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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不死)의 문을 두드리며 서 있는 님

담마다사 이병욱 2016. 8. 10. 19:57

 

 

불사(不死)의 문을 두드리며 서 있는 님

 

 

 

불교인들 중에 윤회를 믿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업과 업의 과보를 믿는다면 내생과 윤회는 당연한 뒤따르는 것임에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 하여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부처님은 현실에 대한 가르침만 말씀 하셨지 내생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내생과 윤회에 대한 이야기는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부정한다면 자신 보다 더 높은 시력을 가진 자의 눈에 보이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자신의 경험이나 인식능력의 한계로 인하여 믿지 않는다면 더 많은 경험과 인식의 지평을 넓힌 사람들이 알고 본 것에 대하여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은 범부들보다는 더 많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범부들 보다는 더 많은 인식능력을 가진 일체지자이었다. 일체지자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것이 초기경전이다.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은 사성제와 십이연기로 설명된다. 실천방법으로는 팔정도이다. 그런데 십이연기구조를 살펴보면 미래에 대한 추론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마치 과거를 알면 미래가 보이는 것처럼, 십이지연기의 각 연결고리에 대하여 발생과 소멸에 대한 통찰의 지혜가 일어나면 과거나 미래에 대한 추론적 지혜가 일어 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상윳따니까야 2권 해제에서 연기에 대한 그러한 고귀한 제자의 통찰은 두 가지 양상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바로 현세에서의 연기고리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곧바른 앎과 다른 하나는 그러한 관계가 과거나 미래에도 불변적으로 유지된다는 추론적인 앎이다.”라 했다.

 

사실에 대한 앎과 보편에 대한 앎

 

곧바른 앎은 사실에 대한 앎이라고도 한다. 이는 빠알리어 ‘dhamme nānaṃ’ 번역한 것이다. 초불연에서는 법에 대한 지혜라 번역했다. 한자어로는 법지(法智)라 한다. 법지는 사성제의 법이나 도의 지혜에 대한 법을 뜻한다고 했다. 이는 십이연기 고리에서 각 연결고리에 대하여 서성제로 통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한 앎을 바탕으로 추론적인 앎, 보편에 대한 앎이 생겨난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So iminā dhammena diṭṭhena viditena akālikena pattena pariyogāhena atītānāgatena ya neti.

 

Ye kho keci atītamaddhāna samaā vā brāhmaā vā jarāmaraa abbhaññasu, jarāmaraasamudaya abbhaññasu, jarāmaraanirodha abbhaññasu, jarāmaraanirodhagāmini paipada abbhaññasu, sabbe te evameva abbhaññasu, seyyathāpāha etarahi.

 

Yepi hi keci anāgatamaddhāna samaā vā brāhmaā vā jarāmaraa abhijānissanti, jarāmaraasamudaya abhijānissanti, jarāmaraanirodha abhijānissanti, jarāmaraanirodhagāmini paipada abhijānissanti, sabbe te evameva abhijānissanti, seyyathāpāha etarahīti. Idamassa anvaye ñāa.

 

그는 앎과 봄을 갖추어 시간을 뛰어넘어 관통하여 깊이 이해한 이 가르침을 통해서 과거와 미래에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이끌어낸다.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라도 과거에 늙음과 죽음을 파악했고 늙음과 죽음의 원인을 파악했고 늙음과 죽음의 소멸을 파악했고 늙음과 죽음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파악했다. 그들 모두는 내가 지금 이러하듯이 같은 방법으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파악했을 것이다.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라도 미래에 늙음과 죽음을 파악할 것이고 늙음과 죽음의 원인을 파악할 것이고 늙음과 죽음의 소멸을 파악할 것이고 늙음과 죽음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파악할 것이라면, 그들 모두는 내가 지금 이러하듯이 이와 같이 파악할 것이다.’그에게 이것이 보편에 대한 앎이다.

 

āavatthusutta-앎에 대한 토대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3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보편적인 앎(anvaye ñāa)’에 대하여 과거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가 부처님에 그랬던 것처럼 늙음과 죽음에 대하여 사성제로 파악했다면, 역시 미래에도 부처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수행자나 성직자도 사성제의 구조로 파악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추론적인 앎에 대하여 보편에 대한 앎이라 했다.

 

보편에 대한 앎은 빠알리어로 ‘anvaye ñāa라 한다.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한역으로 유지(類智)라고 한다. 여기서 anvaye‘having undergone, experienced, or attained’의 뜻이다. 경험으로 얻어진 것을 말한다.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언제나 보편적이었고 또한 언제나 보편적일 연기법에 대한 논리적 귀결을 뜻한다.”(182번 각주) 라고 설명했다. cdb에서는 귀납적 앎(the knowledge of entailment)’라 했다고 한다. 여기서 귀납적이라는 말은 단어장 저장 완료하나하나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사실을 종합하여 그것으로부터 일반적인 원리를 추론하는라는 뜻이다. 귀납적 추론이란 일반적 원리를 찾아 내기 위한 방법을 말한다.

 

주석적 번역과 탈역

 

보편에 대한 앎또는 귀납적 앎에 대한 빠알리어 ‘anvaye ñāa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최상의 지혜로 아는 것이라 번역했다. 이는 주석적 번역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은 과거에도 이러 했고 미래도 이러할 것이라 했다. 이는 보편적인 진리 또는 보편적인 앎, 보편적인 지혜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최상의 지혜로 번역한 것은 문맥과는 동떨어진 과도한 의역으로 본다.

 

 

이것이 법에 대한 그의 지혜이다. 그가 보고 분명하게 알고 시간이 걸리지 않게 얻고 간파한 이러한 법으로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을 적용한다.

 

과거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늙음-죽음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늙음-죽음의 일어남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최상의 지혜로 알았던 것은 모두 마치 지금의 내가 최상의 지혜로 아는 것과 같다.

 

미래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늙음-죽음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늙음-죽음의 일어남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최상의 지혜로 알게 될것은 모두 마치 지금의 내가 최상의 지혜로 아는 것과 같이 알게 될 것이다.”

 

āavatthusutta-지혜의 토대 경, 상윳따니까야 S12.33, 각묵스님역)

 

 

각묵스님의 번역에서 늙음-죽음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라 했다. 이는 빠알리어 jarāmaraa abbhaññasu’를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번역문을 보면 최상의 지혜로 알고라 했는데 빠알리 원문에 없는 말이다. 아마 빠알리어  abbhaññasu’최상의 지혜로 아는 것이라 번역한 듯 하다. 그러나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abbhaññasu’는 영어로 recognition, remembrance, recollection’의 뜻이다. 단지 아는 것또는 인식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늙음과 죽음을 파악했고라 번역했다. 빅쿠보디는 directly knew aging-and-death”라 번역하여 늙음과 죽음을 곧바로 아는 것이라는 뜻으로 번역했다.

 

각묵스님이 최상의 지혜로 아는 것이라는 말은 빅쿠 보디의 곧바로 아는 것이라는 번역과 일면 유사해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빠알리어 abbhaññasu’는 단지 아는 것, 경험해서 아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abhijānāti‘knows fully or by experience’의 뜻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사성제의 지혜를 아는 것이라는 뜻으로 확대 해석하여 최상의 지혜로 아는 것이라 의역한 것이라 본다. 이는 초불연 각주에서 확인 된다. 각주를 보면 마치 내가 지금 사성제를 통해서 아는 것처럼”(S.A.ii.67) 이라 하여 주석을 인용했다. 초불연에서는 주석적 번역을 한 것이다.

 

각묵스님의 번역에서 빠알리원문 한 줄이 빠져 있다. 그것은 빠알리 구문 “Idamassa anvaye ñāa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그에게 이것이 보편에 대한 앎이다.”라고 번역했다. 빅쿠보디는 “This is his knowledge of entailment.”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초불연 번역을 보면 탈역되어 있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빅쿠보디는 ‘anvaye ñāa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했다.

 

 

anvaye ñāa. Spk: The knowledge (that follows) as a consequence of the knowledge of the principle; this is a name for reviewing knowledge (see n. 68). It is not possible to apply the method to the past and future by means of the dhamma of the four truths or the dhamma of path knowledge, but when the four paths have been penetrated by path knowledge, reviewing knowledge subsequently occurs, and one applies the method by means of that.

 

This explanation is difficult to square with the account of reviewing knowledge at Vism 676 and elsewhere as knowledge of the path and fruit attained, the defilements abandoned, those remaining, and Nibbwa. What is meant here, rather, is an inference extended to past and future, based on the immediate discernment of the conditionality operative between any given pair of factors.

 

The following paragraph is also at 1227, 28. Spk says that the arahant's (prior) plane of traineeship (khīāsavassa sekhabhūmi) is being discussed, on which Spk-pf remarks: the moment of the supreme path (aggamaggakkhaa).

 

(cdb vol1, 104번 각주, 빅쿠보디)

 

 

늙음과 죽음에 대하여 사성제의 구조로 통찰했을 때 과거나 미래에도 추론 가능함을 말한다. 그래서 수반함을 뜻하는 ‘entailment’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것이 수반하는 지혜이다.(This is his knowledge of entailment)”라는 뜻으로 번역했다.

 

추론으로 알 수 있는 것

 

초불연 각묵스님은 빠알리어 한구절을 번역하지 못했다. 탈역이라 본다. 그런데 이어지는 번역에서는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는 법에 대한 지혜와 수반하는 지혜라는 이러한 지극히 청정하고 지극히 깨끗한 두 가지 지혜가 있다.”라하여 수반하는 지혜라는 말을 사용했다. 여기서법에 대한 지혜‘dhamma nāna를 말하고, ‘수반하는 지혜anvaye ñāa’를 말한다. 전재성님은 사실에 대한 앎보편에 대한 앎이라 번역했다. 빅쿠보디는 knowledge of the principle’knowledge of entailment’라 했다. 이는 곧바른 앎추론적 앎에 대한 것이다. 사성제와 연기의 진리를 통찰하면 보기 힘든 법을 알 수 있음을 말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진리, 중생, 재생연결, 조건 이 네 가지 법은 보기 어렵고 가르치기도 아주 어렵다. (Vism17.25) 라 되어 있다. 왜 보기도 어렵고 가르치기도 어려울까? 그것은 연기법과 사성제를 통찰한 현자가 아니면 보기 힘들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전승된 가르침을 통달하거나 수행하여 법을 증득한 자가 아니면 연기의 주석은 불가능하다.” (Vism17.25) 라 했다.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은 법을 보지 못한 자들이라 볼 수 있다. 자신의 알량한 깜냥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자신의 경험하지 않았다 하여, 자신이 인식하지 않았다 하여 내생과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은 법을 보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나 현자들은 범부들이 볼 수 없는 네 가지 법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청정도론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재생연결의 정신 물질이 알음알이를 조건한 것이라고 알겠는가?’라고, [답한다.] 경과 추론으로 알 수 있다.

 

(청정도론, Vism17.202, 대림스님역)

 

 

청정도론에서는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경과 추론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앎에 대한 토대의 경(S12.33)’에 실려 있는 보편에 대한 앎(anvaye ñāa)’과 일치 한다. 연기의 고리에 대하여 사성제의 구조로 통찰하면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소멸되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윤회나 재생연결식 등 알기 어려운 법을 추론해서 알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런 법들은 현자들만이 볼 수 있는 것이라 했다.

 

꿰뚫음의 지혜(nibbedhikapañña)

 

부처님은 이 경을 통하여 연기고리 사이의 관계가 발생과 소멸이라는 사성제의 구조속에서 곧바로 알려져야 한다고 했다. 이런 통찰이 일어 났을 때 과거나 미래에서도 불변적으로 유지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진리의 흐름에 들어 최대한 일곱번 윤회하면 최종목적지인 열반에 도달할 것이라 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했다.

 

 

Yato kho, bhikkhave, ariyasāvakassa imāni dve ñāāni parisuddhāni honti pariyodātāni – dhamme ñāañca anvaye ñāañca. Aya vuccati, bhikkhave, ariyasāvako diṭṭhisampanno itipi, dassanasampanno itipi, āgato ima saddhamma itipi, passati ima saddhamma itipi, sekkhena ñāena samannāgato itipi, sekkhāya vijjāya samannāgato itipi, dhammasota samāpanno itipi, ariyo nibbedhikapañño itipi, amatadvāra āhacca tiṭṭhati itipīti.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제자가 이 청정하고 순수한 두 가지 앎, 즉 사실에 대한 앎과 보편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다면, 수행승들이여, 그는 견해를 확립하고 통찰을 지녀, 올바른 사실에 도달하여 올바른 사실을 보고, 학인의 지혜를 갖추고 학인의 명지를 갖추고 진리의 흐름에 들어, 고귀한 님으로 꿰뚫음의 지혜를 성취하여, 불사의 문을 두드리며 서 있는 님이라고 일컬어진다.”

 

āavatthusutta-앎에 대한 토대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3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두 가지 앎(지혜)에 대하여 먼저 강조하고 있다. 사실에 대한 앎(dhamme ñāa)과 보편에 대한 앎(anvaye ñāa)이다. 이는 현세에서 연기고리에 사성제 구조로 통찰하면 곧바로 알게 되는데 이를 사실에 대한 앎이라 했다. 그리고 연기고리에 대한 관계가 과거나 미래에서도 불변적으로 유지되는 것을 추론적으로 알기 때문에 보편에 대한 앎이라 했다. 이런 두 가지 앎을 통칭하여 꿰뚫음의 지혜(nibbedhikapañña)’라 했다. 초불연에서는 꿰뚫는 통찰지라 했다. 빅쿠보디는 penetrative Wisdom’이라 했다.

 

불사(不死)의 문을 두드리며 서 있는 님

 

부처님의 제자가 꿰뚫음의 지혜를 성취하면 불사의 문을 두드리며 서 있는 님이라고 일컬어진다.”라 했다. 이는 빠알리어 “amatadvāra āhacca tiṭṭhati itipīti.”를 번역한 것이다. 초불연에서는 불사의 문에 도달하여 머문다.”라고 번역했다. 서로 다른 번역처럼 보인다.

 

한편에서는 불사의 문을 두드리며 서있다고 했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불사의 문에 도달하여 머문다라고 했다. ‘두드린다도달한다는 다른 말이다. 이와 관련된 빠알리어가 āhacca’이다. 이 말은 영어로 ‘having knocked or touched’의 뜻이다. 문을 뜻하는 ‘dvāra’와 함께 쓰이면 문을 두드리다라는 뜻이 된다. 불사의 문을 열고 들어 가려는 행위를 말한다. 열반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도달하여 머문다라 했다. 도달한다는 말은 빠알리 원문에 보이지 않는다.

 

꿰뚫음의 지혜를 성취한 제자는 불사의 문앞에서 문을 두드리며 서 있는 것이다. 불사의 문에 들어 갈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불사의 문에 도달하여 머문다고 했다. 머물기만 하면 불사의 문이 열리는 것일 것일까? 문을 두드리는 행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두드린다는 뜻의 빠알리어 āhacca’가 쓰였다. 빅쿠보디는  stands squarely before the door to the Deathless.”라 번역했다. 이는 불사의 문앞에 정면으로 서 있다는 뜻이다. 각묵스님의 번역과 유사하다. 그러나 빠알리 원문에는 āhacca’‘having knocked or touched’의 의미로서 분명히 불사의 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누구나 불사의 문에 들어 갈 수 있다고 했다. 진리의 흐름에 들어 최대 일곱생 이내면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된다. 그런데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은 시설되지 않는다. 오온에 집착하는 범부들은 육체적 죽음에 직면하여 죽게 되지만, 자아에 대한 집착이 없는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말은 적용될 수 없다. 그래서 불사(不死)’라 한다. 마침내 불사의 문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릴 때 불사의 문은 열릴 것이다. 이를 불사의 문을 두드리며 서 있는 님(amatadvāra āhacca tiṭṭhati itipīti)”라고 멋지게 표현한 것이다.

 

 

 

2016-08-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