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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놓아버린 자와 캐러밴의 지도자, 제석천과 사함빠띠의 입장차이

담마다사 이병욱 2016. 6. 23. 17:10

 

 

짐을 놓아버린 자와 캐러밴의 지도자, 제석천과 사함빠띠의 입장차이

 

 

상윳따니까야 부처님에 대한 예경의 경(S11.17)’이 있다. 경에서 마침 신들의 제왕 제석천과 하느님 싸함빠띠가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 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각각 문기둥에 기대어 섰다.”라 되어 있다. 제석천과 사함빠띠가 동시에 출현 한 것이다. 초기경에서 이런 장면은 거의 볼 수 없다.

 

제석천은 삼십삼천의 신들의 제왕이고, 사함빠띠는 범천의 신이다. 불교적 세계관으로 본다면 사함빠띠의 지위가 더 높다. 제석천은 욕계천신이지만, 사함빠띠는 색계와 무색계를 아우르는 범천계의 최고신이기 때문이다.

 

기둥에 기대어 섰다

 

욕계 신들의 제왕 제석천과 범천계의 하느님 사함빠띠가 부처님을 찾아 왔다. 그런데 둘은 기둥에 기대어 섰다라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인사를 드리고 한쪽에 물러 앉는 것이 보통이다. 사함빠띠의 경우 청원할 때 왼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은 채 세존께 계신 곳을 향해 합장하고”(S6.1) 라 되어 있다.

 

기둥에 기대어 섰다라는 말은 ‘dvārabāha nissāya aṭṭhasu’를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dvārabāha‘door-post’로서 문기둥을 말한다. ‘Nissāya’‘1. support; 2. protection; 3. that on which anything depends’의 뜻이다.  ‘aṭṭhasu’‘tiṭṭhati’의 형태로서 ‘stand’의 뜻이다.

 

두 개의 기둥이 있는데 각각 기둥에 제석천과 사함빠띠가 옆에 서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기둥에 의지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전재성님은기둥에 기대어 섰다.”라고 기대어 있는 모습으로 번역했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각각 다른 문기둥에 섰다.”라 하여 단지 기둥 옆에 서 있는 것으로 번역했다. 빅쿠보디는 “stood one at each doorpost”라 하여 각각 기둥에 섰다.”라 번역했다.

 

제석천 찬탄하기를

 

먼저 신들의 제왕 제석천이 부처님을 찬탄했다.

 

 

Uṭṭhehi vīra vijitasagāma

pannabhāra anaa vicara loke,
Cittañca te suvimutata

cando yathā paṇṇarasāya rattinti.

 

[제석천]

보름날 밤에 떠오르는 달처럼

그대의 마음은 완전히 해탈되었으니,

일어서소서 영웅이여, 전쟁의 승리자여, 세상을 거니소서.

짐을 놓아버린 님이여, 허물없는 님이여.”

 

(Vandanāsutta -부처님에 대한 예경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17, 전재성님역)

 

 

번역비교를 해보니

 

게송을 보면 청원경에서 사함빠띠가 읊은 게송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구절과 두 번째 구절의 전송을 말한다. 이 게송과 관련하여 각묵스님과 빅쿠보디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일어서소서, 영웅이시여

전쟁에서 승리하신 분이시여

대상의 우두머리시여, 짐을 내려 놓은 분이시여

세상에서 유행하소서.

당신의 마음은 완전히 해탈했으니

보름달의 달과도 같으십니다.”(각묵스님역)

 

“Rise up, 0 hero, victor in battle!

Your burden lowered, debt-free one, wander in the world.

Your mind is fully liberated

Like the moon on the fifteenth night.” (빅쿠보디역)

 

 

게송에서 짐을 놓아버린 님이여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pannabhāra’를 번역한 것이다. 영어로 ‘one who has put down his burden’의 뜻이다. 주석에 따르면 오온(khanda)과 번뇌(kilesa)와 형성(sakhāra)  세 가지 짐이라 했다.

 

부처님을 찬탄하는 빠알리문구가 “Uṭṭhehi vīra vijitasagāma pannabhāra anaa vicara loke”이다. 모두 네 가지이다. 이는 1)vīra 2)vijitasagāma 3)pannabhāra 4)anaa 로 표현 된다.

 

전재성님은 ‘1)영웅이여(vīra), 2)전쟁의 승리자여(vijitasagāma), 3)짐을 놓아버린 님이여(pannabhāra), 4)허물없는 님이여(anaa)’ 라 하여 모두 번역했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1)영웅이시여(vīra), 2)전쟁에서 승리하신 분이시여(vijitasagāma), 3)대상의 우두머리시여, 4)짐을 내려 놓은 분이시여(pannabhāra)’라 했다.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대상의 우두머리에 대한 빠알리어는 보이지 않는다. 대체 대상의 우두머리는 무엇을 근거로 번역한 것일까? 그리고 빚없는 자를 뜻하는 anaa를 번역하지 않았다.

 

빅쿠보디의 번역을 보면 1)0 hero(vīra), 2)victor in battle! (vijitasagāma) 3)Your burden lowered(pannabhāra), 4) debt-free one(anaa) 라 하여 빠짐 없이 번역했다. 각묵스님은 anaa(빚 없는이여)를 번역하지 않았다. 대신 엉뚱하게 대상의 우두머리시여가 들어가 있다.

 

각묵스님이 대상의 우두머리시여라는 엉뚱한 말이 삽입된 것은 아마 권청 경(S6.1)’의 게송에 대한 번역을 그대로 가져 왔기 때문일 것이다. 권청경을 보면 “Uṭṭhehi vīra vijitasagāma satthavāha anaa vicara loke”라 되어 있다. 잘 살펴보면 pannabhāra 대신 satthavāha가 들어가 있다. Satthavāha는 캐러번(대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빚 없는 이를 뜻하는 ‘anaa’를 번역하지 않았다. 이는 실역(失譯)’이다. 또 있지도 대상의 우두머리시여를 집어 넣어 오역(誤譯)’이 되었다.

 

사함빠띠 찬탄하기를

 

제석천이 부처님을 찬탄하자 이번에는 사함빠띠가 부처님을 역시 게송으로 찬탄했다. 그런데 제석천이 전송을 말했다면 사함빠띠는 후송을 다 말했다.

 

 

[싸함빠띠]

신들의 제왕이여, 그같이 여래께 예경하지 말고 이와 같이 여래께 예경하라.

 

Uṭṭhehi vīra vijitasagāma

satthavāha anaa vicara loke,
Desassu bhagavā dhamma

aññātāro bhavissantīti.

 

일어서소서 영웅이여, 전쟁의 승리자여,

세상을 거니소서. 캐러밴의 지도자여, 허물없는 님이여,

알아듣는 자가 반드시 있으리니,

세존께서는 가르침을 설하여 주소서.”

 

(Vandanāsutta -부처님에 대한 예경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17, 전재성님역)

 

 

 

 

caravan

 

 

게송을 보면 전송은 제석천이 읊은 것이다. 다만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짐을 내려 놓은 분이시여(pannabhāra)’라는 말 대신 캐러밴의 지도자여(satthavāha)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후송은 청원경(S6.1)의 내용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

 

오역(誤譯)과 실역(失譯)

 

이 게송에 대한 각묵스님과 빅쿠보디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일어서소서, 영웅이시여

전쟁에서 승리하신 분이시여

대상의 우두머리시여, 짐을 내려 놓은 분이시여

세상에서 유행하소서.

세존께서는 법을 설하소서.

구경의 지혜를 가진 자들이 생길 것 입니다.”(각묵스님)

 

“Rise up, 0 hero, victor in battle!

0 caravan leader, debt-free one, wander in the world.

Teach the Dhamma, 0 Blessed one:

There will be those who will understand”(빅쿠보디역)

 

 

각묵스님역을 보면 짐을 내려 놓은 분이시여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 번역에 대한 빠알리어는 보이지 않는다. 초불연 권청경을 보면 빚진 것이 없는 분이시여라 하여 anaa’에 대하여 제대로 번역했다. 이렇게 본다면 내려 놓은 분이시여라는 말은 제석천의 게송에서 pannabhāra를 그대로 가져 온 것이다. 그러나 사함빠띠의 게송에 pannabhāra는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anaa’에 대하여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역이고, 있지도 않은 pannabhāra에 대하여 번역하였기 때문에 오역이다. 빅쿠보디는 0 caravan leader, debt-free one”라 하여 제대로 번역했다.

 

각주를 보면

 

사함빠띠 게송과 관련하여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했다.

 

 

주석서도 복주석도 왜 사함빠띠 범천이 신들의 왕 삭까의 게송을 이와 같이 바로 잡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아마 삭까는 부처님의 해탈만을 칭송하였지 부처님께 법을 설하여 중생들을 해탈-열반의 길로 인도하는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해 주실 것을 권청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초불연 상윳따1 980번 각주)

 

 

각주를 보면 주석을 인용한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Spk nor Spk-pf explains why Brahrna Sahampati corrects Sakka. The reason may be that Sakka praises only those qualities of the Buddha that he shares with other arahants, while Brahma addresses him in his role as sattha, the Teacher and Master of the dispensation. The same exchange of verses, between sakra and Mahabrahma, is recorded at Mvu III 315-16, but set at the Goatherd's Banyan Tree in the period immediately following the Buddha's enlightenment; see Jones, 3:304-5.

 

(CDB 649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제석천과 사함빠띠가 달리 사용한 용어가 있다. 제석천은 짐을 놓아버린 님이여(pannabhāra)”라 했으나, 사함빠띠는 캐러밴의 지도자여(satthavāha)”라 한 것이다. 제석천은 짐을 놓아 버린 자라 하여 해탈자로서 부처님을 찬탄했으나, 사함빠띠는 중생을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대상의 지도자라고 찬탄한 것이다.

 

 

2016-06-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