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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에 대한 지혜(法住智)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6. 7. 31. 11:47

 

 

사실에 대한 지혜(法住智)에 대하여

 

 

 

 

 

 

 

 

마른 지혜(乾慧)

 

어느 스님이 인터넷 글쓰기 하는 것에 대하여 건혜(乾慧)’라 했다. 건혜란 마른 지혜를 말한다. 그래서 문자적인 지혜는 있는지 모르나 실제적인 지혜는 없는 사람이라 했다. 수행 없이 교리적으로 깨쳐 아는 것도 해당된다. 그러나 수행할 수 없는 환경이라면 경전을 통한 문자적 지혜를 깨치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 된다. 어느 교수는 불교TV 대담 프로에서 아침좌선 수행을 그만 두고 초기경전을 통한 지혜수행으로 전환했다고 들은 바 있다. 그렇다면 선정수행 없이 경전을 통하거나 일상에서 사띠수행만 해도 아라한이 될 수 있을까?

 

수행승과 교학승이 다투었는데

 

앙굿따라니까야 마하쭌다의 경(A6.46)’을 보면 수행승과 교학승이 다투는 장면이 있다. 서로 자신의 수행방법이 최고라는 것이다. 교학승은 수행승에 대하여 우리는 선정에 든다, 우리는 선정에 든다라고 하는데 이들은 도대체 무슨 선정에 든다는 말인가?”라며 비난 한다. 반면 수행승들은 교학승에 대하여 수다스럽고 쓸데 없이 지껄이는 것으로 보아 새김을 잃고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만하고 마음이 혼란되고 감관은 거칠다.”고 비난한다.

 

마하쭌다의 경에 따르면 수행승과 교학승에 대하여 단점만 말하지 말고 장점을 말하라고 했다. 그렇다면 수행승의 장점은 무엇일까? 이는 세상에 이러한 불사의 세계를 몸으로 접촉하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A6.46)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실제로 수행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지혜를 말한다. 교학승의 장점에 대해서는 “세상에 이러한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A6.46)라 했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교학승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언어나 문자적으로 전승된 가르침을 이해 했을 때 교학만으로도 통찰지를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선정에 들지 않고도

 

마른 지혜와 관련된 이야기가 상윳따니까야 수시마에 대한 경(S12.70)’이 있다. 전재성님의 해제글에 따르면 이 경에 대하여 이 경은 진리를 꿰뚫음으로써 초월적인 힘인 신통을 얻지 않고도 비물질계의 선정에 들지 않고도 해탈한, 즉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이룬 아라한의 부류를 소개하면서, 존재의 다발과 연기의 현상에 대한 진정한 본질을 아는 지혜가 열반으로 이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라고 했다.

 

진리를 꿰뚫는 것(dhammābhisamaya)’으로도 아라한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아라한이 된 다는 것이 신통해탈자나 양면해탈자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혜해탈자도 포함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싸리뿟따여, 저들 오백 명의 수행승들 가운데 육십 명의 수행승들은 세 가지의 명지에 정통한 님이며, 육십 명의 수행승들은 여섯 가지 곧바른 앎을 성취한 님이고, 육십 명의 수행승들은 지혜에 의한 해탈과 마음에 의한 해탈을 함께 성취한 님이고, 또한 다른 사람들은 지혜에 의한 해탈만을 성취한 자이다. (S8.7)라는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다.

 

가르침의 도둑

 

수시마의 경은 가르침의 도둑으로 알려져 있다. 이교도 수시마가 부처님의 교단으로 몰래 출가하여 부처님의 진리를 배워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이익을 얻게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수시마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승복당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신의 악한 의도를 자백하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한때 부처님이 라자가하 벨루 숲 깔란다까니바빠에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승가는 대우 받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환대받고, 존중받고, 존경받고, 공경 받고 예경 받고라 표현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탁발음식 등 사대필수품에 대한 보시를 잘 받았다. 반면 외도의 유행자들은 정반대로 환대 받지도 공경받지도 못해서 탁발 등 사대필수품을 보시 받을 수 없었다. 이에 이교도 유행자들의 무리는 리더 수시마에게 벗이여 쑤시마여, 가서 사문 고따마에게서 청정한 삶을 사십시오. 당신이 그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설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면 부처님 가르침을 배워 오라고 했다. 소위 가르침의 도둑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경우 탁발 등 보시를 잘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수시마는 부처님에 가서 출가 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러면 쑤시마를 출가시켜라.”라고 말했다. 그래서 유행자 수시마는 부처님 앞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부처님은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구족계를 주었다고 설명해 놓았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가 가르침을 훔치러 온 불순한 동기를 알면서도 그가 나중에 마음이 변하여 거룩한 경지[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예견하고 아난다에게 그의 출가를 허락한 것이다.”(Srp.II.125) 라고 설명되어 있다.

 

스승의 감추어진 비밀[師拳]

 

가르침을 훔치려 들어 온 수시마는 수행승들이 안거가 끝난 다음에 부처님 앞에서 아라한 선언 하는 것을 보았다. 이에 수시마는 그 수행승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 보았다.

 

 

[쑤시마]

그대들은 진실로 세존 앞에서 이와 같이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라고 궁극적인 앎에 도달한 것을 선언했습니까?”

 

(수시마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70, 전재성님역)

 

 

키워드는 궁극적인 앎(aññā)’이다. 초불연에서는 구경의 지혜라고 번역했다. 각묵스님은 구경의 지혜(aññā)란 아라한(arahatta)의 이름(nama)이다.”라 하여 문자적으로도 해석했다. 안냐에 대한 빠알리사전을 보면 ‘highest knowledge’라 하여 ‘refers to the perfect knowledge of the Saint (Arahat; s. ariya-puggala)’라고 설명되어 있다. 아라한 선언을 했을 때 궁극적 앎 도는 구경의 지혜가 성취 되었음을 말한다.

 

수시마가 아라한선언을 한 수행승에게 안냐에 대하여 물어 본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스승의 주먹(師拳)’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완전한 지혜가 위없는 가르침의 표지이자 스승의 감추어진 비밀[師拳]이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밝혀 보고자 수행승들에게 접근한 것이다.”(Srp.II.125) 라고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의 어떤 비밀스런 가르침을 배우 궁극적 지혜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 의문한 것이다. 그래서 신통지에 대하여 물어 본다.

 

육신통해탈과 무색계해탈

 

수시마는 여섯 가지 신통이 있는지 아라한선언을 한 수행승들에게 물어 본다. 그래서 인간을 뛰어 넘는 하늘귀로 하늘사람과 인간의 멀고 가까운 두 가지 소리를 듣습니까?”라며 물어 본다. 이는 천이통에 대한 것이다. 이 밖에도 천안통, 타심통, 숙명통 등에 대해 물어 볼 때 마다 수행승들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누진통에 대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누진통을 제외한 신통은 색계 4선정 상태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수시마가 물어 본 것은 사선정에서 신통의 지혜로 궁극적 지혜에 도달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수행승들은 육신통선정수행으로 아라한이 된 것이 아니다. 또 무색계선정으로 해탈한 자도 아니다. 이는 미세한 물질계를 초월하여 비물질계의 경지에서의 고요한 해탈자의 가운데 지냅니까?”라는질문에 벗이여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수행승들은 어떤 방법으로 해탈하여 구경의 지혜, 즉 아라한과를 얻었을까?

 

지혜에 의한 해탈(paññāvimutti: 慧解脫)

 

수시마는 수행승들에게 사선정상태에서 신통으로 구경의 지혜를 얻었는지 물어 보았으나 그렇지 않다고 했다. 무색계선정의 경지에서 구경의 지혜를 얻었는지에 대해 묻자 그것도 아니라고 했다. 어떤 비밀 스런 가르침을 전수받아 궁극적 지혜를 얻었는지에 대하여 의문하고 물어 본 것이다. 그래서 수시마는 수행승들에게 존자들이여, 여기 지금 한편으로, 그대들이 말한 사실과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모순되는 것입니다. 존자들이여, 어떻게 된 것입니까?”라며 물어 보았다. 수시마가 생각하기를 아라한의 경지는 육신통이나 무색계선정수행을 닦아야만 성취가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수행승들은 이렇게 말해 준다.

 

 

 

[수행승들]

벗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러합니까? 벗이여 쑤씨마여, 우리들은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이룬 것입니다.”

 

(수시마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70, 전재성님역)

 

 

수행승들은 지혜에 의한 해탈(paññāvimutti)’이라고 했다. 초불연에서는 통찰지를 통한 해탈[慧解脫]’이라고 번역했다. 이렇게 본다면 아라한과를 얻는데 있어서 세 가지 해탈이 있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육신통해탈, 무색계선정해탈, 혜해탈이다. 여기서 육신통해탈과 무색계선정해탈은 모두 선정을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런데 혜해탈과 관련하여 초불연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우리는 통찰지를 통한 해탈[慧解脫]을 하였습니다.’라는 것은 우리는 선이 없는(nijjhānaka)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 자들이어서 오직 통찰지로써 해탈 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407번 각주) 라고 했다.

 

수시마가 물어 본 것도 선정수행과 같은 비밀스런 가르침(사권)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닌지 물어 본 것이다. 그런데 수행승들은 예상과는 다르게 지혜수행만으로 아라한과를 성취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혜해탈에 대한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 paññāvimutti]을 이룬 자는 통찰자[nijjhānaka]이며 신체적 정신적 통찰만으로 거룩한 님의 경지에 도달한 자를 말한다.”(357번 각주) 라고 했다. 여기서 통찰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신체적-정신적 통찰이란 위빠사나수행을 말하며 현상을 무상, , 무아로 통찰함을 말한다. 전재성님은 혜해탈자에 대하여 주석을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거룩한 님은 SRP.II 126-127에 따르면, 선정에 드는 멈춤의 행자[samatha yānika]와는 달리 선정이 없는 건조한 통찰자[乾觀者: sukkhavipassati]로서 초월적 능력이나 지혜를 지니고 있지 않지만 번뇌를 부순님이다. Mrp.II.147에서도, 지혜에 의한 해탈자는 선정이 없는 건조한 통찰자로서 번뇌를 부순님을 말한다. Cdb.785에서 비구 보디는 이러한 진술을 거부하면서 이 경에서 네 가지 선정의 유무에 대한 언급을 찾아 볼 수 없고, 쑤시마의 질문이 선정의 문제까지로 확대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석에서 지혜에 의한 해탈자를 선정이 없는 마른 통찰지라고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성전협 상윳따2 357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서는 선정이 없이도 아라한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위빠사나 통찰수행을 하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위빠사나 수행으로 통찰지를 얻은 자에 대하여 ‘sukkhavipassata’라 하여 한자어로는 건관자(乾觀者)라 했다.

 

건관자(sukkhavipassata:乾觀者)에 대하여

 

건관자에 대하여 빅쿠보디의 견해는 부정적이다. 선정 없이 지혜에 의한 해탈만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런데 붓다고사는 지혜에 의한 해탈의 경우에는 거룩한님(아라한)이라도 곧바른 앎이나  선정의 경지를 얻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하여 혜해탈에서 선정이 없다고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지혜에 의한 해탈은 모든 형성된 것을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통찰에 의한 해탈이라고 볼 때, 선정의 상태도 지혜에 의한 해탈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지혜에 의한 해탈에 선정이 없다는 것은 모순되는 것이다.”(367번 각주) 라 했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니

 

수시마의 경을 보면 지혜에 의한 해탈을 말하고 있다. 육신통이나 무색계선정을 닦은 해탈과는 다른 것이다. 이런 혜해탈에 대하여 붓다고사는 선정 없이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빅쿠보디는 부정적 견해를 냈다고 한다. 어떤 부정적 견해일까? 빅쿠보디는 관련 구절에 대하여 “We are liberated by wisdom, friend Susima”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지혜에 의한 해탈(liberated by wisdom)’에 대한 Cdb의 각주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다.

 

 

paññāvimuttā kho maya, āvuso susimā. Spk: He shows: "Friend, we are without jhāna, dry-insighters, liberated simply by wisdom" āvuso maya nijjhānaka sukkhavipassakā paññāmatten’eva vimuttā). Spk-pt: Liberated simply by wisdom: not both-ways-liberated (na ubhatobhāgavimutta), While Spk seems to be saying that those bhikkhus did not have any jhāna, the sutta itself establishes only that they lacked the abhiñña and āruppa; nothing is said about whether or not they had achieved the four jhāna. It is significant that Susima's questions do not extend to the jhāna, and it is even possible (though contrary to the commentaries) that nijjhānaka should be understood, not as the deprivative “without jhāna,” but as an agent noun from nijjhāna, pondering, hence “ponderers.” In any case, the sutta goes no further than to distinguish the paññāvimuttā arahant from other arahants who have the six abhiññas and the formless attainments, and thus it offers nothing radically different from the Nikayas as a whole.

 

The commentaries explain the paññāvimuttā arahant to be of five kinds: those who attain one or another of the four jhānas, and the "dry-insighter" (sukkhavipassaka) who lacks mundane jhana but still has the supramundane jhana inseparable from the noble path (see Sv I1 512,19-28). on the contrast between paññāvimuttā and ubhatobhāgavimutta arahants, see MN I 477-78; Pp 14,190-91.

 

(Cdb 210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에 따르면 혜해탈자(paññāvimuttā)는 선정없이 성취된 것이 아니라 했다. 경에서는 혜해탈을 강조하기 위해 쉽게 성취할 수 없는 색계사선정의 육신통해탈과 무색계선정에 따른 양면해탈을 예로 들었지만, 지혜에 의한 해탈 역시 선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했다.

 

성전협 전재성님은 빅쿠보디의 견해를 소개 했다. 그러나 빅쿠보디번역서를 많이 참조 했다는 초불연 번역서의 각주에는 빅쿠보디의 견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주석서와 청정도론에서 언급되어 있는 네 가지 선의 체험 없이 해탈한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 자를 더한 이것다.”라 했다. 그러나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경에서 육신통과 무색계선정의 특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초선정부터 사선정을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혜해탈자는 네 가지 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the “dry-insighter" (sukkhavipassaka) who lacks mundane jhana but still has the supramundane jhana inseparable from the noble path”라 했다.

 

선정 없이도 혜해탈이 가능할까?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 따르면 선정 없이도 지혜에 의한 해탈로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수시마경에서는 육신통과 무색계선정 없이도 가능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선정 없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경에서 선정에 대한 설명 없이 무상, , 무아를 설명함으로써 마치 선정 없이 지혜로만 해탈이 가능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빅쿠보디가 지적한 것처럼 초기경전에서는 선정을 바탕으로 한 지혜에 의한 해탈이 많이 소개 되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지혜로 해탈한 님의 경을 보면 지혜에 의한 해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존자 우다인이 아난다에게 벗이여, ‘지혜로 해탈한 님, 지혜로 해탈한 님이라고 말하는데, 세존께서는 어떻게 지혜로 해탈한 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까?”(A9.44) 라며 물어 본다. 이에 아난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난다]

 

벗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난 뒤,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듭니다. 그는 지혜로 그것을 분명히 압니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경우 그 특정한 관점에서 그 분을 지혜로 해탈한 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 해탈한 님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9.44,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색계사선 뿐만 아니라 무색계사선, 그리고 상수멸정까지 모두 아홉 종류의 지혜에 의한 해탈이 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혜해탈은 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에 대한 지혜(dhammaṭṭhitiñāa: 法住智)

 

수시마가 아라한과를 성취한 수행승들이 모두 육신통해탈이나 무색계선정해탈을 이룬 자들로 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수행승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했다. 이는 해탈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음을 말한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지혜에 의한 해탈, 즉 혜해탈(paññāvimutti)이다.

 

혜해탈은 어떻게 성취되는 것일까? 어떤 해탈이든지 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수시마의 경에서는 선정을 바탕으로 한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빅쿠보디가 말한 것처럼 생략된 것일 수도 있다. 경에서는 무아상경에서 보는 것처럼 정형화된 무아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있다.

 

수시마는 여전히 수행승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대들이 간략하게 한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라며 그 말의 뜻을 알 수 있게끔 상세하게 설명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수행승들은 벗이여 쑤씨마여, 그대가 그것을 알거나 모르거나 여기 우리는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이룬 것입니다.”(S12.70) 라고 말할 뿐이었다. 이런 말을 듣자 수시마는 답답했던 것 같다. 마침내 부처님을 찾아 뵈었다. 이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Pubbe kho, susima, dhammaṭṭhitiñāa, pacchā nibbāne ñāa”

 

[세존]

쑤씨마여, 사실에 관한 지혜만 앞서면 열반에 관한 지혜는 따라오는 것이다.”

 

(수시마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70,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말씀 하신 사실에 대한 지혜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한역으로 법주지(法住智)라 했다. 법이 머무는 지혜라는 뜻이다. 사실에 대한 지혜는 빠알리어 ‘dhammaṭṭhitiñāa’를 번역한 것이다. 초불연에서는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라고 번역했다. 이에 대하여 조건이 다양한 형태의 법들이 전개 되고 머무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법들의 머묾이라 했다.”라고 각묵스님은 각주했다. 전재성님은 사실에 대한 지혜에 대하여 법의 상태, 즉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삼법인]에 대한 지혜, 즉 연기법에서 사실에 대한 지혜를 말한다.”라고 각주 했다.

 

삼법인에 대한 지혜

 

부처님이 말씀 하신 ‘dhammaṭṭhitiñāa’는 삼법인에 대한 지혜임을 알 수 있다. 모든 현상들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통찰하면 지혜의 의한 해탈이 일어 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런 사실에 대한 지혜가 생겨나면 궁극적으로 열반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그래서 사실에 관한 지혜만 앞서면 열반에 관한 지혜는 따라오는 것이다.”라 한 것이다.

 

부처님은 왜 삼법인을 들어 혜해탈을 말씀 하신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주석(Srp.II.127) 을 인용하여 여기서 이것을 언급한 것은 삼매가 없이도 지혜가 일어난다는 사실, 쑤씨마여, 길과 경지는 삼매의 산물도 아니고, 삼매의 공덕도 아니고, 삼매의 성취도 아니다. 그것은 통찰의 산물이고, 통찰의 공덕이고, 통찰의 성취이다.’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358번 각주) 라고 각주 했다. 주석서와 복주석서에 따르면 순수 위빠사나만을 닦아서 아라한이 되는 경우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사실에 대한 지혜, 즉 삼법인에 대한 지혜를 통찰하면 열반은 따라 오는 것이라 했다. 이는 열반의 지혜는 통찰의 지혜 마지막 단계에서 일어남을 말한다. 사실에 대한 지혜는 법들이 머무는 지혜, 법주지를 말한다. 여기서 법들이 머뭄이라 뜻의 ‘dhammaṭṭhiti’‘the real nature of the Norm’의 의미이다. 이는 법들의 보편적 성질을 말한다. 그것은 바로 무상함과 괴로움과 실체가 없는 것을 말한다. 이런 가르침을 부처님은 수시마에게 설명해 준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시마에게 쑤씨마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로 시작 되는 정형구를 설한다.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이해 했을 때 사실에 대한 지혜가 생겨날 것이다. 이것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 했을 때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라고 말씀 하신다. 이렇게 관찰 했을 때 마침내 해탈 할 수 있다고 했다.

 

해탈 하면 해탈지가 생겨난다. 그래서 부처님은그가 해탈 할 때 해탈되었다.’는 궁극의 앎이 생겨나서,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이런 과정만 본다면 부처님은 사실에 대한 지혜만 알면 누구나 아라한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이 진정으로 말씀 하고자 한 것은 육신통이나 무색계선정을 닦은 자만이 해탈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기 위함이다. 이는 이어지는 가르침에서 알 수 있다.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

 

부처님은 사실에 대한 지혜를 말씀 하시면서 쑤씨마여, 그렇다면 그대는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며 여러 가지 초월적 능력을 경험하는가?”(S12.70) 라며 물어 보신다. 사선정에서 육신통을 반드시 닦아야만 아라한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부처님은 쑤씨마여, 여기 지금 한편으로 그대가 말한 사실과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햇다는 사실은 모순되는 것이다. 쑤씨마여, 어떻게 된것인가?”라며 반문 한다. 수시마는 아라한이 되는 것에 대하여 특별한 비법이나 어떤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사실에 대한 지혜, 즉 현상에 대하여 무상, , 무아라고 통찰하는 삼법인에 대한 지혜만 있으면 누구나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주석과 복주석, 청정도론에 따르면 선정없이 위빠사나만 닦으면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지혜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마른 위빠사나, 혜해탈 등으로 불리운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혜해탈은 선정 없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위빠사나수행도 선정없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지혜에 의한 해탈은 모든 형성된 것을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통찰이라 볼 때, 선정의 상태도 지혜에 의한 해탈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지혜에 의한 해탈에 선정이 없다는 것은 모순되는 것이다.”(357번 각주)라고 설명했다.

 

경에서는 육신통해탈, 양면 해탈, 혜해탈이 언급되어 있다. 어느 해탈이든지 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만 육신통과 무색계 선정은 특별한 것이다. 이는 수시마가 아라한이 되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의 비밀스런 가르침(사권)에 의해서 가능한 것인지 의심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비밀스런 가르침은 없다고 했다. 누구나 현상에 대하여 무상, , 무아로 법을 사실을 통찰하면 사실에 대한 지혜가 생겨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선정 없이 위빠사나수행으로만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주석과 청정도론의 견해이다. 그러나 어떤 통찰이든지 선정의 바탕이 없이는 지혜가 나올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혜해탈은 선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다만 사선정의 육신통이나 무색계 선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님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도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 라 했다.

 

 

수행승들이여, 선정을 닦아라, 방일하지 말라.

그대의 마음을 욕망의 대상을 따라 돌게 하지 말라.

방일하여 뜨거운 쇳덩이를 삼키지 말라.

불타면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울부짓지 말라.(dhp371)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

선정과 지혜가 있으면,

참으로 그에게 열반이 현전된다. (dhp372)

 

 

2016-08-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