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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히니가 사문을 좋아하는 이유

담마다사 이병욱 2016. 6. 25. 17:24

 

 

로히니가 사문을 좋아하는 이유

 

 

빅쿠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탁발을 하며 하루 한끼을 먹고 분소의를 걸친 모습이 연상된다. 외형적으로 삭발한 모습이 가장 돋보여서 일반사람들과 차별화 되기도 한다. 명상하며 독신생활을 하는 모습이 청정해 보이기도 한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사는 것일까? 한마디로 말하라면 자유이다. 자유를 위하여 엄격한 계율을 지켜 가며 사는 것이다. 그런 자유를 다른 말로 해탈이라고도 한다.

 

마부 마딸리 말하기를

 

해탈자로서 빅쿠에 대한 찬탄 게송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참모임에 대한 예경의 경(S11.20)’이 그것이다. 경에서는 신들의 제왕 제석천과 제석천의 마부 마딸리와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제석천이 수행승들의 승가를 예경했다. 승가는 수행승으로 이루어진 모임을 말한다. 신들의 제왕 제석천이 인간의 몸을 가진 자들을 예경하는 것에 대하여 의아해 하며 마딸리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물었다.

 

 

Ta hi ete namasseyyu

pūtidehasayā narā,
Nimugg
ā kuapasmete

khuppipāsā samappitā.

 

[마딸리]

썩어 빠진 몸속에 살며

존재의 다발 속에 가라앉아

굶주림과 목마름에 괴로워하는

이 사람들이 당신에게 예경하네.”

 

(Tatiyasakkanamassanasutta-참모임에 대한 예경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20, 전재성님역)

 

 

제석천의 마부 마딸리에 따르면 예경 받아야 할 대상은 제석천이다. 수행승들은 단지 늘 굶주림과 목마름 등 고통 속에 허우적거려 보이는 가련한 존재들일 뿐이다. 제석천이 수행승들의 모임에 예경하고 찬탄하는 것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이다.

 

직역과 의역 사이에서

 

빠알리 게송에서 세 번째 문구 ‘nimuggā kuapasmete’가 있다. 이 문구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했다.

 

 

nimuggā kuapasmete: 여기서 분명히 ‘[동물의] 시체 속에 가라 앉아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역자는 그 뜻을 풀어서 여기서는 존재의 다발이라고 번역한다. Srp.I.353에 따르면, 어머니의 모태에서의 태아의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전체문맥으로 보아 이는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존재의 다발[오온]이 죽음의 신[사신]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보아 그것으로 이루어진 우리자신을 시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2187번 각주, 전재성님)

 

 

빠일리어 ‘nimuggā kuapasmete’에서 nimuggā‘sunk down’의 뜻이고,  kuapa‘corpse(시체)’의 뜻이다. 따라서 시체속에 가라 앉아가 되는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시체속에 가라 앉는 것에 대하여 태아의 상태를 말한다고 했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전체적 문맥으로 보아 오온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시체속에 가라 앉아라는 직역 대신 존재의 다발 속에 가라앉아라 하여 의역했다. 반면 각묵스님은 직역했다.

 

초불연 각묵스님의 각주를 살펴 보았다. 같은 문구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열 달 동안 어머니의 자궁이라 불리는 시체안에 빠져 있었다라 하여 주석을 인용하고 있다. 역시 번역도 시체의 내부 속에 빠져 있었으며라며 직역했다. 이런 번역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주석서의 설명처럼 볼 수도 있지만 지금 살아있는 자신의 몸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다.”(초불연 상윳따1 900번 각주) 라 했다. 각주에서는 오온으로 의역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본문에서는 시체라 하여 직역한 것이다.

 

빅쿠보디는 어떤 견해를 가졌을까? 빅쿠보디는 관련 문구에 대하여 “Those submerged inside a corpse”라 하여 직역했다. 각묵스님 번역과 같은 내용이다. 이에 대하여 어떻게 각주 하였을까?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Those submerged inside a corpse. I read this line as in Be (in both text and the lemma of Spk) as nimuggā kuapamhete, with the indirect object a locative singular. Se reads kuapasmete, using an alternative form of the locative singular. Eel & 2, however, and Spk (Se) in the lemma read the line with the locative plural kuapesv ete. Spk explains: “These are submerged for ten months in a corpse, namely, in the mother's womb.” Despite this comment, it seems more likely that the reference is to the individual's own living body

 

(CDB Vol1. 655번 각주, 빅쿠보디)

 

 

주석에서는 태아가 시체처럼 꼼짝 않고 열 달 동안 있는 자궁에 있는 모습을 설명한다고 했다. 이를 좀더 확장하면 살아 있는 개별존재도 모두 포함된다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오온을 말한다. 세 번역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썩어 빠진 몸속에 살며

존재의 다발 속에 가라앉아

굶주림과 목마름에 괴로워하는

이 사람들이 당신에게 예경하네.”(전재성님역)

 

악취가 나는 몸에 드러누웠고

시체의 내부 속에 빠져 있었으며

굶주림-목마름에 괴로워하는

이런 자들 당신께 예배합니다.”(각묵스님역)

 

“ ‘It is these that should worship you-

The humans stuck in a putrid body,

Those submerged inside a corpse,

Afflicted with hunger and thirst. (빅쿠보디역)

 

 

세 번역을 보면 ‘kuap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오온이라 하여 의역했고,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은 시체라 하여 직역했다.

 

마부 마딸리의 게송을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태아의 존재로 보았다. 태아는 열달 동안 꼼짝 없이 어머니의 자양분에 의존해야 한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 모두 어머니의 손에 달려 있다. 이처럼 오온에 묶여 있는 존재를 인간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을 자궁속에 있는 시체와 같은 존재로 본 것이다.

 

제석천 답송하기를

 

인간과 신은 차원이 다르다. 그것도 신들의 제왕 제석천은 인간과 비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제석천은 왜 수행승의 참모임을 예경하는 것일까? 제석천의 마부 마딸리는 도저히 이해 하지 못하겠다는 태도이다. 그래서 집 없는 자들에게, 바싸바여, 당신은 그들에게 무엇을 갈망하는가?”라며 말한다. 이에 제석천은 게송으로 답송한다.

 

 

1)

Eta tesa pihayāmi

anāgārāna mātali,
Yamh
ā gāmā pakkamanti

anapekkhā vajanti te.

 

[제석천]

마딸리여, 출가한 자들에게

나는 이와 같은 것을 갈망하네.

마을을 떠나면 돌아보지 않고 길을 가고

 

2)

Na tesa koṭṭhe openti

na kumbhe na khalopiya,
Parani
ṭṭhitamesānā

tena yāpenti subbatā,
Sumantamantino dh
īrā

tuhībhūtā samañcarā,

 

그들의 헛간이나 항아리나

바구니 속에 아무 것도 모으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것을 찾아

그것으로 계율에 맞게 생활하네.

그들은 지혜로워 훌륭한 말을 하지만

침묵을 지키며 올바로 유행하네.

 

3)

Devā viruddhā asurehi

puthu maccā ca mātali,
Aviruddh
ā viruddhesu

 attadaṇḍesu nibbutā,
S
ādānesu anādānā

te namassāmi mātalīti,

 

마딸리여, 범부들도 항상 싸우고

하늘사람들도 아수라들과 싸우지만

전쟁 가운데서도 싸우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 가운데 평온한 이들

집착하는 자 가운데 집착하지 않는 이들

마딸리여, 나는 그분들께 예경하네.”

 

(Tatiyasakkanamassanasutta-참모임에 대한 예경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20, 전재성님역)

 

 

 

테리가타에 유사한 게송이

 

첫 번째 게송에서 마을을 떠나면 돌아보지 않고 길을 가고(Yamhā gāmā pakkamanti anapekkhā vajanti te)”라는 문구가 있다. 이에 대하여 “Thig.282에도 나온다.”(2190번 각주) 라고 했다. 테리가타 282번 게송을 말한다.

 

테리가타 282번 게송을 찾아 보았다.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 다음과 같이 해석 되어 있다.

 

 

Yasmā gāmā pakkamanti

ne vilokenti niñcana
Anapekkh
āva gacchanti

tena me samaā piyā.

 

어떤 마을이든지 떠날 때는

어떤 것에라도 뒤돌아보지않습니다.

아무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

 

(테리가타 282번 게송, 일아스님역)

 

 

이 게송은 테리가타 로히니경에 실려 있다. 비구니 로히니가 출가하기 전 아버지와 대화에서 읊은 것이다. 사문을 좋아하는 로히니에게 아버지는 “너는 잠이 들 때에도 잠을 깰 때에도 사문들을 말하는구나. 사문의 칭찬을 입에 달고 있구나. 얘야, 너는 출가 수행녀가 되겠구나.”(Thig. 271)라고 말한다.

 

그런 한편 아버지는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승에 대하여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로히니에게 그들은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게으르고 남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고, 갈망으로 가득하고 맛있는 것들을 찾는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그토록 사문을 좋아 하느냐?(Thig. 273)라며 묻는다. 이에 로히니가 자신이 사문을 좋아 하는 이유에 대하여 긴 게송으로 설명한다. 282번 게송은 그 중의 하나이다.

 

로히니가 사문을 좋아하는 이유

 

로히니가 사문을 좋아하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들이 일을 하지 않고 얻어 먹고 살기 때문에 게으른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가장 부지런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다름 아닌 마음의 밭을 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하기를 좋아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훌륭한 일을 하며 욕망과 성냄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Thig.275)라고 설명해 준다. 참고로 테리가타에 실려 있는 로히니경을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로히니가 말하였다)

“사랑하는 아버지,

당신은 오랫동안 사문에 대하여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계행과, 지혜와,

정진에 대하여 찬탄하겠습니다.(274)

 

1)

Kammakāmā analasā, kammaseṭṭhassa kārakā;

Rāga dosa pajahanti, tena me samaā piyā.

 

그들은 일하기를 좋아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훌륭한 일을 하며 욕망과 성냄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75)

 

2)

Tīi pāpassa mūlāni, dhunantntti sucikārino;

Sabba pāpa pahīnesa, tena me samaā piyā.

 

그들은 세 가지 악의 뿌리를 남김없이 제거하고

청정한 행을 닦아 모든 악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76)

 

3)

Kāyakamma suci nesa, vacīkammañca tādisa;

Manokamma suci nesa, tena me samaā piyā.

 

그들은 몸에 의한 행이 청정합니다.

말에 의한 행이 청정합니다.

생각에 의한 행이 청정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 합니다.(277)

 

4)

Vimalā sakhamuttāva, suddhā santarabāhirā;

Puṇṇā sukkāna dhammāna, tena me samaā piyā.

 

그들은 티가 없고 진주조개처럼

안과 밖이 청정하고

깨끗한 특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78)

 

5)

Bahussutā dhammadharā, ariyā dhammajīvino;

Attha dhammañca desenti, tena me samaā piyā.

 

그들은 학식이 많고 가르침을 지니고

거룩하고,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목표와 담마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79)

 

6)

Bahussutā dhammadharā, ariyā dhammajīvino;

Ekaggacittā satimanto, tena me samaā piyā.

 

또한 그들은 하나로 집중된 마음으로

마음챙김에 머뭅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0)

 

7)

Dūragamā satimanto, mantabhāī anuddhatā;

Dukkhassanta pajānanti, tena me samaā piyā.

 

그들은 먼길을 행각하고, 마음챙김에 머물고

지혜롭고 산란하지 않으며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1)

 

8)

Yasmā gāmā pakkamanti, na vilokenti kiñcana;

Anapekkhāva gacchanti, tena me samaā piyā

 

어떤 마을이든지 떠날 때는

어떤 것에라도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무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2)

 

9)

Na tesa koṭṭhe openti, na kumbhi na khaopiya;

Pariniṭṭhitamesānā, tena me samaā piyā.

 

그들은 재물을 창고나, 단지나, 바구니에 저장하지 않으며

완전히 조리된 음식만 탁발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3)

 

10)

Na te hirañña gahanti, na suvaṇṇa na rūpiya;

Paccuppannena yāpenti, tena me samaā piyā.

 

그들은 동전이나 금과 은을 지니지 않습니다.

그날그날 탁발한 것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4)

 

11)

Nānākulā pabbajitā nānājanapadehi ca
A
ññamañña piyāyanti tena me samaā piyā.

 

그들은 여러 다른 가문에서, 다른 지역에서 왔지만

서로간에 친근하게 대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5)

 

(테리가타 Thig.271~289, 로히니 비구니, 일아스님역)

 

 

 

Three bhikkhu

 

 

로히니는 아버지에게 사문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하여 열 한 개의 게송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아버지는 흡족한 듯 “오, 사랑하는 로히니야, 너는 정말로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이 집에서 태어났구나. 너는 부처님과 가르침에 신뢰심이 있고 승가에 참으로 깊이 존경하는구나.(Thig. 286)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도 그처럼 훌륭하신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하겠다. 그리고 계행을 지키겠다. 그것은 나를 행복으로 이끌 것이다.(Thig.289)라며 삼보에 귀의한다.

 

타경전과 일치하는 내용을 보면

 

마부 마딸리는 수행승들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마치 로히니의 아버지가 사문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과 같다. 로히니가 아버지에게 열 한가지로 사문을 좋아 하는 이유를 알려 주듯이, 제석천은 자신의 마부 마딸리에게 수행승의 모임을 좋아 하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해 준다. 일부 문구는 로히니경과 일치한다.

 

제석천의 게송에서 마을을 떠나면 돌아보지 않고 길을 가고는 테리가타 282번 게송과 일치하고, “그들의 헛간이나 항아리나 바구니 속에 아무 것도 모으지 않으며라는 문구는 테리가타 게송의 그들은 재물을 창고나, 단지나, 바구니에 저장하지 않으며 완전히 조리된 음식만 탁발합니다.” (Thig.283)와 일치한다.

 

제석천의 두 번째 게송에서 그들은 지혜로워 훌륭한 말을 하지만 침묵을 지키며 올바로 유행하네.(Sumantamantino dhīrā tuhībhūtā samañcarā)”가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그들은 가르침에 대해서는 밤새도록 우레와 같이 말하지만, ‘침묵을 지키며 유행한다.’고 하는 것은 왜 그런가? 그들은 쓸모 없는 말을 피하기 때문이다.”(Srp.I.353) 이라 했다. 이 문구와 관련하여 율장대품에 그리고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닷새마다 밤을 새며 법담을 나눕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저희들은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있습니다. (율장대품 10, Vin.I.352) 라는 내용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반드시 침묵만 지키고 있지 않음을 말한다. 법에 대해서는 밤이 새도록 토론 하는 것이다. 그 외에는 거룩한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다.

 

제석천의 세 번째 게송을 보면 싸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범부들도 싸우고 신들도 싸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싸우지 않는 자들이 있다. 수행승들의 모임에 있는 자들이다. 이에 대하여 전쟁 가운데서도 싸우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 가운데 평온한 이들이라 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다투지 않음을 말한다. 이 문구는 법구경에도 나온다. 법구경 406번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Aviruddha viruddhesu, ~

attadaṇḍesu nibbuta,
S
ādānesu anādāna, ~

tam-aha brūmi brāhmaa.

 

적대하는 자에게 적대하지 않고

폭력을 쓰는 자 가운데 평온하고

집착하는 자 가운데 집착을 여읜 님,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고 한다.”(Dhp406, 전재성님역)

 

 

수행승은 대중을 향해 적대를 품지 않는다. 설령 그들이 적대하더라도 적대를 품지 않기 때문에 적대하지 않는다. 집착을 여의었다는 것은 오온에 대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집착을 여읜 것이다.

 

삼보에 귀의하는 마부 마딸리

 

제석천은 수행승들을 예경하는 이유에 대하여 게송으로 설명했다. 집착을 여읜 수행승은 비록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오온의 죽음과 함께 열반이 보장 되어 있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결코 굶주림과 갈증에 괴로워 하는, 자궁속에 시체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이에 마딸리는 로히니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삼보에 귀의 하게 된다. 그래서 제석천이여, 당신이 예경하는 이들이 세상에서 진실로 가장 훌륭하니 바싸바여, 당신이 예경하는 님들, 그들에게 나도 또한 예경하리라.”(S11.20) 라고 선언한다.

 

 

2016-06-2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