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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대화법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6. 8. 15. 12:18

  

부처님 대화법에 대하여

 


질문같지 않은 질문에 대하여

 

어리석은 자는 지금 겪고 있는 행복이나 불행이 자신의 탓이라거나 타인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상윳따니까야에 아쩰라 깟싸빠의 경(S12.17)’에 따르면 나형외도 깟싸빠는 부처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입니까? (sayakata dukkha)”라며 질문했다. 여기서 괴로움이라는 뜻의 dukkha는 불행 또는 불쾌라고도 볼 수도 있다. 이에 부처님은 짤막하게 그렇지 않습니다. (Mā heva)라 했다.

 

부처님은 깟싸빠의 질문에 상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고 짤막하게 왜 내치듯이 답했을까? 한역아함경에서는 차시무기(此是無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질문같지 않은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차시무기란 무엇일까? 각주에 따르면 사구분별에 대해서는 무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X Y이다.’  ‘X -Y이다.’ ‘X Y이고 -Y이다.’ ‘X Y도 아니고 –Y도 아니다.’라는 네 가지 명제를 말한다.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해서는 무기(avyākata)라 하는데 이는 유보 또는 폐기되어야 할 질문을 말한다.

 

깟싸빠가 대뜸 부처님에게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입니까?”라고 물어 보았을 때 부처님은 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짤막하게 그렇지 않습니다.”라 했다. 이번에는 깟싸빠가 또 다시 당돌하게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입니까? (parakata dukkha)”라며 질문 했다. 이렇게 물었을 때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고 입을 닫고 있어여 하지만 초기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Mā heva)라고만 짤막하게만 답했다.

 

깟싸빠는 아랑곳 하지 않고 이번에는 괴로움은 자신이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입니까?”라며 묻는다. 그때 마다 부처님은 짤막하게 그렇지 않습니다.”라고만 답했다. 그것은 답을 할 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질문같지 않은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질문에 대응하는 네 가지 방법

 

부처님이 짤막하게만 답한 것은 질문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답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네 가지 성립되지 않는 질문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대화주체의 경(A3.67)’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대부분 과거에 일어 났던 이야기, 미래에 발생될 이야기, 그리고 현재의 이야기가 대화주제인데 이런 주제가 대화주제로 적합한 것인지 아닌지는 따져 보아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다.

 

 

수행승들이여, 질문을 받으면, 단언적으로 대답해 주어야 하는 경우에 단언적으로 대답하지 못하거나, 질문을 받으면, 분석적으로 대답해 주어야 하는 경우에 분석적으로 대답하지 못하거나, 질문을 받으면, 질문의 화살을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경우에 질문의 화살을 되돌려 주지 못하거나, 질문을 받으면 그 질문을 제쳐 두어야 하는 경우에 질문을 제쳐두지 못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대화상대로 적합하지 않다.”

(대화주체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67, 전재성님역)

 

 

대화상대로 부적합한 자에 대한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를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네 가지 경우에 대하여 예를 들어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첫 번째로 단언적으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 시각은 무상한가?”라고 물었을 때 그렇다라고 단언적으로 얘기 해야 한다. 이를 한자어로 응일향기문이라 한다.

두 번째로 분석적으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 무상한 것은 시각만인가?”라고 물었을 때 시각만이 아니고 청각도무상하다.”라고 분석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한자어로 응분별기문이라 한다.

 

세 번째로 질문의 화살을 되돌려 주지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 시각과 청각은 동일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두 감각능력과 관련해서 묻는가?”라며 되묻고는 그렇다면 다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무상성에 대해 묻는가?”라며 역질문을 하며 그렇다면 동일하다.”라고 되돌려 주는 답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한자어로 응반힐기문이라 한다.

 

네 번째로 무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 답을 할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상대방이 육체와 영혼은 동일한 것인가?”라며 물었을 때 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쩰라 깟싸빠가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입니까?” 라든가. “괴로움은 타인이 만든 것입니까?” 등의 사구분별에 따른 질문이 대표적이다. 부처님은 이런 질문에 응답을 하지 않았다. 무기한 것이다. 이를 한자어로 응사치기문이라 한다.

 

대화상대로 적합하지 않은 네 가지 유형

 

질문같지 않은 질문에 왜 답을 해서는 안될까? 어떤 이는 무아인데 왜 윤회합니까?”라며 질문하기도 한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하지 말아야 한다. 유아론자가 뻔히 결론을 내고서도 무아인데 왜 윤회합니까?”라며 묻는다면 악취나는 질문에 해당된다. 이런 질문에 답을 하는 순간 말려 들 수 있다. 질문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질문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질문을 받고는 옳고 그름에 입각하지 못하고, 취지에 입각하지 못하고, 알려진 발언에 입각하지 못하고, 절차에 입각하지 못하면, 수행승들이여, 그러한 사람은 대화상대로 적합하지 않다.”

 

(대화주체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6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대화상대로 적합하지 않은 자로 네 가지 경우를 들고 있다. 이런 유형에 대하여 대화상대로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옳고 그름, 취지, 알려진 발언, 절차에 입각하지 않은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음을 말한다.

 

첫째, 질문의 옳고 그름에 입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허무주의를 영원주의의 토대로 반박하고 영원주의를 받아 들인다면, 논박을 위해서 받아들인 잘못된 입장을 유지할 수 없다.”(Mrp.II.309-310) 라고 했다. ‘죽으면 끝이다라는 단멸론에 대하여 갑자기 영원론자가 영원주의 입장에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 한다면 적절치 못한 대화가 된다. 이런 자는 대화상대로 적합하지 않다.

 

둘째, 질문의 취지에 입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서는 예를 들어 사람이 토론 상대자에 의해서 그대는 이것을 물을 것이다.’라고 제기되면, 자신이 알려진 것을 알고 아니야 나는 다른 것을 질문할 것이다.’라고 하고 당신은 그것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할 것이다.’라고 하면, 자신은 아니야, 나는 달리 말하겠다.’라고 하면, 자신의 의도에 입각하지 못한 것이다.” (Mrp.II.309-310) 라고 설명되어 있다. 질문의 취지와 관계 없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논점회피라 볼 수 있다. 이런 자는 대화상대로 적합하지 않다.

 

셋째, 알려진 발언에 입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예를 들어, 자신의 발언에 대하여 적대자가 칭찬하면, 올바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장을 바꾸는 것이다.” (Mrp.II.309-310) 라고 설명되어 있다. 비록 적이라도 올바른 행위를 했다면 칭찬해 주는 것이 예의이다. 드라마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적장에게 훌륭했다라며 경의를 표하는 장군을 연상케 한다. 그럼에도 원수에게 칭찬받는 것을 치욕으로 여겨 입장을 바꾼다는 것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개구리같은 사람이다. 이런 자는 대화상대로 적합하지 않다.

 

넷째, 절차에 입각하지 못한 것은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식사할 때와 같이 적당하지 않은 시간에 진지한 질문을 하거나, 토론의 규칙을 잘 지키지 않는 것이다.” (Mrp.II.309-310) 라 했다.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못하고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유쾌한 식사시간에는 날씨 이야기나 건강이야기 등을 하는 것이 부드럽다. 그럼에도 죽음 등 심각한 이야기를 한다면 밥맛이 달아날 것이다. 토론에서 해야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음에도 마구 뱉어 버렸을 때 토론의 규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토론에서 금하는 것이 있다. 정치이야기, 종교이야기, 여자이야기를 말한다. 그럼에도 이 세 가지 중의 하나를 얘기했을 때 본전도 건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분위기를 썰렁하게 할 수 있다.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자는 대화상대로 적합하지 않다.

 

공격하고 유린하고 조롱하고 말꼬리를 붙들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듣는 이야기기 있다. 그것은 저 사람은 술도 함께 못마실 사람입니다.”라는 말이다. 술도 함께 할 수 없는 사람, 식사도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대화상대로 적합하지 않음을 말한다. 토론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토론을 하다 보면 모든 것이 드러난다. 대화상대로서 적합한지 적합하지 않은지는 몇 마디 해 보면 알 수 있다.

 

만일 그가 토론규칙을 전혀 지키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또 질문을 받고서는 즉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문서답하거나 아예 다른 것으로 화제를 돌려버린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또 대화도중에 화를 낸다든가 실망감을 표현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대화상대로 부적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다.

 

 

수행승들이여, 질문을 받고 공격하고 유린하고 조롱하고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지면, 수행승들이여, 그러한 사람은 대화상대로 적합하지 않다.”

 

(대화주체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67, 전재성님역)

 

 

토론할 때 그 사람의 현재 모습이 드러난다. 그 사람이 지혜가 있는지는 토론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질문에 대하여 공격하고, 유린하고, 조롱하고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행위를 하는 자와는 대화를 중단해야 한다. 왜 그런가? 질문을 받으면 여러 가지 논거를 전거를 통해서 질질 끌며 공격하는 하는 행위를 하는 자가 있다. 이를 공격이라 한다.

 

유린하는 자는 어떤 자인가? 주석에 따르면 근거를 취해서 비판하는 것을 말한다. 또 조롱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질문하거나 말할 때에 손바닥을 치면서 박장대소하는 하는 것을 말한다.”(Mrp.II.311) 라고 주석에 설명되어 있다.

 

말꼬리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서는 사소하게 입으로 잘못한 말을 취해서 혐책하고 조사하는 것이다.”라 했다. 아내가 남편에게 맨날 술만 먹는다고 비난하면 남자는 일주일에 5일만 먹었다라고 말하는 것 등을 말한다. 말의 꼬리를 잡아 잘잘못을 따지다 보면 토론의 본질은 멀어지고 사소한 것에 감정에 매이기 쉽다. 그래서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자와는 대화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대화를 가려서 하라고 했다. 먼저 대화상대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해야 함을 말한다.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을 하거나 동문서답을 하거나 도중에 주제를 바꾸거나 조롱하거나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 지는 자와 대화 해 보았자 하등 득이 될 것이 없다. 그런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했다.

 

만약 상대방에 관심이 있다면 법에 대하여 이야기하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관심이 있다면, 하나의 법을 곧바로 알고, 하나의 법을 완전히 알고, 하나의 법을 끊어 버리고, 하나의 법을 깨닫는다. 하나의 법을 곧바로 알고, 하나의 법을 완전히 알고, 하나의 법을 끊어 버리고, 하나의 법을 깨달으면, 반드시 해탈을 경험한다.”(A3.67) 라고 했다. 이는 사성제에 대한 것이다. 사성제를 알아 해탈을 목적으로 해야 함을 말한다. 따라서 대화나 토론은 반드시 해탈을 목적으로 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집착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이 대화의 목적” (A3.67) 이라 했다.

 

부처님은 쓸데 없는 잡담을 금했다. 그러나 법에 대한 토론은 장려 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믿음으로써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그대들 훌륭한 가문의 자제들이 법담을 위하여 모였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M26) 라고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또 율장에서는 그리고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닷새마다 밤을 새며 법담을 나눕니다.”(Vin.I.352) 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법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다. 그래서 망갈라경(축복경, Sn2.4)에서도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Kālena dhammasākacchā Kālena dhammasākacchā)”라 했다.

 

배우려는 자세를 갖추었을 때

 

부처님은 쓸데 없는 질문, 질문같지 않는 질문에 대해서는 무기로 일관했다. 아쩰라 깟싸빠가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입니까?” 등의 네 가지 질문을 말한다. 그렇다고 모두 무시한 것은 아니다. 단지 예를 갖추어서 배우려는 자세를 갖추었을 때, 받아 들이려는 자세를 갖추었을 때는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는 깟싸빠가 존경하는 세존께서는 저에게 괴로움을 보여 주십시오. 존경하는 세존께서는 저에게 괴로움을 가르쳐 주십시오.”(S12.17) 라고 요청했을 때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부처님은 괴로움에 대하여 자기원인설과 타자원인설이 잘못된 것임을 깟싸빠에게 알려 주었다. 자기원인설은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동일하다.”라고 보는 관점을 말한다. 이는 행위의 주체를 인정하는 말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렇게 주장한다면 영원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라 했다. 반면 타자원인설은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행위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에 해당되는 것입니다.”라 했다.

 

부처님은 배우려는 자세를 가진 외도 까싸빠에게 자기원인설과 타자원인설로 설명해 주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깟싸빠에게 말해 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이어지는 가르침을 보면 알 수 있다.

 

 

깟싸빠여, 여래는 이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소멸합니다.”

 

(아쩰라 깟싸빠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1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외도 까싸빠에게 중도를 설했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를 말한다. 이를 연기법으로 설한 것이다. 그래서 십이연기에 대한 순관과 역관 정형구가 나온다.

 

부처님의 대화하는 방법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은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니고 타자가 만든 것도 아니라고 했다. 지금 여기서 접촉에 따른 것이다. 접촉에 따라 쾌와 불쾌가 일어난다. 이는 즐거움과 괴로움이고, 또 다른 말로 행복과 불행이다. 행복과 불행은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니고 타자가 만든 것도 아니다. 이를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설명했다. 그럼에도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입니까?”라는 물음에 답을 한다면 만족 시켜 줄 수 없다. 설령 답을 한다고 해도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 질 것이기 때문에 토론이 성립될 수 없다. 그래서 집착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이 대화목적이라 했다. 이에 부처님은 대화하는 방법에 대하여 이렇게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분노로 가득 차 대화를 하네.

화를 내고 오만하고

고귀하지 못한 수단을 사용하며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찾네.

 

악담을 하고, 무례를 범하고

혼란스럽고, 상대를 짓밟는 것을

대화에서 서로가 즐겨하니

그것은 고귀하지 못한 것이네.

 

현자가 대화하고자 원하면

그 때를 알고 나서

고귀한 삶에 대한 대화를

가르침에 입각하여 말해야 하리.

 

집착 없는 정신으로

화내지 않고 오만하지 않고

질투함이 없이 성급함이 없이

현자는 대화를 이끌어야 하리.

 

그는 질투를 여읜 마음으로

올바른 앎으로 말하네.

잘 말해진 것에 대해서는 칭찬하고

잘못 말해진 것이라도 비웃지 않네.

 

비난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지 않고

공격하지 않고 유린하지 않고

함부로 지껄이지 않는다네.

 

바른 말은 청정한 믿음을 주고

우리의 앎을 깊게 하네.

고귀한 님은 이와 같이 말할 줄 아네.

그것이 고귀한 님의 말이네.

총명한 님은 이것을 알아서

교만하지 않고 참답게 말하네.”(A3.67)

 

 

2016-08-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