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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뜸 제자로서 다섯 번 언급된 아난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6. 2. 5. 21:00

 

으뜸 제자로서 다섯 번 언급된 아난다

 

 

부처님의 으뜸가는 제자

 

앙굿따라니까야에 제일의 품(Etadaggavagga)’이 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으뜸 가는 출가의 빅쿠와 빅쿠니, 그리고 재가의 우빠사까와 우빠시까에 대한 것이다. 모두 80명이 소개 되고 있다. 사리뿟따에 대해서는 수행승들이여, 나의 제자 가운데 싸리뿟따는 위대한 지혜를 가진 님 가운데 제일이다.”(A1.197) 라 지혜제일(mahāpaññāna)을 강조하였다. 목갈라나에 대해서는 신통을 지닌 님 가운데 제일이다.”라 하여 신통제일(iddhimantāna)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으뜸 가는 제자 중에 빅쿠가 80명 가운데 47명이다. 절반 넘는 숫자가 빅쿠임을 알 수 있다. 빅쿠니는 80명 가운데 14, 우빠사까(청신사) 80명 가운데 9, 우빠시까(청신녀) 80명 가운데 10명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재가 구분이 없고 차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으뜸 제자 80명 중에 빅쿠가 47명으로서 58%를 차지 한다. 그런데 47명 중에눈 중복제자도 있다. 쭐라빤다까가 2, 수부띠가 2, 아난다가 5번 언급되었다. 중복을 제외 하면 모두 74명이다.

 

으뜸 제자로서 다섯 번 언급된 아난다

 

부처님의 으뜸 제자로서 아난다가 무려 5번 언급되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Etadagga bhikkhave mama sāvaka bhikkhūna bahussutāna yadida ānando,

수행승들이여, 나의 제자 가운데 아난다는 많이 배운 님 가운데 제일이다.”(A1.226)

 

Etadagga bhikkhave mama sāvaka bhikkhūna satimantāna yadida ānando,

수행승들이여, 나의 제자 가운데 아난다는 새김을 확립한 님 가운데 제일이다.”(A1.227)

 

Etadagga bhikkhave mama sāvaka bhikkhūna gatimantāna yadida ānando,

수행승들이여, 나의 제자 가운데 아난다는 행동거취가 분명한 님 가운데 제일이다.”(A1.228)

 

Etadagga bhikkhave mama sāvaka bhikkhūna dhitimantāna yadida ānando,

수행승들이여, 나의 제자 가운데 아난다는 의지가 확고한 님 가운데 제일이다.”(A1.229)

 

Etadagga bhikkhave mama sāvaka bhikkhūna upaṭṭhākāna yadida ānando,

수행승들이여, 나의 제자 가운데 아난다는 시중드는 님 가운데 제일이다.”(A1.230)

 

 

 

Ananda

 

 

아난다는 많이 배운 것(bahussutāna), 사띠하는 것(satimantāna), 행동거취가 분명한 것(gatimantāna), 의지가 확고한 것(dhitimantāna), 시중드는 것(upaṭṭhākāna)에서 으뜸인 것을 알 수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언급된 모두 74명의 으뜸제자 중에 아난다가 다섯 번으로 가장많이 언급되어 있다. 이는 두타를 설하는 님 가운데 제일(dhutavādāna)’이라는 마하깟싸빠나, ‘위대한 지혜를 지닌 님 가운데 제일(mahāpaññāna)’이라는 사리뿟따, 그리고 신통을 지닌 님 가운데 제일(iddhimantāna)’이라는 목갈라나 존자도 한번 밖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아난다존자는 무려 다섯번이나 언급되어 있다. 그 중에 시중드는 것(upaṭṭhākāna)’에서 제일인 것이 눈에 띈다.

 

하늘사람이 충고하기를

 

부처님의 시자로 잘 알려져 있는 아난다존자에 대한 천신의 충고가 상윳따니까야 숲의 품에 실려 있다. 천신은 어떤 충고를 하였을까? 한때 아난다 존자가 꼬살라 국에 있는 한 우거진 숲에 머물고 있을 때 하늘사람(천신)이 이렇게 말하였다.

 

 

Rukkhamūlagahaa pasakkiya

nibbāa hadayasmi opiya,
Jh
āya gotama mā ca pamādo

ki te biibiikā karissatīti,

 

[하늘사람]

나무뿌리가 무성한 곳에 들어가

마음에 열반을 새겨 명상하라.

고따마의 제자여, 방일하지 말라.

걱정하는 것이 그대에게 무슨 소용이 될까?”

 

(Ānandasutta-아난다의 경, 상윳따니까야 S9.5, 전재성님역)

 

 

하늘사람은 아난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무엇을 걱정하지 말라는 것일까? 이와 관련된 문구가 ‘biibiikā이다. 이말은 원래 잡담을 의미한다. 원어대로 번역한다면 잡담하지 말라가 된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이렇게 떠들썩해서 그대 무엇을 할 것이요?”라 하여 잡담의 뉘앙스로 번역하였다.

 

전재성님은 ‘biibiikā에 대하여 왜 걱정의 뜻으로 번역하였을까? 각주를 보보면 의미상으로 걱정하는 것을 뜻하지만 문맥상 걱정이 맞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번역차이가 생겼을까?

 

위로하다  vs 가르치다

 

경의 도입부에 실려 있는 설명 문구를 보면 그 때 존자 아난다는 재가신도들을 위로 하는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보냈다. (Tena kho pana samayena āyasmā ānando ativela gihīsaññattibahulo viharati.)”라 되어 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주석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마하 깟싸빠는 아난다로 하여금 아라한이 되어 라자가하의 경전 제일결집에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아난다는 밤낮 마을에서나 숲에서 오직 신도들에게 무상을 설하며 신도들이 부처님이 돌아가신 것을 슬퍼하는 것을 위로하는데 급급해서 자신의 임무를 버렸다.”(Srp.I.292) 라 되어 있다. 부처님이 열반한 직후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주석을 보면 아난다가 매우 다정다감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난 후 신도들이 슬퍼하자 무상을 설하며 위로 한 것이다. 그러나 아난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하루 빨리 아라한이 되는 것이었다. 그때 까지 아난다는 수다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도들 위로 하기에 바쁘자 이를 가엾게 여긴 하늘사람이 게송으로 충고한 것이다.

 

아난다는 슬퍼하는 재가신도들을 위로 하는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하였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재가자들을 가르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라 하였다. 여기서 위로한다가르친다라는 말이 서로 다른 번역이다.

 

빠알리어 ‘gihīsaññattibahulo’가 있다. 이는 ‘gihī+saññatti+bahulo’형태로 되어 있다. Gihī‘a layman’의 뜻으로 재가자를 말한다. 문제의 saññatti

‘information; pacification, 令知, 了解, 勧説, 慰撫, 의 뜻이다. Bahulo‘Much, abundant’의 뜻이다.  따라서 ‘gihīsaññattibahulo’재가자를 많이 위로하다의 뜻이 된다.

 

아난다는 부처님이 열반하였기 때문에 재가자들의 허탈감을 달래 주려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의 번역 재가신도들을 위로 하는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보냈다라는 말이 각묵스님의 번역 재가자들을 가르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라는 번역 보다 설득력이 있다.

 

죽음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

 

아난다는 마하깟싸빠존자가 주도하는 결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재가자들을 위로 하기에 바빴다. 이를 가엾게 여긴 하늘사람이 걱정하는 것이 그대에게 무슨 소용이 될까? (ki te biibiikā karissatīti)”라 하였다. 아난다가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재가자를 위로 하기에 바쁜 것을 충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소승이라 비방할지 모른다. 재가자가 슬퍼할 때 함께 슬퍼 하며 힘이 되어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죽음에 대하여 부처님은 숫따니빠따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세존]

 

1

이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있습니다.

 

2.

태어나 죽지 않고자 하나,

그 방도가 결코 없습니다.

늙으면 반드시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뭇 삶의 운명은 이런 것입니다.

 

3.

결국 익은 과일처럼

떨어져야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

 

4.

이를테면,

옹기장이가 빚어낸 질그릇이

마침내 모두 깨어지고 말듯이,

사람의 목숨도 그렇습니다.

 

5.

젊은이도 장년도

어리석은 이도 현명한 이도

모두 죽음에는 굴복해 버립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6.

죽음에 패배 당하여

저 세상으로 가지만,

아비도 그 자식을 구하지 못하고

친지들도 그가 아는 자를 구하지 못합니다.

 

7.

친지들이 지켜보지만,

보라 매우 애통해하는 자들을!

죽어야 하는 자들은 하나씩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끌려갑니다.

 

8.

이렇듯 세상 사람들은

죽음과 늙음에 삼켜져버립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들은

세상의 이치를 알아 슬퍼하지 않습니다.

 

9.

그대는 오거나 가는 사람의

 그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대는 그 양극을 보지 않고

부질없이 슬피 웁니다.

 

10.

미혹한 자가 자기를 해치며,

비탄해한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라도 생긴다면,

현명한 자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11.

울고 슬퍼하는 것으로서는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더욱 더 괴로움이 생겨나고

몸만 여윌 따름입니다.

 

12.

스스로 자신을 해치면서

몸은 여위고 추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죽은 자들을 수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비탄해 하는 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13.

사람이 슬픔을 버리지 않으면,

점점 더 고통에 빠져듭니다.

죽은 사람 때문에 울부짖는 자들은

슬픔에 정복당한 것입니다.

 

14.

또한 스스로 지은 업으로 인해

태어날 운명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죽음에 정복당해

전율하고 있는 뭇 삶들을 보십시오.

 

15,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그 생각과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떠남도 이와 같으니,

저 자연의 이치를 보십시오.

 

16.

가령 사람이 백년을 살거나

그 이상을 산다 할지라도

마침내는 친족을 떠나

이 세상의 목숨을 버리게 됩니다.

 

17.

그러므로 거룩한 님에게 배워,

죽은 망자를 보고서는

‘나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라고

비탄해 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18.

보금자리에 불난 것을 물로 꺼버리듯이,

단호하고 지혜롭고 잘 닦인 현명한 사람이라면,

바람이 솜을 날리듯,

생겨난 슬픔을 날려버려야 합니다.

 

19.

자신을 위해 행복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있는 비탄과 탐욕과 근심과

자기 번뇌의 화살을 뽑아버려야 합니다.

 

20.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넘어

슬픔 없는 자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화살의 경, 숫따니빠따 Sn3.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죽은 자에 대하여 지나치게 애통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명한 자라면 세상의 이치를 알아 슬퍼하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더구나 슬피우는 것에 대하여 부질 없다고 하였다. 슬프다고 울고만 있으면 몸만 축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였다. 또 비탄에 빠져 있는 것은 무익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비탄해 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하늘사람이 아난다에게 걱정하는 것이 그대에게 무슨 소용이 될까?”라고 충고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고따마의 제자여 vs 고따마여

 

전재성님과 각묵스님이 번역한 게송을 비교해 보면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하늘사람]

나무뿌리가 무성한 곳에 들어가

마음에 열반을 새겨 명상하라.

고따마의 제자여, 방일하지 말라.

걱정하는 것이 그대에게 무슨 소용이 될까?”(S9.5, 전재성님역)

 

밀림의 깊숙이 나무아래 들어가서

그대는 열반을 가슴에 간직하고

고따마여, 참선을 하소서. 방일하지 마소서.

이렇게 떠들썩해서 그대 무엇을 할 것이요?”(S9.5, 각묵스님역)

 

 

가장 크게 차이 나는 것이 네 번째 구절이다. 걱정과 떠들썩함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열반당시 재가자들의 심리상태와 다정다감한 아난다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에서 죽음에 대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아난다는 더 이상 재가자들과 함께 있어서는 안된다. 하루 빨리 아라한이 되어 결집에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비록 ‘biibiikā가 잡담의 의미가 있지만 이를 문맥에 맞추어 걱정이라 의역한 것은 매우 타당해 보인다. 반면 각묵스님은 원어 의미 그대로 떠들썩함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번역 세 번째 구절을 보면 고따마여라 되어 있다. 이는 ‘Jhāya gotama’이다. 여기서 Jhāya는 여격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고따마여라 하였다. 반면 전재성님은 고따마의 제자여라 하였다.

 

‘Jhāya gotama’에서 제자라는 말이 없다. 그러나 문맥상 고따마의 제자여라 하는 것이 이해 하기 쉽다. 이는 하늘사람이 아난다에게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지 고따마여라 하였을 때 부처님을 지칭하는 말이 된다.

 

고따마라는 말이 아난다를 지칭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아난다와 부처님은 사촌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씨를 뜻하는 고따마로 부를 수 있다. 마치 석가족 여인들 모두에게 고따미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부처님과 아난다가 같은 씨족인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고따마여라 하는 것은 혼란을 줄 수 있다. 영문에서는 ‘disciple of Gotama’라 하여 고따마의 제자라고 번역되어 있다.

 

 

 

2016-02-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