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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스님이 아닌 승가공동체에 보시해야 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6. 7. 19. 15:06

 

 

왜 스님이 아닌 승가공동체에 보시해야 하는가

 

 

보시는 어디에 해야 하는가? 불자들은 당연히 스님에게 보시해야 된다고 생각할것이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스님에게 보시하는 것도 좋지만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훨씬 더 수승하다고 했다.

 

스님에게 돈을 주면

 

일반적으로 수행자에게 보시하는 것은 탁발을 의미한다. 입을 것과 의약품 와좌구 등 사대필수품이 있지만 수행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대표적인 보시행위로 보고 있다. 그러나 보시에는 사대필수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승원을 지어 승가에 보시하는 것 역시 보시행위에 해당된다. 그런데 만일 승원을 지어 스님에게 보시한다면 어떻게 될까? 스님 개인 소유가 될 것이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도 맞지 않고 율장에도 없는 것이다.

 

재가자는 탁발하러 나온 수행승에게 보시함으로써 보시공덕을 짓는다. 또 승가를위하여 승원을 지어 보시는 것 역시 큰 공덕을 짓는 행위가 된다. 그런데 보시는 기본적으로 승가에 보시한다는 점이다. 스님에게 보시하는 행위가 승가에 보시하는 행위가 아니라, 승가에 보시하는 행위가 스님에게 보시하는 행위가 됨을 말한다.

 

종교전문기자가 쓴 책에서 청화스님의 이야기를 보았다. 염불선으로 유명했던 청화스님은 생전에 스님에게 절대로 돈 주지 마세요. 주머니에 돈 있으면 공부 안 합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신도들이 준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돈은 불어날 것이다. 별도의 통장을 만들어 관리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돈이 모이게 되면 별도의 토굴이라도 장만하고픈 생각이 들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역시 종교전문기자의 책에서 언급된 월암스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너도 나도, 어른도 아이도 사설사암이요, 토굴이요, 아파트다. 개인주의가 팽배해 대중생활은 이뤄지지 않고 승가공동체의식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라 했다.

 

재가불자들은 존경하는 스님을 보면 보시하고자 한다. 대게 돈이 든 봉투를 전달한다. 그런데 스님에게 돈을 건네는 행위가 사실 여법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탁발의 전통이 사라진 한국불교에서 돈봉투 건네는 것이 탁발음식을 공양하는 것을 대신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청화스님 말대로라면 스님을 공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혀 상반된 번역을 보고

 

앙굿따라니까야에 목재상의 경(Dārukammikasutta, A6.59)’이 있다. 부처님이 냐띠까 마을의 긴자까바싸타에 계실때였다. 어느 날 목재상을 하는 장자가 부처님을 찾아 왔다. 부처님은 장자에게 장자여, 그대는 가족에게 보시합니까?”라며 물었다. 이 번역과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장자여, 그대의 가문에서는 보시를 하는가?”라 되어 있어서 전혀 상반된 번역이 되었다.

 

빠알리원문을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api nu te, gahapati, kule dāna dīyatī” ti?”” 라 되어 있다. 여기서 kule‘a family; clan; caste’의 뜻이다. Dīyatīdadāti의 형태로서 ‘gives; offers; allows; grants; hands over’라 설명되어 있다. 빠알리어 dadāti주는 것의 뜻임을 알 수 있다. “api nu te”에서,  api‘and; even; and then’이고, nu는 의문을 나타내는 말이다. Te‘These’의 뜻으로 ‘so () pl’로 설명되어 있다. Te가 복수의 의미라면 “api nu te”그대들은 어떤가?”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te‘tva(, )’의 의미도 있으므로 “api nu te”그대는 어떤가?”의 뜻도 있다. 그래서 ““api nu te, gahapati, kule dāna dīyatī” ti?””라는 말은 그대, 장자여, 집에 줄 것을 주는가?”라는 뜻이 된다.

 

전재성님은 장자여, 그대는 가족에게 보시합니까?”라 했다. 장자와 그대가 일치 하고 있다. 그래서 장자에게 가족에게 줄 것, 즉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먹을 것 등을 주는가라며 물어 보는 것이다. 그런데 초불연 대림스님은 장자여, 그대의 가문에서는 보시를 하는가?”라 하여 주어가 완전히 다르다. 장자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나무를 팔거나 숯을 만들어 파는데 가장 먼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장자에게 먼저 가족에게 줄 것을 주는지 물어 보는지가 맞을 것이다.

  

가족에게도 보시하고 수행자에게도 보시하고

 

부처님은 목재상에게 먼저 자신의 가족에게 줄 것을 주는지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이에 목재상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Dīyati me, bhante, kule dāna. Tañca kho ye te bhikkhū āraññikā piṇḍapātikā pasukūlikā arahanto vā arahattamagga vā samāpannā, tathārūpesu me, bhante, bhikkhūsu dāna dīyatī

 

[목재상]

세존이시여, 저는 가족에게 보시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적한 숲에 지내거나, 탁발하거나, 누더기 옷을 입었거나, 거룩한 님이거나 거룩한 길을 성취한 수행승들이 있다면, 그러한 수행승들에게도 저는 보시합니다.”

 

(Dārukammikasutta-목재상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59, 전재성님역)

 

 

 

 

 

경의 제목이 Dārukammikasutta이다. 여기서 Dāruka‘made of wood’의 뜻이다. 이에 대하여 NDB에서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dealer in firewood”라 설명되어 있다. 가정에서 연료로 사용하기 위한 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을 말한다.

 

목재상은 가장 먼저 가족을 부양한다고 했다. 그 다음에 숲속에 사는 수행자들에게도 먹을 것 등을 보시한다고 했다. 가족도 먹여 살리고 수행자에게도 보시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심 있는 재가자의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세존이시여, 저희 가문에서는 보시를 합니다. 세존이시여, 숲에 머물고 탁발음식만 수용하고 분소의를 입는 아라한 비구들이나 혹은 아라한도를 얻은 그러한 자들에게 보시를 합니다.”라고 번역해 놓았다. 대림스님은 가족에게 보시한다는 말 대신 가문에서 보시한다라고 번역했다. 이는 이어지는 문구에서 문맥상 어긋난다.

 

그러나 빅쿠보디는 “My family gives gifts, Bhante. And those gifts are given to bhikkhus who are arahants or on the path to arahantship, those who are forest dwellers, almsfood collectors, and wearers of rag-robes.” (NDB, 빅쿠보디역) 라 함으로써 가족에서도 봉사할 뿐만 아니라 숲속의 현자에게도 보시하고 있다고 번역했다. 이는 이어지는 문구 ‘And those’로도 알 수 있다.

 

“Tañca kho ye”와 관련하여 전재성님은 저는 가족에게 보시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적한 숲에 지내거나..”라 해서 뿐만 아니라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빅쿠보디 역시 “My family gives gifts, Bhante. And those gifts..”라 하여 “And those”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대림스님은 연결어 없이 저희 가문에서는 보시를 합니다. 세존이시여, 숲에 머물고..”라 했다.

 

세 번역문을 비교해 보면

 

문제의 번역문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Dīyati me, bhante, kule dāna. Tañca kho ye te bhikkhū āraññikā

 

1) 세존이시여, 저는 가족에게 보시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적한 숲에 지내거나 탁발하거나, 누더기 옷을 입었거나, 거룩한 님이거나 거룩한 길을 성취한 수행승들이 있다면, (전재성님역)

 

2) 세존이시여, 저희 가문에서는 보시를 합니다. 세존이시여, 숲에 머물고 탁발음식만 수용하고 분소의를 입는 아라한 비구들이나 (대림스님역)

 

3) My family gives gifts, Bhante. And those gifts are given to bhikkhus who are arahants or on the path to arahantship, those who are forest dwellers (빅쿠보디역)

 

 

부처님은 땔감나무를 팔아 생계를 영위하는 장자의 방문을 받았다. 부처님은 장자에게 가장 먼저 생계를 잘 영위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럼에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 대뜸 보시를 열심히 하고 있는지에 묻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만나자마자 돈 얘기부터 하는 것과 같다. 이에 장자는 저는 가족에게 보십합니다.”라고 말하며, 이어서 숲속의 수행자들에게도 보시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세속인은 깨달은 자를 알아 보기 힘들다

 

한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가장이다. 경에서는 장자(gahapati)’로 표현되어 있다. 장자의 가장 큰 의무는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지 해서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리고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 이는 망갈라경(축복경, Sn2.4)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고(Mātāpitū upaṭṭhāna puttadārassa sagaho)” (stn262) 라는 표현으로도 알 수 있다.  여기에다 보시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래서 “나누어 주고 정의롭게 살고(ānañca dhammacariyā ca)” (stn263) 라 했다. 목재상 장자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안으로 가정을 유지하고 밖으로는 보시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부처님은 장자의 말을 듣고 곧바로 칭찬하지 않았다. 신중하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장자여, 그대는 세속인으로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고 아이들이 북적대는 집에서 살고 까씨 국에서 나는 전단향을 쓰고 화환과 향수와 크림을 사용하고 금은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들이 거룩한 님인가 또는 거룩한 길을 성취한 님인가를 알기 어렵습니다.”

 

(Dārukammikasutta-목재상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59, 전재성님역)

 

 

장자의 삶은 숲속의 수행자의 삶과 대조 되는 삶이다. 수행자들은 한적한 숲에 지내거나, 탁발하거나, 누더기 옷을 입는 것에 비해, 장자의 삶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며 아이들과 함께 북적 되는 삶을 살고, 사치를 하며 재산을 소유하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세속인이 숲속에 사는 사람이 아라한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장자가 생각하기를 숲속에 사는 수행자는 모두 아라한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땔감하러 숲에 들어 갔을 때 먹을 것 등을 보시한 것이다. 숲에 산다고 하여 다 아라한일 수 있을까? 절에 산다고 하여 다 깨달은 자일 수 없듯이, 숲속에 산다고 하여 번뇌 다한 아라한일 수 없다는 것이다.

 

왜 스님이 아닌 승가공동체에 보시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장자에서 숲속에 사는 사람일지라도 아라한이 아닐 수 있다고 했다. 한적한 숲속에 살아도 교만하거나 허영에 가득 찬 사람을 수 있음을 말한다. 반면 마을 주변에 사는 수행자라 하여도 번뇌가 많은 수행자라 볼 수 없다고 했다. 설령 마을 가까이 사는 수행자일지라도 교만과 허영을 여읜 아라한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수행자라 하여 모두 성자로 볼 수 없다. 탁발하러 다니는 수행승이 아라한일수도 아닐수도 있으며, 초대에 응한 수행승이 아라한일수도 아닐수도 있으며, 기운 누더기 옷을 입고 다니는 수행승이 아라한일수도 아닐수도 있으며, 장자가 주는 옷을 입고 다니는 수행승이 아라한일수도 아닐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와 같은 세속인의 눈으로는 아라한인지 아닌지 알아 볼 수 없다고 했다. 마치 깨달은 자가 깨달은 자를 알아 보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장자에게 이렇게 말씀 하였을까? 그것은 보시에 대한 개념때문이다. 숲속에 사는 수행자라 하여 거룩한 자로 간주하여 보시한다면 잘못일 수 있음을 말한다. 스님이라 하여 모두 거룩하게 여겨 부처님처럼 모시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Igha tva, gahapati, saghe dāna [dānāni (ka.)] dehi. Saghe te dāna dadato citta pasīdissati. So tva pasannacitto kāyassa bhedā para maraā sugati sagga loka upapajjissasī

 

[세존]

장자여, 그대는 차라리 참모임에 보시를 하십시오. 그대가 참모임에 보시를 하면 마음이 청정한 믿음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대는 청정한 믿음의 마음으로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입니다.”

 

(Dārukammikasutta-목재상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5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승가에 보시하라(saghe dāna dehi)’ 고 했다. 수행승에게 보시하지 말고 승가에 보시하라는 것이다. 그 수행승이 청정한지 청정한지 판단이 서지 않으면 차라리 승가공동체에 보시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승가에 보시하라는 부처님 가르침은 맛지마니까야 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M142)’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양어머니였던 고따미비구니가 부처님에게 손수 지은 가사를 보시하고자 했다. 이에 부처님은 고따미여, 승단에 이것을 보시하십시오. 그대가 승단에 보시할 때에 곧 나와 승단을 공양하는 것이 됩니다.”(M142) 라 했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 주석에 따르면 승단에 보시하면 결국 수행승들에게 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중으로 보시 공덕이 된다고 했다. 또 승단에 보시해야만 승단이 유지 되어 가르침이 오래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라 했다.

 

승가화합이란?

 

보시는 승가에 해야 한다. 아무리 존경하는 스님이 있어도, 아무리 도를 많이 닦은 스님이 있어도 재가자의 입장에서 그 스님이 얼마나 청정한지 얼마나 도가 높은지 알 수 없다. 그럴 경우 차라리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이에 대하여 허정스님은 자신의 운영하는 카페에서 이렇게 자신의 판단에 의지해서 보시하다가 그 비구들이 계율을 잘 지키지 않고 촐랑대고 산만해서 비난받게 되는 경우에는 보시한 것을 후회하고 스님들을 원망하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라 했다. 승가에 보시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승가에 보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강조했다.

 

 

더불어 승가에 보시하면 마음에 청정한 믿음이 생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 조계종이 부익부빈익빈이 된 것은 승가의 재원을 몇몇 스님이나 문중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재가자들이 승가에 보시하지 않고 개인에게 보시한 이유가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승가에 보시한다면 그 시주물은 공공물이 되어서 누구나 사용할 수 있지만 개인에게 보시를 하면 사유재산이 되어서 보시를 받지 못하는 스님들과 화합이 깨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허정스님, 스님들에게 보시하지 말고승가 보시 하시오, 천장사카페 2016-07-18)

 

 

허정스님은 한국불교에 만연된 배금주의를 개탄하고 있다. 출가자는 금은을 가지지 않아야 함에도 스님들이 개인통장을 가지고 있다면 부처님 가르침과 크게 멀어진 것이다. 통장에 돈이 쌓이면 토굴하나라도 가지고 싶어 할 것이다. 그래서 종단의 큰스님이라 불리는 분들치고 토굴이라 불리는 개인 사찰을 가지고 있지 않은 분이 없을 정도로 우리종단은 사유화 경쟁이 치열하다.”라고 했다.

 

어른 스님이건 젊은 스님이건 토굴 가지는 것이 소원인 세상이 되어 버렸을 때 스님들 세계는 많이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못한 자로 갈리게 될 것이다. 이는 승가화합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승가화합은 여법한 것이다. 담마()와 위나야()를 스승으로 하여 승가가 여법하게 유지될 때 승가화합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승가화합을 이루려면 비법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승가에서 자자와 포살을 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갈마를 하는 이유일 것이다.

 

가르침이 오래 전승되려면

 

불자들은 절에 가면 보시한다. 보시공덕은 지계와 함께 권장되는 덕목이다. 그런데 재가자들 대부분은 보시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부처님처럼 모시는 스님에게 보시를 하면 최상의 보시로 보고 큰 보시공덕을 받을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맞지 않다.

 

임종에 이른 노보살이 전 재산을 자신이 평생 모시는 스님에게 맡겼을 때 정당한 것일까? 물론 스님이 절을 지어 포교를 한다면 절을 승원에 보시한 것 못지 않게 큰 공덕을 쌓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재가자는 스님이 얼마나 청정한지 어느 정도 과위에 있는지 재자자의 눈으로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목재상에게 그러므로 당신은 그들이 거룩한 님인가 또는 거룩한 길을 성취한 님인가를 알기 어렵습니다.”(A6.59) 라 했다.

 

재가자는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이는 부처님도 장려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목재상에게 그대는 차라리 참모임에 보시를 하십시오.”라 했고, 고따미에게는 고따미여, 승단에 이것을 보시하십시오. 그대가 승단에 보시할 때에 곧 나와 승단을 공양하는 것이 됩니다.”(M142) 라 했다. 이렇게 본다면 보시는 당연히 승가에 해야 한다. 그래야 승가가 유지되고, 승가가 유지 되어야 가르침이 오래 전승된다.

 

 

2016-07-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