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탈색(脫色)과정이 필요해, 위라가니로다(viraga-nirodha)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6. 7. 17. 18:09

 

탈색(脫色)과정이 필요해, 위라가니로다(viraga-nirodha)에 대하여

 

 

 

인연(因緣)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2권은 인연(nidāna)을 주제로 한 것이다. 인연을 주제로 하여 모두 10상윳따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인연의 모음(Nidānasayutta, S12)’을 보면 가장 먼저 12연기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인연(因緣)’이라 하는 것은 빠알리어 니다나(nidāna)’를 번역한 것이다. 영어로 ‘source; cause; origin’의 뜻으로 한자어로 , 因緣, 因由로 설명되어 있다. 초불연에서도 인연으로 옮겼다.

 

인연이라는 말은 연기라는 말의 뜻과 같다. 그래서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인연상윳따해제에서 니다나에 대하여그것은 토대나 기초의 의미도 있지만 원인(hetu), 발생(samudaya), 조건(paccaya)과 일치하는 단이다.(DN.II.57)”라 했다.

 

디가니까야 2 57페이지를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인연의 큰 경(D15)’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태어남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존재이다.”(D15, II.57) 라 되어 있다. 이것이 연연 또는 연기에 대한 정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인연과는 다르다고 했다. 대승에서 인연은 근본원인으로서 인()과 보조원인으로서 연()을 구분하지만, 초기불교에서는 평등한 관계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대승에서 인연법은 인과법에 가깝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인연법은 인연과법이라 볼 수 있다. (hetu)과 연(paccaya)이 평등한 관계를 말한다. 여기서 연은 조건(paccaya)을 말한다. 이런 조건을 강조하여 초기불교에서 인연법에 대하여 조건법이라고도 한다.

 

초기불교에서 연기법은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다. 인연과(因緣果)인 것이다. 가장 핵심은 조건이다. 연기법은 조건발생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조건이 중요할까? 그것은 먼저 부처님이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yo paiccasamuppāda passati. So dhamma passati. Yo dhamma passati. So paiccasamuppāda passatī)”(M28)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연기와 진리는 동의어라 볼 수 있다. 진리를 보았을 때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연기의 법칙을 알았을 때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조건 발생한 것이라면, 조건이 소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새겨라 했을까?

 

인연상윳따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연기의 경(Paiccasamuppādasutta, S12.1)’이다. 부처님이 수행승들을 불러 놓고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대게 제자들이 질문했을 때 답하는 형식으로 경이 이루어져 있는데 이런 케이스는 특별하다.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에서도 부처님이 제자들을 불러 모아 경을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한 가르침임을 의미한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에게 연기에 관해 설하겠다. 그것을 잘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paiccasamuppāda vo, bhikkhave, desessāmi; ta suātha, sādhuka manasi karotha; bhāsissāmī)”(S12.1) 라 했다. 여기서 연기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빠알리어로 빠띳짜사뭅빠다(paiccasamuppāda)’라 한다. ‘조건하여(paicca) 함께 발생한다(samuppāda)’는 뜻이다. 그래서 조건법이라 한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설하면서 잘 새기도록 해라라고 당부했다. 흘려 듣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연기법은 외울 필요가 있다. 외워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함을 말한다. 초불연에서도 듣고 마음에 새겨라.”라고 번역했다. 빅쿠보디는 Listen to that and attend closely”라 했다. 여기서 새기다라는 말은 빠알리어 manasi’이다. Mānasa의 형태로서 ‘mind; intention. (adj.), (in cpds.) having the intention of’의 뜻이 있기 때문에 의도적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새겨라라고 번역했을 것이다.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부처님은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로 시작되는 조건발생적 연기를 설한다. 이어서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로 시작되는 조건소멸적 연기를 설한다. 그래서 연기법을 보면 반드시 조건발생과 조건소멸로 설명한다.

 

조건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현재 괴로움과 윤회가 있는 것은 조건발생한 것이고, 조건이 소멸하면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특히 연기법에 대하여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으로 설명된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주를 보면 매우 길게 설명되어 있다. 윤회와 관련하여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2연기의 순관은 윤회의 발생구조(vaṭṭa)를 드러내는 것이고 12연기의 역관은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구조(vivaṭṭa) 혹은 윤회의 소멸구조를 설하신 것이다. 이처럼 12연기는 윤회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12연기의 핵심이다.”(초불연상윳따2, 35번 각주, 각묵스님)

 

 

 

 

 

 

 

 

Dependent Origination

 

 

각묵스님에 따르면 12연기에 대하여 윤회의 발생과 윤회의 소멸구조로 설명했다. 그래서 대승의 화엄에서 말하는 중중무진연기 12연기를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대승의 법계연기는 상호의존적 연기로 설명되지만, 초기불교에서 연기는 조건발생적 또는 조건소멸적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조건이 붙어야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어서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니로다(nirodha)에 대하여

 

12연기는 발생과 소멸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사성제에서 집성제와 멸성제와도 같은 개념이다. 조건 발생한 것은 조건이 다하면 소멸하게 되어 있다. 이때 소멸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니로다(nirodha)’를 번역한 것이다. 사성제에서 멸성제에 대하여 dukkhanirodho ariyasacca라 하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멸성제)’라 했다. 여기서도 니로다가 소멸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멸을 뜻하는 니로다는 12연기 역관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는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라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조건이 소멸함에 따라 결국 괴로움도 소멸된다. 그래서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S12.1) 라 했다. 이것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정형구이다.

 

소멸을 뜻하는 니로다는 12연기와 사성제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술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소멸을 뜻하는 니로다는 항상 이욕을 뜻하는 위라가(virago)와 함께 쓰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virāganirodhā가 되는데, 이는  ‘asesavirāganirodhā라 하여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한다.’(전재성님역) 거나 남김없이 빛바래 소멸한다.’라는 정형구로 사용된다.

 

위라가(viraga)에 대하여

 

빠알리정형구 ‘virāganirodhā에서 nirodhā에 대하여 두 번역서에서는 공통적으로 소멸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욕을 뜻하는 virāga에 대해서는 번역이 다르다. 전재성님은 사라지다의 뜻으로 번역했고, 각묵스님은 탐욕이 빛바래다또는 빛바래다의 뜻으로 번역했다. 빅쿠보디는 ‘fading away’뜻으로 번역했다. 위라가의 번역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했다.

 

 

“Asesavirāganirodhā: 여기서 ‘virāga’를 한역에서처럼, 이탐(離貪)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십이연기고리의 중간에 갈애가 존재하므로 무명에 앞서는 선제조건으로서 이탐을 상정할 필요가 없으므로, 가이거가 Ggs.II.3에서 번역했듯이 이염(離染)의 의미로서 사라짐(verdchwinden)을 택한다. SN.II.18에서처럼 ‘virāga’는 원리(遠離)의 의미로도 널리 쓰인다.”(성전협상윳따2 3번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은 위라가에 대하여 사라지다으로 번역했다. 이는 각묵스님이 탐욕이 빛바래다라는 뜻의 주석적 번역과 대조된다. 특히 12연기에서 갈애라는 고리가 있기 때문에 이탐, 이욕 등의 번역이 맞지 않음을 말한다. 이렇게 한번 정해 놓은 사라지다라는 번역어는 빠알리니까야 도처에서 일관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각묵스님의 탐욕이 빛바래다또는 빛바래다라는 말은 선택적으로 사용된다. 이는 각묵스님이 각주에서 본문에서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로 옮긴 것은 asesa-virāga-nirodhā를 직역한 것이다. 여기서 빛바램으로 옮긴 virāga는 초기불전연구원의 다른 번역에서는 대부분 탐욕의 빛바램으로 옮긴 virāga와 같은 단어이다.”(초불연상윳따2 31번 각주)라 했다.

 

번역비교해보면

 

virāga에 대한 초불연 번역어 탐욕의 빛바램을 십이연기 정형구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무명이 남김없이 탐욕이 빛바래어 사라지면가 되어 어색해진다. 더구나 갈애와 관련된 것에서는 갈애가 남김없이 탐욕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가 되어 더욱더 어색해진다.  그래서 십이연기에서만큼은 빛바램이라 하여 무명이 남김없이 [탐욕이] 빛바래어 사라지면이 되고, “갈애가 [남김없이 탐욕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가 된 것이다. 이에 반해 전재성님의 번역은 한결같이 사라짐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이 되고, “갈애가 [사라져] 소멸되면 집착이 소멸되고의 뜻이 되었다. 빅쿠보디는 But with the remainderless fading away and cessation of ignorance comes cessation of volitional formations;”라 하여 ‘fading away and cessation’로 병렬복합어로 사용했다. 이를 빠알리원문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Avijjāya tveva asesavirāganirodhā sakhāranirodho

 

1)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전재성님역)

 

2)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탐욕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고(각묵스님역)

 

3) But with the remainderless fading away and cessation of ignorance comes cessation of volitional formations(빅쿠보디역)

 

 

위라가라는 말은 원래 천의 물감이 바래지는 것을 말한다. 염색된 것이 탈색되는 것을 뜻한다. 이를 주석에서는 빛이 바래는 것으로 설명했다. 마음이 오염된 것을 천에 물감이 입혀진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마음의 오염원을 제거하는 것에 대하여 탈색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위라가는 오염원이 사라지는 과정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빛바램(이욕, virāg)은 도(즉 예류도, 일래도, 불환도, 아라한도)를 뜻하고 소멸(nirodhā)은 아라한과를 뜻한다.”(30번 각주) 라 했다. 이렇게 본다면 위라가는 탈색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빅쿠보디는 ‘fading away’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무대에서 서서히 빛이 꺼지면서 사라지는 듯한 모습을 연상케 한다.

 

탐욕의 빛바램이라 했을까?

 

그런데 각묵스님은 탐욕의 빛바램이라 하여 주석적 번역을 했다. 그렇다면 각묵스님은 왜 주석적 번역을 했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각주에서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보디 스님은 virago-nirodhā라는 합성어를 빛바래고 소멸함으로 병렬복합어로 풀이하였고, 청정도론은 빛바램에 의한 소멸로 격한정복합어[依主釋, tat-purusa]로 해석하고 있다. 역자는 청정도론을 따라서 빛바래어 소멸함으로 옮기고 있다.”(초불연상윳따2 31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에 따르면 초기경전에서 중요한 술어 중의 하나인 위라가의 번역에 대하여 청청도론를 따랐다고 했다. 청정도론은 니까야에 대한 일종의 수행지침서이자 주석서이므로 결국 주석적 번역임을 말한다.

 

위라가에 대하여 주석적 번역을 하여 탐욕의 빛바램이라 번역하면 번역이 어색해진다. 이는 다음과 같은 예에서 확인된다. 

 

 

Ettha chanda virājetvā eva dukkhā pamuccatīti.(S1.30)

 

1) 이것들에 대한 욕망을 떠나면,

참으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리라. (S1.30, 전재성님역)

 

2) 여기에 대한 욕구를 빛바래 버리면

이렇게 해서 괴로움에서 해탈하노라. (S1.30, 각묵스님역)

 

3) Having expunged desire here,

One is thus released from suffering. (S1.30, 빅쿠보디역)

 

 

‘빛바램’과 ‘떠남’이라는 표현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초기경전에서 정형구로 표현 되어 있는 ‘Nibbinda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반면 성전협에서는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가장 큰 차이가 ‘위라가(virāgā)’에 대한 것이다탐욕이 빛바래고’와  ‘사라지고’의 차이이다.

 

위라가에 대하여 탐욕이 빛 바랜다는 표현은 주석적 번역의 전형이다. 그래서 욕구를 빛바래 버리면라는 어색한 표현이 된다. 마치 옷감의 물감이 바래지는 것처럼 탐욕도 서서히 사라진다는 표현을 ‘탐욕이 빛바랜다’는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떠남(遠離)으로 번역했을 때

 

위라가와 관련하여 전재성님은 사라짐 또는 떠남으로 번역했다. 떠남으로 번역한 것에 대하여 SN.II.18에서처럼 ‘virāga’는 원리(遠離)의 의미로도 널리 쓰인다.”라고 각주했다. 찾아 보니 가르침을 설하는 님의 경(S12.16)’이다. 관련 구절을 번역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Jarāmaraassa ce bhikkhu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dhamma deseti (S12.16)

 

1) 수행승이여, 늙음과 죽음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가르침을 설하면,..” (S12.16, 전재성님역)

 

2) 비구여, 만일 늙음-죽음을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면..” (S12.16, 각묵스님역)

 

3) “Bhikkhu, if one teaches the Dhamma for the purpose of revulsion

towards aging-and-death, for its fading away and cessation,..” (S12.16, 빅쿠보디역)

 

 

빠알리어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virāgāy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떠남(遠離)’의 뜻으로 번역했다. 각묵스님은 탐욕이 빛바래고라 했다. 빅쿠보디는 fading away’라 했다.

 

마음의 오염원은 탐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냄도 있고 어리석음도 있다. 이외에도 후회, 질투, 인색 등 수 많은 불선법이 있다. 이들 불선법 모두를 대표하는 것이 아마 탐욕의 빛바램일 것이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탐욕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단지 사라짐또는 떠남의 뜻으로 번역했다. 빅쿠보디도 fading away라 하여 진행형으로 사라져 가는 것으로 표현했다.

 

탈색과정이 필요해

 

삶의 과정에서 사람의 마음은 오염되어 간다. 마치 흰천에 물감이 입혀지는 것 같다. 천에 물감을 입히면 잘 빠지지 않는다. 탐진치로 물든 마음 역시 잘 빠지지 않는다. 더구나 사상이 유입되면 더욱더 빠지기 힘들다. 사상과 관련하여 율장대품에서는 염색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야사의 출가이야기를 보면 부처님이 차제설법을 하자 마치 청정하여 반점이 없는 천이 올바로 색깔을 받아들이는 것처럼”(Vin.I.16) 이라 했다. 재가자는 아직 외도사상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에 있어서 흰천과 같은 것으로 본 것이다. 이는 청소년기 종교를 갖지 않은 학생에게 포교하면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미 기존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경우 포교하기 힘들다. 물이 단단히 들었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종종 외도가 부처님설법을 듣고 감명하여 귀의하는 장면이 있다. 디가니까야 위대한 사자후의 경(D8)’을 보면 외도가 부처님의 답변을 듣고 저는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쁩니다.”라며 뛸 뜻이 기뻐하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서는 부처님제자가 되겠다고 말한다. 구족계를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 자리에서 구족계를 주지 않았다. 부처님은 깟싸빠여, 예전에 이교도였던 사람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기 원한다면, 그는 넉 달 동안 시험삼아 머물러야 합니다.”(D8) 라고 말했다. 외도가 구족계를 받는데 있어서 네 달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탈색과정이라 볼 수 있다. 신앙을 갖지 않은 자가 구족계를 원하면 그 자리에서 주었지만 외도사상에 물든 자들에게는 일정기간 외도사상의 물을 빼야 함을 말한다. 네 달을 시험삼아 머물렀을 때 주변의 수행승이 만족하면 구족계를 주는 것이다.

 

한번 형성된 사상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 절에 가면 법당 주련에 입차문래막존지해(入此門來莫存知解)’라는 문구가 써 있다. 이 문에 들어 오려거든 자신의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사상, 신앙 등을 내려 놓으라는 말이다. 유일신교를 믿는 사람이 불교를 받아 들이려면 먼저 유일신교 신앙을 내려 놓아야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도 사함빠띠의 청원으로 법을 설하기로 하였을 때 일성이 듣는 자들은 불사의 문이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Apārutā tesa1 amatassa dvārā ye sotavante pamuñcantu saddha)”(S6.1) 라 했다. 여기서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는는 말이 ‘pamuñcantu saddha이다.  빠알리어 pamuñca‘releasing; loosening; delivering; sending off; emitting; giving up’의 뜻이므로 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saddha)버려라(pamuñca)’는 뜻이 된다.

 

마음의 때, 마음의 오염원을 빼는 과정이 위라가라 볼 수 있다. 주석적으로 말하면 탐욕이 빛바래는 것이다. 마치 흰천에 갖가지 색깔로 물들어 있는데 탈색하는 과정을 말한다. 완전히 탈색 되었을 때 니로다가 된다. 그래서 위라가니로다(virāga-nirodhā)는 초기경전에서 정형구로 사용된다. 이를 사라져서 소멸하고또는 탐욕이 빛바래어 소멸되고또는 fading away and cessation’으로 번역하였다.

 

 

2016-07-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