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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를 뿌리는 그대로 그 열매를 거두나니

담마다사 이병욱 2016. 6. 3. 12:23

 

 

씨를 뿌리는 그대로 그 열매를 거두나니

 

 

 

내가 남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도 남이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왜 그런가? 기본적으로 나는 착하고 건전하기 때문에 자비심으로 대한다. 그러나 상대방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나의 안전을 타인에게 맡길 수 없다.

 

안전보장을 요구하지만

 

상윳따니까야 제석천의 모음(S110’에서 바닷가 선인의 경(S11.10)’이 있다. ‘안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주 오랜 옛날 많은 선인들이 계행을 지키며 착한 성품을 지니며 바닷가 초암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사람과 아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에 선인들은 하늘 사람들은 옳고 아수라들은 옳지 못하다. 우리에게 아수라의 위협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아수라의 제왕인 쌈바라에게 찾아가서 안전을 보장받으면 어떨까?”(S11.10) 라고 생각 했다.

 

선인들은 안전보장을 아수라에게 요청하겠다고 했다. 힘이 곧 정의이고 조폭과도 같은 아수라에게 안전보장을 바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abhayadakkhia yāceyyāmāti: Srp.I.346에 따르면, 신들과 아수라들간의 전쟁이 커다란 바다를 두고 벌어졌는데, 자주 아수라들이 패하여 신들에게서 도망쳐 선인의 초암이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들은 선인들이 우려하는 것은 아수라들이 패하면, 분노하여 초암을 때려 부술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제왕에게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2120번 각주, 전재성님)

 

 

선인들은 계행을 지키며 사는 자들이다. 기본적으로 착한 성품을 지녔다. 착한 성품의 선인들은 안전보장을 받고자 아수라의 제왕 쌈바라 앞에 나타났다. 시로서 다음과 같이 안전보장을 요구했다.

 

 

Isayo sambara pattā

yācanti abhayadakkhia,
K
āma karohi te dātu

bhayassa abhayassa vāti,

 

[선인]

선인들이 쌈바라에게 와서

안전의 보장을 구하네.

안전을 보장하든 위협하든

그대들은 임으로 결정하시오.’

 

(바닷가 선인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10, 전재성님역)

 

 

선인들은 약자이고 아수라는 강자이다. 선인들은 착한 성품을 가졌고, 아수라들은 악한 성품을 가졌다. 약자가 강자에게 안전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생사여탈권은 아수라에게 있다. 그래서 그대들은 임으로 결정하시오(Kāma karohi te dātu)라고 말한 것이다.

 

안전보장해 줄 수 없다고

 

안전보장을 요청하는 선인들에게 아수라제왕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이어지는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Isīna abhaya natthi

duṭṭhāna sakkasevina,
Abhaya
yācamānāna

bhayameva dadāmi voti,

 

[쌈바라]

제석천을 섬기는

나쁜 자들인 선인들에게 안전은 없네.

그대들은 안전을 구하지만

나는 그대들을 위협한다네.’

 

(바닷가 선인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10, 전재성님역)

 

 

아수라제왕은 선인들에 대하여 나쁜 자들(duṭṭhāna)’이라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제석편을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전보장을 못하겠다고 했다. 오히려 위협을 줄 것이라 했다. 마치 조폭논리와 같다.

 

저주의 게송을

 

선인들은 안전보장을 거부당했다. 이에 선인들은 삼바라를 향해 저주의 게송을 보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Abhaya yācamānāna

bhayameva dadāsi no.

Paiggahāma te eta

akkhaya hotu te bhaya.

 

[선인]

안전을 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대가 우리를 위협한다면

우리는 그대에게 그것을 돌려주니

그대에게 끝없는 위협이 되리.

 

(바닷가 선인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10, 전재성님역)

 

 

선인들은 안전을 요총했다. 그러나 거절 당했다. 같은 편이 아니라 하여 오히려 위협하겠다고 했다. 이에 선인들은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될 것이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대에게 그것을 돌려주니(Paiggahāma te eta)”라 했다.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빠알리어 문구 ‘paiggahāma te etaṃ’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우리는 그대가 준 이것을 섭수하노니라 했다. 전재성님의 우리는 그대에게 그것을 돌려주니와는 정반대의 번역이다. 누구의 번역이 옳은 것일까?

 

빅쿠보디의 번역을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We receive this at your hands”라 되어 있다.  단순하게 직역하면 우리는 당신의 손에서 이것을 받는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배구나 탁구, 테니스에서 리시브라는 말이 있다. 이 때 리시브는 상대방이 서브한 공을 받아 넘김이라는 뜻이다. 인터넷사전에서도 그렇게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빅쿠보디의  “We receive this at your hands”라는 문장은 우리는 이것을 너의 손에 넘겨 준다.”라는 뜻이 된다. 그럼에도 초불연 번역을 보면 우리는 그대가 준 이것을 섭수하노니라 하여 정반대의 번역을 했다.

 

문제의 단어는 ‘paiggahāma’이다. 이 단어는 ‘pati+gaha+hā+ma’의 형태로 되어 있다. 여기서 pati‘back, in return; against’의 뜻이고, gaha‘one who catches or take possession of’의 뜻이다. 가진 자에게 되돌려 준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의 번역 우리는 그대에게 그것을 돌려주니가 올바르다. 빅쿠보디의 번역 “We receive this at your hands” 역시 올 바르다. 그러나 각묵스님의 번역 우리는 그대가 준 이것을 섭수하노니은 문맥에 맞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정반대의 번역으로서 오역이다. 세 번역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Abhaya yācamānāna

bhayameva dadāsi no.

Paiggahāma te eta

akkhaya hotu te bhaya.(S11.10)

 

안전을 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대가 우리를 위협한다면

우리는 그대에게 그것을 돌려주니

그대에게 끝없는 위협이 되리. (S11.10, 전재성님역)

 

“ ‘Though we have asked for safety,

You give us only danger.

We receive this at your hands:

May ceaseless danger come to you!  (S11.10, 빅쿠보디역)

 

우리가 안전을 요청하는데

그대는 우리에게 위험을 주도다.

우리는 그대가 준 이것을 섭수하노니

그대에게 끊임없는 위험이 되리로다. (S11.10, 각묵스님역)

 

 

세 번역을 비교해 보면 아수라제왕에게 불익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안전을 요청했음에도 오히려 위협하려 한다면 그 과보를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뿌린대로 거둔다

 

선인들의 저주 게송은 이어지는 선인들의 게송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선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Yādisa vapate bīja

tādisa harate phala,
Kaly
āakārī kalyāa

pāpakārī ca pāpaka,
Pavutta
tāta te bīja

phala paccanubhossasīti,

 

씨를 뿌리는 그대로

그 열매를 거두나니

선을 행하면 선한 결과가

악을 행하면 악한 결과가 있으리,

사랑하는 이여, 씨앗이 뿌려지면

그대는 그 과보를 받으리라.’

 

(바닷가 선인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10, 전재성님역)

 

 

 

 

 

뿌린대로 거둔다많이 듣는 말이다. 인과응보와 사필귀정의 뜻이다. 영어속담에도 “As you sow, so shall you reap”라 하여 회자 되고 있다. 바이블에서도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느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 7)”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고층의 초기경전에서도 뿌린대로 거둔다라는 말이 있다. 선인들이 아수라왕에게 씨를 뿌리는 그대로 그 열매를 거두나니 Yādisa vapate bīja  tādisa harate phala라 한 것이다.

 

님 주신 밤에 씨뿌렸네

 

선을 행하면 선과보를 받고, 악을 행하면 악과보를 받는다. 게송에서도 선을 행하면 선한 결과가 악을 행하면 악한 결과가 있으리. Kalyāakārī kalyāa  pāpakārī ca pāpaka라 했다. 여기서 선을 뜻하는 ‘Kalyāakārī’does good things; virtuous’의 뜻이고, ‘pāpakārī’‘sinful; wicked’의 뜻이다. 그런데 게송에서 사랑하는 이여, 씨앗이 뿌려지면라는 문구가 있다. 이 문구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했다.

 

 

Pavutta tāta te bīja: pavutta(sk. Pra-uupta) vap(Srp.I.347: khette patiṭṭhāpitam)에서 유래하는 완료분사형으로 뿌려지다(vappate)’와 의미상으로 겹친다. Ggs.I.357에 따르면, 이 문장은 씨앗이, 아빠여, 그대에 의해 뿌려지면 (pavutta tāta te bīja)’으로 읽어야 한다. 그 때 따따(tāta)아빠또는 남자를 부르는 애칭으로 풍자적 표현이다. 역자는 사랑하는 이여라고 다소간 의역을 한다.

 

(2125번 각주, 전재성님)

 

 

조용필 노래 중에 님 주신 밤에 씨뿌렸네라는 구절이 있다. 게송에서 사랑하는 이여, 씨앗이 뿌려지면이라는 구절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사랑하는 이여라는 말은 따따(tāta)라는 말의 의역이라 했다. 여기서 따따(tāta)는 아빠, 즉 남자를 뜻한다고 했다. 씨앗과 아빠, 또는 남자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각묵스님은 그대 이제 씨앗을 뿌렸으니라 했다. 빅쿠보디는 “By you, dear, has the seed been sown;”라 했다. ‘사랑하는 님, 그대에 의해 씨앗이 뿌려지면이라는 뜻이 된다.

 

잠을 잘 자려면

 

아수라의 제왕 삼바라는 선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계행을 잘 지켜 계의 향기가 바람을 거슬러 가는 선인들에게 단지 제석천의 편을 들었다고 하여 적대시 하고 앙갚음 하려 한 것이다.

 

아수라왕 삼바라는 저주의 과보를 받았다. 경에 따르면 선인들의 의해서 저주받아 밤에 세 번이나 잠을 설쳤다.”라 되어 있다. 주석에 따르면 밤에 세 번이나 그는 잠들자마자 백 개의 창으로 온몸이 찔린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었다. 다른 아수라가 와서 안부를 묻고 위로하면서 날이 밝았다. 그 때부터 그의 마음은 병들어 와들와들 떨었다. 그래서 그의 다른 이름이 베빠찟띠(Vepacitti)가 된 것이다.”(Srp.I.347) 라 했다.

 

자비심이 없이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찬 사람은 잠을 잘 못 이룬다. 그래서 세상에 잠을 잘 자는 사람의 조건으로서 탐욕과 분노를 버리라고 했다. 이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탐욕으로 인한 고뇌가 생겨나면, 그 탐욕으로 인한 고뇌로 불타면서 괴롭게 잠을 자지 않겠습니까?(A3.35) 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또 하나 잠을 잘 자는 방법이 있다.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섬기고 닦고 익히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만들고 확립하고 구현시켜 훌륭하게 성취하면, 열한 가지 공덕이 기대된다. 열한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편안히 잠자고, 행복하게 깨어나고, 악몽을 꾸지 않고, 사람들에게 아낌을 받고, 귀신들에게조차 사랑을 받고, 신들이 보호해 주고, 불이든 독약이든 거의 해를 입지 않고, 빠르게 삼매에 들고, 안색이 맑고, 당황함이 없이 임종에 들고, 더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하느님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A11.15) 라 했다.

 

 

 

2016-06-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