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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먹고 사는 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16. 6. 27. 15:07


분노를 먹고 사는 야차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말이 있다. 영화제목이기도 하고 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질투를 먹고 사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질투는 해로운 마음(不善心)’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해로운 마음부수에는 열 네 가지가 있다. 그 중에 질투(issa)’도 들어가 있다. 그런 질투는 성냄을 뿌리로 하고 있다. 성냄를 뿌리로 하는 마음에 성냄, 질투, 인색, 후회 이렇게 네 가지가 있다.

 

누군가 질투를 하면 할수록 힘을 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누군가 상대방에 대하여 분노를 하면 할수록 역시 힘을 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질투를 먹고 사는 사람, 분노를 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욕을 먹으면 욕을 먹을수록 오래 산다는 말과 같다.

 

분노를 먹고 사는 야차

 

분노를 먹고 사는 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추악한 용모의 경(Dubbaṇṇiyasutta, S11.22)’이다. 초불연에서는 못생김 경이라 했다. 이는 dubbaṇṇa‘of bad colour; discoloured; ugly’의 뜻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오랜 옛날에 수행승들이여, 어떤 추악하고 왜소한 야차가 신들의 제왕 제석천의 보좌에 앉았다.”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야차가 제석천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를 본 삽십삼천의 신들은 분노했다.

 

그런데 하늘의 신들이 분노하면 할수록 왜소하고 못생긴 야차는 점점 잘생겨지고 용모가 아름다워 지는 것이었다. 이에 하늘사람들은 제석천에게 가서 그는 참으로 존자여, 분노를 먹고 사는 야차일 것입니다.(So hi nūna mārisā kodhabhakkho yakkho bhavissatī)”라 했다.

 

 


시험에 들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야차의 이미지는 험상궂은 분노의 이미지이다. 늘 분노하는 모습의 야차에게 분노하면 할수록 오히려 아름다운 용모로 바뀐다는 것이다. 누군가 질투하면 질투할수록 용모가 예뻐지는 것과 같다. 이런 야차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다음과 같이 각주했다.

 

 

그는 난장이였는데 타다 만 나무 그루터기 같은 색깔을 한 배불뚝이였다. 그는 삭까의 황색돌로 만든 옥좌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는 색계에서 온 범천이었다. 그는 삭까가 인욕의 힘을 갖추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시험하러 온 것이다. 악의를 가진 약카들이 그처럼 잘 지키고 있는 [삭까의 궁전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SA.i.354)

(초불연 상윳따1 996번 각주, 각묵스님)

 

 

초불연 각주를 보면 왜 야차가 제석천의 옥좌에 앉아 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강자의 인내를 강조하는 제석천에 대하여 시험에 들기 위함이라 한다. 이는 이전 경에서 제석천은 참사람이 최상의 이익을 성취하려면, 인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네라든가,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없는 자에게 인내하네.”(S11.5) 라며 강자의 인내를 강조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제석천의 역발상

 

인내와 인욕을 특징으로 하는 제석천은 야차를 어떻게 대했을까? 천신들은 분노 했지만 제석천은 정 반대로 대했다. 그것도 최상의 예를 갖추어 이렇게 대했다.

 

 

Upasakamitvā ekasa uttarāsaga karitvā dakkhiajāumaṇḍala pahaviya nihantvā yena so kodhabhakkho yakkho tenañjali paāmetvā tikkhattu nāma sāvesi sakko'ha mārisa devānamindo, sakko'ha mārisa devānamindoti.

 

가까이 다가가서 한 쪽 어깨에 옷을 걸치고 오른 쪽 무릎을 땅에 대고 그 분노를 먹고 사는 야차에게 합장하고 세 번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제석천]

벗이여, 나는 신들의 제왕 제석천입니다. 벗이여, 나는 신들의 제왕 제석천입니다. 벗이여, 나는 신들의 제왕 제석천입니다.”

 

(Dubbaṇṇiyasutta-추악한 용모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22, 전재성님역)

 

 

제석천은 합장공경의 자세를 취했다. 금강경에서 수보리를 연상케 한다. 금강경선현기청분을 보면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가르침을 청할 때 대중가운데 일어나 편단우견우슬착지합장공경(偏袒右肩右膝着地合掌恭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오른 쪽 어깨에 옷을 걸치고 오른 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한 자세를 말한다. 부처님에 대한 최상의 예를 표한 것이다.

 

신들의 제왕 제석천은 자신의 보좌에 앉아 있는 야차에게 최상의 예를 다했다. 마치 수보리가 부처님대하듯 한 것이다. 이는 역발상이다. 당연히 화를 내며 쫓아 버려야 하나 오히려 부처님 대하듯 한 것이다.

 

문맥인가 원문인가

 

제석천은 야차에게 자신이 신들의 제왕 제석천임을 알렸다. 그것도 벗이여, 나는 신들의 제왕 제석천입니다. (sakko'ha mārisa devānamindo)”라며  세 번이나 알렸다. 이것 역시 최상의 예를 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두 번역이 다르다. 전재성님은 벗이여, 나는 신들의 제왕 제석천입니다.”라고 세 번 반복했으나, 각묵스님은 존자여, 저는 신들의 왕 삭까입니다.”라 하여 두 번만 반복했다. 빠알리 원문에는 “sakko'ha mārisa devānamindo, sakko'ha mārisa devānamindoti”라고 두 번 반복되어 있다. 이로 본다면 각묵스님번역이 맞다. 그러나 본문에 “tikkhattu nāma sāvesi”라 되어 있다. 여기서 tikkhattu‘Thrice(세 번)’의 의미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의 번역이 맞다.

 

빠알리원문에는 “tikkhattu nāma sāvesi라 하여 세 번 이름을 불렀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구를 부면 “sakko'ha mārisa devānamindo, sakko'ha mārisa devānamindoti라고 두 번 반복되어 있을 뿐이다. 아마 한줄을 빠뜨린 것 같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빠알리원전 그대로 하여 두 번 반복했고, 반면 전재성님은 문맥에 맞게 복원하여 세 번 반복하는 것으로 번역했다.

 

빅쿠보디는 어떻게 했을까? CDB를 찾아 보니 ‘I, dear sir, am Sakka, lord of the devas! I, dear sir, am Sakka, lord of the devas!’”라 되어 있다. 두 번 반복되어 있다. 빠알리 원문 그대로이다.

 

원래 야차의 모습으로

 

인내와 인욕의 화신이라 볼 수 있는 제석천은 자신의 보좌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형상의 야차에게 최상의 예를 갖추어 존중해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발생했다. 제석천이 공경의 예를 하면 할수록 야차는 더욱 추악해지고 더욱 왜소하기 짝이 없어진 것이다. 분노의 야차는 분노를 먹으면 먹을수록 아름다운 용모를 갖게 되는데, 반대로 자비를 먹으니 용모가 점차 거칠어지며 원래 야차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게 된 것이다.

 

‘anunayamāno’를 번역하지 않았는가

 

마침내 야차는 사라졌다. 인내와 자비로 쫓아 낸 것이다. 이에 제석천은 즐거운 마음으로 이와 같은 시들을 읊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이 대목에서 이 사실에 대해서 이 게송들을 읊었다.”라고 했다. ‘즐거운 마음이 사실에 대해서의 차이이다. 빠알리 원문을 찾아 보았다.

 

빠알리원문을 찾아 보니 관련 구절은 “anunayamāno tāya velāya imā gāthāyo abhāsi이다. 여기서 키워드는 ‘anunayamāno이다. 이는 ‘anunaya+māno형태이다. 빠알리어 anunaya‘friendliness’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anunayamāno는 전재성님이 번역한 것과 같이 즐거운 마음이 된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번역에서는 즐거운 마음이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 사실에 대해서라고 했다.

 

빅쿠보디 번역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찾아 보니 “on that occasion recited these verses”라 되어 있다. 번역하면 그 경우에 이들 게송을 읊었다라는 뜻이다. 빅쿠보디 역시 ‘friendliness’의 뜻을 가진 빠알리어 ‘anunayamāno를 번역하지 않았다. 이는 실역(失譯)이라 본다.

 

제석천이 게송으로 말하기를

 

제석천이 삽십삼천의 신들에게 읊은 게송은 다음과 같다.

 

 

Na sūpahatacitto'mhi

nāvattena suvānayo,
Na vo cir
āha kujhāmi

kodho mayi nāvatiṭṭhati.

 

[제석천]

나는 쉽게 마음을 상하지 않고

쉽게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네.

그대들에게 화내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고,

분노는 나에게 생겨나지 않네.

 

 

Kuddho'ha pharusa brūmi

na ca dhammāni kittaye,
Sannigga
hāmi attāna

sampassa atthamattanoti.

 

결코 화를 내어 거친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덕을 칭찬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익한가를 살펴서

나는 자신을 잘 제어할 뿐이네.”

 

(Dubbaṇṇiyasutta-추악한 용모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22, 전재성님역)

 

 

제석천은 어떠한 경우에도 화내지 않는다. 이는 제석천의 일곱 가지 서원에서도 알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 마할리의 경에 따르면 성냄과 관련하여 나는 살아 있는 한 화내지 않으며 만약 나에게 화가 나면 곧바로 그것을 제거하리라.”라 했다. 제석천은 어떠한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고 인내와 자비로서 대한다.

 

인내와 자비,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첫 번째 게송에서 제석천은 나는 쉽게 마음을 상하지 않고라 했다. 이 구절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나는 마음 망가진 자 아니며라 했다. 빅쿠보디는 “I am not one afflicted in mind”라 하여 나는 괴로워하는 마음 가진 자 아니다라는 뜻으로 번역했다. 이 문구와 관련된 빠알리어는 “Na sūpahatacitto'mhi”이다. 키워드는 sūpahatacitto로서 ‘sūpahata+citta’의 형태로 되어 있다. 여기서 sūpahata는 또 ‘sūpa+hata’로서, sūpacurry의 뜻으로 스프나 즙을 말하고, hata‘killed; injured; destroyed’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sūpahatacitta’는 마음이 죽처럼 망가진 상태라 볼 수 있다. 우리속담에 변덕이 죽 끓듯 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아마 ‘sūpahatacitta’를 두고 한 말 같아 보인다. 그래서일까 각묵스님은 마음 망가진으로 번역듯 하다. 이는 이어지는 문구 “nāvattena suvānayo”에도 확인 된다. 빠알리어 vatta‘circular; round’의 뜻으로 번역자들이 소용돌이와 회오리, 그리고 whirl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제석천은 어떤 경우에서라도 화내지 않으리라고 서원했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마음이 상처 받는다든가 마음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는다. 따라서 거친말을 하지 않는다. 인내와 자비, 그리고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대한다.

 

Dhammāni에 대하여

 

두 번째 게송을 보면 자신의 덕을 칭찬하지 않고라는 말이 있다. 각묵스님은 “[내안의] 법다움을 칭송하지 않노라라 하여 전혀 다르게 번역했다. 이는 “na ca dhammāni kittaye”에 대한 번역이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 안에 있는] 법다움dhammāni(중성명사 복수)를 옮긴 것이다. (dhamma)은 대부분 남성명사로 나타나지만 여기서처럼 드물게 중성명사로도 쓰인다. 여기서 dhamma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주석서와 복주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비슷한 용례가 자따까(J.v.172)Santān ca dhammāni sukittitāni(착한 사람들의 법다움을 칭송하였다)로 나타난다. 이 경우의 dhamma는 부처님 가르침으로서의 법(Dhamma)이 아니라 개인적인 자질을 뜻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풀어서 옮겼다.

(초불연 상윳따1 1000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에 따르면 빠알리어 dhammāni에 대하여 중성명사로 보아서 담마의 원래 의미보다는 인적인 자질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서 법답게라 번역했다고 한다.

 

빅쿠보디 각주를 보면

 

빅쿠보디는 관련문구에 대하여 And I don't praise my virtues.’라 하여, dhammāni 에 대하여 virtue(미덕, 덕목)’이라 번역했다. 관련게송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Neither Spk nor Spk-pt offers any help with the meaning. VAT proposes, "And I do not speak on Dhamma matters," but at Ja V 172,23 and 221,27 we find

Santān ca dhammāni sukittitāni, "the well-proclaimed qualities of the good," which suggests that here too the rare neuter plural dhammāni refers to personal virtues, not to spiritual teachings.

 

(CDB Vol1, 661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에 따르면 주석과 복주석서에서도 뜻이 설명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다만 ‘VAT에서는 담마 만을 말하지 않는다라 했다. VAT는 무엇을 말할까? 찾아 보니 Vanarata, Ananda Thera’라 되어 있다. 아난다 장로를 말한다.

 

자따까에서 사용된 문구에서 dhammāni가 보이는데 이는 선(: good)을 지칭하는 것으로써 영적인 가르침이라기 보다 개인적 덕목(personal virtues)에 가깝다고 했다.

 

세 번역을 비교해 보면

 

관련 게송에 대하여 세 번역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Kuddho'ha pharusa brūmi

na ca dhammāni kittaye,
Sannigga
hāmi attāna

sampassa atthamattanoti.

 

결코 화를 내어 거친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덕을 칭찬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익한가를 살펴서

나는 자신을 잘 제어할 뿐이네.”(전재성님역)

 

분노하여 거친 말을 하지 않고

[내 안의] 법다움을 칭송하지 않노라.

나 자신의 이익을 내가 보기 때문에

내 스스로 나 자신을 잘 제어하노라.”(각묵스님역)

 

"'When I'm angry I don't speak harshly

And I don't praise my virtues.

I keep myself well restrained

Out of regard for my own good."' (빅쿠보디역)

 

 

초기경전에서 법답게, 여법하게, 정의롭게 라는 말은 ‘dhammena’ 또는 ‘dhammika’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dhammāni’라는 말은 빅쿠보디 각주에 따르면 개인적 덕목에 가깝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상대방이 도발해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은 개인적 덕목에 가깝다. 그래서 자신의 덕을 칭찬하지 않고라 했을 것이다. 빅쿠보디는 my virtues’라 하여 개인적 덕목임을 구체적으로 표현 했다.

 

열등한 자의 질투와 우월한 자의 자비

 

시기와 질투를 일삼는 자가 있다. 대표적으로 안티(Anti)’일 것이다. 연예인에게는 안티가 많다. 안티가 많아야 인기도 높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일까 의도적으로 안티를 양성한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시기와 질투를 하면 할수록 상대방은 돋보인다는 사실이다. 연예인, 스포츠스타, 정치인 등은 어떻게 보면 욕을 먹고 성장한다고 볼 수 있다. 시기와 질투라는 욕이다.

 

시기와 질투는 열등한 자의 힘이다. 그런데 시기와 질투의 대상은 시기와 질투를 받을수록 더욱 더 빛난다는 사실이다. 연예인, 스포츠스타, 정치인 등 명망가들은 시기와 질투를 먹고 자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질투는 나의 힘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질투가 열등한 자의 전유물이라면 분노는 우월한 자의 것이다. 약자는 강자에게 분노하기 힘들다. 강자에 대한 분노는 강자의 분노를 유발하여 손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약자는 인내할 수밖에 없고, 강자는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존재를 과시하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상윳따니까야 추악한 용모의 경(S11.22)’에서 삽십삼천의 신들은 흉폭한 모습의 야차에 분노로써 대했다.

 

야차는 삼십삼천의 신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한참 아래 세상에 사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제석천의 보좌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어 분노한 것이다. 그런데 아니러니 하게도 분노의 화신이라 볼 수 있는 야차는 신들이 분노하면 할 수록 아름다운 얼굴모습으로 바뀌었다. 분노를 먹고 자란 것이다. 반면 아름다운 용모의 신들은 분노함으로 인하여 얼굴이 추악해졌을 것이다. 화가 났을 때 거울을 보면 악마의 얼굴이 따로 없다.

 

제석천은 삽심삼천에서 신들의 제왕이다. 제석천이 신들의 제왕이라 불리 울만한 것은 화를 절대 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신들의 제왕으로서 제석천은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비로서 야차를 대했다. 그 결과 분노의 화신 야차의 얼굴이 신들과 같은 용모에서 점차 야차 본래의 얼굴 모습으로 바뀌더니 마침내 보좌에서 사라졌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리더가 되려면

 

조직이나 단체의 장을 맡고 있는 자는 강자이다. 그럼에도 리더가 분노를 일삼는다면 사실상 조폭과 다를 바 없다. 조폭의 경우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이다. 화를 내는 것도 화를 나게 했기 때문이라 하고, 때리는 것도 맞을 짓을 했기 때문이라 보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가정에서도 보게 된다. 부모와 자식간에 갈등, 부부간의 갈등, 시모와 며느리와의 갈등 역시 강자와 약자에서 일어난다.

 

자식이 말을 듣지 않는다 하여 분노를 표출한다면 사실상 조폭의 논리와 다름 없다. 아내가 내 뜻대로 따르지 않는다 하여 폭력을 행사한다면 역시 조폭의 논리와 다름 없다. 시모가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스님이 분노를 표출하는 것에 대하여 자비의 분노라고 할 수도 있지만 화를 낸 것만은 사실이다. 분노하는 순간 야차가 되고 아수라가 되는 것이다. 경에서는 분노하는 스승에게서 떠나라고 했다. 어느 정도일까? 범일스님의 수트라에 따르면 상대의 언행에사 탐진치의 일부라도 드러나면 그 마음이 오염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만약 오염된 상태라면 그의 가르침을 버리고 그를 떠나야 한다.”(391p) 라고 했다. 단 한번만이라도 화내는 모습을 보았다면 미련 없이 떠나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아수라부모, 아수라남편, 아수라시모, 아수라스님을 좋아하지 않는다. 강자의 입장에 있다면 자비로서 대해야 한다. 인내와 자비, 부드러움과 고요함, 여기에 알아차림(sati)까지 있다면 금상첨화이다. 자식에게 인내와 자비로 대했을 때 야차와 같은 흉폭한 마음은 달아 날 것이다. 아내에게 부드러움과 고요함으로 대했을 때 아수라판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큰 조직의 리더를 맡고 있는 자는 다르다. 대게 부드럽고 자비로운 것이 특징이다. 큰 집안의 가장이나, 큰 회사의 회장이나, 큰 기관의 리더나, 종교계의 수정을 맡고 있는 자들은 특징이 있다. 대게 인내와 자비, 부드러움과 고요함을 특징으로 한다. 한마디로 자비로운 것이다. 강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힘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자의 인내와 자비로써 조직이나 단체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힘보다 자비의 힘만한 것이 없다. 시기와 질투가 열등한 자들의 분노의 표출이라면, 인내와 자비는 강자의 개인적 덕목이다. 한글자로 ()’이다. 그 덕을 담마니(dhammāni)’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덕장을 용장이나 지장 보다 더 높이 평가한다. 조직이나 단체의 리더가 되려면 자비덕망이 있어야 한다.

 

 

2016-06-2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