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한 음식
만악의 근원
송년회 시즌입니다. 알고 지내는 법우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자신의 지역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아마 법회모임의 총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초청한 것 같습니다. 모임에는 부부팀 2팀을 포함하여 모두 7명이 모였습니다. 모두 나이가 든 법우님들입니다. 문제는 술이 과해서 탈이 났습니다. 한 법우님이 과도한 주사를 한 것입니다. 오랜 만에 참석한 모임의 끝을 흐려 놓았습니다.
음주가 만악의 근원입니다. 대부분 사건이나 사고가 원인을 추적해 보면 음주와 관련된 것들이 많습니다. 음주를 하게 되면 기름진 음식을 먹게 되고, 말이 많아지고 결국 실수를 저지르고 말게 됩니다. 음주도 일종의 음식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음주를 하는 것은 청정하지 못한 식사라 볼 수 있습니다.
음식의 경에서
상윳따니까야에 음식과 관련된 경이 있습니다. ‘음식 경(S12.11)’이 그것입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아하라 숫따’에 대하여 ‘음식 경’이라고 제목을 달았습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자양분의 경’이라 했습니다.
음식 경 또는 자양분의 경이라 불리우는 아하라경에는 네 가지 음식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한자어로 단식, 촉식, 의사식, 식식(識食)이라 합니다. 단식은 딱딱한 음식으로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 되는 음식을 말합니다. 촉식은 느낌이 조건이 되는 음식을 말하고, 의사식은 의도의 조건이 되는 음식을 말하고, 식식은 정신-물질의 조건이 되는 음식을 말합니다.
네 가지 음식은 모두 다시 태어남의 원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특히 식식(識食)에 대하하여 몰리야팍구나 경에따르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했습니다.
“[만일 그대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타당한 설명을 할 것이다. ‘알음알이의 음식은 내생에서 다시 태어남[再生]의 발생이라 [불리는 정신-물질]의 조건이 된다.”
(몰리야팍구나 경, 상윳따니까야 S12.12, 각묵스님)
초불연 각묵스님의 해석을 보면 대괄호와 한자어를 사용하여 번역했습니다. 전형적인 주석적 번역이라 볼 수 있습니다. 주석에서 설명되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실려 있는 형식입니다.
각묵스님 번역을 보면 한자어로 ‘[再生]’이라는 말이 보입니다. 이는 식식이 재생연결식임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각주를 보면 “여기서 알음알이의 음식은 재생연결식이다.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은 이 알음알이와 함께 일어난 정신-물질이다.”(SA.ii.31)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식식은 재생연결식임에 틀림 없습니다. 특히 초불연 각주를 보면 앙굿따라니까야 ‘존재 경(A3.76)’을 근거로 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존재 경에 따르면 “이처럼 업은 들판이고 알음알이는 씨앗이고 갈애는 수분이다.”(A3.76)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서 식은 내생의 다시 태어남을 유발하는 재생연결식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식식(識食)은 명색의 조건
몰리야팍구나의 경에 따르면, 몰리야팍구나는 부처님이 설한 연기법을 잘못 이해고 있었습니다. 몰리야팍구나는 부처님의 네 가지 음식에 대한 설법을 듣고 “세존이시여,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섭취합니까?”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이런 질문은 잘못 된 것입니다. 식식을 누군가 섭취한다고 보면 이는 아뜨만을 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러한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라고 질책하면서 “무엇 때문에 자양분이 생겨납니까?”라고 연기법적으로 질문해야 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십니다.
viññāṇāhāro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yā paccayo. Tasmiṃ bhūte sati saḷāyatanaṃ, saḷāyatanapaccayā phassoti.
“의식의 자양분은 미래의 새로운 존재의 생성의 조건이고, 그것이 생겨날 때 여섯 가지 감역이 생겨나고 여섯 가지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난다.”
(몰리야팍구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12, 전재성님역역)
‘의식의 자양분’은 ‘식식(識食)’을 말합니다. 초불연에서는 ‘알음알이의 음식’이라 했습니다. 식식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성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존재는 빠알리어 ‘부따(bhūta)’를 번역한 것입니다. 주석에 따르면 부따는 오온을 지칭하는 것이라 합니다. 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 나기 때문에 식과 명색을 갖춘 것에 대하여 부따로 본 것입니다. 식식은 명색의 조건이 됩니다.
동일한 의식과 함께 생성되는 명색
몰리야팍구나의 경을 보면 연기는 ‘육촉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른바 8지연기를말합니다. 그러나 식식을 조건으로 부따가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식은 재생연결식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주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했습니다.
“Srp.II.31에 따르면, 의식의 자양분은 재생의식[結生識: paṭisandhicitta]를 말한다. 미래의 새로운 존재의 생성은 그 동일한 의식과 함께 생성되는 명색을 말한다. 이 명색이 생겨나서 존재하면, 여섯 가지 감역이 있게 된다. AN.I.223-224에 따르면, 업은 밭이고 의식은 씨앗이다. 갈애는 습기로서 낫거나 중간이거나 높은 영역에서 의식이 정초되면서 미래의 새로운 존재가 탄생된다.”
(상윳따니까야 2권 50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식식은 재생연결식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거로 드는 것은 앙굿따라니까야 ‘존재의 경(A3.76)’입니다. 존재의 경에 따르면 의식은 씨앗이라 했습니다. 업이라는 밭에 씨앗이 떨어지면 발아할 것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수분입니다. 만일 수분이 없다면 발아 하지 않고 말라 죽을 것입니다. 여기서 수분은 갈애를 의미합니다. 갈애는 다름 아닌 갈증과도 같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갈애입니다. 갈애가 있기 때문에 씨앗이 성장하여 잎이 나고 줄기가 커져 커다란 나무가 됩니다. 그래서 자양분의 경에 따르면 “이 네 가지 자양분은 갈애를 원인으로 하고 갈애를 근거로 하고 갈애를 원천으로 한다.”(S12.11) 라고 연기가 시작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미래의 새로운 존재의 생성은 그 동일한 의식과 함께 생성되는 명색을 말한다.”라고 주석의 견해를 실어 놓았습니다. 여기서 ‘그 동일한 의식과 함께 생성되는 명색’이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재생연결식에 대한 심오한 설명이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동일한 의식이 그렇습니다.
재생연결식이란?
재생연결식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비담마 논장에서 백미라 볼 수 있는 ‘인식과정’에 대한 부분을 이해해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동일한 의식’이라 했는데 이는 무슨 뜻일까요?
최근 어느 법우님으법부터 선물 받은 ‘체계적으로 배우는 아비담마’를 열어 보았습니다. 재생연결식이 동일한 마음이라 하는데 관련된 부분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의 삶은 재생연결심으로 시작된다. 이 마음이 무너진 후에 죽음이 생명연속심의 기능을 수행할 때까지 생명연속심이 계속해서 일어났다가 무너진다.
마지막 생명연속심은 죽음의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죽음의 마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이 3가지 마음, 즉 재생연결심, 생명연속심, 죽음의 마음은 세상 또는 종류(Jati)에서, 마음부수에서, 그것들이 취하는 감각대상에서 동일하다. 보통사람들에게는 8가지 큰 과보의 마음 가운데 하나가 재생연결심, 생명연속심, 죽음의 마음의 기능을 한다.
이 3가지 마음은 한 가지 큰 유익한 마음과 결합한 동일한 ‘업’의 과보이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는 동일하다. 만약 ‘기쁨이 함께하고 지혜와 결합하며 자극받지 않은 큰 유익한 마음이면 ‘기쁨이 함께하고 지혜와 결합하며 자극받지 않은 큰 과보의 마음’이 재생연결심, 생명연속심, 죽음의 마음의 기능을 할 것이다.
이 마음들이 취하는 감각대상은 전생의 죽음 직전에 나타났던 죽음 직전의 표상이다. 이 표상은 ‘업’ 또는 ‘업의 표상’으로 ‘태어날 곳의 표상’의 형태이다.
(체계적으로 배우는 아비담마, 제4장 인식과정, 불광출판사 김종수님역)
아비담마에서 동일한 의식이란 ‘재생연결심(paṭisandhicitta)’, ‘생명연속심(bhavaṅgacitta)’, ‘죽음의 마음(cuticitta)’ 이렇게 세 가지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세 마음은 모두 같은 마음이라 합니다. 동일한 마음을 말합니다. 재생연결식은 일생에 있어서 최초의 마음이라 하는데 십이연기에서 식에 해당됩니다. 생명연속심은 한 존재의 일생의 마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일생동안 지속되는 마음이라 합니다. 빠알리어로 바왕가찌따라 합니다. 죽음의 마음은 한 존재의 최후의 마음입니다.
생명연속심(bhavaṅgacitta)이 윤회한다
한 존재에 있어서 몸과 마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지속됩니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고 성향이 다른 것도 ‘생명연속심(bhavaṅgacitta)’이라는 한마음 때문입니다. 일생에 있어서 단 한번 일어나는 재생연결식에 의해 생명연속심이 역시 오로지 한번만 일어나는 죽음의 마음에 이를 때까지 지속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생명연속심, 즉 바왕가찌따가 윤회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재생연결식을 말하지 않는가
어떤 이는 식이 윤회한다고 합니다. 물론 조건 발생되는 식, 연기되는 식이 윤회한다고 말합니다. 삶의 과정에서 증장된 식이 윤회한다고 말합니다. 근거가 되는 경으로서 음식의 경 또는 자양분의 경이라 일컫는 ‘아하라경’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식이 어떻게 윤회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는 논장의 가르침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아비담마 논장에 실려 있는 재생연결식으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다.
해피법당의 해피스님은 “식이 윤회한다는 경전적인 조건이에요”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부처님은 식이 갈애를 조건으로 해 가지고 오염된 행위의 조건에서 생겨난 업식이 머물면 그것이 식식이고, 그것이 윤회하는 조건입니다.” (해피스님) 라 합니다.
해피스님은 아비담마논장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아하라경을 설명할 때 재생연결식이라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이는 두 번역서의 각주에 언급되어 있는 주석의 견해를 전혀 인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니까야 본문에 실려 있는 대로 파악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다 보니 내용이 장황합니다. 그리고 난해합니다. 칠판에 도표 식으로 가득 써 놓았지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중표 교수 역시 아하라경에 대하여 재생연결식이니 윤회이니 하는 말을 일체 하지 않습니다.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하는 입장에서 사용할 수 없는 말이라 봅니다. 그러다 보니 연기법을 오로지 삶에 대비하여 설명하려 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는 ‘부처님은 오로지 고와 고소멸에 대해서만 말씀했다’라는 것이 이유입니다.
“네 눈으로 보았느냐?”
십이연기, 십지연기, 팔지연기에 대하여 오로지 현존하는 삶에 대비하여 설명한다면 삼세양중인과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현존하는 삶 뿐만 아니라 과거나 미래에 대한 삶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로지 현존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할까요?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하는 이중표교수가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 눈으로 보았느냐?”라는 말입니다. 드러난 것이 아니면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와서 보라”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 드러나지 않는 것은 대상이 아님을 말합니다.
이중표교수는 십이연기에 대하여 중도로 설명합니다. 이는 용수의 중론에 따른 것입니다. 근본불교가 중론과 만났을 때 십이연기는 삶의 과정에서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언어적으로 개념화 된 것이기 때문에 개념 타파 하는 것이 깨달음이라 말합니다. 그결과 논장을 전면 부정합니다. 당연히 삼세양중인과도 부정됩니다.
십이연기에 대하여 중론이라는 잣대를 들이댔을 때 부처님 가르침은 현세적인 것이 됩니다. 드러나지 않은 것, 보이지 않은 것은 단지 개념이나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고와 고소멸에 대해서만 말했다’거나, ‘부처님은 현실적인 가르침만 설했지 내생은 말씀 하지 않으셨다’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네 눈으로 보았느냐?”고 말합니다.
밥만 먹고 살 수 없다
송년회 시즌입니다. 사람들은 오랜 만에 만나는 지인들과 함께 음식을 즐기며 담소할 것입니다. 그러나 음주가 과하면 다음날 최악의 컨디션이 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매번 반복되는 것은 음식절제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아하라경에 따르면 음식은 먹는 음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느낌의 조건이 되는 촉식이 있고, 행위의 조건이 되는 의사식이 있습니다. 또 명색의 조건이 되는 식식이 있습니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없습니다. 접촉으로 살고 행위를 하며 살며 알아야 사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갈애에 따른 것으로 윤회하는 조건이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 없습니다.
청정한 음식
업은 들판이고, 식은 씨앗이고, 갈애는 수분이라 했습니다. 업의 들판에 식이라는 씨앗이 뿌려졌을 때 적절한 수분만 있으면 자랍니다. 그런데 수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씨앗이 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수분이라는 갈애는 음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게 할 뿐만 아니라 미래 태어남의 조건이 된다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단식, 촉식, 의사식, 식식 이라는 네 가지 음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네 가지 음식에 대한 갈애가 새로 태어남의 조건이 됨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음식절제를 설했습니다. 감관을 수호하고 늘 깨어 있는 마음과 음식절제를 동급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음식절제를 강조한 것은 음식에 대한 갈애가 재생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음식은 반드시 먹는 것 뿐만 아니라 접촉하는 것, 의도하는 것, 의식하는 것이 모두 음식이라 했습니다.
매일 점심이 기다려집니다. 요즘 새로 생긴 셀프식당입니다. 한끼에 오천원합니다. 정성으로 만들어진 음식을 대하면 감사의 마음이 절로 나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청정한 음식이가 때문입니다. 접촉하는 것, 의도하는 것, 의식하는 것 역시 음식입니다. 청정한 음식을 대했을 때 청정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면 마음까지 청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2016-12-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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