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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보살행이란? 복전이 되어 무여열반을 보여 주는 것

담마다사 이병욱 2016. 3. 7. 14:48

 

대승보살행이란? 복전이 되어 무여열반을 보여 주는 것

 

 

요즘은 글로벌시대이다. 그리고 정보통신시대이다. 손안에 스마트폰이 있어서 어느 곳에서나 소통하고 있다. 모든 정보는 오픈되고 공유화 된다. 이렇게 글로벌화 되고 모든 정보가 오픈되는 시대에 아직도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 있다. ‘소승이라고 부르는 자들을 말한다. ‘큰수레’ ‘작은수레를 말하면서 악의적으로 비방하는 자들을 말한다.

 

소승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보살사상을 강조한다. 깨달은 자라면 주변사람들에 대하여 나 몰라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로지 해탈과 열반만 추구하는 불교를 비방한다. 그리고 해탈한 성자들을 비방한다. 그런데 이런 비방에는 뿌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뿌리일까? 그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대승경전이다. 일부 대승경전에서는 아라한을 폄하하고 심지어 능멸하기 때문이다.

 

아라한을 능멸한 유마거사

 

몇 년 전 불교방송에서 불교강좌를 들었다. 매일 아침에 방송되는 불교강좌는 유마경이었다. 유마경을 설한 법사는 놀랍게도 “대승에서는 평등을 보기 때문에 따로 지혜와 어리석음을 구별하는 사성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놀랐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가볍게 무시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부처님의 제자인 아라한이 재가의 거사에게 모욕당하는 장면이다. 이에 대하여 사성제를 주장하지 않는 마하야나, 유마경 강의를 듣고(2010-12-2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부처님의 제자는 어떻게 모욕당하였을까? 유마경을 보면 유마거사가 유마거사 집으로 탁발나온 수보리존자에게 극언을 퍼 붓는 장면이 있다. 옮겨 보면 그런 경지에 들어가지 못한 당신에게 복덕이 되기는 커녕 지옥, 아귀, 축생의 경계에 떨어질 것이다. 그대에게 보시하는 것은 복전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그대에게 공양을 올리는 사람 역시 3악도에 떨어질 것이다.” 라는 내용이다.

 

유마거사는 공의 도리를 모르는 수보리는 지옥과 같은 악처에 떨어질 것이라고 저주하고 있다. 더구나 공의 도리를 모르는 자에게 음식 등을 공양하면 보시한 자 역시 함께 삼악도에 떨어질 것이라 한다.

 

수보리는 유마거사집으로 밥 얻으로 갔다가 호되게 야단 맞는다. 경에 따르면 얼마나 얼얼 했던지 “수보리는 유마거사의 말을 듣고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 없었고, 무어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답을 잃고, 망연자실한채 ‘바루’를 그냥 두고 유마거사의 집에서 나가려고 했다.”라 되어 있다. 마치 수보리를 칠칠치 못한 이미지의 바보 영구처럼 묘사 하고 있다.

 

수보리는 밥을 얻어 먹기는커녕 혼쭐이 나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수보리는 발우를 놓고 나왔다. 이를 본 유마거사는 마치 혀를 차듯이 가엾게 여겨 발우를 챙겨 주었다는 것이다.

 

현명한 자가 나룻배의 키를 잡아야

 

대승에서는 소승에 대하여 보살행을 하지 않는다고 비방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아라한이 된 성자에게 마치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은 자비에 대하여 수 많이 말씀 하셨다. 또 대승에서 말하는 소위 보살행에 대한 것도 있다. 숫따니빠따 나룻배의 경을 보면 틀림 없는 대승사상이다. 마치 큰 수레를 연상시키는 것 같다. 이에 대하여 보살사상은 이미 구현되어 있었다! 나와경(나룻배의 경, Sn2.8)(2012-05-12)’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나룻배의 경에서 보살행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1. 누군가에게 배워 진리를 알게 되었다면,

마치 하늘사람이 제석천을 섬기듯, 그를 대하라.

많이 배운 사람은 섬김을 받으면,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진리를 밝혀 보인다.

 

2. 현명한 님은 그것을 추구해서 주의를 기울여,

진리에 따라 가르침을 실천한다.

이러한 사람을 가까이 하여 게으르지 않는다면,

식견이 있는 자, 슬기로운 자, 지혜로운 자가 된다.

 

3. 가르침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질투심이 있는,

소인이나 어리석은 이를 가까이 섬긴다면,

이 세상에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의심을 버리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른다.

 

4. 마치 사람이 물이 넘치고, 홍수가 져서,

물결이 거센 강에 빠지면, 그 물결에 휩쓸려 떠 내려가는 것과 같다.

그런 이가 어찌 남을 건네 줄 수 있겠는가.

 

5. 마찬가지로 가르침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

많이 배운 사람에게서 그 의미를 경청하지 않으면,

스스로도 모르고 의심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가 어찌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

 

6. 현명한 자가 튼튼한 나룻배에 올라서 노와 키를 장착하고,

그 도구에 대하여 잘 알고 잘 다룬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을 태워서 건네줄 수 있는 것과 같이,

 

7. 지혜에 통달하고 자신을 수양하고 많은 것을 배워 동요하지 않는

성품을 가진 사람은, 가르침을 귀를 기울이고 따르려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깨우칠 수 있다.

 

8.그러므로 참으로 현명하고 많이 배운 참사람과 가까이 하라.

의미를 알고 길을 추구하면서 가르침을 인식하면,

그는 안락을 얻으리라.

 

(Nava sutta- 나룻배의 경, 숫따니빠따 Sn2.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현명한 자가 나룻배의 키를 잡아야 함을 말씀 하셨다. 배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 키를 잡았을 때 저 언덕으로 무사히 건너 갈 수 있음을 말한다. 만약 어설프게 아는 자가 키를 잡았을 때 어떻게 될까? 아마 거센 파도가 일렁이면 조작미숙으로 배가 침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에 빠져 있는 자가 물에 빠져 있는 자를 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런 이가 어찌 남을 건네 줄 수 있겠는가.”(stn319) 라 하셨다.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다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다. 이는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자를 구원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쭌다여, 스스로 진흙에 빠진 사람이 다른 진흙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쭌다여, 스스로 진흙에 빠지지 않은 사람만이 참으로 진흙에 빠진 다른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이 가능하다. 쭌다여, 자신을 제어하지 않고 수련시키지 않고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킬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쭌다여, 자신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킨 사람만이 참으로 다른 사람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킬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M8) 라고 하셨다.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고, 진흙에 빠져 있는 자가 진흙에 빠져 있는 자를 구할 수 없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오염 되어 있는 자가 탐진치로 살아 가는 중생을 구할 수 없다. 누가 구할 수 있는가? 부처님은 진흙에 빠지지 않은 사람만이 참으로 진흙에 빠진 다른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이 가능하다.”라 하셨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된 자만이 중생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현명한 자만이 나룻배의 키를 잡을 수 있다. 모든 오염원이 소멸된 자만이 중생을 구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날까?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 삭까나마까의 경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라자가하 깃자꾸다 산에 머물 때의 일이다. 그 때 삭까라는 야차가 부처님께 다가왔다. 다가와서 게송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Sabbagantha*ppahīnassa

vippamuttassa te sato
Sama
assa na ta sādhu

yadaññamanusāsatīti.

 

 [싹까]

그대가 모든 사슬에서 벗어나

완전히 해탈한 수행자라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그대에게 옳은 일이 아니네.”

 

(Sakkasutta-싹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0.2, 전재성님역)

 

 

야차 삭까는 부처님의 반대편에 서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악마와 유사하다. 초기경전에서 악마 마라는 항상 부처님의 반대편에 서서 이야기 하고 있다. 깨달으면 되었지 굳이 사람들에게 진리를 알려 주려 하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야차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그대에게 옳은 일이 아니네.”라 하여 중생구제에 대하여 신경 쓰지 말라는 식으로 말한다.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피곤한 것이다. 왜 그럴까? 상윳따니까야 어울림의 경(S4.14)’를 보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네. 분수에 맞지 않는 짓거리를 하면서 호의와 혐오에 집착하지 말라.”라는 악마 빠삐만의 게송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감사를 표하면 호의를 일으키고, 다른 사람이 경멸을 표하면 혐오를 일으키기 때문이라 하였다.

 

부처님이 사람들과 친하게 사는 이유는

 

법을 설하는 이가 있다. 그런데 설법을 사는 하는 사람에게 호의와 혐오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차라리 숲속에서 조용히 사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설법하였다. 왜 그랬을까? 부처님은 삭까에게 이렇게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Yena kenaci vaṇṇena

savāso sakka jāyati,
Na ta
arahati sappañño

manasā anukampitu.

 

[세존]

싹까여, 어떠한 이유로든

어떤 사람과 친밀함이 일어난다면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그에 대한 동정으로

마음이 동요해선 안 되네.

 

 

Manasā ce pasannena

yadaññamanusāsati,
Na tena hoti sa
yutto

sānukampā anuddayāti.

 

그러나 깨끗하고 청정한 마음으로

그가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면

그는 연민과 동정 때문에

사슬에 묶이지 않는다네.”

 

(Sakkasutta-싹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0.2, 전재성님역)

 

 

religious mendicancy

 

 

부처님이 설법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자비심때문이다. 중생들이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민과 동정 때문에라 하였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생각하였을까? 각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야챠는 이렇게 생각했다:

부처님과 같은 수행승은 해탈의 상태에 있더라도 다른 사람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그들과 관계를 맺게 되면, 다시 세상에 묶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이렇게 답했다:

현자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그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다. 현자는 삿된 욕망이 없이 오직 자비심으로 상대방에게 해탈의 길을 열어 줄 뿐이다.

 

(1918번 각주, 전재성님)

 

 

이 각주를 보면 주석이 인용되어 있지 않다. 전재성님의 견해임을 알 수 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초불연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The purport of the Buddha's verses is that a wise man should not take to instructing others if he is at risk of becoming attached, but he may do so out of compassion when his mind is purified and his sympathy is not tainted by worldly affection.” (cdb 562번 각주, 빅쿠보디) 라 되어 있다.

 

부처님은 해탈한 자임에도 사람들과 접촉 하였다.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을 수 있지만 반대로 비방을 받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삭까의 말대로 세상에 묶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사람들과 접촉하여 진리를 설한 것은 자비심때문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세상에 묶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획득과 손실’, ‘명성과 악명’, ‘칭송과 비난’, ‘즐거움과 괴로움이렇게 여덟 가지를 말한다. 그러나 해탈한 자에게 팔풍, 즉 여덟 가지 바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성자들은 세상의 비난이나 칭찬에 전혀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자비심으로 세상사람들과 접촉하기 때문이다.

 

뭇삶에 대한 자비심 때문에

 

부처님이 법을 설하게 된 동기가 초기경전에 실려 있다. 이는 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S6.1)’에서 뭇삶에 대한 자비심 때문에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자비심 때문에 사람들과 접촉한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부처님의 보살행을 잘 나타낸 구절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라한이 육십명이 되어 교단으로서 모습을 갖추어가자 전도를 선언하였다.

 

부처님의 전도선언문을 보면 역시 세상을 불쌍히 여겨(lokānukampāya)”(율장대품 악마에 대한 이야기1) 라는 말이 나온다. 부처님은 왜 세상을 불쌍하게 보았을까세상사람들은 지금 당장 쾌락을 향유하려 하며 살지만 결국 죽게 되어 있다. 오온에 대한 집착으로 인하여 새로운 태어남을 유발하기 때문에 세세생생 삼계를 두레박처럼 윤회하게 된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세상사람들이 너무나 불쌍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 길을 떠나라고 명령한 것이다.

 

복전이 되고 무여열반을 보여 주었을 때

 

세상사람들을 어떻게 구해야 할까? 분명한 사실은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수렁에 빠져 있는 자가 역시 수렁에 빠져 있는 자를 구할 수 없다. 물에 빠진 자를 구하려면 물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 다음에 밧줄이나 배를 이용하여 구해 내면 된다.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자를 구할 수 없다. 현자만이 어리석은 자를 구할 수 있다. 해탈한 현자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도 세상에 대한 자비심 때문이다. 자비심이 없다면 산속에 들어가 홀로 살아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해탈한 자가 세상 속에서 탁발하며 사는 것은 세상에 대한 자비심 때문일 것이다. 무엇 보다 해탈하여 열반하는 모습을 주었을 때 이 보다 더한 중생구제가 없을 것이다.

 

어떤 외도는 소승불교 스님들은 강건너 불이 났음에도 태연히 앉아 있습니다.”라며 비방한다. 그리고 아라한이 되더라도 열반에 들지 않고 세세생생 이 중생계가 다 할 때까지 중생구원하는 보살을 찬탄한다. 그래서 자신은 소승은 비방하고 대승은 추켜세우고라 하여 노골적으로 초기불교와 테라와다불교비방한다. 과연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보살행을 하지 않은 것일까?

 

대승불교를 표방하는 한국불교에서는 탁발의 전통이 없다. 있긴 있었지만 스님들의 위의를 손상시킨다 하여 종단에서는 공식적으로 금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스님들은 세상사람들과 소통하지 않게 되었다. 산 높고, 물 맑고, 공기 좋은 심산유곡에서 마치 신선처럼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 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스님과 세상과의 소통은 사라졌다. 스님과 불자들과 소통은 물론 스님과 스님과의 소통도 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모습이 지독한소승일 것이다.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탁발의 전통이 남아 있다. 가급적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탁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세상사람들과의 강력한 소통방식이라는 것이다. 탁발하러 나가 차례로 집을 방문하였을 때 부자나 가난한 자 구분 없이 복을 짓게 해주는 것이다. 더구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된 성자에게 공양하면 그 과보는 매우 크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가 되면복전(福田: puññakkhetta)’이 된다. 복전이 되어 복을 지을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야말로 보살행이다. 더구나 공양 받았을 때 그대가 행복하기를!” 라고 자애의 축원하거나 또는 그대가 하루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기를!”라고 연민의 마음을 내었을 때 이것 또한 보살행이다.

 

가장 큰 보살행은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다. 청정한 삶을 살아 열반을 실현하였을 때 세상사람들로 하여금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생에 완전한 열반을 실현하여 무여열반에 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보살행이 아닐까?

 

 

2016-03-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