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적 오류를 불러 일으킨 출처불명의 한문게송을 보며
“출처를 아는 분은 알려 달라”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구절의 출처는 어디일까. 출처를 아는 분은 알려 달라.”불교닷컴 서현욱기자의 칼럼에 있는 글입니다. 기자에 따르면 최근 자승원장이 박근혜대통령과의 독대에서 “수목등도화 사재능결과 강수유도사 강재능입해(樹木等到花 謝才能結果 江水流到舍 江才能入海)”라는 문구를 인용하여 시국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한문 게송의 출처가 화엄경이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 보아도 화엄경에 나오지 않는 문구라 합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한문송을 인용하면서 화엄경에 근거한 것임을 밝혔습니다. 공공시설물의 벽면에도 걸려 있는 게송의 출처는 화엄경입니다. 그러나 화엄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문구라 합니다. 누군가 화엄경에 근거한 것이라 하기에 관행적으로 사용하다 보니 집단적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라는 문구는 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요?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습니다. 도(magga)를 이루면 과(phala)가 성취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매가 맺을 때 꽃은 떨어집니다. 물론 열매와 동시에 꽃이 피는 경우도 있습니다. 연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꽃이 피고 나면 열매가 맺습니다. 그런데 꽃이 피지 않고 열매가 맺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화과입니다. 그러나 꽃이 피지 않고 열매를 맺는 경우는 없습니다. 무화과는 열매 안으로 꽃이 피어 꽃이 피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서는 “무화과 나무에서 꽃을 찾아도 얻지 못하듯, 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발견하지 못하는 (Yo nājjhagamā bhavesu sāraṃ vicīnaṃ pupphamīva udumbaresu) ”(stn5) 이라 했습니다. 이는 오온에서 자아를 찾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존재에서 실체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건지어진 무상한 존재에서 고정불변한 실체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존재에서 자아를 찾으려 하는 것에 대하여 무화과나무에서 꽃을 찾는 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도를 이루면 과를 성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꽃이 피면 열매를 맺듯이, 도를 이루어 과를 성취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문게송을 보면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라 했습니다.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라는 말은 ‘도를 이루어 과를 맺는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꽃이 피는 것은 자연이치입니다. 그러나 ‘꽃을 버려야 한다’는 말은 어법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강물은 강을 버려야 한다’는 것 역시 어법에 맞지 않습니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을 뿐이고, 강물은 그저 바다로 흘러갈 뿐입니다.
인과적 과정의 흐름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강물은 흘러 바다에 이르는 것 역시 당연한 이치입니다. 도를 닦으면 과를 성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도의 길로 들어 섰을 때 단계적으로 깨달음의 바다에 이르는 것과 같습니다. 작은 빗방울이 모여서 작은 못을 이루고, 작은 못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 개울이 되어 더 큰 못에 이릅니다. 큰 못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 작은 지류를 이루고, 작은 지류는 큰 강에 합류합니다. 큰 강은 마침내 대양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비가 굵은 알갱이가 되어 떨어질 때 산꼭대기에서 밑으로 흘러내리면서 산의 협곡과 계곡과 지류를 이루듯이, 산의 협곡과 계곡의 지류를 이루고 나서 다시 작은 못을 이루듯이, 작은 못을 이루고 다시 큰 못을 이루듯이, 큰 못을 이루고 나서 다시 작은 강을 이루듯이, 작은 강을 이루고 나서 다시 큰 강을 이루듯이, 큰 강을 이루고 나서 큰 바다와 대양을 이루는 것과 같다.”(S12.23, 전재성님역)
비가 억수로 쏟아질 때, 그 빗방울은 여러 단계를 거쳐 마침내 대양에 이릅니다. 마치 꽃이 피면 열매를 맺듯이 순차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원인과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즉, 계곡, 협곡, 지류, 작은 못, 큰 못, 작은 강, 큰 강, 바다가 형성되는 것처럼 연기관계에서도 인과적 과정의 흐름이 발견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우선성과 수반성
십이연기의 고리에서 가장 선두인 것은 무명입니다. 무명을 연유하여 인하여 형성이 이루어지고, 형성을 연유하여 의식이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은 연결고리는 태어남을 연유로 괴로움이 이루어지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연기의 고리가 형성됩니다. 마치 작은 빗방울이 여러 단계를 거쳐 바다에 이르는 것처럼 선과 후가 인과로 연결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괴로움을 연유로 믿음이 이루어지고”라 했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가르침에 대한 믿음입니다. 구체적으로 사성제에 대한 믿음입니다. 괴로움에 대하여 철저하게 알아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괴로움을 연유로 믿음이 이루어지고, 믿음을 연유로 만족이 이루어지고, 만족을 연유로 희열이 이루어지고, 희열을 연유로 청정함이 이루어지고, 청정함을 연유로 지복이 이루어지고, 지복을 연유로 삼매가 이루어지고, 삼매를 연유로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이 이루어지고,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을 연유로 싫어하여 떠남이 이루어지며, 싫어하여 떠남을 연유로 갈애를 떠남이 이루어지고, 갈애를 떠남을 연유로 해탈이 이루어지고, 해탈을 연유로 소멸에 관한 지혜가 이루어진다.” (S12.2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해탈의 지혜가 일어나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치 빗방울이 계곡, 협곡, 지류, 작은 못, 큰 못, 작은 강, 큰 강, 바다에 이르는 것처럼, 사성제의 진리를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믿음’이 생겨납니다. 신뢰에 기반한 이성적인 믿음입니다.
믿음에 이어지는 단계를 보면 희열, 청정함, 지복, 삼매,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如實智見), 싫어하여 떠남(廉離), 갈애를 떠남, 해탈, 소멸에 관한 지혜로 진행됩니다. 이런 과정은 자연스런 것입니다. 마치 물 흐르듯 합니다. 이는 원인의 결과에 대한 존재상의 우선성과 원인은 결과에 수반된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은 칠각지에서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라 하여 안온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연결고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염각지입니다. 몸(身)과 느낌(受)과 마음(心)과 사실(法)이라는 네 가지 염처에 대한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을 때 올바른 새김이 확립됩니다. 이어지는 과정을 보면 마치 물 흐르듯이 정진각지, 희각지, 경안각지, 정각지, 사각지 순으로 진행됩니다.
깨달음의 바다로
하나의 빗방울이 강물을 이루어 대양으로 흘러 들어 간다는 비유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비의 경(S55.38)’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에 대한 우선성과 수반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는 부처님에 관하여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을 갖추었고, 가르침에 관하여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을 갖추었고, 참모임에 관하여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을 갖추었고 고귀한 님들이 사랑하는 계행을 갖추었는데, 이러한 원리들에서 출발하여 피안에 도달하면, 모든 번뇌를 부숨으로 이끌어진다.”(S55.38, 전재성님역)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조건이 있습니다. 경에서는 믿음을 선두에 놓고 있습니다. 그것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더구나 청정한 믿음이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는 “괴로움을 연유로 믿음이 이루어지고” S12.23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가르침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의 마음을 내었을 때 원인과 결과라는 연기의 법칙처럼, 원인의 결과에 대한 존재상의 우선성과 원인은 결과에 수반성에 따라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합니다.
출처불명의 한문게송은
한국불교에 큰 문제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경을 밝히지 않고 인용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임에도 마치 자신의 얘기인 것처럼 말합니다. 또 경을 인용하긴 하되 ‘화엄경’ ‘법구경’ 하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느 품에 있는지 알 수 없어서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잘못 인용하는 것입니다. 해당경전에 그런 내용이 없음에도 마치 있는 것처럼 인용하는 것 입니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습니다. 당연한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도를 이루면 과를 성취합니다. 가르침을 실천하면 즉각적인 결과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를 빗방울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세차게 비가 내렸을 때 개울에서 강물로, 강물에서 큰 바다에 이르는 것처럼 사성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내었을 때 깨달음의 바다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출처불명의 한문게송 “수목등도화 사재능결과 강수유도사 강재능입해(樹木等到花 謝才能結果 江水流到舍 江才能入海)”, 즉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라는 말은 초기경전에서 유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꽃은 피고지고 강물은 흘러갈 뿐입니다.
2016-11-1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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