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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6. 9. 23. 13:23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류가 생겨난 이래 아마 모든 사람들의 의문사항일 것이라 본다.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책도 보고 스승도 찾는다. 더 깊이 알기 위하여 학문을 하기도 한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물리학이다. 물질을 통해서 궁극을 찾아 보자는 것이다.

 

몇 년 전 TV에서 물리학관련 프로를 보았다. 프로의 제목은 스티브 호킹, 우주를 말하다.’였다. 이 프로에서 어느 노과학자는 스위스의 입자가속기센터의 벽면에 걸린 폴 고갱의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를 소개 했다. 이 그림이 최첨단 물리학연구소의 벽면에 걸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해서 이 만한 표현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폴 고갱의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작가의 슬픈 사연에서 기인한다. 고갱이 타이티에서 여생을 보낼 때 사랑하는 딸이 죽었다. 딸이 죽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폴 고갱은 인간의 생노병사에 대하여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 의문을 그림으로 표현 하였는데 자살하기 직전에 그린 것이라 한다.

 

물리학자는 왜 스님이 되었을까?

 

우리는 어디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동서양을 막론 하고 고금을 막론하고 현실세계를 살아 가는 사람들의 영원한 화두이다. 특히 고통에 가득찬 현실을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이 말은 절박하게 다가 온다. 그러나 쉽게 풀리지 않는다. 인간의 지식과 사유로 풀어 보려 하지만 더욱 더 의문만 일어나고 혼란만 가져 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에게 의지 하는지 모른다. 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또 어떤 부류는 죽어버리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물질을 기반으로 단멸론적 허무주의에 기인한다.

 

과학은 물질을 기반으로 한다. 과학자들은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서 궁극을 보고자 한다. 마침내 거대한 입자가속기까지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물질을 쪼개면 쪼갤수록 오리무중이 되어 버린다. 우주와 같은 거시적 세계와는 달리 미시적 세계에서는 법칙이 들어 맞지 않는 것이다. 제멋대로의 세계와 같다. 그럼에도 많은 성과를 올렸다. 우리가 몰랐던 많은 법칙과 원리를 밝혀 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원한 화두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대명제를 밝혀 냈을까?

 

어떤 스님은 과학적 발견에 많은 기대를 한다. 세계최초로 힉스입자가 밝혀 졌을때 어떤 원로의원 스님은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입증 될 것이라고 상당히 기대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공즉시색과 같은 원리를 말한다. 그러나 실망하는 과학자도 있었다. 범일스님 같은 케이스이다. 물리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까지 받은 스님은 젊은 시절 우주를 탐구하는 과학자였다. 그러나 물질의 궁극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존재의 근원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출가 하게 되었는데 그 해답을 불교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세상의 원리를 물질에서 찾고자 하는 자들이 있다. 과학자들이 대표적이다. 물질을 쪼개고 쪼개다 보면 궁극적 원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얻어진 것도 많다. 이렇게 탐구하여 상대성이론이 나오고 최근에는 끈이론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렇다면 거시적 세계와 미시적 세계의 탐구에 의한 과학적 원리가 현재 당면한 고통스런 현실에 도움을 주고 있을까? 힉스발견으로 인하여 색즉시공공즉시색의 원리가 밝혀 졌다고 해서 현재 당면한 고통이 해결될 수 있을까?

 

물질을 탐구하여 과학적 원리를 밝혀 냈다고 해서 당면한 고통스런 현실이 해결되지 않는다. 물질을 아무리 쪼개도 물질에 대한 것일 뿐 정신적 영역까지 미칠 수 없다. 설령 정신적 영역까지 탐구했을지라도 생노병사우비고뇌의 영역까지 이르지 못한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방법에 이르는 길까지는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물리학자는 스님이 되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일체란?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세상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세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산천초목과 삼라만상, 그리고 우주를 말한다. 이를 기세간이라 한다. 그래서 이 세계에서 태어나 이 세계에서 살다가 이 세계에서 죽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갠지스강의 작은 모래 알갱이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loka)은 전혀 다르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서의 세상이다. 세상이 있어서 내가 세상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 사는 것이 된다. 이런 세상을 일체(sabba)라 한다.

 

부처님은 일체에 대하여 명쾌하게 정의했다. 불교적 세계관이라 볼 수 있는 일체는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일체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바로 일체라고 한다.” (S35:23)라고 정의했다. 이런 일체를 누가 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누군가 ‘나는 이러한 일체를 부인하고 다른 일체를 알려주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공허한 말일 뿐이다. 만약 질문을 받으면 그는 대답할 수 없고, 더 나아가 곤혹스러움에 쩔쩔맬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그의 감역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S35:23)

 

 

일체를 부정하는 자들은 쩔쩔맬 것이라 했다. 그 어떤 것도 눈, , 코 등 여섯 가지 감역을 벗어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일체가 생겨나는 원리는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접촉 하였을 때 의식이 생겨 나는 것으로 본다. 만일 의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세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시발점을 접촉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M18) 라 했다.  

 

어떻게 희론이 발생되는가?

 

모든 것은 접촉에서 시작 된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 역시 시발점은 접촉이다. 접촉으로 조건으로 하여 느낌이 발생되기 때문이디. 그런 느낌은 즐거운 느낌, 과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이렇게 세 가지 중에 하나이기 쉽다.  그런데 느낌을 알아라리지 못하면 희론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M18) 라 했다. 이런 전개는 12연기와 다른 것이다. 12연기에서는 느낌 다음에 갈애가 일어난다. 그러나 희론이 일어날 때는 느낌 다음에 지각(saññā)이다. 지각한 것을 사유한다고 했다. 사유(vitakka)는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에 대하여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되면 생각으로 하나의 세계를 만들게 된다. 생각속에만 있는 세계를 말한다. 이를 희론이라 했다. 그래서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라 했다.

 

희론은 망상을 말한다. 이를 빠알리어로 빠빤짜(papañca)라 한다. 초불연에서는 사량분별이라 번역했다. 이 단계가 되면 현실의 세계를 떠난 것이다. 오로지 생각속에서 집을 만들어 놓고 사는 것이 된다. 상상속의 거대한 사념의 구조물이 희론이다. 이 희론에 대하여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서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난다.”(M18) 라 했다. 여기서 주목할 말은 삼세라는 말이다.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이나 관념이 생겨난다고 했다. 이는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로 시작되는 삼세에 대한 15가지 의문과 맥락을 같이한다.

 

10가지 형이상학적 의문

 

말룽끼야뿟따는 인생과 자연과 우주에 대하여 의문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 문제를 풀기 위하여 출가 했는지도 모른다. 이는 경에서 세상은 영원하다든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든가, 세상은 유한하다든가, 세상은 유한하지 않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같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다르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든가. 여래께서는 이러한 것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못마땅하고, 나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M83) 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부처님은 이런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세상이 영원하다고 말하면 영원주의의 견해가 되는 것이고,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고 보면 허무주의적 견해가 된다. 열 가지 사변적 견해는 부처님 당시 외도들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사변적 견해는 망상이고 희론일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독화살의 비유를 들었다. 독화살을 맞은 자가 독화살이 어디서 날아 왔는지 등을 알려고 한다면 그것을 알기도 전에 죽을 것이라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변적 견해에 집착하는 것은 당면한 괴로움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말한다. 한마디로 10가지 의문은 무익한 것이다.

 

삼세에 대한 15가지 의문

 

말룽끼야뿟따가 의문한 세상은 영원한가?’ 등의 열 가지 견해와 유사한 견해가 있다. 그것은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없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 나는 미래세에 있을까? 나는 미래세에 없을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나는 미래세에 어떻게 지낼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변할까? 또는 현세에 이것에 대해 의심한다 나는 있는가? 나는 없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있는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M2) 에 대한 것이다. 특히 마지막 구절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항목을 보면 마치 폴 고갱의 작품 제목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연상케 한다.

 

나는 누구일까?’ 라며 삼세에 걸쳐서 고민한다면 이는 번뇌에 해당된다. 마음이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존재의 근원, 궁극적 실재를 탐구해 보지만 여섯 감각영역을 떠나 있다면 희론이 되기 쉽다. 희론은 망상과 같은 말로서 사념의 구조물이라 볼 수 있다. 생각으로 기와집을 짓는 것과 같다.

 

희론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물들이면 번뇌가 된다. 사유의 근거없는 확장으로 공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과 같다. 상상속에서 기와집도 만들고 연애도 하는 것과 같다. 이를 희론이 시간과 존재에 관한 관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과거, 미래, 현재 삼세에 걸쳐서 나는 누구일까’ 라든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며 고민한다면 실체도 없는 개념을 붙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으로 설명한다.

 

마두삔디까경(M18)에 따르면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서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난다.”라 했다. 이는 삽바사와경(M2)에서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로 시작 되는 삼세에 대한 의문과 일치한다. 공통적으로 삼세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사는 것은 현실적이 못하다. 생각이 탐진치에 오염되면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있게 되어 번뇌만 증장된다. 그래서 삼세에 걸쳐서 의문하는 것에 대하여 이것을 견해의 심취, 견해의 정글, 견해의 험로, 견해의 왜곡, 견해의 몸부림, 견해의 결박이라고 부른다.” (M2) 라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결박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묶여 있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의심극복청정

 

열 가지 형이상학적 견해에 집착하는 것은 번뇌에 해당된다. 또 삼세에 걸친 열다섯 가지 의문 역시 번뇌에 해당된다. 그런 번뇌에는 감각적 욕망의 번뇌, 존재의 번뇌, 사견의 번뇌, 무명의 번뇌 이렇게 네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서 열가지 또는 열 다섯 가지 견해는 오염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사견의 번뇌라 볼 수있다. 그런데 정도론에 따르면 삼세의 번뇌를 벗어나는 방법에 대하여 설명해놓았다. 이를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kaṅkhāvitaraṇavisuddhi)’이라 한다.

 

의심극복청정이란 무엇일까? 이는 칠청정 중에서 네 번째 단계이다. 정신과 물질은 항상 조건에서 생긴다든가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조건과 업으로 파악했을 때 조건에 따라 정신-물질이 일어나는 것을 본 뒤 현재에 이렇듯이 과거에도 조건으로부터 생겼고, 미래에도 조건으로부터 생길 것이라고 관찰한다.”(Vism.19.10) 라 했다. 이렇게 관찰할 때 삼세에 대한 의심은 사라질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견의 번뇌를 없앨 수 있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연기법을 특징으로 한다. 모든 것은 연기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한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소멸하는 현상을 이 몸과 마음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였을 때 외도들의 견해에 지나지 않은 삼세에 대한 15가지 의문도 사라질 것이라 했다.

 

조건 발생과 조건소멸을 관찰하면

 

무엇이든지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모르기 때문에 답답한 것이다. 알면 사라지는 것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을 알면 세상은 영원한가?’ 등의 10가지 의문과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등의 15가지 삼세에 대한 의문은 사라진다. 이는 이 몸과 마음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하기 때문이다. 이를 청정도론에 따르면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또는 바르게 보는 지혜라 한다.

 

 세상은 영원한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이는 영원주의적 견해에 대한 것이다. 이런 의문은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 라 했다. 소멸의 원리로 영원주의를 논파한 것이다. 연기의 역관으로 설명된다. 연기의 역관은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라고 되어 있다. 무상하게 조건 소멸하는 것을 관찰하였을 때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절대유로서의 극단은 거짓이 된다. 그래서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라고 보는 영원주의는 희론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는가?’에 대한 견해는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이는 부처님이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연기의 순관에 따르면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라는 정형구로 되어 있다. 조건발생함을 관찰하면 몸이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허무적인 견해가 된다. 따라서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는 단멸론적 견해는 파기된다.

 

지금 당면한 괴로움을 해결 하려면 현상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지 않고 있는 그대로 현상을 관찰 했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우리 몸과 마음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을 넘어서 다른 것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면 공허한 것이 된다. 오온을  벗어나 거시적 우주론이나 미시적 양자론으로 우리는 어디서 어디로 가는가?’라며 존재의 근원을 찾는다면 실패하고 말 것이다. 또한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벗어나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며 이 몸과 마음 밖에서 찾고자 한다면 역시 실패하고 말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

 

종종 노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특별히 하는 일이 없는 노인들이 삼삼오오 공원에서 또는 식당에서 주로 정치이야기를 한다. 정치현안과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런데 의견이 갈리는 경우 여와 야가 대결하는 것처럼 치열하게 싸운다. 입에 도끼를 문듯, 입에 칼을 문듯 상대방을 공격한다. 이런 말싸움이 신체적 접촉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노인들의 정치이야기는 공허하게 들린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튜브를 보면 각종 법문이 올려져 있다. 그 중에 깨달음과 관련하여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 있다. 이것만 알면 된다고 한다. 자신의 말을 듣다 보면 언하대오(言下大悟)’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의 입만 바라보면 된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다 보니 교리나 수행도 필요없다고 말한다. 마치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듣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현실과 관련 없는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희론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경전을 보면 공개토론장이 등장한다. 주로 외도들이 토론 하는데 경에 따르면 시끄럽게 왁자지껄 큰 소리로 떠들며 여러 가지 잡담”(D9) 하는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그 중에는 세상은 영원한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등으로 토론하기도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토론 역시 공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당면한 현실의 문제에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노인들이 공원에서 정치이야기 하는 것 같고 유튜브에서 이것을 말하는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일체를 버리고 다른 일체를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여섯 감각영역의 일체를 버리고 오온 바깥에서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공허하게 말로만 떠벌린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여섯 감역이라는 일체를 벗어났기 때문에 만일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더욱 더 큰 곤경에 처할 것이다.”(S35.23) 라 했다. 우리 몸과 마음 밖에서 무언가 찾으려 하는 것은 생각이 탐진치에 오염된 희론이고 번뇌에 지나지 않는다.

 

연기와 연생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부처님은 이 몸과 마음을 관찰하라고 했다. 오온 밖에 있는 존재의 근원이나 궁극적 실재가 대상이 될 수 없다. 이 몸과 마음을 떠나서는 그 어떤 해법도 발견할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해법은 우리 몸과 마음에 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에서 생성과 소멸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다.

 

 

수행승들이여, 거룩한 제자들은 이 연기와 연생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써 관찰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전생에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없었는지, 나는 전생에 무엇으로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어떻게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되었는지’ 숙세로 거슬러 올라가 가거나

 

‘나는 내세에 있을지, 나는 내세에 없을지, 나는 내세에 무엇으로 있을지, 나는 내세에 어떻게 있을지, 나는 내세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될 것인지’ 내세로 달려가거나

 

‘나는 현세에 있는지, 나는 현세에 없는지, 나는 현세에 무엇으로 있는지, 나는 현세에 어떻게 있는지, 나는 현세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되는지’ 현세에 의혹을 갖게 되거나 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제자는 있는 그대로 이 연기와 연생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서 잘 관찰하기 때문이다.” (S12.20)

 

 

2016-09-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