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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법(甘露法)은 불사법(不死法: amata)이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6. 3. 16. 13:00

 

 

감로법(甘露法)은 불사법(不死法: amata)이다

 

 

 

법회를 하면 법사가 등장한다. 이때 청법가를 부른다. 가르침을 설해 주기를바라는 노래이다. 이광수가 작사한 청법가를 보면 덕높으신 스승님 사자좌에 오르사 사자후를 합소서 감로법을 주소서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감로법(甘露法)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청법가에서

 

인터넷사전에 따르면 감로법에 대하여 법의 맛이 청정하여 중생의 몸과 마음을 길러주기 때문에 감로라 했다.라 되어 있다. 또 다른 사전을 보면 “[불교] 부처의 가르침을 한번 믿으면 끝없는 공덕과 이익을 얻는다는 뜻에서 그 가르침을 다디단 이슬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감로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풀이 하면 단 이슬이다. 부처님 가르침도 단 이슬처럼 감미롭다는 의미 일 것이다.

 

청법가는 한글로 된 가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청법게라 하여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게송이 있다. 이에 대하여 법은 원하는 자에게 주는 것, 범천의 권청과 이광수의 청법가(請法歌)(2010-07-3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한문으로 된 게송은 청법게는 어떤 내용일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청법게(請法偈)

 

차경심심의(此經甚深意)    

대중심갈앙(大衆心渴仰)    

유원대법사(唯願大法師)    
광위중생설(廣爲衆生說)    

 

이 경의 깊고 깊은 뜻을

대중들은 목마르게 갈구합니다.

오직 원컨대 대법사님께서는

중생들을 위해 널리 법을 설해주소서.

 

 

한문청법게에서는 감로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목마르게 갈구한다는 말은 나온다. 진리에 갈증이 난 자가 법을 청하는 것이다.

 

법은 청하는 자에게 설한다고 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아무나 붙잡고 가르침을설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침에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가르침에 갈증 난 자에게 설하였을 때 달디단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래서 감로법이라 했을 것이다.

 

무비스님은 화엄경에서

 

감로법에 대하여 불사법라고도 한다. 죽지 않는 법이라는 뜻이다. 죽지 않으니 태어남도 없다. 그래서 감로법은 불생불사의 법이다. 감로법에 대하여 무비스님은 화엄경 강좌에서 이렇게 해석했다.

 

 

시감로도사청량(示甘露道使淸凉)하야: 감로의 도를 보여서 하여금 청량케 했다.

감로는 불사(不死)의 영약이다. 감로도는 불사법이고 불사(不死)의 가르침이다. 불교는 궁극적으로 생사를 초월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감로도가 되는 것이다. 감로수, 감로약, 감로병은 불교의 가르침을 상징한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감로수가 제일이다. 진리에 목말라 있는 사람에게는 부처님의 진리가 감로의 물이나, 감로의 이슬, 감로수를 담은 감로병이다. 생사를 초월하는 불사의 길이다.

 

(무비스님,  6-3 세주묘엄품 제1의3/대중의 득법과 찬불(십회향位衆 제4회향-제3회향) )

 

 

화엄경에 실려 있는 시감로도사청량(示甘露道使淸凉)’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 감로도라는 말이 나온다. 이에 대하여 무비스님은 감로도는 불사법이고 불사(不死)의 가르침이다.”라고 해석하였다.

 

최봉수교수 말하기를

 

감로법이 불사법이라는 말은 최봉수교수의 불교강좌에서도 들었다. 최봉수교수는 감로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감로라는 것이 도대체 뭐냐? 이 감로라는게 인도말로 하자면 아무르타다르마(a-mrta-dharma)’ 라 해요. 아무르타라 하는 것을 감로라고 아주 문학적으로 번역을 한 거죠. 아무르타라고 하는게 뭐냐? 무르타(mrta)는 죽음이고 아(a)는 부정하는 말이고, 다르마(dharma_는 법이라 해서 불사법이라 해요.

 

(최봉수교수 비교종교 강의 제1)

 

 

최봉수교수는 감로법이 불사법이라 했다. 이를 산스크리트어로 아무르타다르마(a-mrta-dharma)’라 했다. 빠알리어로 말하면 아마따담마(amata-dhamma)’가 된다. 아마따는 영어로 ‘Deathlessness’라 한다.

 

아마따가 감로라는 의미는 빠알리사전에도 나온다.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amata에 대하여 ‘ambrosia; the deathless state’라 표현 하고 있다. 여기서 영어 ambrosia신들이 먹는 음식라는 뜻이다. 더 구체적으로  ‘The drink of the gods, ambrosia, water of immortality’라 소개 되어 있다. 또 신들이 마시는 것으로서 불멸의 물(water of immortality)’이라 한다.

 

숫따니빠따에서

 

불멸의 물을 마시면 죽지 않을 것이다. 불사로서 아마따는 숫따니빠따에서 이와 같은 게송으로 표현 되어 있다.

 

 

Sacca ve amatā vācā

asa dhammo sanantano,
Saveca atthe ca dhamme ca

 āhu santo patiṭṭhitā.

 

진실은 참으로 불사의 말이니,

그것은 영원한 가르침입니다.

진실속에, 유익함속에, 가르침속에

참사람들이 서 있다고 합니다.” (stn453)

 

 

첫 번째 구절에서 ‘amatā vācā’에 대하여 불사의 말이라 번역되어 있다. 이는 진실 또는 진리(Sacca)를 말한다.  이와 같은 진리에 대하여영원한 가르침(dhammo sanantano)’ 이라 했다.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amatā는 불사(不死) 또는 감로(甘露)라 불리운다.”(2369번 각주) 라 했다. 아마따가 본래 죽지 않음을 뜻하지만 달디 단 이슬이라는 말과 동의어임을 말한다. 이는 주석에서 그 감미로움 때문에 감로와 유사하다.(sādhubhāvena amatasadisā)” (Prj.II.399) 라 한 것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불사를 뜻하는 아마따가 달콤한 이슬이라는 뜻의 감로와 동의어이다. 주석에서는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 감미로움 때문에 감로와 유사하다.”라 하였으나 가르침에 갈증에 난 사람들에게는 단 이슬 같은 가르침이다. 아침에 작은 이슬을 볼 수 있다. 그런 이슬은 해가 솟아 오르면 금방 증발해 버리고 만다. 이렇게 극소량의 이슬은 갈증이 난 자에게는 감미롭고 달콤한 것이다.

 

상윳따니까야에서도

 

감로로서 아마다는 상윳따니까야에서도 보인다. 상윳따니까야 야차의 모음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Kimme katā rājagahe manussā

madhupītāva seyyare
Ye sukka
na payirupāsanti

desenti amata pada.

 

[야차]

감미로운 술에 취한 듯 지내는

라자가하 시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가?

불사의 삶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쑥카에게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네.”

 

(Pahamasukkāsutta-쑥까의 경1, 상윳따니까야 S10.9, 전재성님역)

 

 

이 게송이 설해지게 된 동기가 있다. 야차가 수행녀 쑥까의 설법을 듣고 나서부터이다. 야차는 수행녀의 설법을 듣고 청정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라자가하 이 거리 저 거리를 다니면서 이 게송을 읊은 것으로 되어 있다.

 

법을 청하는 자의 태도

 

야차는 수행녀(빅쿠니) 쑥카의 설법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런 좋은 법을 알려 주고자 대도시 라자가하 큰 사거리 이곳 저곳에서 시를 읊었다. 마치 오늘날 전철안이나 도심의 사거리에서 보는 전도사를 연상케 한다.

 

전도사들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친다. 그러나 별다른 반응이 없다. 전도사가 예천불지를 외칠 때 마다 호응하기는커녕 피해 간다. 왜 그럴까?

 

법은 청해야 설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찾아오지 않으면 설하지 않았다. 찾아 오더라도 가까이 앉지 않으면 설하지 않았다. 가까이 앉더라도 질문하지 않으면 설하지 않았다. 질문하더라도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지 않으면 설하지 않았다. 귀 기울여 듣더라도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법을 설하지 않았다. 기억하더라도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지 않는다면 설하지 않았다. 이것이 법을 청하는 자의 태도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여섯 가지 조건(A8.82)’이 충족되지 않으면 법을 설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야차는 쑥카빅쿠니의 설법에 대하여 떠들고 다녔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사거리에서 쑥카빅쿠니의 감로법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으나 사람들은 들은체 만체 한 것이다. 이에 야차는 실망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라자가하 시 사람들이 마치 감미로운 술에 취한 것 같다고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게송에서 첫 번째 구절을 보면  감미로운 술에 취한(madhupītāva seyyare)”이라 번역되어 있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술을 마신 듯 잠들어 있고라 했다.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그들은 마치 꿀 술을 마신 것처럼 잠들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을 마신 자는 머리를 들지 못하고 그 자리에 정신을 잃어 버리기 때문이다.”라고 주석(SA.i.316)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누군가 진리를 설하였을 때 귀를 기울이는 자들은 드물다. 대부분 오욕락을 즐기기에 바쁘다. 이런 현상은 부처님 당시 라자가하 시내의 사람들이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래서 불사의 삶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쑥카에게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네. (Ye sukka na payirupāsanti desenti amata pada라 하였을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불사의 길 설하는 숙까를 섬기지 않는 구나.”라 하였다.

 

물리지 않는 가르침

 

수행녀 쑥카로부터 설법을 들은 야차는 법을 알리고자 이곳 저곳 다니며 알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오욕락에 취했는지 도무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 하다. 더구나 죽지 않는 법을 설하였음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몹시 실망한 듯 하다청정한 믿음을 낸 야차의 두 번째 게송은 다음과 같다.

 

 

Tañca pana appaivānīya

asecanakamojava,
Pivanti maññe sappaññ
ā v

alāhakamivaddhagūti.

 

그녀의 가르침은 참으로 물리지 않고

고갈되지 않는 감로수이네.

생각하건데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나그네가 구름을 마시듯 그것을 마시라.”

 

(Pahamasukkāsutta-쑥까의 경1, 상윳따니까야 S10.9, 전재성님역)

 

 

 

 

Dew

 

 

좋은 말은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부처님의 말씀이 그렇다. 예를 들어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게송은 언제 어느 때 읽어도 가슴을 울린다. 감정이 격해져 있을 때 읽으면 차분해 지고, 우울할 때 읽으면 가슴이 채워진다. 수행녀 쑥카가 설한 부처님의 가르침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청정한 믿음을 낸 야차는 그녀의 가르침은 참으로 물리지 않고(Tañca pana appaivānīya)라 했다.

 

여기서 물리지 않는다라는 말은 ‘appaivānīya를 번역한 것이다.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일반적인 음식은 아무리 맛이 있더라도 자꾸 먹으면 물리지만, 가르침은 다르다. 자꾸만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라고 주석(Srp.I.316) 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빠알리어 ‘appaivānīya’‘no turning back’의 뜻이다. 한자어로 不能遮止的, 反對不能的이다. ‘거부할 수 없다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각묵스님은 그 법은 거부할 수 없고라 했다. 이에 대하여 보통의 음식은 아무리 맛이 있더라도 계속해서 먹으면 물리지만 이 법은 물리지 않는다.”라고 주석을 인용하여 설명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물리지 않는다. 한자어로 표현 한다면 식상하지 않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무리 들어도 싫증나지 않고 물리지 않는 가르침이다.

 

가장 큰 난제는

 

말을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 이전에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있다 보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전에 했던 말이잖아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 나오면 성공이라 한다. 왜 그럴까? 메시지가 분명하게 전달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라 한다.

 

부처님의 말씀은 아무리 들어도 물리지 않고 식상하지 않다. 들어도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한다. 그래서 좋은 문구는 통째로 외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공감하는 것일까? 그것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 하였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면서 많은 문제에 부딪친다. 어려운 문제도 있고 쉬운 문제도 있다. 다리에 상처가 나서 아픔을 겪고 있다면 이것도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큰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다.

 

지금 직장을 잃어서 통장의 잔고가 줄어 들 때 큰 문제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큰 문제가 아니다. 다시 일을 시작하면 한번에 해결 되기 때문이다. 노후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옆도 쳐다 보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 가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를 말한다. 마치 운명과도 같은 문제에 부딪쳤을 때 사람들은 그제서야 절대자를 찾고 초월적 존재에게 의지한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지금 죽음에 임박한 자가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까?  

 

불사의 가르침

 

이 세상 누구도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호걸도 죽음에 이르면 자신의 힘으로 손가락 하나 까닥 하지 못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죽음을 극복하였다. 그리고 죽지 않는 불사의 법을 설하였다. 이것이 불사의 길 (amata pada)에 이르는 가르침이다. 그런 가르침에 대하여 감로법이라 한다.

 

감로법은 불사의 가르침이다. 이는 고갈되지 않는 감로수이네 (asecanakamojava)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감로수의 자양분을 모두 갖추었으니라 하였다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감로수로 옮긴 원어는 asecanaka이다. 주석서는 anāsittaka(섞이지 않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주석서는 이 단어가 sinc(to sprinkle)에서 파생된 단어로 설명하지만 학자들은 다른 예를 들면서 이 단어가 sek(to satiate)에서 파생된 것으로 간주한다. 역자는 후자를 따르고 보디 스님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감로수로 의역을 하였다.

 

주석서는 법이 감로수이고 자양분을 갖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먹는 음식은 다른 양념들을 뿌려야 맛이 나지만 법은 그 법의 성품(dhammata)에 의해서 본래 달콤하고 영양분이 가득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가미할 필요가 없다.” (SA.i.316)

 

(초불연 상윳따1 903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은 빅쿠보디의 제안을 받아 들여 ‘asecanaka’에 대하여 감로수로 의역했다고 밝혔다. 또 법이 감로수인 이유에 대하여 주석서를 근거로 하여 설명하고 있다. 감로수와 관련하여 전재성님은 특별한 언급이 없이 다만 ‘asecanakam ojavaṃ’에 대하여 주석을 인용하여 달리 집어 넣어야 할 것이 없는 술이라고 각주 하였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니

 

각묵스님이 빅쿠보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하는 내용은 어떤 것일까? cdb에서 관련 각주를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Spk explains asecanakamojava ("irresistible"), in pada a, thus: "Whereas ordinary food, even though very delicious, fails to give pleasure when one eats it again and again and becomes something to be rejected and removed, this Dhamma is different. The wise can listen to this Dhamma for a hundred or a thbusand years without becoming satiated."

 

Spk glosses asecanakam ojava in pada b, as anāsittaka ojavanta, "unadulterated, nourishing," and explains that unlike material food, which becomes tasty by the addition of condiments, this Dhamma is sweet and nutritious by its own nature.

 

While Spk thus takes asecanaka to be derived from sincati, to sprinkle, Brough maintains that the word is derived from a different root sek, meaning "to satiate." He renders it "never causing surfeit" (gandhārī Dhamapada, p. 193, n. to 72). See too CPD, s.v. asecanaka, which quotes the traditional Skt explanation from the Amarakosa: trpter nasty anto yasya darsanat; "that the sight of which gives endless satisfaction."

 

In Pali the word is used more in connection with the senses of smell and taste (e.g., at AN 111 237, 22 and 238,l). My rendering "ambrosial" is intended to suggest the same idea as the Skt definition, but more concisely so that it can also be incorporated into the description of mindfulness of breathing at 54:9(V 321,22 and 322,1,11).

 

Pada d reads: valahakam iva panthagu (in Be and Ee1 Se and Thi 55 end with addhagu). Spk: "Like travellers(pathika) oppressed by the heat (who drink) the water released from within a cloud."

 

(cdb 591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의 각주를 옮겨 보았다. pdf에 실려 있는 것(cdb vol1)이다. 빠알리원어를 최대한 살렸으나 산스크리트어를 옮기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asecanaka’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asecanaka’에 대하여 역자는 후자를 따르고 보디 스님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감로수로 의역을 하였다.”(903번 각주) 라 했다. 그러나 빅쿠보디의 각주 그 어디에도 감로수를 뜻하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주석을 인용하여 “This Dhamma is sweet and nutritious by its own nature”라는 말은 나온다.

 

빅쿠보디는 ‘asecanaka’에 대하여  “ambrosial” 이라 번역했다. 이 말은 아주 맛있는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빅쿠보디가 번역한 영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But the wise, as it were, drink it up-

That [Dhamma] irresistible,

Ambrosial, nutritious-

As travellers do a cloud.”(S10.9, 빅쿠보디역)

 

 

각묵스님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은 거부할 수 없고

감로수요 자양분을 두루 갖추었으니

지혜로운 자 그것을 마실 수밖에 없으리니

마치 나그네가 구름을 마시듯이.” (S10.9, 각묵스님역)

 

 

게송을 보면 빅쿠보디는 ‘asecanaka’에 대하여 ‘Ambrosial(아주 맛있는)’라고 번역했음을 알 수 있다. 각묵스님은 감로수요 자양분을 두루 갖추었으니라 하여,‘asecanaka’에 대하여감로수로 번역했다. 전재성님은 고갈되지 않는 감로수이네라 하여 역시 감로수라 번역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감로수(asecanaka)와 관련하여 앙굿따라니까야 ‘AN III. 237, 22 and 238.l’를 찾아 보라고 했다. 어떤 내용일까?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Seyyathāpi bho puriso aggarasaparititto na aññesa hīnāna rasāna piheti, evameva kho bho, yato yato tassa bhoto gotamassa dhamma suāti: yadi suttaso yadi geyyaso yadi veyyākaraaso yadi abbhūtadhammaso, tato tato na aññesa puthusamaa brāhmaappavādāna piheti. (1)

 

[삥기야닌]

존자여, 예를 들어 사람이 최상의 맛 있는 음식을 포식하면 포식 할 때 마다, 다른 열등한 맛은 바라지 않듯이, 존자여, 이와 같이 경이든, 응송이든, 수기이든, 미증유법이든, 존자 고따마의 가르침을 들으면 들을 때마다, 언제나 다른 많은 바라문의 가르침을 바라지 않게 됩니다.”

 

(Kāraapāli sutta -까라나빨린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194, 전재성님역)

 

 

이 경은 바라문 까라나빨린과 바라문 삥기야닌과의 대화이다. 바라문 삥기야닌은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다. 그러자 바라문 삥기야닌은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하여 지혜가 있는지, 현명한 자인지궁금해서 물어 보았다. 그러자 삥기야닌은 내가 수행자 고따마의 지혜가 총명한지 알 수 있겠습니까? 고따마의 지혜가 총명한지를 알 수 있는 자는 그와 동일한 사람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 본다고 했다. 부처님이 얼마나 지혜가 있는지, 부처님이 얼마나 총명한 지는 부처의 경지에 올라 가야 알 수 있을 것이다바라문 삥기야닌은 부처님 설법을 듣고 매료되었다.그래서 음식의 비유를 들어 부처님의 가르침이 최상의 음식과 같다고 설명하였다.

 

감로수의 가르침

 

바라문 삥기야닌은 부처님의 설법에 매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다섯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1) 최상의 맛있는 음식을 포식하는 것, 2) 꿀떡과 같이 순수한 달콤한 맛을 얻는 것, 3) 전단향 냄새와 같은 순수한 방행의 향을 얻는 것, 4) 유능한 의사가 질병을 치유하는 것, 5) 갈증을 느낀 사람이 목욕하고 물을 마실 때 피곤과 열뇌가 가시는 것, 이렇게 다섯 가지로 보았다. 이 중에 마지막 갈증에 관한 것이 아마 감로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Seyyathāpi bho pokkharai acchodakā sātodakā sītodakā setakā supatitthā ramaīyā, atha puriso āgaccheyya ghammābhitatto ghammapareto kilanto tasito pipāsito, so ta pokkharaa ogāhetvā nahātvā ca1 pītvā casabbadarathakilamathapariāha paippassambheyya. Evameva kho bho, yato yato tassa bhoto gotamassa dhamma suāti yadi suttaso yadi geyyaso yadi veyyākaraaso yadi abbhūtadhammaso, tato tato sabbadarathakilamathapariāhā paippassambhantī'ti.

 

[삥기야닌]

존자여, 예를 들어 차갑고 신선하고 시원하고 은빛을 반사하는 물을 지닌 연못이 있는데, 더위에 불타고 더위에 사로잡혀 지치고 목마르고 갈증을 느끼는 한 사람이 와서 그 연못에 들어가 목욕하고 물을 마시고 모든 걱정과 피곤과 열뇌가 가시듯이, 존자여, 이와 같이 경이든, 응송이든, 수기이든, 미증유법이든, 존자 고따마의 가르침을 들으면 들을 때마다, 언제나 모든 걱정과 피곤과 열뇌가 사라집니다.”

 

(Kāraapāli sutta -까라나빨린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194, 전재성님역)

 

 

바라문 삥기야닌이 다섯 번째 비유로 든 것은 감로수이다. 부처님가르침에 대하여 감로수와 같다고 본 것이다. 진리에 갈증이 난 자에게 부처님가르침을 설한 것과 같다. 그래서 모든 걱정과 피곤과 열뇌가 가신다고 했다.

 

아나빠나사띠(호흡관찰)를 하면 불사에 이를 것

 

감로수라 번역된 빠알리어 asecanaka는 영어로 ‘full and delicious in itself’의 뜻이다. 한자어로는 無混濁的, 純粹的, 美味的로 설명된다. 빅쿠보디는 ambrosial’이라 하여 아주 맛있는 음식이라 했다. 맛있는 음식과 같은 부처님 법에 대하여 54:9’를 참고 하라고 했다.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호흡새김에 의한 집중을 닦고 호흡새김에 의한 집중을 익히면, 고요하고 승묘한 감로의 지복에 들어, 악하고 불건전 현상이 생겨날 때마다 즉시 사라지게 하고 그치게 한다.”

 

(베쌀리의 경, 상윳따니까야 S54.9, 전재성님역)

 

 

여기서 감로의 지복에 들어라는 말이 있다. 감로라는 말은 ‘asecanaka’를 번역한 말이다. 영어로 ambrosial’이라 하여 아주 맛있는 음식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의 번역자들은 감로로 번역하였다. 그런 감로는 다름 아닌 불사(amata)를 말한다. 그래서 아나빠나사띠(호흡새김)을 하면 불사에 이를 것이라 했다.

 

나그네가 구름을 마시듯

 

게송에서 네 번째 구절을 보면 나그네가 구름을 마시듯(alāhakamivaddhagūti)”(S10.9) 이라 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주석을 인용하여 열기에 지친 여행자들이 내리는 빗물을 마시듯이라 했다. 이는 빅쿠보디가 소개한 앙굿따라니까야 베쌀리의 경에 실려 있는 다섯 번째 이야기와 일치한다. 각묵스님은 여행자들이 그름이 내리는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라고 각주 하였다. 빅쿠보디는 주석을 인용하여 “Like travellers(pathika) oppressed by the heat (who drink) the water released from within a cloud.”라 하였다. 열기에 지친 나그네가 구름으로부터 생성된 물을 마시는 것처럼이라는 뜻이다.

 

감로법은 불사법이다

 

불사법이 감로법인 이유는 두 번째 게송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그녀의 가르침은 참으로 물리지 않고 고갈되지 않는 감로수이네. 생각하건데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나그네가 구름을 마시듯 그것을 마시라.”라는 구절로 알고 있다. 마치 더위에 불타고 더위에 사로잡혀 지치고 목마르고 갈증을 느끼는 한 사람이 와서 그 연못에 들어가 목욕하고 물을 마시고 모든 걱정과 피곤과 열뇌가 가시는 것과 같다. 마치 절에 가면 시원한 약수를 마시는 것 같다.

 

절에 가면 약수가 있다. 약수의 명칭은 다양하다. 가장 많은 이름이 아마 감로수일 것이다. 산길을 힘들게 올라 온 참배자가 약수를 마시면 시원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감미롭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감로수와 같아서 우리를 불사로 이끌어 준다.

 

부처님은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불사의 법을 가르치셨다. 제자들은 불사의 법을 통하여 스스로 불사의 법을 성취하였다. 죽지 않는 법을 성취한 것이다. 그렇다면 가르침을 실천하면 왜 불사가 될까?

 

사람들은 오온을 자기 것이라 여긴다. 그러다보니 유아론자에게 죽음은 진짜 죽음을 의미한다. 육체적 죽음과 함께 정신적으로도 죽는 것이다. 물론 지은 업이 있기 때문에 어떤 존재로든지 재생한다.

 

오온을 자기것으로 여기는 유아론자들은 모두 죽는다. 언제 죽을 지 알 수 없지만 죽을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다른 문제는 다 해결해도 죽음의 문제만큼은 해결 할 수 없다. 자신의 몸이 파괴 되어 죽는 것이고, 자신의 느낌, 지각이 파괴 되면 죽는 것이다. 왜 그런가? 몸과 느낌, 지각, 형성, 정신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오온의 파괴가 죽음이 된다. 그러나 오온을 내 것이라고 집착하지 않는 아라한에게 죽음이 있을 수 없다.

 

무아론자에게 오온의 파괴는 죽음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아라한은 이미 자아에 취착된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오언)의 짐을 완전히 모두 내려 놓은 상태(ohitabharo)에 있기 때문이다.(Itv.38-39, 702번 각주)”라 하였다.  아라한에게 죽음은 애초에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불자들은 법회 할 때 청법가를 부른다. 그래서 덕높으신 스승님 사자좌에 오르사 사자후를 합소서 로법을 주소서라며 청법한다. 이때 감로법이 바로 불사법이다.

 

 

 

2016-03-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