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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도 슬픔도 없는 궁극은 어디에, 아수라와 제석천의 하늘전쟁

담마다사 이병욱 2016. 5. 28. 11:47

 

 

절망도 슬픔도 없는 궁극은 어디에, 아수라와 제석천의 하늘전쟁

 

 

 

신들의 전쟁

 

흔히 아수라장이라는 말을 한다. 사전적 의미는 이리저리 널부러져 있는 집기들 사이에서 치고 받고 싸우는 싸움판, 그 사이에서 소리 높여 욕하고 싸우며 부르짖는 그 난장판의 현장을 일컫는 말이다.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는 이 말은 불교에서 유래한다.

 

치고받고 싸움판, 또는 흐트러진 현장, 그리고 커다란 혼란에 대하여 아수라장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싸움을 의미하는 뜻이 매우 강하다. 실제로 초기경전을 보면 아수라는 싸움꾼이었다.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을 보면 아수라들은 신들의 적대자로 인간계와 아귀계 사이에 존재하지만, 서른 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근처에 있다가 자주 신들에게 전쟁을 일으키는 무리를 말한다.(성전협 전재성님) ”라고 설명해 놓았다. 아수라는 전쟁의 신인 것이다.

 

상윳따니까야에 제석천의 모음(Sakkasayutta, S11)’이 있다. 선신이라 볼 수 있는 제석천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상윳따니까야에 아수라상윳따는 보이지 않는다. 싸움꾼 악신에 대한 이야기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라상윳따와 대비된다. 악마의 모음을 따로 만든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본다.

 

아수라의 공격

 

제석천의 모음 첫 번째 경은 제석천과 아수라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에게 얘기를 들려 주는 형식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옛날 아수라들이 하늘사람들을 공격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신들의 제왕 제석천은 하늘사람 쑤비라에게 말했다. ‘그대 쑤비라여, 아수라가 신들을 공격하고 있다. 그대 쑤비라여, 나아가서 아수라에 대항하라.’ 수행승들이여, 하늘사람 쑤비라는 전하,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신들의 제왕 제석천에게 대답하고는 방일에 빠졌다.”

 

(쑤비라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1, 전재성님역)

 

 

 

asura

 

 

경에서 하늘사람 쑤비라(Suvīra)’가 나온다. 주석에 따르면 제석천의 아들이라 한다. 아수라가 전쟁을 걸어 왔을 때 다섯 무리의 방어선이 있다고 했다. 나가, 수빤나, 꿈반다, 약카, 사대천왕을 말한다. 아수라들이 이 다섯 전선을 무너뜨리면 사대왕천은 신들의 제왕인 제석천에게 보고 하는데, 그때 직접 마차를 타고 전선에 가거나 그의 아들들 가운데 한명에게 임무를 맡긴다고 한다.

 

환희의 동산에서

 

제석천은 아들 쑤비라에게 방어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쑤비라는 소홀히 했다. 무려 세 번에 걸쳐 나아가서 아수라에 대항하라라며 방어를 명하였으나, 그 때 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며 말만 할 뿐 도무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은 것이다.

 

전쟁의 신이자 악신인 아수라군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무려 다섯 곳의 방위망을 뚫은 아수라와 일전을 앞두고 있다. 그럼에도 제석천의 아들 쑤비라는 방일에 빠졌다. (pamāda āpādesi)”라 했다. 게으름피운 것이다.

 

왜 쑤비라는 게으름 피운 것일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그는 요정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60요자나가 넘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대로에 들어가 난다나 정원등에서 별자리 놀이를 하며 소일했다.”(SA.i.340) 라 되어 있다.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천상의 환희동산에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놀고 있었던 것이다.

 

제석천은 답답했던 것 같다. 쑤비라에게 애쓰지도 않고 정진하지 않고 안락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쑤비라여, 그곳으로 가라. 나도 또한 그곳으로 데려 가다오.”(S11.1) 라며 질책했다. 이에 쑤비라는 그곳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방일하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해야 할 일을 수행하지도 않은 그곳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극에 달했을 때

 

쑤비라는 최종수비대장으로서 아수라군대를 막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오로지 환희동산에서 안락만 추구한다. 적은 바로 코 앞에 있는데 물리칠 생각은 않는다. 그리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Akammunā devaseṭṭha

sakka vindemu ya sukha,

Asoka anupāyāsa

tamme sakka vara disāti,

 

[쑤비라]

제석천이여, 신들 가운데 높은 님이여,

해야 할 일이 없고 안락한,

제석천이여, 절망이 없고 슬픔도 없는

그 궁극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쑤비라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1, 전재성님역)

 

 

절망도 없고 슬픔도 없는 곳은 어디일까?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삼십삼천 환희의 동산에서도 절망과 슬픔이 있는 것이다. 아수라가 싸움을 걸어 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다음으로 윤회하는 세계에 살기 때문이다.

 

천상에 태어나도 복과 수명이 다하면 윤회할 수밖에 없다. 복을 다 찾아 먹었기 때문에 이전에 지은 악업에 대한 과보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천상에 태어난 자는 이전에 조금이라도 지은 악업에 대한 과보로 악처에 나기 쉽다.

 

쑤비라는 적을 목전에 앞두고 향락에 빠졌다. 두려움이 극에 달했을 때 여인의 치마폭에 숨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제석천이여, 절망이 없고 슬픔도 없는 그 궁극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Asoka anupāyāsa tamme sakka vara disāti)”라 한 것이다.

 

번역의 차이점

 

위 게송에서 두 번역서의 차이점이 발견되었다. 이는 빠알리구문 “asoka anupāyāsa tamme sakka vara disāti”해석에 대한 것이다. 전재성님은 제석천이여, 절망이 없고 슬픔도 없는 그 궁극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라 했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삭까여, 슬픔 없고 절망 없는 그런 은총 제게 주소서.”라고 번역했다. 빠알리어 ‘varaṃ’ 대하여 궁극은총이라는 전혀 다른 번역을 한 것이다.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역자는 보디스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vara을 은총(boon)을 뜻하는 명사로 이해해서 이렇게 옮겼다.” (초불연 상윳따1, 923번 각주) 라고 설명했다. 이에 빠알리어 vara을 찾아 보았다.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varaṃ’ 대하여 ‘[adv.] better’라 되어 있다. 빠알리어 vara’를 찾아 보니 ‘excellent; noble. (m.), a boon; favour’의 뜻이다. 은혜라는 뜻의 ‘boon’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1의 뜻은 ‘excellent(훌륭한)’이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니

 

빅쿠보디의 번역을 찾아 보았다. 관련구절에 대하여 “0 Sakka, The sorrowless state without despair: Grant me that, Sakka, as a boon”라고 번역했다. 특히 “tamme sakka vara disā”문구에 대하여 “Grant me that, Sakka, as a boon”라고 번역했다. 이는 삭까여, 저에서 은혜를 부여 하소서.”라는 뜻이다. 과연 제석천은 슬픔과 절망이 없는 은혜를 주는 전지전능한 존재일까?

 

은총을 뜻하는 boon과 관련된 vara에 대하여 빅쿠보디의 각주를 찾아 보았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Spk: In pada a, alasassa (in Se and Eel; alasvassa in Be &

Ee2) should be resolved: alaso assa; in pada c, Sabbakāmasamiddhassa

should be resolved: Sabbakāmehi samiddho assa

In pada d, I read disāt ti with Be, Se, and Ee2, as against

disan ti in Eel.

 

Spk paraphrases pada d thus: "0 Sakka, supreme deva,

show me that blessed, supreme, state (or) region, point it

out to me, describe it" (sakka devaseṭṭha tam me vara uttama

hāna okāsa disā ācikkha kathehi).

 

VAT proposes that because pada d includes no other noun for an adjective

vara to qualify, it would be better to take v vara itself as the noun meaning "a boon" and disā as meaning "to grant, to bestow." This meaning is attested to in PED, S.V. disati, but without references.

 

I have followed VAT's suggestion, though I cannot cite any other instances where v vara is used in relation to disati. It is usually governed by the verb dadāti, as at Vin 1278,23.

 

(CDB Vol1, 607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는 ‘VAT’의 제안을 받아 들여 vara에 대하여 은총의 뜻을 지닌 ‘a boon’으로 번역한다고 했다. 여기서 ‘VAT’는 무엇을 말할까? 찾아 보니 ‘Vanarata, Aananda Thera’라 되어 있다.

 

와로 와란뉴 와라도 와라하로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빅쿠보디의 제안을 받아 들여 vara에 대하여 은총으로 번역했다. 이는 빅쿠보디가 설명한 것과 같이 vara이라는 말 그 자체가 은총의 뜻이 있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궁극이라 번역했다. 이런 번역어는 최상을 뜻한다. 숫따니빠따 라따나경(보배의 경, Sn2.1)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Varo varaññū varado varāharo           
Anuttaro dhammavara
adesayī          
Idampi buddhe ratana
paīta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위없는 것을 알고, 위없는 것을 주고,

위없는 것을 가져오는, 위없는 님께서,

최상의 위없는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깨달은 님에게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stn234)

 

 

게송에서 ‘vara을 뜻 하는 말이 네 번 사용되었다. 이는 첫 구절 Varo varaññū varado varāharo”를 말한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위없는 것을 알고(Varo), 위없는 것을 주고(varaññū), 위없는 것을 가져오는(varado), 위없는 님께서(varāharo)라고 번역된다. 훌륭한 것, 궁극적인 것을 뜻한다. 부처님과 가르침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열반의 길이니

 

빠알리어 ‘vara에 대하여 은총의 뜻으로 번역하면 이어지는 게송 제석천의 답송과 맞지 않는다. 제석천은 은총을 베풀만한 전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쑤비라가 제석천이여, 절망이 없고 슬픔도 없는 그 궁극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라 했을 때 제석천은 다음과 같이 답송했다.

 

 

Sace atthi akammena

koci kvaci na jīvati,
Nibb
āassa hi so maggo

suvīra tattha gacchāhi

mañca tattheva pāpayāti.

 

[제석천]

해야 할 일이 없고 쇠퇴하지 않는 곳이

어느 곳 어디인가에 있다면,

그것은 실로 열반의 길이니

쑤비라여 그곳으로 가라.

나도 또한 그곳으로 데려 가다오.’

 

(쑤비라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1, 전재성님역)

 

 

제석천은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할 일 없고 쇠퇴하지 않는 곳을 말한다. 이는 쑤비라가 방일하지 않고 애쓰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곳이 있다면 가르쳐 달라는 말에 대한 답송이다.

 

제석천의 모음 해제에 따르면, 제석천은 부처님의 이상적인 평신도로 나온다. 그는 신으로서 지배자의 위치를 갖지만 아직 인간적인 존재로 유덕한 가장이 되는 일곱가지 덕목을 지닌다고 했다. (S11.11). 이렇게 본다면 제석천이 비록 신들의 제왕, 즉 인드라신이지만 윤회계를 벗어나지 못한 중생에 지나지 않는다.

 

제석천에 대하여 슬픔과 절망 없는 은총을 주는 자로 묘사한 것은 문맥상 맞지 않다. 더구나 제석천은 답송에서 나도 또한 그곳으로 데려 가다오라 함으로써 열반의 길로 가고자 하는 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제석천에 대하여 서른 셋 하늘에 대한 최고 지배자이고 통치자인 제석천은 노력과 정진을 칭송하는 자일 것이다.”(S11.1) 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애쓰고 노력하고 정진하는

 

부처님이 제석천과 아수라의 전쟁에 대하여 이야기한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경의 말미에 수행승들이여, 그렇다면, 잘 설해진 가르침과 계율로 출가하여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아직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정진하는 여기 그대들에 대해서는 말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S11.1) 라며 반문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애쓰고 노력하고 정진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그럼에도 방일한다면 쑤비라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아수라의 군대가 다섯 방위망을 뚫고 코 앞에 이르렀음에도 환희동산에서 요정들과 놀고 있다면 아수라의 군대에게 정복당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행승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수호하지 못한다면 악마에 정복당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보릿단의 경(S35.248)’에서는 하늘의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를 부여 받아 감각적 쾌락을 탐닉하는 것에 대하여 손발과 목이 밧줄로 묶이는 것과 같다고 했다.

 

 

 

2016-05-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