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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할 수 없는 것 세 가지, 물리지 않는 것 두 가지

담마다사 이병욱 2016. 7. 23. 19:41

 

만족할 수 없는 것 세 가지, 물리지 않는 것 두 가지

 

 

 

한번뿐인 인생 즐기며 살자?

 

요즘은 과학의 시대이다. 그러다 보니 종교인들의 말 보다 과학자의 말을 더 신뢰하는 듯 하다. 불교에도 과학을 거들어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리, 생물, 지구과학 등 과학적 사실을 들어 불교를 설명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대게 유물론적임을 알 수 있다. 과학이라는 것이 물질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유물론으로 빠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유물론은 필연적으로 단멸론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죽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그러다 보니 유물론을 말하는 사람들은 업()도 없고 내세도 없다고 한다. 부처님당시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이 유명하다.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유물론은 초기경전에서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헌공도 없고,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S24.5) 로 정형화 되어 있다. 오로지 현세만 있을 뿐 내세는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은 단멸론적 허무주의적 견해를 가지면 살아서 어떤 공덕도 지을 필요도 없다. 도덕적 삶을 살 필요도 없고 오계를 지킬 필요도 없다. 오로지 한번 뿐인 인생을 즐기며 살자고 생각한다.

 

흔히 한번뿐인 인생 후회없이 살자고 한다. 늙어지면 못 놀기 때문에 젊었을 때 놀자고 한다. 또 유행가 가사를 보면 마시고 또 마시어 취하고 또 취해서 이 밤이 세기 전에 춤을 춥시다.”라 하여 지금 여기서 마음껏 즐기자고 한다. 그렇다면 늙어졌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더구나 늙어 병든 몸이 되었을 때는 즐길 수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물질에 기반한 유물론은 허무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과학도 물질에 기반하고 있으므로 과학을 불교에 접목하는 것도 역시 허무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 불교닷컴에서 환망공상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는 포항공대 강병균교수의 글도 이에 해당된다.

 

아무리 해도 만족할 수 없는 것 세 가지

 

유물론적 허무주의 견해를 가지면 즐기며 살자고 말한다. 즐김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행복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세속적 행복이다. 흔히 말하는 안락, 쾌락, 재미, 편안 등을 말한다. 이렇게 즐거움과 안락과 재미만 추구하는 삶은 만족스러운 것일까? 앙굿따라니까야에 만족은 없음의 경이 있다. 경에서 부처님은 아무리 해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했다.

 

 

“Tiṇṇa, bhikkhave, paisevanāya natthi titti. Katamesa tiṇṇa? Soppassa, bhikkhave, paisevanāya natthi titti. Surāmerayapānassa, bhikkhave, paisevanāya natthi titti. Methunadhammasamāpattiyā, bhikkhave, paisevanāya natthi titti. Imesa, bhikkhave, tiṇṇa paisevanāya natthi tittī” ti. Chaṭṭha.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원리는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잠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가 있는 것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성적교섭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Atittisutta- 만족은 없음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104,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잠, 취기가 있는 것, 성적교섭 이 세 가지에 대하여 만족이 없는 것이라 했다. 갈증만 일으킬 뿐 결코 만족에 이를 수 없다는 뜻이다.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은 불만족을 말하고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허무적인 것이 된다. 사람들이 즐겁다고 말하는 것, 사람들이 재미를 추구하는 것들이 행복을 줄지 모르지만 그때뿐이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일시적 행복한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이 번역과 관련하여 초불연 번역을 보았다. 그런데 사용 용어도 다를 뿐 아니라 뜻도 달랐다. 서로 다른 번역처럼 보이는 내용은 정반대로 되어 있다. 초불연 번역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에 탐닉하는 것은 물림이 없다. 무엇이 셋인가? 비구들이여, 잠에 탐닉하는 것은 물림이 없다. 비구들이여, 곡주와 과일주를 마심에 탐닉하는 것은 물림이 없다. 비구들이여, 성행위에 탐닉하는 것은 물림이 없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에 탐닉하는 것은 물림이 없다.

 

(Atittisutta -물림 없음 경, 앙굿따라니까야 A3.104, 대림스님역)

 

 

대림스님은 물림 없다는 표현을 했다. 그래서 잠에 탐닉하는 것, 술에 탐닉하는 것, 성행위에 탐닉하는 것이 물림이 없다고 했다. 좀처럼 쓰이지 않는 말 물림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국어 사전을 찾아 보면 물리다에 대하여 여러 가지 뜻이 있다. 말은 같아도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있는 것이다. ‘이빨로 물리다의 뜻이 있고, ‘샀던 물건을 도로 주고 물건을 되찾다는 의미도 있고, ‘마땅히 갚아야 할 것을 치룬다는 의미도 있다. 또 윗니와 아래니 사이에 끼운 상태로 떨어지거나 빠져 나가지 않게 누르게 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리고 번역문에 사용된 의미로서 다시 대하기 싫을 만큼 몹시 싫증이 나다.”라는 뜻도 있다.

 

초불연 대림스님 번역을 보면 세 가지가 물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 중에 성행위에 탐닉하는 것은 물림이 없다.”라고 번역했다. 물림이 없다는 말은 결국 싫증 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성행위에 탐닉하는 것은 싫증나지 않는다.”라는 말이 된다. 과연 이런 번역이 맞는 것일까? 전재성님은 성적교섭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라 했다.

 

두 번역을 비교하면 정반대로 되어 있다. 대림스님 번역을 보면, 성행위가 물림이 없기 때문에 싫증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결국 성행위는 좋다라는 뜻이 된다. 반면 전재성님의 번역을 보면 성적교섭은 만족이 없기 때문에 불만족스런 것이 된다.

 

한편에서는 성행위가 좋은 것, 즐거운 것, 만족스로운 것이라 하여 수카(sukha)’의 의미로 번역되었다. 또 한편에서는 성적교섭은 즐기더라도 만족이 없기 때문에 불만족 스러운 것이라 하여 두카(dukkha)’의 의미로 번역되었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세 번역을 비교해 보니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했을까? NDB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Bhikkhus, there are three things that give no satiation by indulging in them. What three? (1) There is no satiation by indulging in sleep. (2) There is no satiation by indulging in liquor and wine. (3) There is no satiation by indulging in sexual intercourse. These are the three things that give no satiation by indulging in them.”

 

(No Satiation, NDB 빅쿠보디역)

 

 

빅쿠보디는 빠알리어 ‘natthi titti’에 대하여 no satiation’이라 했다. 만족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잠자는 것, 취기가 있는 것, 성적교섭 하는 것에 탐닉해도 만족이 있을 수 없다고 번역했다. 이런 번역은 전재성님 번역과 일치한다.  물림이 없다는 초불연 번역과는 다르다.

 

세 번역에 대하여 비교표를 만들어 보았다. 성적교섭과 관련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Methunadhammasamāpattiyā, bhikkhave, paisevanāya natthi titti.”

1) “수행승들이여, 성적교섭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전재성님역)

2) “비구들이여, 성행위에 탐닉하는 것은 물림이 없다.” (대림스님역)

3) “There is no satiation by indulging in sexual intercourse.” (빅쿠보디역)

 

 

빠알리어 ‘Methunadhammasamāpattiyā’‘Methunadhamma+samāpattiyā형태이다. ‘Methunadhamma’‘sexual intercourse’를 뜻하고, ‘samāpatti’‘attainment; an enjoying stage of meditation’의 뜻이다. 따라서 ‘Methunadhammasamāpattiyā성적접촉을 즐기는  이라는 뜻이 된다.

 

‘paisevanāya’에서 ‘paisevana’의 형태로 ‘practising; using; following’의 뜻이다. 가장 중요한 말인 ‘titti’‘satisfaction; the brim’의 뜻으로 만족하다, 가득차다의 뜻이다. 따라서 ‘natthi titti’만족이 없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빠알리 구문 Methunadhammasamāpattiyā, bhikkhave, paisevanāya natthi titti.”빅쿠들이여, 성적교섭을 즐겨도 만족은 없다라는 뜻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과 빅쿠보디는 ‘natthi titti’에 대하여 만족은 없다는 뜻으로 번역하여 아무리 성적행위를 즐겨도 결코 만족에 이를 수 없다는 뜻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대림스님은 정반대로 물림이 없다로 하여 싫증 나지 않는다더 나아가 성행위를 좋아한다는 뜻으로 번역했다.

 

만족하지 않는다물림이 없다는 뜻은 전혀 다른 말이고 서로 반대말이다.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만족을 뜻하고 결국 괴로움(dukkha)’이 된다. 반면 물림이 없다는 것은 싫어하지 않는다가 되어 좋아한다는 뜻이 되는데 결국 만족의 뜻이 되어 즐거움(sukha)’이 된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전혀 다른 말이고 반대의 말이다. 그럼에도 한번역에서는 ‘natthi titti’에 대하여 괴로운 것이라는 뜻으로 번역했고, 또 한번역에서는 즐거운 것이라는 뜻으로 번역하여 정반대가 되었다.

 

누가 잠을 잘 자는가

 

잠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라 했다. 이에 대하여 탐욕과 성냄으로 풀어 볼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탐욕과 성냄으로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잠을 잘 잘 수 없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A3.35)라 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욕망과 분노로 가득한 사람에게는 잠을 잘 자고 싶어도 잘 잘 수가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장자나 장자의 아들에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탐욕으로 인한 고뇌가 생겨나면,  그 탐욕으로 인한 고뇌로 불타면서  괴롭게 잠을 자지 않겠습니까? (A3.35) 라고 묻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잠을 잘 수 있을까? 이는 “감각적 욕망에 오염되지 않고 청량하고 집착이 없고 완전한 적멸을 성취한 거룩한 님은 언제나 잠 잘자네. 모든 집착을 부수고 마음의 고통을 극복하고 마음의 적멸을 성취한 님은 고요히 잠 잘자네. (A3.35) 라는 게송에서 알 수 있다.

 

욕망과 분노가 소멸된 자는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라 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초불연의 잠에 탐닉하는 것은 물림이 없다.”라는 번역은 잘못된 것이다. 빅쿠보디는  “There is no satiation by indulging in sleep”라 했다. 이것이 바른 번역이다. 전재성님도 잠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라 번역했다.

 

취기가 있는 것을 즐겼을 때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가 있는 것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라 했다. 이것 역시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탐욕과 성냄을 적용시키면 알 수 있다. 술을 마시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욕망이 개입되어 있다. 그래서 욕망으로 마신다. 또 술을 마시는 행위는 분노가 개입되어 있다. 그래서 분노로 술을 마신다.

 

욕망과 분노로 술을 마셨을 때 취기가 일어나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은 상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술에서 깨어나면 몹시 불쾌를 느낀다. 마실 때와 깨어날 때의 느낌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취기가 있는 것을 취했을 때 아무리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초불연에서는 곡주와 과일주를 마심에 탐닉하는 것은 물림이 없다.”라 했다.마치 술에 탐닉하는 것은 싫증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다. 물림이라는 말은 바른 용어선택이 아니다. 빅쿠보디는 “There is no satiation by indulging in liquor and wine.”라 하여 바르게 번역했다. 전재성님 역시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가 있는 것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라 하여 바르게 번역했다.

 

만족 없는 성적교섭

 

성적교섭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라 했다. 이것 역시 인간의 욕망과 분노로 풀이 할 수 있다. 성적교섭은 기본적으로 욕망이 개입되어 있다. 그런데 성적교섭은 남자와 여자 둘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만일 상대방이 동의 해 주지 않는다면 성적교섭은 성립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분노가 일어날 수 있다.

 

뉴스를 보면 우발적 살인 사건 상당수가 순간적 분노를 참지 못하여 발생하고 있다. 성적교섭과 관련된 살인사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설령 성적교섭이 상대방과 합의 하여 만족을 하더라도 그 느낌은 일시적인 것이다행복한 느낌이 오래 지속되지 않아 불만족스런 것이다.

 

성적교섭은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하는 욕망과 자신의 뜻대로 안되었을 때 분노로 표출된다. 또 성적교섭에 따른 느낌이 오래 지속 되지 않아 불만이다. 이런 이유로 성적교섭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성행위에 탐닉하는 것은 물림이 없다.”라 하여 마치 성행위는 즐거운 것이고 좋은 것이라는 뜻으로 번역했다. 빅쿠보디는 “There is no satiation by indulging in sexual intercourse.”라 하여 제대로 번역했다. 전재성님도 성적교섭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라 하여 바르게 번역했다.

 

물리지 않는 것이 있는데

 

물림이 없다는 말은 싫어 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고 결국 좋아한다는 말과 같아서 만족을 나타낸다. 탐욕과 성냄으로 살아 가는 중생들에게는 즐거움을 추구하지만 나중에 보면 불만으로 끝이 난다. 따라서 중생들은 늘 불만족으로 살아 간다. 잠을 잘 자고 싶어도 잘 잘 수 없는 것은 욕망과 분노 때문에 잠못 이룬다. 술을 마셔도 뒤끝이 좋지 않다. 마실 때는 좋을지 모르지만 몸이 따라 주지 못해서 불쾌함과 괴로움이 따른다. 더구나 술은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면 마실수도 없다. 이는 성적교섭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물림이 없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밥먹는 것도박이다.

 

식욕은 성욕과 함께 인간의 근본적 욕구이다. 사람들은 성욕을 참을 수 있어도 굶주림은 참을 수 없다. 먹지 않으면 신체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는 날 까지 먹어야 한다. 이것이 물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음식절제를 강조했다. 먹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에 기계에 기름칠 하듯 상처난 곳에 연고를 바르듯 음식절제를 강조했다. 이렇게 본다면 먹는 것은 물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식사에 탐닉하는 것은 물림이 없다.”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물리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도박이다. 도박에 중독되면 패가 망신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해도 해도 물리지 않는 것이 도박의 매력 때문이다. 도박은 술을 마시는 것과 성행위를 하는 것과 다르다. 마치 밥을 먹는 것처럼 물리지 않는다. 죽는 순간까지 먹어야 살듯이 자금이 바닥날 때까지 도박을 하는 것도 물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주와 섹스는 한계가 있다.

 

술을 마시면 연이어 마실 수 없고 나이 들거나 병이 들면 감당할 수 없어서 육체적 한계가 있다. 성적교섭은 파트너가 있어야 하고 연이어 할 수 없고 나이 들거나 병이 들면 역시 육체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도박은 육체적 한계를 초월한다. 카드나 화투를 밤새도록 해도 지치지 않는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이런 도박에 주식도 해당된다.

 

국가에서 공인된 도박이라 볼 수 있는 주식에 온 국민이 참여 하고 있다. 홈트레이딩시스템을 깔아 놓고 실시간 게임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게임은 지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청소년들이 밤새도록 온라인 게임을 하는 것 같다. 일종의 어른들의 게임이라 볼 수 있는 실시간 단타매매는 사실상 도박이다. 한번 중독되면 헤어나기 어렵다. 자금이 바닥 나기 전에는 하루종일 모니터만 쳐다 보고 있게 된다. 도박은 잠자는 것, 술 마시는 것, 성적교섭과 달리 육체적 한계를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식욕과 도박은 물리지 않는 것이다.

 

물림이 없다라고 했을 때 잠이나 술, 성적교섭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잠이나 술, 성욕은 육체적으로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일시적 행복감일 뿐이다. 그래서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식욕과 도박은 육체적 한계를 초월한다. 죽을 때까지 돈이 바닥날 때까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림이 없는 것이다.

 

지나치게 번역서를 믿으면 안된다

 

초불연에서는 물림이라는 말을 번역에 잘못 적용했다. 빠알리원문에서 분명히 titti‘satisfaction’의 뜻으로 만족을 뜻하는 것임에도 이를 물림의 뜻으로 번역하여 ‘natthi titti’에 대하여 물림이 없다는 뜻으로 번역했다. 이는 명백한 오역이다.

 

초기경전을 읽을 때 한번역서만 읽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두 번역서를 비교해 가며 읽는 것이 좋다. 더 좋은 것은 영역까지 함께 읽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빠알리원문과 함께 읽는 것이다. 지나치게 번역서를 믿으면 안된다

 

 

2016-07-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