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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이 넘쳐 흐르는 네 가지 원리

담마다사 이병욱 2016. 6. 17. 12:42

 

공덕이 넘쳐 흐르는 네 가지 원리

 

 

여기 가난한 자가 있다. 늘 빈곤하게 산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불행이 끊이지 않는다. 가난과 빈곤과 불행이 끊이지 않았을 때 삶은 고단하다. 형벌 같은 삶을 산 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가난한 사람의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오랜 옛날에 어떤 사람이 이곳 라자가하 시에서 가난하고 빈곤하고 불행한 사람으로 살았다.”(S11.14)로 시작된다.

 

가난하고 불행한 자

 

가난하고 불행한 자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그는 여래께서 설한 가르침과 계율에 대한 믿음을 닦고 덕성을 닦고 관용을 닦고 지혜를 닦고 나서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 서른 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하늘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는 용모나 명성에서 하늘사람보다 뛰어 나게 빛났다.”라고 말씀 하셨다. 그는 누구일까?

 

주석에 따르면 가난하고 불행한 자는 나병환자 숩빠붓다라 한다. 각주에서는 그는 한때 나이 든 연각불에게 악의를 갖고 욕설을 퍼부어 사후에 지옥에 태어났다. 지옥에서 댓가를 치룬 뒤 라자가하 시의 가난한 아들로 태어나서 문둥병에 걸려 큰 고통을 겪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곧 진리의 흐름에 든 님(예류자)이 되었다. 그리고 돌아다니던 소에 받혀 죽었다. 그러나 그는 죽어서 자신의 믿음 때문에 하늘나라에 태어났다.”(Srp.I.349-350) 라고 설명 되어 있다.

 

나병환자 숩빠붓다이야기는 우다나에서도 나온다. 우다나 나병환자 쑵빠붓다의 경(Ud61)’이 그것이다. 숩빠붓다는 나병환자로 비참하게 살았다. 어느 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모든 것이 바뀐다. 밥을 얻어 먹으로 갔다가 우연히 부처님을 설법을 듣고 인생이 180도 바뀐 것이다.

 

부처님은 숩빠붓다를 위해 설법을 했다. 숩빠붓다가 법석에 앉아 있는 것을 아시고 이 자가 참으로 세상에서 가르침을 알아챌 수 있다.”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왜 이렇게 생각하셨을까? 그것은 숩빠붓다가 설법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숩빠붓다의 전생을 보면 알 수 있다.

 

성자를 업신여긴 죄로

 

숩빠붓다가 나병환자로 태어난 것은 전생에 연각불인 따가라씨킨에게 침을 뱉어 모욕을 주었기 때문이다. 탁발나온 연각불을 보고서 이 문둥이, 문둥이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자가 누구인가라고 생각하며 침을 뱉고 왼쪽으로 돌아 갔다. 이 과보로 오랜 세월 지옥에서 고생하다가 나병환자로 태어났다. 성자에 대하여 생각으로 멸시하고, 침을 뱉어 모욕을 주고, 더구나 왼쪽으로 돌아 무시한 것이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성자를 모욕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탁발나온 성자에 대하여 무례하게 굴었을 때 그 과보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청정한 자를 해치는 과보는 일반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설령 생각으로 업신여겨도 과보를 받는다. 언젠가 오래 전 TV를 보다 도인 같은 사람을 보았다. 머리와 수염이 허연 노인을 보고서 알면 얼마나 안다고라며 업신여기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그 도인이 나타난 것이다. 우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도를 닦은 자에 대하여 업신여기는 마음에 대한 과보가 꿈으로 나타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생멸법을 알게 되었을 때

 

숩빠붓다는 연각불에 대하여 침을 뱉은 과보로 지옥에서 한량 없는 세월을 고통스럽게 보냈다. 지옥고가 다하여 인간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매우 가난하고 빈곤하고 불행하게 살았다. 누구도 쳐다 보지 않고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비참한 나병환자로 살았다. 이런 사실을 부처님은 마음으로 다 알고 있었다. 숩빠붓다가 법석에 앉자 마치 그를 위해 법문하듯이 보시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하늘에 대한 이야기,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가져오는 위험과 타락과 오염, 그것을 여읨의 공덕 등에 관하여 설하였다.

 

숩빠붓다는 처음 듣는 설법이었지만 매우 감격했다. 그리고 그대로 받아 들였다. 마치 깨끗한 옷이 올바로 물드는 것과 같이 나병환자 숫빠붓다에게 무릇 어떠한 것이든 생겨난 것은 소멸되는 법이다.”라며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연기의 법칙을 이해 했을 때 그 자리에서 예류자가 된 것이다.

 

숩빠붓다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에 받혀 죽었다. 가난하고 빈곤하고 불행한 인생이 끝난 것이다. 그러나 청정한 믿음을 내었기 때문에 곧바로 삼십삼천에 화생했다. 예전의 비참했던 용모는 오간데 없이 가장 빛나는 존재가 되었다.

 

나병환자는 부처님을 만나고 인생이 180도 달라졌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인격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생멸법을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하여 한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먹지 않아도 배부른 것처럼 진리를 알았을 때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을 것이다. 그것은 재물과 같은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지혜의 재물’(A7.7) 이라 했다. 지금 가난하고 빈궁해도 일곱 가지 재물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제석천이 게송으로 말하기를

 

나병환자 숩빠붓다는 삼심삼천에 태어났다. 더 이상 가난하고 빈궁하고 불행한 존재가 아니다. 더구나 용모나 명성에서 다른 삼십삼천의 동료들 보다 빼어 났다. 이에 삼십삼천의 신들은 시기하고 실망하고 화를 냈다고 한다. 이에 신들의 제왕 제석천은 그들에게 경고 했다. 제석천은 시기하지 말라고 했다. 나병환자는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과 계율에 대한 믿음을 닦고, 덕성을 닦고, 관용을 닦았기 때문이라 했다. 그리고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의미를 확실하게 전달했다.

 

 

1.

Yassa saddhā tathāgate

acalā suppatiṭṭhitā
S
īlañca yassa kalyāa

ariyakanta pasasita,

 

[제석천]

여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잘 정립되고

고귀한 님들이 사랑하고 찬탄하는

훌륭한 계행을 잘 지키고,

 

2.

Saghe pasādo yassatthi

ujubhūtañca dassana,
Ada
iddoti ta āhu

amogha tassa jivita.

 

참모임에 청정한 믿음을 지니고

통찰이 올바른 자는

가난하다고 불리지 않으니

그 삶은 헛되지 않네.

 

3.

Tasmā saddhañca sīlañca

pasāda dhammadassana,
Anuyuñjetha medh
āvī sara

buddhāna sāsananti.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겨

믿음과 계행과 청정,

그리고 가르침에 대한 통찰에 전념해야 하리.”

 

(Daiddasutta-가난한 사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14, 전재성님역)

 

 

 

 

 

전륜성왕경(S55.1)에서

 

첫 번째 게송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다. 이는 빠알리어 삿다를 말한다. 삿다는 막연한 믿음이나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확신에 찬 믿음이다. 그래서 영어로 ‘confidence’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의 경험과 사유와 추론에 대입하였을 때 틀림 없음을 확인 한다면 믿음이 생겨난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믿음이다. 흔들림 없는 믿음이다.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삿다에 대하여 도에 의해 생긴 믿음이라 했다. 그리고 이 게송에 대하여 전륜성왕 경(S55.1)’을 소개하며 예류과의 네 가지 구성요소(---)를 다 갖춘 것이 된다고 삭까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초불연 상윳따1, 972번 각주) 라 했다.

 

전륜성왕경은 어떤 것일까? 찾아 보니 다음과 같다. 이는 빅쿠보디의 각주와도 일치한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Spk explains faith as faith arrived at via the path (maggen' āgatasaddhā). Good conduct built on virtue (sīla kalyāa) is the noble disciple's "virtue dear to the noble ones" (ariyakantasīla), one of the four factors of stream-entry (55:1), which the stream-enterer does not abandon even in

a future existence.

 

(CBB 1, 644번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에 따르면 예류자가 되는데 있어서 네 가지 요소가 있다고 했다. 참고할 경으로서 ‘(55:1)’를 소개하고 있다. 찾아 보니 왕의 경(S55.1)’이다. 경에서는 네 가지 원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네 가지 원리를 성취하지 못하면 악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설령 천상의 환희동산에서 살더라도 네 가지 원리를 갖추지 못하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와 같은 악처에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류과의 네 가지 구성요소

 

첫 번째 게송에 대한 전재성님과 각묵스님과 빅쿠보디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여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잘 정립되고

고귀한 님들이 사랑하고 찬탄하는

훌륭한 계행을 잘 지키고,(전재성님역)

 

 

여래께 움직이지 않고 잘 확립된 믿음을 가지고

선하고 성자들이 좋아하고 칭송하는 계를 지니고(각묵스님역)

 

“ ‘When one has faith in the TathBgata,

Unshakable and well established,

And good conduct built on virtue,

Dear to the noble ones and praised;(빅쿠보디역)

 

 

부처님은 탁발음식에 의존하고 누더기를 걸치고 살아도 네 가지 원리를 갖추면 지옥 등과 같은 악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청정한 믿음이다. 어떤 믿음인가?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와 계행()에 대한 믿음이다. 이 네 가지 원리를 갖춘다면 사대주를 정복한 것은 이 네 가지 원리를 성취한 것에 비해 그 십육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S55.1) 라 했다.

 

번역에 차이가

 

두 번째 게송을 보면 승가에 대한 청정한 믿음과 통찰이 올바른 자는 가난한 자라고 불리지 않는다고 했다. 비록 가난하고 빈곤하고 불행에 처해 있더라도 나병환자 숩빠붓따처럼 청정한 믿음을 내었을 때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등 일곱 가지 재물(A7.7) 을 가진 것과 같다는 말이다.

 

두 번역서를 보면 번역에 차이가 난다. 빠알리구문 ‘ujubhūtañca dassan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통찰이 올바른 자는라 했고, 각묵스님은 올곧은 자를 보는 자라 했다. 이는 ‘dassana’에 대하여 통찰보는 것으로 달리 한 것이다.

 

빠알리어 ‘dassana’에 대한 빠알리 사전을 보면 ‘sight; intuition; insight’의 뜻이 있다. 보는 것(sight)과 통찰(insight) 두 가지 뜻이 있다. 각묵스님은 전자를 택했고, 전재성님은 후자를 택한 것이다. 그래서  올곧은 자를 보는 자(각묵스님)’통찰이 올바른 자(전재성님)’가 되어 서로 다른 뜻이 되어 버렸다. 빅쿠보디는 And one's view is straightened out,’라 했다.  세 번역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참모임에 청정한 믿음을 지니고

통찰이 올바른 자는

가난하다고 불리지 않으니

그 삶은 헛되지 않네. (전재성님역)

 

승가에 청정한 믿음이 있고 올곧은 자를 보는 자

그는 가난하지 않다 일컬어지나니

그의 삶은 조금도 헛되지 않도다. (각묵스님역)

 

"'When one has confidence in the Sagha

And one's view is straightened out,

They say that one isn't poor;

One's life is not lived in vain. (빅쿠보디역)

 

 

불자가 된다는 것은 삼보에 귀의하고 의지함을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삼보에 대하여 흔들림 없는 믿음과 청정한 믿음을 내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자에 대하여 올곧은 자라 볼 수 있다.

 

올곧다는 말은 ‘ujubhūta’를 번역한 것이다. 영어로 ‘straight; upright of life’의 뜻이다. 바르게 사는 자는 바른 견해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빅쿠보디는 And one's view is straightened out’라 하여 견해가 올곧은 자라는 뜻으로 번역했다.

 

올곧은 견해는 다름 아닌 정견이다. 정견은 현상에 대한 통찰에서 온다. 이렇게 본다면 dassana는 단지 보는 것(Seeing )’이 아니라 통찰(insight)’에 가깝다.  따라서 ‘ujubhūtañca dassana의 뜻은 통찰을 가진 올곧은 자의 뜻이 된다.

 

각묵스님은 올곧은 자를 보는 자라 하여 올곧은 자를 단지 보는자라 하여, dassana에 대하여 단지  보는 것으로 번역했다. 올곧은 자를 보는 자라 하여, 올곧은 자보다 보는 자를 강조하여 게송의 의미와는 동떨어진 번역을 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새겨야

 

세 번째 게송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겨라는 말이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해야 함을 말한다. 각묵스님은 교법을 억념하면서라고 번역했다. 차이는 새기다억념하다이다, 이는 빠알리어 ‘sara에 대한 번역이다. 빅쿠보디는 Remembering’이라 했다. ‘sara의 동사형 ‘sarati’  ‘remembers; moves along’의 뜻이다. 세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겨

믿음과 계행과 청정,

그리고 가르침에 대한 통찰에 전념해야 하리. (전재성님역)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부처님들의 교법을 억념하면서

믿음과 계와 청정한 믿음과 법을 봄에 몰두할지니라. (각묵스님역)

 

"'Therefore the person of intelligence,

Remembering the Buddha's Teaching,

Should be devoted to faith and virtue,

To confidence and vision of the Dhamma."' (빅쿠보디역)

 

 

부처님의 가르침은 새겨야 한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은 실천해야 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명령과도 같다. 그래서 buddhāna sāsananti’라 했을 것이다. 가르침에 대한 통찰에 전념해야 함을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믿음(saddha)과 계행(sīla)과 청정(pasāda)이 바탕되어야 한다.

 

공덕이 넘치는

 

가난하고 빈곤하고 불행한 숩빠붓다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인격적 변화가 수반되었다. “무릇 어떠한 것이든 생겨난 것은 소멸되는 법이다.”라며 진리의 눈이 생겨 예류자가 된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었을 때 세상의 어떤 재물이나 권력, 부귀영화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악처에 나지 않고 선처에 나는 것이 보장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일곱 생이내에는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되어 있다.

 

숩빠붓다는 불법승 삼보와 계행에 대한 청정한 믿음을 내었다. 그 공덕으로 가난하고 빈곤하고 불행했던 숩빠붓다는 삼십삼천에 태어났다. 공덕이 넘쳐 흐른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 공덕이 넘치는 경(A4.52)’에서는 상윳따니까야 가난한 사람의 경(S11.14)’에서 볼 수 있는 똑 같은 게송이 실려 있다.

 

 

여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확립하고

고귀한 님들이 사랑하고 칭찬하는

계행을 지키고

 

참모임에 청정한 믿음이 있어

올곧은 님을 본다면

그는 가난하지 않다고 일컬어지고

그 삶은 헛되지 않으리.

 

슬기로운 자라면,

깨달은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믿음과 계행과 확신을 갖추고

가르침의 관찰에 전념해야 하리.”(A4.52, 전재성님역)

 

 

2016-06-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