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번역은 매끄럽고 유려해야

담마다사 이병욱 2016. 11. 8. 11:25

 

번역은 매끄럽고 유려해야

 

 

한국에는 두 종류의 빠알리니까야 번역서가 있다.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개인적인 호불호에 달려 있다. 그런데 유튜브 등에서 본 법문을 보면 대체로 스님이 번역한 것을 교재로 삼고 있는 듯하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안 번역비교를 한 결과 차이점을 알게 되었다. 길고 짧은 것은 대 보면 안다고 했다. 비교해 보면 금방 드러난다.

 

 

 

 

 

 

 

번역비교를 보면

 

상윳따니까야에 가르침을 설하는 님의 경(Dhammakathikasutta, S12.16)’이 있다. 초불연에서는 설법자 경이라 한다. 경의 제목에 있어서도 우리말로 풀어 쓰는 것과 한자어를 사용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 경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번역비교를 보면 다음과 같다.

 

 

Jarāmaraassa ce bhikkhu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dhamma deseti, dhammakathiko bhikkhū'ti ala vacanāya

 

수행승이여, 늙음과 죽음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가르침을 설하면, 그 수행승은 가르침을 설하는 님이라고 할 수 있다.”(S12.16, 전재성님역)

 

비구여, 만일 늙음-죽음을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면 그를 법을 설하는 비구라 부르기에 적당하다.”(S12.16, 각묵스님역)

 

“Bhikkhu, if one teaches the Dhamma for the purpose of revulsion towards aging-and-death, for its fading away and cessation, one is fit to be called a bhikkhu who is a speaker on the Dhamma.”(S12.16, 빅쿠보디역)

 

 

세 개의 번역에서 주목하는 단어는 빠알리어 ‘virāgāya’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그것이 사라지고라 했고, 각묵스님은 탐욕이 빛바래고라 했다. 빅쿠보디는 ‘for its fading away’라 했다. 빠알리어 ‘virāgāy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virāgāyavirajjanaṭṭhaya의 뜻으로 사라지거나 더 이상 마음을 오염시키지 않는 이염(離染)을 위하여란 뜻이다.”(71번 각주) 라 했다. 그런데 한역에서는 virāgā에 대하여 이욕(離欲)이라 번역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한역의 이욕이란 번역은 원의에 가깝지 않으므로 택하지 않는다.”라 했다.

 

이욕(離欲)과 이염(離染)은 다르다

 

이염과 이욕은 다른 것이다. 이염은 오염원에서 떠난다는 뜻이다. 이욕은 욕망에서 떠난다는 것이다. 이욕이 더 포괄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virāgā에 대하여 탐욕의 빛바램이라 번역했다. 수 많은 오염원 중에서 탐욕에서만 벗어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이렇게 번역한 이유는 무엇일까? 각묵스님은 초불연 상윳따니까야 각주에서 주석을 인용하여 “ ‘빛바래기 위해서(virajjanaṭṭhaya)’라는 것도 빛바램의 관찰을 얻기 위해서라는 뜻이다.(SAT.ii.34)”(109번 각주)  라고 설명했다. 색깔로 물들인 천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색이 바래져서 옅어지는 것을 탐욕에 비유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번역은 전형적인 주석적 번역이다. 각주에서나 설명되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실려 있는 격이다. 빅쿠보디는 ‘for its fading away’라 하여 서서히 사라짐의 뜻으로 번역했다. 연극이 끝났을 때 서서히 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

 

빠알리어 virāgā에 대하여 탐욕이 빛바래고라고 번역하면 문맥상 맞지 않는다. 경에서는 늙음과 죽음(Jarāmaraassa)에 대하여 혐오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하게 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초불연식으로 번역하면 늙음과 죽음에 대하여 탐욕이 빛바래고가 되어 어색하다. 어떻게 늙음과 죽음이 탐욕이 빛바랠 수 있을까? 어법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늙음과 죽음에 대하여 그것이 사라지고라 하여 그것이 늙음과 죽음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빅쿠보디도 ‘aging-and-death’에 대하여 ‘for its fading away’라 하여 it‘aging-and-death’임을 나타내고 있다.

 

초불연 번역을 보면 virāgā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탐욕이 빛바래고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한역 이욕을 단지 우리말로 풀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Virāgā는 문맥상 이염이라 하는 것이 맞다. 따라서 virāgāya이염을 위하여가 맞는 것이다. 모든 오염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늙음과 죽음에서도 벗어나는 것이다. 결국 늙음과 죽음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존재, 집착, 갈애, 느낌, 접촉, 여섯 가지 감역, 명색, 의식, 형성, 무명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그래서 존재에서 사라지고, 집착에서 사라지고…”가 된다. 그런데 초불연식으로 하면 존재를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가 되어 버린다. 이는 어법에 맞지 않는다.

 

어색한 번역

 

상윳따니까야 3권에도 가르침을 설하는 자의 경(S22.115)’이 있다. 대상이 십이연기에서 오온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물질에 대한 것을 보면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물질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가르침을 설하면”(전재성님역) 이라 되어 있다. 그런데 각묵스님 역을 보면 비구여, 만일 물질을 염오하고 물질에 대한 탐욕을 빛바래게 하고라 되어 있다. 무엇이 차이 있을까? 그것은 만일 늙음-죽음을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S12.16)만일 물질을 염오하고 물질에 대한 탐욕을 빛바래게 하고”(S22.115)의 차이이다. 전자에서는 탐욕이 빛바래고이고 후자는 물질에 대한 탐욕을 빛바래게 하고라 되어 있다. 빠알리어 ‘virāgāya’에 대하여 길게 번역해 놓은 것이다. 더구나 대명사를 쓰지 않고 물질을 중복해서 사용했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물질에 대한 대명사를 사용하여 그것이 사라지고라 했다.

 

빠알리어 virāgāya에 대한 초불연번역을 보면 일관성이 결여 되어 있다. 그것은 경마다 번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상윳따니까야 2권에 있는 설법자 경에서는 만일 늙음-죽음을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S12.16)라 하여 탐욕이 빛바랜다는 말이 늙음-죽음과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십이연기의 모든 각지에다 탐욕이 빛바랜다는 말을 적용한 결과 무명을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가 되어 이상한 번역이 되어 버린다. 전재성님은 무명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라 하여, 무명을 대명사 그것으로 받아 사라지는 대상이 무명이 된다.

 

초불연 상윳따니까야 설법자 경에서는 만일 물질을 염오하고 물질에 대한 탐욕을 빛바래게 하고”(S22.115) 라 했다. 이는 ‘S12.16’번역 패턴과 다른 것이다. 만일 ‘S12.16’으로 한다면 만일 물질을 염오하고 탐욕을 빛바래게 하고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질을 받아 물질에 대한을 집어 넣었다. 이는 동어반복이다. 탐욕이 빛바래는 것이 물질인 것을 나타내고 있지만 대명사로 받지 않았다. 이를 제대로 번역한다면 만일 물질을 염오하고 그것에 대한 탐욕을 빛바래게 하고라 하여 물질 대신에 그것이라는 대명사를 집어 넣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문제가 된다. 오온에서 의식에 대한 것을 초불연식으로 번역하면 만일 알음알이를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한 탐욕을 빛바래게 하고라 하여 이상한 번역이 되어 버린다. 알음알이()와 탐욕이 빛바랜다는 말이 매칭 되지 않는 것이다. 전재성님은 의식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라 번역했다.

 

번역은 유려하게

 

불자들은 부처님원음을 접하면서 부처님 그분이 어떤 이야기를 하셨는지 알게 되었다. 대부분 번역서를 접해서이다. 그런데 번역이 매끄럽지 않다거나 잘못 번역되었다거나 문맥에 맞지 않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부처님 그분이 말씀 하신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없을 것이다. 단어 하나에도 수 많은 뜻이 포함되어 있다.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문맥이나 상황에 적절하게 사용된 것이다. 그럼에도 자의적으로 번역했을 때, 기존 번역문을 답습했을 때 어색할 때가 있다. 아무리 읽어 보아도 뜻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다. 여러 번 읽어 보아야 그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경전은 부처님 가르침이 실려 있는 성전이다. 함부로 낙서 할 수도 없고 함부로 다룰 수도 없다. 부처님 모시듯이 열어 보고 대하는 태도를 갖는다. 그럼에도 내용이 매끄럽지 않을 때, 비속어가 쓰였을 때 번역서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 단어 하나 하나에도 수 많은 의미가 있고 다른 경전과도 연계 되어 있어서 초기경전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다. 심오한 뜻을 가진 단어에 대하여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또는 주석에 따라 번역한다면 읽기가 거북해진다. 번역은 매끄러워야 한다. 물흐르듯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도중에 대괄호가 보이고 한자어가 보인다면 흐르는 물에 바위가 박혀 있는 것 같다. 단어 하나에 심오한 가르침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문맥으로 파악해야 한다. 설명은 각주에서 하면 된다. 물흐르듯이 유려한 번역이 잘된 번역이다.

 

 

2016-11-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