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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전을 외우더라도 행하지 않는다면, 문소성지(聞所成智)보다 수소성지 (修所成智)를

담마다사 이병욱 2016. 2. 25. 12:45

 

많은 경전을 외우더라도 행하지 않는다면, 문소성지(聞所成智)보다 수소성지 (修所成智)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경전을 매일 접한다. 2600여년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제자들이 기억하고 암송하였다. 이를 구전하여 현재와 같은 엄청난 분량의 경전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경전이 많은 것은 부처님이 45년간 쉼 없이 설하였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이를 놓치지 않고 기억하였다. 또 기억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실천하여 궁극적 경지에 이르렀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하였다. 이 말은 한자어로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이다. 조선후기 저자 미상의 추구집推句集) ’에 실려 있는 글이다. 또 안중근이 애송하였다는 글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花有重開日 人無更少年(화유중개일 인무갱소년)”라 되어 있다. 이는 꽃은 다시 또 피어나는 날이 있으련만사람에겐 젊은 시절이 또 오지 않으니라는 내용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라는 말은 틈만 나면 책을 접하여 자신의 정신적 향상과 성장을 위하자는 말이 된다.

 

틈만 나면 경전을 접하여야 한다. 부처님당시 제자들은 책을 본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잘 귀담아 들었을 것이다. 또 들은 것을 잊지 않기 위하여 암송하였다. 만일 부처님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버리면 어떻게 될까? 아마 엉뚱한 말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부처님으로부터 이 어리석은 자여(moghapurisa)”라는 말을 듣기 쉬울 것이다.

 

왜 움츠러들었을까?

 

상윳따니까야 숲의 품경전 읽기의 경이 있다. 한때 한 수행승이 꼬살라국에 있는 우거진 숲에 머물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런데 이전에는 꽤 오랫동안 경전을 읊으면서 지냈던 그 수행승이 나중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하며 움츠러들었다.”(S9.10) 라 되어 있다. 초불연에서는 그 무렵 그 비구는 처음에는 지나치게 암송을 많이 하며 머물다가 나중에는 무관심해져서 침묵하며 편히 지내고 있었다.”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차이는 움츠러들었다편히 지내고 있었다이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가 ‘sakasāyati’이다.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주석을 인용하여 이 단어는 거북이가 승냥이 앞에서 목과 팔다리를 움츠리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한 것이다.”라 하였다. 이어지는 주석을 보면 수행승이 항상 경전을 읽고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오온)을 관찰하여 거룩한 님(아라한)의 경지를 얻었기 때문에 경전을 읊조릴 이유가 없어져서, 사실은 움추려 든 것이 아니라 그 경지를 즐기고 있었다.”(Srp.I.296) 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초불연의 번역 편히 지내고 있었다라는 말은 주석적 번역이라 볼 수 있다. 이 문구와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but on a later occasion he passed the time living at ease and keeping silent.”라 하였다. ‘침묵을 지키며 편안하게 있었다라는 뜻이다.

 

숲속의 신 경책하기를

 

수행승이 경전을 암송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하며 지내자 숲속의 신이 다가왔다. 다가와서 이렇게 게송으로 말하였다.

 

 

Kasmā tuva dhammapadāni bhikkhū

nādhīyasi bhikkhūhi savasanto,
Sutv
āna dhamma labhatippasāda

diṭṭheva dhamme labhatippasasanti.

 

[하늘사람]

수행승이여, 왜 다른 수행승들과 함께

가르침을 배우지 않는가?

가르침을 들으면 청정한 기쁨을 얻고

살아 있을 때 칭찬을 받네.”

 

(Sajjhāyasutta -경전 읊기의 경, 상윳따니까야 S9.10, 전재성님역)

 

 

숲속의 신은 수행승이 거룩한 경지, 즉 무학의 아라한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정진을 게을리 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경책한 것이다.

 

현법(現法 : diṭṭheva dhamme)에 대하여

 

게송에서 네 번째 구절을 보면 살아 있을 때 칭찬을 받네(diṭṭheva dhamme labhatippasasanti)”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살아 있을 때라는 말은 빠알리어 ‘diṭṭheva dhamme’를 번역한 것이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암송자는] 지금-여기에서 칭송을 받습니다.”라 하여 지금-여기라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Hearing the Dhamma, one gains confidence; In this very life [the reciter] gains praise”라 하였다. ‘diṭṭheva dhamme’에 대하여 In this very life’라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빠알리어 딧테와담마(diṭṭheva dhamme)는 매우 중요한 술어이다. 여기서 ‘diṭṭha’‘seen; found’의 뜻으로 현재 보여진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diṭṭheva dhamme’는 현재 보여진 법 즉 현법(現法)’이라 한다. 영어로는 ‘here and now’라 하여 지금 여기라 한다. 그런데 diṭṭheva dhamme가 반드시 지금 여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문맥에 따라 한 생으로 표현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diṭṭheva dhamme’는 빠알리사전에서‘meaning the visible order of things, the world of sensation, this world’라 하였다. 반대말은 ‘samparāyika dhamma’이다. 이는 samparāyika‘belonging to the next world’의 뜻이므로  ‘samparāyika dhamma’ ‘the state after death, the beyond’, 죽음 이후의 상태또는 내세라 설명된다.

 

욕망을 떠났으니

 

숲속의 신이 수행승을 경책 하였다. 이에 수행승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한다.

 

 

Ahu pure dhammapadesu chando

yāva virāgena samāgamimha,
yato vir
āgena samāgamimha

ya kiñci diṭṭha va suta muta vā,
Aññ
āya nikkhepanamāhu santoti.

 

[수행승]

욕망에서 떠남을 이루기까지

일찍이 가르침의 말씀을 원했다.

이제 우리는 욕망의 떠남을 이루었으니.

보거나 듣거나 감지한 것마다 알고 나면,

참사람들은 버려야 할 것이라 부르네.”

 

(Sajjhāyasutta -경전 읊기의 경, 상윳따니까야 S9.10, 전재성님역)

 

 

욕망의 떠남이라는 말은 ‘virāga’를 번역한 것이다. 초불연에서는 탐욕의 빛바램이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dispassion(냉정, 공평)’이라 번역하였다.

 

주석에 따르면 ‘virāga’에 대하여 색이 바래져서 없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아라한에게는 번뇌가 바래서 소멸하는 것을 의미한다. ‘virāga’에 대하여 초불연 각주를 보면 주석을 인용하여 성스런 도를 뜻한다.”라고 하였다. ‘virāga’에 대하여 한역으로 離欲(이욕)’이라 한다. 이는 ‘virāga’‘vi+rāga’의 형태이기 때문에 욕망없음의 뜻이기 때문이다.

 

가르침마저 버려야 할까?

 

게송을 보면 무학의 번뇌다한 아라한은 더 이상 이룰 것도 공부할 것도 없다. 그래서일까 모든 것을 알고 나면 버려야 할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고 가르침마저 버려야 할까? 만일 금강경에서와 같이 법상응사하황비법 (法相應捨 何況非法)’이라 하여 가르침마저 버려야 한다면 부처님의 제자라 볼 수 없다. 뗏목으로 거센흐름을 잘 건넜다면 뗏목을 버린다거나 불살라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은 저 언덕에 도달했을 때 ‘이제 나는 이 뗏목을 육지로 예인해 놓거나, 물속에 침수시키고 갈 곳으로 가면 어떨까?’라고 생각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같이 해야 그 사람은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한 것이다.” (M22) 라 하신 것이다.

 

원담스님의 수행일기에서

 

하루라도 경전을 접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이 실감난다. 아직까지 번뇌가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겨야 함을 말한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경전을 보며 살 수 없다. 경전을 더 이상 보지 않고 살아 갈 수 있는 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근 원담스님의 수행일기에서 경전과 관련된 글을 보았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2016215()맑음

 

김윤식(金允植, 1936~, 문학평론가)<황홀경의 사상,1984>의 서문에 나오는 마지막 문장이다.

 

인생이 짧은 마당에 예술이 길 이치가 없다. 설사 길더라도 대단치 않을 것이다. 다만 환각이 남을 따름이리라. 황홀경의 환각만이 남을 뿐이리라. 나는 그것을 사랑하였다. 1983년 가을. 저자

 

일생동안 모종의 아름다움을 찾아 이리저리 산지사방으로 헤집고 다녔던 문학평론가 김윤식이 뱉어낸 위의 문장은 사실상 임종 때 남길 유언으로 여겨도 될 듯한 여운을 준다.

 

아름다움, 문학과 예술의 美, 그게 무엇인가? 문화적 유전자에 전염된 탐미적 취향에 기인한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 그것이 문학과 예술을 이룩해냈다. 미를 향한 욕망의 추구, 그것의 화려함과 허무함. 김윤식이란 문학평론가는 바로 이 점을 토로한 것이다.

 

도서관의 산적한 책들, 그 대부분은 죽은 자들의 것이 아닌가. 죽은 것을 향해 애절한 마음으로 대화하고 뒤엉켜 어루만지는 작업, 바로 이것이 김윤식의 글쓰기 작업이었던 것이다.

 

죽은 것들을 애호하고 연모하면서, 그들과 공감하고 심지어 세뇌를 당해 그들의 메시지를 퍼 나르는 일까지 한다. 그게 바로 지식인들의 책읽기와 글쓰기이다. 도서관에서 보물을 찾듯이 찾아낸 책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어찌 보면 묘지기와 같다.

 

도서관에는 죽은 자들이 남긴 말과 글들이 산적해 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부르며, 산 자가 죽은 자를 불러일으킨다. 죽은 자의 과거가 산 자의 현재로 스며든다. 문화유전자가 영원의 현재를 사는 방식이다. 그러나 문화유전자를 실어 나르는 숙주인 개인의 인생이란 얼마나 왜소하고 허무한가? 그의 일생은 책벌레요 정보전달자 밖에 안 된다. 왜 이런 짓에 평생을 거는가? 탐미적 취향 때문이다.

 

탐미적 취향이라니? 윤회하는 세계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아 향수하려는 짓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진주를 찾는 일과 같아 무익하기도 할뿐더러, 미래에 받을 고통의 원인을 만드는 일이 된다.

 

윤회하는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찾아 찬미하고 즐기는 습관이 생기면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그건 똥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똥 벌레가 하는 짓이라, 거듭 거듭 똥 벌레로 태어날 원인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이 윤회하는 것에는 아름다움이 없으니, 더럽다는 인식을 닦으라(不淨觀asubha bhavana)고 하셨다.

 

그런데 또 문학평론가들이 책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까닭은 저자와 서로 뜻이 상통했을 때 느끼는 황홀감 때문이라 한다. 황홀감이라니? 그러나 그건 자주 오는 게 아니다. 한 번 체험한 후에 다시 그 체험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금단 현상이라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래서 책의 동굴에 유폐되면 빠져나오기 힘들고, 문자의 바다에 빠지면 심연으로 침몰하고 만다.

 

고래로 聞思修문사수를 이야기 한다. 聞이란 것에 讀을 포함시킬 수 있을까? 讀독은 간접적인 聞문이다. 자고로 문이란 저자의 목소리로 나오는 말을 직접 듣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직제자들을 聲聞성문, 부처님의 음성을 들은 제자라고 한다.

 

책을 통해 듣는 것은 讀經독경, 看經간경이라 한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지혜를 聞所成智문소성지, 들음으로써 얻어진 지혜라 한다. 듣고 기억해서 사유해야 자기 것이 된다. 스스로의 힘으로 사유해서 얻어진 지혜가 思所成智사소성지, 사유함으로써 얻어진 지혜이다. 지식인들도 여기까지는 한다.

 

그러나 修所成智수소성지, 닦음으로써 체득되어진 지혜는 얻기 어렵다. 닦음이란 修習수습을 말한다. 마음을 바꾸는 훈련을 반복하면서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독서인과 수행인의 차이이다.

 

김윤식의 평생은 독서였지, 수행이 아니었기에 글만 쓰되 목숨을 건 글만 쓰며 글쓰기의 신이 되고자 한 사내라고 체념한다. 책벌레가 늙어 죽을 때 책장 갈피 속에 늙은 몸을 누이곤 마지막 숨을 거두며 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가련하다. 독서인의 일생이여.

 

밤 정진을 마치고 나오며 하늘을 보니, 반달이 분칠한 듯 뽀얗게 보인다. 가는 눈이 솔솔 내린다. 쌓일 것 같지는 않다.

 

(원담스님, 동안거 수행일기-9(해제), 2016-02-24)

 

 

Library

 

 

원담스님의 수행일기에서 일부 옮긴 것이다. 편의상 문단을 나누었다.

 

원담스님은 책을 보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큰 의미가 없다고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修所成智(수소성지)’, 즉 닦음으로써 체득되어진 지혜라 하였다.

 

단지 책을 보는 것으로 그친다면 이는 聞所成智(문소성지)’, 들음으로써 또는 읽음으로써 얻는 지혜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인들이 책 읽는 방식일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思所成智(사소성지)’, 사유함으로써 얻어진 지혜를 말한다. 지성인들에 해당된다. 하지만 일반인들이나 지성인들은 딱 여기까지만 해당된다. 더 이상 실천이 없기 때문이다.

 

행하지 않는다면

 

한 평생 책을 가까이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힌다는 말이 있듯이, 하루라도 독송을 하지 않으면 역시 가시가 돋힐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라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경전을 독송하는 것 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많은 경전을 외우더라도

방일하여 행하지 않는다면

소치기가 남의 소를 헤아리는 것과 같이

수행자의 삶을 성취하지 못하리. (dhp19)

 

경전을 외우지 못하더라도

가르침에 맞게 여법하게 행하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버리고,

올바로 알고 잘 마음을 해탈하여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의 집착 여의면,

수행자의 삶을 성취하리. (dhp20)

 

 

 

2016-02-2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