bhavissanti mahānisaṃsā 대신에 Be, Se: tesaṃ te kārā…로 읽어야 한다.”(164번 각주) 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설명하다 만 것처럼 보입니다. 구체적 설명이 없어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찾아 보았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We should read, with Be and Se, tesaṃ te kārā amhesu mahapphalā bhavissanti, as against tesaṃ vo kārā in Ee. The sense of this line has been missed by C.Rh.D at KS 2:24, and Walshe follows her at SN-Anth 3:20. Cp. MN I 140,23-24, 31-32: Yam kho idam pubbe pariññātam tattha me (no) evarūpa kāra kariyanti. PED recognizes kāra in the sense of "service, act of mercy or worship," but does not include these references.”
(CDB Vol1 65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는 ‘tesaṃ vo kārā’ 대신 ‘tesaṃ te kārā’로 읽어야 함을 말합니다. 여기서 vo 는 ‘by you 의 의미고, te는 ‘these’의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용하는 그 보시는 그들 자신에게 커다란 과보와 공덕’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빅쿠보디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with the hought]: ‘In such a way this going forth of ours will not be barren, but fruitful and fertile; and when we use the robes, almsfood, lodgings, and medicinal requisites [offered to us by others], these services they provide for us will be of great fruit and benefit to them.’”S12.22, 빅쿠보디역)
각묵스님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우리의 출가는 헛되지 않고 결실이 있고 이익이 있을 것이고, 우리가 의복과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수용하도록 해준 그들의 행위는 그들에게 많은 결실과 많은 이익을 가져올 것이다.’” (S12.22, 각묵스님역)
빅쿠보디는 ‘tesaṃ te kārā’에 대하여 “these services they”라 번역했습니다. 전재성님은 “우리가 사용하는 그 보시는”이라 번역했습니다. 각묵스님은 “그들의 행위는 그들에게”라 번역했습니다. 각묵스님은 빠알리어 kārā에 대하여 행위라 번역했습니다.
빠알리어 카라는 ‘deed; service’의 뜻입니다. 문맥상 보시를 뜻합니다. 따라서 ‘tesaṃ te kārā’의 뜻은 “그대들이 한 그대들의 보시는”라는 뜻이 됩니다. 전재성님의 번역이 원어에 가깝게 번역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빅쿠보디는 “[offered to us by others], these services they”라 했는데 이는 “[다른 사람에 의해 우리에게 제공된] 이들 보시는 그들에게”라는 뜻이 되어 대괄호를 이용하여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단지 “그들의 행위는 그들에게”라 하여 ‘tesaṃ te kārā’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당부
부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합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자신에게 유익한가를 살펴 방일하지 말고 마땅히 정진하라. 또한 수행승들이여, 타인에게 유익한 것인가를 살펴 방일하지 말고 마땅히 정진하라. 수행승들이여, 자신에게 유익한가 타인에게 유익한가를 모두 살펴 방일하지 말고 마땅히 정진하라.”(S12.2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정진하는 것에 대하여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유익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일 자신에게만 유익한 것이라면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타 모두 유익한 것이라면 바람직한 것입니다. 출가자는 수행하여 도와 과를 성취해서 유익한 것이고, 재가자는 보시함으로 인하여 보시공덕을 쌓아 유익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 됩니다.
자타가 이익 되는 삶
이기적 삶과 이타적 삶이 있습니다. 대게 이타적 삶을 강조합니다. 이기적 삶이란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 밖에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이가 스팸문자를 대량으로 발송한다든가 불특정 다수에게 보이스피싱을 유도하는 문자를 발송한다면 대단히 이기적입니다. 남이 불편해 하건 말건 자신의 이익만 취하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일종의 사기꾼 심보라 볼 수 있습니다.
남만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직장생활도 넓은 측면에서 해당됩니다. 직장 생활은 대게 퇴출로 끝납니다. 지금 아무리 지위가 높고 연봉이 높아 잘 나가는 사람일지라도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쫒겨 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럴 경우 남을 위해 산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자신과 가족을 위한 이타적 삶, 그리고 조직과 사회를 위한 모두를 위한 삶이라고 위안을 삼을 수 있으나 자신에게 향상이 없다면 남을 위한 삶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자신은 물론 남들에게 까지 이익이 되는 삶을 살라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에게 유익한가 타인에게 유익한가를 모두 살펴”(S12.22) 라는 구절로 알 수 있습니다. 자신만 유익하고 남은 불익하거나, 자신은 무익하고 남은 이익되는 삶이 아니라 자타가 이익되고 유익한 삶을 말씀 했습니다. 이를 출가자의 정진과 관련하여 설명했습니다.
생명의 탁발
출가자는 청정한 삶(brahmacariya)를 살기로 서원한 자들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진해야 합니다. 일을 하지 않고 직업을 갖지 않는 출가자는 탁발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허정스님은 생존의 문제라 했습니다. 생존을 위해 탁발 해야 합니다. 탁발을 해야 정진할 수 있고 바라는 최상의 목적을 달성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재가자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재가자가 의, 식, 주, 약 등 사대필수품을 제공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출가자의 탁발에 대하여 미얀마에서 수행중인 허정스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카톡방에 남겼습니다.
“꼬위다스님!
이 곳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이 탁발공양입니다. 공양을 끝내면 하루가 다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탁발공양은 하루의 중심이었습니다. 비구들이 가슴 앞에 바루를 들고 백미터 가까이 줄 지어 서있는 모습은 아름답고 장엄합니다. 마하야나 스님들은 미얀마 비구스님들 뒤에서고 다음으로 미얀마 사미들, 외국인재가자순으로 천천히 탁발이 진행됩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탁발의식은 마을까지 가서 음식을 얻어오는 것이지만, 이곳 사찰은 마을과 멀리 떨어진 산중에 위치하고 있는 데다가 상주대중이 많아서, 마을신도회에서 밥과 반찬을 사찰로 가져와서 스님들께 공양 올리고 있습니다.
마을에 다녀오는데만 2시간 이상 걸리는 옛날 스님들의 탁발에 비하면 요즘은 탁발은 약식 탁발입니다. 그렇게 편리해진 탁발이지만 외국인 수행자들과 마하야나 수행자들에게 탈발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탁발공양시간은 산중의 스님들이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만남의 시간이자 그날 시간에 맞추어 참석하지 않으면 오후 내내 굶어야 하므로 생존의 시간입니다. 정성스런 탁발공양을 받아서 그런지 이 곳에 오고부터 일종식을 하는데도 마치 오래전부터 해오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적응이 됩니다.
이 곳에서 탁발공양을 체험하고 보니 한국에서 배웠던 바루공양은 진정한 바루공양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우리의 바루공양은 반찬과 밥을 바루에 담아 먹는다는 것 뿐이지 바루공양의 정신을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신도님들에게 음식을 탁발하여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이곳 비구들에게 신도님들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자신의 바루에 따듯한 밥을 떠 넣어 주는 신도님들에게 어찌 고마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으며 한시라도 시주의 은혜를 되새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곳의 신도님들은 스님에게 의지하고 스님은 신도님들에게 서로서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허정스님)
허정스님이 유학당시 도반스님인 꼬위다 스님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작성된 글중 일부입니다. 글을 보면 미얀마의 탁발에 대하여 상세하게 묘사 되어 있습니다. 일하지 않고 직업을 갖지 않고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는 빅쿠에게 탁발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도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미얀마에는 탁발전통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변형된 것이긴 하지만 탁발정신이 부처님 당시로부터 면면히 내려 오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럼 한국불교는
미얀마에서 탁발은 양자에게 이익이 됩니다. 출가자는 생명을 유지하기 때문에 유익하고 재가자에게는 공덕을 쌓게 되어서 유익합니다. 이렇게 양자에 유익한 탁발에 대하여 어떤 이는 빅쿠들의 가장 강력한 사회참여라 했습니다. 탁발이야말로 그 어떤 사회 참여 보다도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양자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탁발문화 뿐만 아니라 탁발정신까지 사라진 한국불교에 대하여 허정스님은 글에서 이렇게 비판 했습니다.
“그런데 탁발정신이 사라진 한국승가의 공양모습은 어떤지 아시나요? 마치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여 먹는 것처럼 스님들은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공양주보살님등에게 주문하여 먹습니다. 자기가 먹은 밥그릇을 자기가 씻지도 않습니다. 스님들마다 개인통장을 가지고 있기에 언제든지 돈을 지불하고 식당에 가서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먹습니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도 없으며 공양주는 언제고 임의대로 바꿀 수 있는 고용인이 된지 오래입니다.
사찰이 관광지가 되고 관람료징수등 살찰운영에 필요한 재가자를 고용하다보니 어떤 절은 스님들보다 재가자가 더 많은 사찰도 생겼습니다. 재가자만을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님이 스님을 고용하여 월급을 주고 기도를 하게 하는등 스님과 스님사이가 사업주와 노동자의 관계로 변질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이 모두 사찰이 돈벌이하는 사업장이 되어서 생긴 일들입니다.
사찰의 음식은 수행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신도님들이 정성스럽게 올리는 보시금으로 마련되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 대학입시기도 조상천도기도 같은 기복적인 보시금과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사찰들이 걷어 들이는 문화재관람료, 주차장임대료, 상가임대료등 부동산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스님들이 사찰을 관리하는 자본가의 입장에서 살다보니 청빈해야할 수행자가 고급스런 토굴을 짓고 고급 외제차를 타는 것에 대해서도 당당합니다. “스님이 고급차를 타면 됩니까?”라는 물음에 “ 스님이 고급차를 타야 교통사고를 당해도 다칠 확률이 적고, 스님들이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중생제도를 오래도록 할 수 있는 겁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허정스님)
한국불교에서 탁발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탁발정신마저 사라졌습니다. 탁발이 사라진 불교에서 출가자는 재가자와 단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사찰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고, 사유지를 지난다 하여 문화재관람료 명목으로 입장료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문화재 보수 명목으로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있습니다. 오로지 스님들만의 이익만을 위해 불교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스님들한테만 유익한 것입니다.
자신에게도 유익하고 타인에게도 유익한 삶
부처님은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에게 유익하게 하기 위해 정진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출가자와 재가자의 연결고리를 맺어 주는 것은 탁발과 보시입니다. 재가자들의 사대필수품 보시로 인하여 공덕 쌓고, 출가자는 정진할 수 있어서 유익한 결과를 갖게 됩니다.
탁발문화가 사라진 한국불교, 더구나 탁발정신까지 사라진 한국불교에서 절실한부처님의 가르침은 “수행승들이여, 자신에게 유익한가 타인에게 유익한가를 모두 살펴 방일하지 말고 마땅히 정진하라.”입니다. 자신에게도 유익하고 타인에게도 유익한 삶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2016-12-1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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