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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담마다사 이병욱 2016. 3. 23. 10:11

 

 

한번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어떻게 물어야 할까?

 

야차 알라와까는 부처님에게 묻는다. 야차는 사람은 어떻게 거센 흐름을 건너는가? 어떻게 커다란 바다를 건너는가? 어떻게 괴로움을 뛰어넘는가? 그리고 어떻게 완전히 청정해지는가?”(S10.12) 라며 묻는다.

 

야차는 어떻게(katha)’ 라며 물었다. 여기서 katha‘how?’의 뜻이다. 이렇게 묻는 것이 바른 질문이다. 바르지 않은 질문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존이시여,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취합니까? (S12.12) 와 같은 말이다. 이와 같은 질문은 중생이니 개인이니 하는 개념이 들어가기 쉽다. 그렇다면 어떻게 물어야 할까? 이에 부처님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자양분이 생겨납니까? (kissa nu kho bhante viññāāhāro)”라고 묻는 것이 바른 질문이라 하였다. 이런 질문에 나()나 중생 등으로 표현된 ‘자아’가 들어가 있지 않다. 그대신 ‘어떻게(kissa)’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이렇게 ‘어떻게(kissa)’라는 말이 들어가 있을 때 부처님은 연기법적으로 설명하였다.

 

부처님 답송하기를

 

야차의 질문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하였다.

 

 

Saddhāya tarati ogha

appamādena aṇṇava,
Viriyena dukkha
acceti

paññāya parisujjhatīti.

 

[세존]

사람은 믿음으로 거센 흐름을 건너고

방일하지 않음으로 커다란 바다를 건너네.

정진으로 괴로움을 뛰어넘고,

지혜로 완전히 청정해진다네.”

 

(Āavakasutta -알라바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0.12, 전재성님역)

 

 

 

the other shore

 

 

 

첫 번째 구절에서는 믿음(Saddhā)이 강조 되었고 두 번째 구절은 불방일(appamāda)이 강조되었다. 믿음을 가지면 폭류를 건널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불방일하면 큰바다를 건널 수 있다고 했다. 믿음 보다 불방일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거센흐름(ogha)은 무엇일까?

 

거센흐름(ogha)은 무엇일까? 폭류라고도 번역되는데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은 감각적 쾌락의 거센흐름, 존재의 거센흐름, 견해의 거센흐름, 무지의 거센흐름을 말한다. 이 네 가지 거센흐름은 위 게송의 구절과 매칭 되어 있다. 초불연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네 가지 견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매칭 시켜 놓았다.

 

 

믿음으로 폭류를 건너고(견해의 폭류, 예류도와 예류과)

불방일로 험난한 바다를 건너노라.(존재의 폭류, 일래도와 일래과)

정진으로 괴로움을 극복하고(감각적 욕망의 폭류, 불환도와 불환과

통찰지로 청정하게 되도다.”(무명의 폭류, 아라한도와 아라한과)

(S10.12, 각묵스님역)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사향사과에 대하여 각각의 폭류와 게송의 구절을 매칭 시켜 놓았다. 이와 같은 각주는 빅쿠보디의 각주에서도 설명된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Spk distributes the four "floods" (ogha) over the four lines of the reply and sees each line as implying a particular path and fruit; on the four floods, see n.1.

 

Since the faith faculty is the basis for the four factors of stream-entry (see 55:1), the first line shows the stream-enterer, who has crossed the flood of views;

 

the second line shows the once-returner, who by means of diligence has crossed the flood of existence except for one more existence in the sense-sphere world;

 

the third line shows the nonretumer, who has overcome the flood of sensuality, a mass of fering;

 

and the fourth line shows the path of arahantship, which includes the fully purified wisdom by means of which one crosses over the flood of ignorance.

 

 (CDB VOL1, 598번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견해의 폭류를 건너면 예류도와 예류과가 성취된다고 했다. 이는 믿음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 “Saddhāya tarati ogha라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각 번역자들은 사람은 믿음으로 거센 흐름을 건너고(전재성님역)” “믿음으로 폭류를 건너고(각묵스님역)” “By faith one crosses over the flood(빅쿠보디역)”라 했다.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믿음은 예류자의 네 가지 구성요서의 토대(본서 제6권 전륜성왕의 경(S55:1) 8절참조)”라 했다. 이는 빅쿠보디의 “Since the faith faculty is the basis for the four factors of stream-entry (see 55:1)”라는 각주와 일치한다. 예류자가 되려면 네 가지 믿음이 토대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계행

 

빅쿠보디가 언급한 S55.1을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네 가지원리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전륜성왕이라 하더라도 네 가지 원리를 성취하지 못하면 지옥, 축생, 아귀와 같은 악처에서 태어남을 말한다. 그 네 가지 원리는 무엇일까? 다음과 같다.

 

 

[세존]

부처님에 관하여 이와 같이 세존 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에 존귀하신 님입니다.’라고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을 갖춘다.

 

가르침에 관하여 이와 같이 세존 께서 잘 설하신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라고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을 갖춘다.

 

참모임에 관하여 이와 같이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사람의 모임은 훌륭하게 실천합니다.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사람의 모임은 정직하게 실천합니다.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사람의 모임은 현명하게 실천합니다.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사람의 모임은 조화롭게 실천합니다. 이와 같이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사람의 모임은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 사람으로 이루어졌으니 공양받을 만하고 대접받을 만하며 보시받을 만하고 존경받을 만하며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복밭입니다.’라고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을 갖춘다.

 

또한 그는 파괴되지 않고 균열되지 않고 잡되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자유로워지고 현자가 칭찬하고 번뇌에 물들지 않고 삼매로 이끄는 고귀한 님들이 사랑하는 계행을 갖춘다. 그는 이와 같이 네 가지 원리를 갖춘다.”

 

(왕의 경, 상윳따니까야 S55.1, 전재성님역)

 

 

네 가지 원리는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계행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원리를 가졌을 때 예류도와 예류과를 성취하게 되어 견해의 폭류를 건널 수 있다고 했다.

 

한번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가려면 거센흐름을 건너 가야 한다. 너무 흐름이 빨라 휩쓸려 갈 수도 있다. 안전하게 건너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또한 계행을 갖추어야 한다. 이는 불자들이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준수하는 것과 같다.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불자가 된다. 삼보를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청정한 믿음을 내라고 했다. 그것도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의심을 하거나 못 미더워 한다면 저 언덕으로 건너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예류자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세 가지의 타파가 제시된다. 그것은 개체가 있다는 견해, 매사의 의심, 규범과 금계에 집착(Sakkāyadiṭṭhi vicikicchitañca Sīlabbata”(stn231) 을 말한다. 자아가 있다는 견해, 삼보에 대한 의심, 잘못된 수행방법을 가지고 있다면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어설 수 없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예류자가 되면 아무리 높게 잡아도 일곱 생 이내에는 완전한 열반에 들것이라 했다. 그래서 심오한 지혜를 지닌 님께서 잘 설하신,  성스런 진리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여덟 번째의 윤회를 받지 않습니다. (Ye ariyasaccāni vibhāvayanti Gambhīrapaññena sudesitāni Kiñcāpi te honti bhusappamattā Na te bhava aṭṭhama ādiyanti”(stn230) 라 했다. 예류자에게 아무리 큰 잘못이란 말은 아주 작은 잘못을 말한다. 왜 그런가? 성자의 흐름에 든 자에게 있어서 아직 남아 있는 번뇌는 손톱의 먼지 보다 더 적기 때문이다.

 

한 번 성자가 되면 흐름을 타게 된다. 흐름을 타게 되면 열반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그가 설령 저 언덕에 도달하지 않고자 하더라도 한번 흐름을 탄 이상 열반의 언덕에 도달 하지 않을 수 없다. 저 언덕에 가기 싫다고 하여 다시 이 언덕에 머물 수 없는 것이다. 많이 잡아서 일곱생 이내이면 마치 불이 꺼진 것처럼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된다. 그래서 그에게 과거는 소멸하고 새로운 태어남은 없으니,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를 파괴하고 그 성장을 원치 않으니,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stn235) 라 했다.

 

견해의 폭류를 건넌 성자는 이번에는 불방일로 존재의 폭류를 건너고 정진으로 감각적 욕망의 폭류를 건너 간다. 마지막으로 지혜로서 무명의 폭류를 건너 가면 저 언덕으로 건너가게 된다. 지혜로 완전히 청정해진 성자가 저 언덕으로 건너갔을 때 다시는 이 언덕으로 건너 오지 않는다. 온갖 견해와 존재와 욕망과 무명의 이 언덕으로 다시 올 수 없는 것이다.

 

 

2016-03-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