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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논쟁은 치열하게

담마다사 이병욱 2016. 10. 11. 14:16

 

윤회논쟁은 치열하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대하여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으로 이야기 한다. 어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아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해탈과 열반이라 한다. 또 어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도라 한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무아, 중도 모두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다. 명칭은 달라도 한 점에서 만난다. 일점회귀의 용어는 무엇일까? 그것은 열반이다. 마치 일점회귀하는 것처럼 한점에 만나는 것은 열반이다. 그것은 괴로움의 소멸이자 동시에 윤회의 종식이다.

 

부처님이 괴로움에 대하여 설했다. 괴로움에 대하여 네 가지 거룩한 진리라 하여 사성제를 설한 것이다. 그렇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단지 육체적-정신적 괴로움에서 벗어나면 그만일까? 주석에 따르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에게 괴로움의 원인과 그 소멸에 관해 설하겠다.”(S12.45) 라 했을 때 여기서 괴로움은 윤회의 괴로움’(Srp.II.74) 이라고 주석에서는 설명한다.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서 불도를 닦는다. 궁극적으로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도를 닦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을 알아야 한다.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한 가르침이 연기의 가르침이다. 사성제도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이라는 연기의 가르침이다. 구체적으로 십이연기의 가르침이다.

 

양극단을 떠난 중도

 

부처님은 연기의 가르침을 설할 때 중도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경에서는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S12.35) 라 했다. 여기서 중도는 무엇을 말할까? 이어지는 가르침을 보면 조건이 들어 간다. 그래서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난다.” (S12.35) 라 하여 조건발생하는 연기의 가르침을 설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는 양극단을 떠난 것이다. 초전법륜경에서는 고락중도를 이야기 했다. 이외 유무중도, 자타중도, 단상중도, 일이중도 등 갖가지 중도의 가르침을 설했다. 그런데 중도를 설한다고 하면서 반드시 십이연기를 설했다. 이렇게 본다면 중도와 연기는 동의어인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도, 연기, 무아로 일맥상통한다.

 

적절하지 않은 질문

 

양극단을 떠난 중도의 가르침 중에 육체와 영혼에 대한 것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무명을 조건으로의 경1(S12.35)’에 따르면 어느 수행승이 세존이시여, 늙음과 죽음은 무엇이고 늙음과 죽음에 이르는 자는 누구입니까?” (S12.35)라고 묻는다. 이와 같은 질문에 부처님은 그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라 했다. 두 개의 질문 중에 앞의 것은 적당하지만 뒤의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서에서는 음식의 똥비유를 들고 있다.

 

먼저 전재성님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질문이 적절해 보이더라도 누구에게 늙음과 죽음이 있는가?’ 라는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에 대한 신뢰의 담론을 암시하는 것으로 전체질문이 잘못된 것이다.”(187번 각주) 라 했다. 앞의 질문 늙음과 죽음은 무엇이고는 맞지만, 뒤의 질문 늙음과 죽음에 이르는 자는 누구입니까?”라고 한 것은 존재를 가정한 것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서에서는 음식의 똥의 비유를 들었다.

 

주문한 음식에서 벌레가 나왔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마 먹기가 찜찜 할 것이다. 그런데 잘 차려진 음식 위에 똥이 한방을 묻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먹지 않을 것이다. 주석에서는 황금의 쟁반 위에 올려져 있는 맛있는 음식을 담은 접시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약간의 똥덩어리가 있는 것 같아 모든 음식은 먹을 수 없고 버려져야 하는 것과 같다.”(Srp.II.64) 라 되어 있다.

 

어떤 수행승이 늙음과 죽음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것은 문제삼을 것이 없다. 막연하긴 해도 존재가 무엇입니까?” “집착이 무엇입니까?” 등으로 물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존재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라든가, “집착하는 자는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적절하지 않은 질문이라 했다.

 

영혼과 육체의 관계

 

부처님은 수행승의 잘못된 질문을 지적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연기법적으로 설명했다.

 

 

"Ta jīva, ta sarīranti" vā bhikkhu diṭṭhiyā sati brahmacariyavāso na hoti. "Añña jīva, añña sarīranti" vā bhikkhu diṭṭhiyā sati brahmacariyavāso na hoti. Ete te bhikkhu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 deseti jātipaccayā jarāmaraanti.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같다.’라는 견해가 있다면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S12.35, 전재성님역)

 

 

수행승이 늙음과 죽음이 무엇이고 늙음과 죽음에 이르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물은 것은 늙음과 죽음이라는 것과 죽음에 이르는 자가 서로 다르다.”라 한 것과 같은 말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지적하고 구체적으로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래서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같다는 견해를 가져도 청정한 삶이 아니고, “영혼과 육체는 서로 다르다해도 청정한 삶을 살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상견과 단견에 대한 것이다.

 

단견이 청정하지 않은 이유

 

 그렇다면 상견과 단견이 왜 청정하지 않는 삶일까?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묵스님은 이렇게 설명했다.

 

 

청정범행을 닦음이란 성스런 도를 닦음이다. 그런데 생명이 바로 몸이다.’라는 견해는 생명이 끝나면 몸도 끝나고, 몸이 끝나면 생명도 끝난다고 집착하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중생은 [죽고 나면] 단멸한다고 거머쥐기 때문에 단견, 단멸론이다.”(초불연 상윳따2 254번 각주, 각묵스님)

 

 

단견에 대한 설명이다.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같다.(Ta jīva, ta sarīranti)”라는 견해가 단견, 즉 단멸론이다. 초불연에서는 생명이 바로 몸이다.”라 번역했다. 빠알리어 jīva‘life, vital principle, individual soul’의 뜻이다. 전재성님은 지바를 영혼(soul)으로 번역했고, 각묵스님은 지바를 생명(life)으로 번역했다.

 

영혼 또는 정신 또는 생명이 육체와 같은 것이라면, 육체가 무너질 때 정신 역시 무너져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이 단멸론(uccheda ditthi)이다. 반대로 영혼과 육체는 다르다 (Añña jīva, añña sarīranti)”거나 생명과 몸은 다르다는 견해는 상견이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영육이 같아도 청정하지 않은 삶이고, 영육이 달라도 청정하지 않은 삶이라 했다. 부처님은 왜 청정하지 않은 삶이라 했을까? 먼저 단멸론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그런데 형성된 것은 생겨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이 교법의 영역에서는 바른 견해이다. 그리고 성스런 도는 윤회를 끝장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단멸론을 가진 자에게는 도를 닦음이 없이도 윤회가 소멸하기 때문에 도를 닦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모순]에 빠진다. 그래서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초불연 상윳따2 254번 각주, 각묵스님)

 

 

유전자윤회론을 말하는 자가 있다. 생체유전자가 유전할 뿐 통상적으로 말하는 윤회는 없는 것이라 한다. 설령 통상적 윤회가 참이라 해도 간난아기가 이전 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소용이 없는 것이라 한다. 심지어 무여열반에 대하여 단멸이라 한다. 도를 닦아 몇 생에 걸쳐 무여열반에 이르는 자나 이생에서 죽는 자나 단멸하는 것에서는 같은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유전자윤회론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수행할 필요가 없다.

 

단멸론자들은 정신은 육체에서 나온 것이고, 또한 육체와 정신은 상호의지하는 것이라서, 육체가 멸하면 정신도 멸하여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현자나 어리석은 자나 죽으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보시도 필요 없고 지계도 필요 없고 도를 닦을 필요도 없다.

 

영육이 같다고 보는 단멸론자에게 있어서는 도덕적 삶을 살아가야 할 의무도 없고 도를 닦을 필요도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같다.”라는 단멸론적 견해를 가지면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라고 한 것이다.

 

상견이 왜 청정하지 못할까?

 

상견을 가진 자들 역시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 ‘영혼과 육체는 서로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라 했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이렇게 설명했다.

 

 

두 번째로 생명과 몸은 다르다.’는 견해는 몸이 여기서 끝나더라도 생명은 그렇지 않다. 생명은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자유롭게 간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 견해는 생명은 이 세상으로부터 저세상으로 간다고 거머쥐기 때문에 상견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성스런 도는 삼계윤회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하나의 형성된 것이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다고 한다면 이미 생겨난 윤회로부터 벗어남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도를 닦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모순에] 빠진다. 그래서 이런 견해를 가진 자도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초불연 상윳따2 255번 각주, 각묵스님)

 

 

상견에 대한 설명이다. 윤회의 주체가 있어서 몸만 바꾸는 견해를 말한다. 어떤 변치 않는 영혼이 있어서 이 세상으로부터 저세상으로 간다는 견해를 말한다. 이와 같은 상견을 가지고 있다면 영원히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윤회의 감옥에 갇혀 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윤회를 벗어나기 위한 도를 닦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청정하지 않은 삶이라 했다.

 

빅쿠보디의 설명에 따르면

 

단견을 가져도 청정하지 못한 삶이고 상견을 청정하지 못한 삶이다.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there is no living of the holy life.”라 하여 청정하지 못한 삶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했다.

 

 

Spk: The living ofthe holy life (brahrnacariyavasa) is the living of the noble path. one who holds the view "the soul and the body are the same" (Ta jīva, ta sarīra) holds that the soul and the body are annihilated together (at death).

 

For one who holds this, the annihilationist view follows, for he holds that "a being is annihilated." Now this noble path arises to stop and eradicate the round of existence.

 

But on the annihilationist view the round ceases even without the development of the path, and thus the development of the path becomes purposeless. In the second case, one holding the view "the soul is one thing, the body another" (Añña jīva, añña sarīra) holds that the body alone is annihilated here, while the soul goes about freely like a bird released from a cage. This view is eternalism.

 

But if there were even one formation that is permanent, stable, and eternal, the noble path would not be able to bring the round to an end; thus again the development of the path would be purposeless.

 

(cdb1 107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의 설명을 보면 초불연의 각주와 유사하다. 영혼절멸론자(annihilationist), 즉 허무주의자는 죽음과 함께 영혼과 육체가 절멸하기 때문에 고귀한 도의 길을 갈 수가 없다. 영혼과 육체가 별개로 되어 있다는 영원주의(eternalism)는 바로 그 영원성 때문에 고귀한 도의 완성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허무주의와 영원주의 모두 고귀한 길을 갈 수 없어서 청정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맛지마빠띠빠다(majjhimā paipadā)와 맞제나(majjhena)

 

부처님은 중도를 설하였다. 이는 영혼과 육체는 같다든가 영혼과 육체는 다르다는 양극단을 떠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래는 이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한다. (Ete te bhikkhu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라 했다. 여기서 중도라는 말은 ‘majjhena’이다. 빠알리어 majjhena‘the middle’의 뜻이다. 중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각묵스님은 중간이라 번역했다. 초불연에서는 중간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라고 번역한 것이다.

 

빠알리어 majjhen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중도라 했고, 각묵스님은 중간이라 했다. 빠알리원문으로 본다면 중간이라는 말이 맞다. 그러나 중간이라는 말은 마치 단견과 상견의 중간으로 보일 수 있다. 마치 왼쪽 길고 오른 쪽 길의 중앙에 있는 중간길 처럼 보일 수 있다. 초전법륜경에서는 중도에 대하여 majjhimā paipadā’라 했다. 초불연에서는 이 맛지마빠띠빠다에 대하여 중도라 번역했다. 그러나 이 경에서는 majjhena에 대하여 중간이라 번역했다. 전재성님의 경우 majjhimā paipadāmajjhena에 대하여 모두 중도라 번역하여 일관성을 유지했다.

 

부처님의 중도의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초전법륜경에서는 고락중도로서 사성제를 설했다. 사성제도 연기의 법칙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연기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중도를 실천하는 것은 팔정도이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는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S56.11) 라 한 것이다.

 

단멸을 설하는 스님

 

한국불교에는 단멸을 설하는 스님들도 있다. 성법스님은 힌두교적 윤회는 없다라는 글에서 윤회가 실재하는 세계라고 당위성을 확보하려면, 붓다의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불일치에 대해 합리적인 답변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라 했다. 그러면서 여섯 가지 의문을 표했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지옥과 천상의 세계는 관념의 세계가 아닌 실재實在여야 윤회에 합치되는데, 실재한다는 사실을 어찌 입증해야 하나요?”가 있다. 증명이 되어야 육도윤회를 믿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러니 인간의 모든 지적통찰과, 시대에 확정된 부정할 수 없는 현상과 사실을 모조리 동원해서 당위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중 가장 강력하고 객관적인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은 과학 뿐입니다.”라고 결론 지었다.

 

성법스님에 따르면 상식과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 윤회는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지구의 인구는 엄청 증가하는데, 지구의 축생들이 선한 업을 지어 인간이 증가하는 것인가라며 묻는가 하면 둥물들이 어떤 행위로 복덕을 쌓아 인간으로 신분이 도약할 수 있는 것입니까?”라며 묻기도 한다. 동물이 인간이 되고,인간이 동물이 되는 윤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또 한편으로 ‘윤회는 없다’면 질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사안에 대해, 바라문의 사소한 행태에도 당위성과 질책을 하신 붓다께서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윤회를 인정하셨을 개연성은 눈꼽만치도 없습니다.”라 하여 부처님을 끌어 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성법스님이 생각하는 윤회관은 어떤 것일까? 놀랍게도 요즘 무신론자들의 주장과 유사하다. 과학적 상식에 기반한 무신론자들은 죽음 이후를 생각하지 않는다. 성법스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렇게 주장한다.

 

 

윤회의 개념을 생명체의 연속성과 재생에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아 육체를 화장하고, 화장 후 남은 재를 나무 밑에 뿌리고, 그 나무의 열매를 사람들이 먹게 되고, 새들도 먹게 되고.... 결국 질량보존의 법칙대로 내 육체의 질량과 에너지 많큼은 우주에 윤회되는, 이런 윤회를 설명하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성법스님)

 

 

성법스님의 인생관에 따르면 죽으면 단멸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육체의 죽음과 함께 정신도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물질은 사대로 흩어진다고 하는데 이는 부처님 당시 유물론자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주장과 유사하다. 육체는 죽음과 함께 지, , , 풍 사대로 흩어진다고 했는데 성법스님 역시 그렇게 보고 있다. 그래서 죽음을 맞아 육체를 화장하고, 화장 후 남은 재를 나무 밑에 뿌리고, 그 나무의 열매를 사람들이 먹게 되고, 새들도 먹게 되고.... 결국 질량보존의 법칙대로 내 육체의 질량과 에너지 많큼은 우주에 윤회라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윤회는 없다고?  허무주의 스님의 넋두리를 보고(2013-10-0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한국불교에는 갖가지 외도사상이

 

영혼주의를 말하는 스님이 있다. 사람이 죽는 것에 대하여 마치 옷을 갈아 입듯이 몸을 바꾼다고 말하는 것이다. 윤회의 주체인 영혼이 있어서 죽음과 함께 새몸을 받아 태어남을 강조한다. 한국불교에서는 숙명론을 말하는 스님들도 있다. 모든 것을 전생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사고가 났을 때 액땜 했다고 말한다. 전생이 지은 업이 사고로 인하여 소멸 되었기 때문에 그만 하길 다행이다라고 말한다.

 

한국불교에는 갖가지 외도사상이 들어와 있다. 단멸론, 영혼론, 숙명론 등 온갖 외도사상이 난무한다. 그 중에서도 단견과 상견이 주류를 이룬다. 부처님은 이를 양극단이라 하여 항상 여래는 이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라며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설하였다. 연기의 순관으로 단견을 부수고, 연기의 역관으로 상견을 부순 것이다.

 

윤회논쟁은 치열하게

 

어떤 이는 윤회와 관련하여 논쟁하는 것에 대하여 피로해 하는 것 같다.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논쟁에 대하여 무엇이 그리 중요하느냐는 것이다. 그런 것 생각하는 것 없이 지금 여기서 잘 살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불교인들에게 윤회논쟁은 중요하다. 그것은 청정한 삶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중도와 십이연기를 제대로 모르면 단견이나 상견으로 빠지게 되어 있다.

 

단멸론자나 영원론자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모른다. 초기경전을 보지도 않고 교리에도 관심이 없기 때문에 단견 아니면 상견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윤회의 감옥에 갇혀서 탈출할 수 없다. 감옥이 좋아서 영원히 감옥에 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윤회에 대한 논쟁은 치열하게 전개 되어야 한다. 부처님도 윤회에 대하여 치열하게 말씀 했다. 이는 여래는 이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한다.”라는 말로 알 수 있다.

 

 

2016-10-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