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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길인가 불사의 길인가, 왼길과 오른길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6. 8. 29. 18:31

 

 

죽음의 길인가 불사의 길인가, 왼길과 오른길에서

 

 

두 갈래의 길이 있다. 바른 길과 왼 길이다. 남들이 다 다닌다고 해서 바른 길이라 볼 수 없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이 바른 길일 수도 있다. 왼 길로 가면 죽음의 길이고, 바른 길로 가면 불사의 길이다.

 

 

 

 

right-way-wrong-way

 

 

접촉을 통하여

 

상윳따니까야에 바보와 현자의 경이 있다. 초불연에서는 우현경이라 했다. 빠알리어제목은 발라빤디따숫따(Bālapaṇḍitasutta)’이다. 발라(bāla) ‘young in years; ignorant; foolish’의 뜻으로 일반적으로 어리석은 자라 한다. 빤디따(paṇḍita)‘wise’의 뜻으로 일반적으로 현명한 자라 한다. 초기경에서는 발라와빤디따가 항상 쌍으로 쓰여 가르침을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다. 맛지마니까야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M129)’이 대표적이다.

 

어리석은 자는 바보와 같다.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한 자와 같기 때문이다. 사성제를 모르기 때문에 무지한 것이다. 사성제를 모르기 때문에 세세생생 윤회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어리석은 자에게는 이 현세의 몸이 생겨난다.”(S12.19) 고 했다. 여기서 몸은 의식을 갖춘 몸을 말한다.

 

그런데 몸은 현자에게도 생겨난다는 사실이다몸과 마음을 갖추고 있는 것에는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구별은 없다. 또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접촉을 통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는 사실이다.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차이는

 

즐거움과 괴로움, 행복과 불행의 시발점은 무엇일까? 초기경에서는 접촉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 했을 때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덤덤한 느낌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느낌은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에게도 공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부처님은 어리석은 자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 했다.

 

 

Yāya ca bhikkhave, avijjāya nivutassa bālassa yāya ca tahāya sampayuttassa aya kāyo samudāgato, sā ceva avijjā bālassa appahīnā sā ca tahā aparikkhīā. Ta kissa hetu? Na hi bhikkhave, bālo acari brahmacariya sammā dukkhakkhayāya. Tasmā bālo kāyassa bhedā kāyūpago hoti. So kāyūpago samāno na parimuccati jātiyā jarāmaraena sokehi paridevehi dukkhehi domanassehi upāyāsehi na parimuccati dukkhasmā'ti vadāmi.

 

[세존]

수행승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어리석은 자에게는 이 현세의 몸이 생겨난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에게는 이 무명이 파기 되지 않고 갈애가 극복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는 올바른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청정한 삶을 닦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는 몸이 부서져 죽은 뒤에 또 다른 몸을 받는다. 만약 그가 몸을 받으면 그는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

(Bālapaṇḍitasutta -바보와 현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19, 전재성님역)

 

 

키워드는 청정한 삶(brahmacariya)’이다. 어리석은 자는 청정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또 다시 몸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는 접촉에 따른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거머쥐려 하기 때문에 욕망으로 살아간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밀쳐 내려 하기 때문에 성냄으로 살아간다. 이는 다름 아닌 탐욕과 성냄으로 살아 가는 삶이다. 이런 삶이 오염된 삶이다. 다른 말로 청정하지 않은 삶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삶이다. 어리석은 자는 사성제에 대한 무지로 청정한 삶을 살 수 없어서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 살기 때문에 세세생생 윤회할 수밖에 없다.

 

현명한 자는 어리석은 자와 반대의 삶을 살아간다. 무명과 갈애가 태어남의 원인인 것을 알기 때문에 갈애를 소멸시키는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현명한 자는 올바른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청정한 삶을 닦는다.”라 했다. 이는 다름 아닌 팔정도의 삶이다. 그런데 팔정도의 길은 다름 아닌 청정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는 초불연 각주에서 주석을 인용하여 여기서 청정범행은 도의 청정범행을 말한다.”(SA.ii.40) 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번역비교를 해보니

 

초불연 번역을 보면 해탈이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했다. “태어남과 늙음-죽음으죽부터 해탈하지 못하고,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하고,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번역했다. 해탈이 무려 세 번 나왔다. 그러나 빠알리 원문을 보면 해탈을 뜻하는 ‘parimuccati’라는 말은 두 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더구나 parimuccati‘releases; escapes’의 뜻으로 벗어나다의 의미가 강하다. 일본어 사전을 보면 解放される, 自由になる, する로 설명되어 있다. 해탈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Vimutti라는 말이 쓰인다.

 

초불연에서 “So kāyūpago samāno na parimuccati jātiyā jarāmaraena”에 대하여 태어남과 늙음-죽음으로 부터 해탈하지 못하고라 한 것은 번역이 어색하다. 전재성님은 벗어나지 못한다라고 번역했다. 더구나 “sokehi paridevehi dukkhehi domanassehi upāyāsehi”에 대하여 분리하여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하고라 했는데 원문에 해탈이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

 

전재성님은 “So kāyūpago samāno na parimuccati jātiyā jarāmaraena sokehi paridevehi dukkhehi domanassehi upāyāsehi na parimuccati”에 대하여 직역했다. 그래서 만약 그가 몸을 받으면 그는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라고 하여 parimuccati벗어나다의 의미로 번역했다. 다만 마지막 문장 “na parimuccati dukkhasmā에 대하여 그는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못한다라 하여 parimuccati해탈하다의 의미로 번역했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원문에 없는 것을 포함하여 해탈이라는 말을 세 번 사용하였다.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했을까? CDB를 찾아 보니 Therefore, with the breakup of the body, the fool fares on to [another] body. Faring on to [another] body, he is not freed from birth, aging, and death; not freed from sorrow, lamentation, pain, displeasure, and despair; not freed from suffering, I say.”라 되어 있다. 구조를 보니 초불연 번역과 매우 유사하다. 빅쿠보디의 “the fool fares on to [another] body” 구문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어리석은 자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다른] 몸을 받게 된다.”라 했다. 대괄호에 쓰여 있는 [another] [죽은 뒤에 다른]라는 말이 일치한다. 결정적으로 ‘free from’이라는 말이다. 빅쿠보디는 이 말을 세 번 사용했다. 초불연 번역 역시 해탈하다로 하여 세 번 번역했다. 그러나 원문에는 벗어나다의 의미를 가진 Parimuccati는 두 번 나오는 것에 그친다.

 

세양중인과 근거의 경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우현경에 대하여 6지 연기로 설명했다. 이는 무명-갈애, 몸을 받음, 밖의 정신-물질-감각접촉, 느낌, 다시 몸을 받음라는 여섯 가지 구성요소로 되어 있다고 해서 “6지연기로 분류한다.”라고 했다. 또 우현경에 대하여 삼세양중인과의 튼튼한 경전적 근거가 된다.”라고 각주했다.

 

삼세양중인과론에 대하여 빅쿠보디도 비슷한 설명을 해 놓았다. CDB 50번 각주를 보면“This should also help establish the validity of the "three-life" interpretation of paiccasamuppāda and demonstrate that such an interpretation is not a commentarial innovation.” (CDB 50번 각주) 라 되어 있다. 빅쿠보디에 따르면 세 가지 생, 즉 삼세양중인과는 경에서 연기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정당성을 부여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러한 해석이 주석적 견해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고 했다.

 

두 개의 길이 있는데

 

두 개의 길이 있다. 이 길로 가면 죽음의 길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는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이 죽음의 길임을 알면서도 가는 사람들이 있다. 도둑질 하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남의 물건에 손이 간다면 알면서도 그 길로 가는 것이다. 거짓말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알면서도 자꾸 거짓말 하는 것은 그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음행하는 것이 나쁜 것인줄 알면서도 자꾸 하는 것은 그 길로 가고자 하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그 길로 가면 틀림 없이 죽음에 이른다.

 

두 개의 길이 있다. 저 길로 가면 불사의 길이다. 소수의 사람들만 가는 길이다. 그런데 저 길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 되는 길이다. 사람들이 오욕락으로 살 때 반대로 오욕락을 여의는 삶이다. 청정한 삶의 길이다. 다름 아닌 팔정도의 길이다. 저 길로 가면 틀림 없이 불사에 이른다.

 

죽음의 길과 불사의 길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오른 길이고 또 하나는 왼 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왼 길로 간다.  소수만이 바른 길로 간다. 왼 길에 대하여 초기경에서는띳싸여, 두가지 길이 있다는 것은 의혹을 지칭한 것이다. 왼쪽 길은 여덟가지의 잘못된 길을 지칭한다. 곧 잘못된 견해, 잘못된 사유, 잘못된 언어, 잘못된 행위, 잘못된 생활, 잘못된 정진, 잘못된 새김, 잘못된 집중을 말한다.”(S22:84) 라 했다. 진리의 길로 따졌을 때 왼쪽 길은 길이 아니다. 여기서 왼쪽 길은 진리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경에서는왼쪽 길은 여덟가지의 잘못된 길을 지칭한다. (S22:84)”라고 하였다. 바른쪽 길로 가면 팔정도(八正道)의 길이고, 왼쪽 길로 가면 팔사도(八邪道)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두 길에 대하여 말씀 했다. 두 길은 왼쪽(vāma)과 오른쪽(dakkhia)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가라(vāma muñcitvā dakkhia gahāhi) (S22:84) 라고 하였다. 왜 오른쪽 길로 가라고 하였을까? 그 길이 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왼쪽이 아닌 오른쪽으로 가라고 했다.

 

왼쪽으로 가면 죽음의 길이다. 왜 죽음의 길인가? 오온에 집착하는 자는 오온의 부서짐과 함께 죽음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태어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 있는 한 어리석은 자는 몸이 부서져 죽은 뒤에 또 다른 몸을 받는다. (Tasmā bālo kāyassa bhedā kāyūpago hoti.)”(S12.19) 라고 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오온의 죽음과 함께 죽음의 길로 가게 된다.

 

바른길로 가면 불사의 길이다. 왜 불사의 길인가? 오온에 대한 집착을 벗어버린 무아의 성자에게 근본적으로 죽음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현명한 자가 팔정도를 실천하여 무명이 파기 되고 갈애가 극복되었을 때 청정한 삶은 실현된다. 따라서 현명한 자는 몸이 부서져 죽은 뒤에 또 다른 몸을 받지 않는다. (Tasmā paṇḍito kāyassa bhedā na kāyūpago hoti)”(S12.19) 라고 했다. 현명한 자는 오온이 죽어도 결코 죽는 일이 없어서 불사의 길을 가게 된다.

 

 

2016-08-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