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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수행승을 보호 하는 하늘사람

담마다사 이병욱 2016. 1. 26. 14:09

 

 

숲속의 수행승을 보호 하는 하늘사람

 

 

 

초기경전에서 숲의 이미지는?

 

초기경전에서 (Vana)’은 어떤 의미일까? 법구경에 따르면 숲을 잘라버려라.”라는 말이 있다. 이어지는 게송을 보면 숲에서 두려움이 생기니, 수행승들이여, 숲과 덤불을 자르면 그대들은 숲에서 벗어나리.” (Dhp283)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숲은 두려움과 번뇌의 상징임을 알 수 있다.

 

초기경전에서 숲의 이미지는 정글을 연상케 한다. 초목이 우거지고 넝쿨이 제멋대로 자라 얼키고 설킨 이미지이다. 그런 숲속에 어떤 것이 있을지 알 수 없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이는 “자연의 숲에서 사자와 같은 짐승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처럼, 번뇌의 숲에서 태어남 등의 두려움이 생겨난다. (DhpA.III.424) 라는 주석에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숲을 쳐 내라 했을 것이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제자들은 숲에서 살았다.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숲에서 살며 명상을 하고 식사할 때가 되면 탁발하러 마을에 내려 갔다. 이렇게 숲속에서 살 때 온갖 두려움과 유혹이 있었을 것이다.

 

두려움과 관련하여 깃발의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숲속에 들어가 나무아래에서나 빈 집에서 머물 때, 공포나 전율이나 소름끼치는 두려움이 생겨나면”(S11.3) 라 하였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성스런 상가를 떠 올리라고 하였다.

 

유혹과 관련하여 숫따니빠따에서는 가령 숲 속에 있더라도 불의 화염 같은 높고 낮은 것들이 나타나고, 아낙네는 해탈자를 유혹합니다. 아낙네로 하여금 유혹하도록 하지 마십시오.” (stn703) 라 하였다

 

홀로 숲속에 사는 수행승에게

 

숲은 두려움과 유혹과 번뇌의 상징이다. 이는 울창한 밀림 또는 정글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숲에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수행승들에게 숲은 또한 극복의 대상이다. 하지만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누군가 지적을 해주면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홀로 사는 경우 누가 보살펴 줄 것인가? 상윳따니까야 숲의 모음(Vanasayutta:S9)’을 보면 놀랍게도 하늘사람이다. 인간이 아닌 초월적 존재가 보호해 주고 있는 것이다.

 

 

eka samaya aññataro bhikkhu kosalesu viharati aññatarasmi vanasaṇḍe. Tena kho pana samayena so bhikkhu divāvihāragato pāpake akusale vitakke vitakketi gehanissite.

Atha kho yā tasmi vanasaṇḍe adhivatthā devatā tassa bhikkhuno anukampikā atthakāmā ta bhikkhu savejetukāmā yena so bhikkhu tenupasakami.

 

한 수행승이 꼬살라 국에 있는 한 우거진 숲에 머물고 있었다. 그 때 그 수행승은 대낮에 휴식을 취하면서 세속적인 죄악에 가득한 나쁜 생각을 일으켰다. 마침 우거진 숲에 살고 있던 하늘사람이 그 수행승을 가엾게 여겨 그의 이익을 위해서 수행승을 일깨우고자 수행승이 있는 곳으로 찾아 왔다.

 

(Vivekasutta-홀로 있기의 경, 상윳따니까야 S9.1, 전재성님역)

 

 

 

 

 

Banyan Tree

 

 

 

상윳따니까야 숲의 모음첫 번째 경이다. 한 수행승이 숲에 살고 있었는데 세속적인 죄악에 가득한 나쁜 생각을 일으켰다. (pāpake akusale vitakke vitakketi gehanissite)”라고 하였다.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사악하고 해로우며 세속에 대한 생각이라 하였다. 대체 어떤 생각을 한 것일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주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탁발하러 갔을 때 인상과 그와 관련된 연상일 것이라 여겨진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을 하기 위해 마을이나 거리로 들어가는데 몸을 가다듬지 않고 말을 조심하지 않고 마음을 수호하지 않고 주의 깊음에 머물지 않고 감관을 제어하지 않고 간다고 하자.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했기 때문에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S20.10) 라는 정형화된 문구에서 알 수 있다.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일어 났을 때


숲에 사는 수행은 세속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다. 이는 ‘pāpake akusale’라는 빠알리어로 알 수 있다. 빠빠(papa)‘evil action’의 뜻으로 사악한 행위 또는 악행을 말한다. 이에 대한 반대어는 뿐냐(puñña)로서 공덕행을 말한다. 아꾸살라(akusala)는 불건전한 행위를 말한다. 불선행의 뜻이다. 반대어는 꾸살라(kusala)로서 선행을 말한다. 빠빠는 뿐냐와 대비하여 사용되고, 아꾸살라는 꾸살라와 대비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수행승에게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일어 났을 때 출가의 목적은 달성 될 수 없을 것이다. 유혹에 넘어 갔을 때 환속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경을 보면 초월적인 존재가 나타난다. 이를 전재성님은 숲에 살고 있던 하늘사람(vanasaṇḍe adhivatthā devatā)’이라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은 밀림에 사는 신으로 번역하였다.

 

빠알리어 데와따(devata)는 일반적으로 하늘사람으로 번역된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첫번째 상윳따가 데와따상윳따(S1)’이다. 그런데 와나상윳따(숲의 모음: S9)에서 데와따는 천신이라기 보다 숲속에서 사는 요정이나 목신에 가깝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해제에서 숲이나 나무의 요정을 뜻한다고 하였다. 과연 숲속의 신은 있는 것일까?

 

숲속의 신은 있는 것일까?

 

숫따니빠따 자애의 경(Sn1.8)을 보면 경의 인연담이 있다. 인연담에 목신이 나온다. 목신과 관련된 부분을 보면 그들은 탁발하며 수행 정진 했는데, 그런데 수행정진하는 수행승들의 위광 때문에 자신의 위광을 손실한 나무의 하늘사람(樹神)들이 ‘언젠가 존자들은 갈 것이다’고 궁전에서 내려와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거닐다가 삼개월 간은 너무 길다고 생각하여 수행승들을 방해하기 위해 야차의 모습을 보여주고 공포의 소리를 들려 주었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수신은 목신을 말한다.

 

인적이 끊긴 깊은 숲속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다. 더구나 숲의 주인이라 볼 수 있는 목신이 있어서 수행을 방해 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자애의 마음을 내라고 하였다. 모든 뭇삶들에 대하여 한량 없는 자애의 마음을 내었을 때 자신을 수호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애경은 보배경, 축복경과 함께 자신을 지키는 삼대 수호경이라 한다.

 

서로 다른 번역이 있는데

 

온갖 세속적 욕망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수행승에게 목신이 다가 왔다. 그런데 무섭고 두려운 대상은 아니다. 자신의 영역에서 사는 수행승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고자 한 것이다. 이는 감각적 욕망에 불타고 있는 수행승을 불쌍하게 여겨서 일 것이다. 그래서 그 수행승을 가엾게 여겨 그의 이익을 위해서(bhikkhuno anukampikā atthakāmā ta bhikkhu savejetukāmā)”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비구에게 절박감을 일으키기 위해라 하였다.

 

여기서 ‘anukampī에 대한 번역이 서로 다르다. 전재성님은 가엾게 여겨라 하였으나 각묵스님은 절박감을 일으키기 위해라 하였다. 빠알리어 anukampī대 하여 사전을 찾아 보면 ‘compassionate; one who has pity’라 되어 있다. 전재성님의 번역이 바르다. 빅쿠보디는 having compassion for that bhikkhu(비구에게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라 하여 또한 자비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각묵스님이 절박이라 번역한 것은 원문과 동떨어진 말이다. 

 

수행승을 가엾게 여겨

 

숲에 사는 숲의 신은 숲에 홀로 사는 수행승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숲에 수십명이 모여 왁자지껄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역에서 홀로 사는 수행승이 불쌍해 보인 것이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승이 탁발중에 있었던 세속적 욕망에 가득 차 있을 때 이를 두고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한 것이다.

 

 

1.

Vivekakāmosi vana paviṭṭho

atha te mano niccharatī bahiddhā,
Jano janasmi
vinayassu chanda

tato sukhī hohisi vītarāgo.

 

 [하늘사람]

그대는 홀로 있고자 숲으로 들어 왔으나

그대의 마음은 밖으로 흔들리네.

사람으로서 사람에 대한 욕망을 제거하면.

탐욕을 떠나 즐겁게 되리라.”

 

 

2.
Arati pajahāsi sato

bhavāsi sata ta sādayāmase,
P
ātālarajo hi duttaro

mā ta kāmarajo avāhari.

 

불만족을 버리고 새김을 확립하라.

그대를 새김을 확립한 참사람으로 기억하리라.

지옥의 티끌은 제거하기 아주 어려우니

감각적 욕망의 티끌로 자신을 타락시키지 말라.

 

 

3.

Sakuo yathā pasukuṇḍito

vidhuna pātayati sita raja,
Eva
bhikkhu padhānavā satimā

vidhuna pātayati sita rajanti.

 

먼지로 덮인 새가

날개에 붙어 있는 먼지를 털어 버리듯.

올바른 새김으로 정진하는

수행승들은 몸에 붙어 있는 먼지를 털어 버리네.”


(
Vivekasutta-홀로 있기의 경, 상윳따니까야 S9.1, 전재성님역)

 

 

숲의 신은 수행승에게 연민을 일으켜 충고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차 있는 수행승에게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여러 가르침을 알려 주고 있다. 마치 모든 것을 지켜 보고 있는 것 같다. 또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수호천사와도 같다.

 

빅쿠보디 각주를 보면

 

숲의 신은 사람에 대한 욕망을 제거함에 있어서 사람으로서 사람에 대한 욕망을 제거하면(Jano janasmi vinayassu chanda)이라 하였다. 여기서 janaa ‘person; a man; the people’의 뜻이다. 그래서 사람으로서 사람에 대한 욕망(chanda)을 제거한다(vinaya)”라 하였다. 위나야가 계율(discipline)을 뜻하기도 하지만 제거(removal)의 뜻도 있다.

 

그렇다면 대체 사람으로서 사람에 대한 욕망을 제거한다.’는 뜻은 무엇을 말할까? 이 구절에 대한 전재성님과 각묵스님의 번역서에 각주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빅쿠보디의 cdb에서는 게송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각주가 있다.

 

 

In pada c, since vinayassu is a middle voice, second person imperative, jano, though nominative, may function as a vocative lengthened to fit the metre. Spk seems to support this with its gloss: tva jano aññasmi jane chandarāga vinayassu; "you, a person, remove desire and lust for other people." The sentiment of this verse is echoed by Th 149-50.

 

(cdb 532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는 세 번째 문구 “Jano janasmi vinayassu chanda에 대하여 Remove, man, the desire for people”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제거하라. 사람을, 사람들에 대한 욕망을이라는 뜻이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명령어로 표현한 것이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각묵스님은 사람이여, 사람에 대한 욕망을 제거 하시오라 번역하였다. 주석에 실려 있는 내용과 같다.

 

쐐기의 비유

 

전재성님과 각묵스님의 번역은 다르다. 전재성님은 사람으로서 사람에 대한 욕망을 제거하면라 하였다. 이는 방기사의 모음에 실려 있는 내용과 유사하다. 내용을 보면 “어떻게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서 좋지 않은 생각을 없애고 좋은 생각을 일으킬 수 있는가? (S8.1) 라고 되어 있다. 방기사가 탁발 나갔을 때 “내게 좋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 욕정이 내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참으로 나에게 해롭다. 참으로 나에게 유익함이 없는 것이다. 참으로 나에게 나쁜 것이 닥친 것이다. (S8.1) 라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방기사는 어떻게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을 뿌리 뽑을 수 있었을까? 이는 쐐기의 비유로 설명된다. 맛지마니까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마치 숙련된 미쟁이나 그의 도제가 작은 쐐기로 커다란 쐐기를 쳐서 뽑아 버리는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어떤 인상에 관해 그 인상에 정신적 활동을 일으켜 자신 안에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나면, 그는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 그가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키면,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버려지고 사라진다. 그것들이 버려지면 안으로 마음이 확립되고 가라앉고 통일되고 집중된다.

(M2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쐐기의 비유를 들었다. 그래서 “작은 쐐기로 커다란 쐐기를 쳐서 뽑아 버리는 것처럼(sukhumāya āiyā oārika āi abhinīhaneyya)”라 하였다. 마치 독을 독으로써 제독하는 것과 같다. 이는 동종요법을 말한다.

 

방기사는 악하고 불건전 생각이 마음을 괴롭혔을 때 착하고 건전한 생각을 일으켜 추방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 올려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에서 벗어 나고자 한 것이다.

 

수호천사처럼 나타나

 

수행승은 탁발 중에 어느 여인을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 여인을 생각하면 할수록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만 연이어 일어날 것이다. 커다란 번뇌가 그의 머리속을 점령한 것이다. 이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작은 쐐기로 큰 쐐기를 쳐서 제거 하듯이, 사람에 대한 번뇌는 사람으로 제거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 사람은 부처님이 될 수 있다. 부처님을 떠 올리고 부처님의 말씀을 떠 올리면 사람에 대한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게송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숲속의 신은 새김을 확립하라(sato)”라 등의 말을 해 준다.

 

숲속의 신은 수행승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가엾게 여겨 게송으로 잘못을 알려준 것이다. 이에 수행승은 화들짝 놀랐다. 경에서는 그러자 수행승은 그 하늘사람에게 깨우침을 받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S9.1) 라고 되어 있다. 마치 수호천사처럼 그 앞에 나타나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를 꾸짖어 정신을 차리게 만든 것이다.

 

 

 

2016-01-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