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뻬이얄라(peyyala) 처리된 초기불전연구원의 빠알리니까야를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6. 1. 14. 12:57

 

뻬이얄라(peyyala) 처리된 초기불전연구원의 빠알리니까야를 보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출간된 상윳따니까야를 구입하였다. 낱권으로 된 것을 산 것이다. 사 모으다 보니 한 권을 빼고 모두 갖추어 졌다. 그런데 4권과 5권을 보면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번역되어 나온 책과 비교하였을 때 절반 정도 두께 밖에 안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일까?

 

 

 

 

초불연의 반복구문 생략

 

초불연 상윳따니까야 4권을 열어 보았다. ‘여섯 가지 감역에 대한 모음(S35)’을 보면 축약 되어 있다. 온전히 실려 있지 않은 것이다. 반복구문은 생략하고 그 대신 단어만 나열해 놓았다. 빠일리 원문과 양 번역서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Ya bhikkhave anicca, tatra vo chando pahātabbo. Kiñca bhikkhave anicca: cakkhu bhikkhave anicca, tatra chando pahātabbo.

Sota anicca, tatra vo chando pahātabbo. Ghāna anicca tatra vo chando pahātabbo, jivhā aniccā tatra vo chando pahātabbo, kāyo anicco tatra vo chando pahātabbo, mano anicco tatra vo chando pahātabbo. Ya bhikkhave anicca, tatra vo chando pahātabboti.

 

 

비구들이여, 무상한 것에 대한 그대들의 욕구를 버려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라면 무엇이 무상한 것인가?

 

비구들이여, 눈은 무상하다. 여기에 대한 그대들의 욕구를 버려야 한다. 귀는코는혀는몸은마노는 무상하다. 여기에 대한 그대들의 욕구를 버려야 한다.

 

비구들이여, 무상한 것에 대한 그대들의 욕구를 버려야 한다.”

 

(Aniccachandasutta-안의 무상에 대한 욕구 경, 상윳따니까야 S35:168, 각묵스님역)

 

 

빠알리 원문에 실려 있는 ‘Aniccachandasutta’을 번역한 것이다. 여섯 가지 감역 중에서 시각에 대한 것만 제대로 번역되어 있다. 나머지 청각 등 다섯 가지에 대해서는 점점점(…)처리 하였다. 반복구문이기 때문에 단어만 나열해 놓은 것이다. 이에 반하여 전재성님은 원문대로 다 번역하였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것이라면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세존]

1) 수행승들이여, 시각은 무상한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2) 수행승들이여, 청각은 무상한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3) 수행승들이여, 후각은 무상한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4) 수행승들이여, 미각은 무상한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5) 수행승들이여, 촉각은 무상한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6) 수행승들이여, 정신은 무상한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것이라면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Aniccachandasutta -내적인 무상과 욕망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168, 전재성님역)

 

 

각묵스님의 번역과 전재성님 번역의 가장 차이가 드러난다. 전재성님은 반복구문의 생략 없이 모두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시각 뿐만 아니라 청각 등 다섯 가지도 빠짐 없이 번역하였다. 이는 빠알리 원문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각묵스님의 번역과 전재성님의 번역은 한 눈에 보기에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CDB에서 해당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Bhikkhus, you should abandon desire for whatever is impermanent.

And what is impermanent? The eye is impermanent . . . The mind is impermanent; you should abandon desire for it. Bhikkhus, you should abandon desire for whatever is impermanent.”

 

(CDB, 1 68 (1) Desire for the Impermanent (Internal), 빅쿠보디역)

 

 

빅쿠보디역을 보면 역시 반복구문이 생략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각에 대한 설명만 원문 그대로 실려 있을 뿐 나머지 청각 등의 반복구문이 생략 되어 있다. 초불연 각묵스님과 같은 방식이다. 그런데 빅쿠보디역을 보면 초불연 번역 보다 더 생략 되어 있다. 초불연의 경우 귀는코는혀는몸은마노는라 하여 점 세 개로 처리 하였으나, 빅쿠보디는 The eye is impermanent . . . The mind”라 되어 있어서 시각과 정신만 언급 되어 있고 중간의 청각 등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생략해도 되는 것일까?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본다. 상윳따니까야 여섯 가지 감역의 모음(S35)’육십확장의 품(Saṭṭhipeyyālo)’이 있다. 이름이 의미하듯이 반복구문이 실려 있는 60가지 경에 대한 것이다. 빠알리어 ‘Saṭṭhipeyyālo에서 Saṭṭhisixty(60)을 의미하고 peyyāla‘an indication to show that a passage has been omitted’의 뜻으로 반복구문 생략의 의미이다. 그래서 중략 또는 생략문구라 한다. 그래서 일까 초불연 각묵스님은 과감하게 생략하였다. 그 중에 안의 괴로움에 대한 열망 경 등(S35:171~173)’이 있는데 빠알리 원문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Dukkhachandasutta

171. Ya bhikkhave dukkha, tatra vo chando pahātabbo. Kiñca bhikkhave dukkha: cakkhu bhikkhave dukkha, tatra vo chando pahātabbo.

Sota dukkha, tatra vo chando pahātabbo. Ghāna dukkha, tatra vo chando pahātabbo, jivhā dukkhā, tatra vo chando pahātabbo, kāyo dukkho, tatra vo chando pahātabbo, mano dukkho, tatra vo chando pahātabbo. Ya bhikkhave dukkha, tatra vo chando pahātabboti.

 

 

Dukkharāgasutta

172. Ya bhikkhave dukkha, tatra vo rāgo pahātabbo. Kiñca bhikkhave dukkha: cakkhu bhikkhave dukkha, tatra vo rāgo pahātabbo.

Sota dukkha, tatra vo rāgo pahātabbo. Ghāna dukkha, tatra vo rāgo pahātabbo, jivhā dukkhā, tatra vo rāgo pahātabbo, kāyo, dukkho tatra vo rāgo pahātabbo, mano dukkho, tatra vo rāgo pahātabbo. Ya bhikkhave dukkha, tatra vo rāgo pahātabboti.

 

 

Dukkha chandarāgasutta

173. Ya bhikkhave dukkha, tatra vo chandarāgo pahātabbo. Kiñca bhikkhave dukkha: cakkhu bhikkhave dukkha, tatra vo chandarāgo pahātabbo.

Sota dukkha, tatra vo chandarāgo pahātabbo. Ghāna dukkha, tatra vo chandarāgo pahātabbo, jivhā dukkhā, tatra vo chandarāgo pahātabbo, kāyo dukkho, tatra vo chandarāgo pahātabbo, mano dukkho, tatra vo chandarāgo pahātabbo. [PTS Page 150] [\q 150/] ya bhikkhave dukkha, tatra vo chandarāgo pahātabboti.

 

 

[150]<이 세 개의 경들은 앞의 세 경들(S35:168~170) 가운데서 무상대신에 괴로움이 나타나는 것만 다르고 나머지는 각각 앞의 세 경들(S35:168~170)과 같다.

 

(안의 괴로움에 대한 열망 경 등, 상윳따니까야 S35:171~173, 각묵스님역)

 

 

빠알리원문을 보면 생략 없이 모두 다 표현 되어 있다. 원문을 보면 Dukkhachandasutta,  Dukkharāgasutta, Dukkha chandarāgasutta 라는 제목의 경이 있고 바로 다음에 경의 원문이 빠짐 없이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안의 괴로움에 대한 열망 경 등(S35:171~173)’라는 제목으로 세 개의 경을 한묶음으로 처리 하였다. 더구나 내용의 소개 없이 이전에 번역된 것을 참조하라는 식으로 되어 있다. 이런 형태의 번역이 이 품에 다수 실려 있다. 그렇다면 전재성님은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괴로운 것이라면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세존]

1) 수행승들이여, 시각은 괴로운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2) 수행승들이여, 청각은 괴로운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3) 수행승들이여, 후각은 괴로운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4) 수행승들이여, 미각은 괴로운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5) 수행승들이여, 촉각은 괴로운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6) 수행승들이여, 정신은 괴로운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운 것이라면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Dukkhachandasutta -내적인 괴로움과 욕망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171, 전재성님역)

 

 

[세존]

수행승들이여, 괴로운 것이라면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탐욕을 버려야 한다.

 

[세존]

1) 수행승들이여, 시각은 괴로운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탐욕을 버려야 한다.

 

2) 수행승들이여, 청각은 괴로운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탐욕을 버려야 한다.

 

3) 수행승들이여, 후각은 괴로운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탐욕을 버려야 한다.

 

4) 수행승들이여, 미각은 괴로운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탐욕을 버려야 한다.

 

5) 수행승들이여, 촉각은 괴로운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탐욕을 버려야 한다.

 

6) 수행승들이여, 정신은 괴로운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탐욕을 버려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운 것이라면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탐욕을 버려야 한다.”

 

(Dukkharāgasutta,-내적인 괴로움과 탐욕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172, 전재성님역)

 

 

[세존]

수행승들이여, 괴로운 것이라면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세존]

1) 수행승들이여, 시각은 괴로운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2) 수행승들이여, 청각은 괴로운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3) 수행승들이여, 후각은 괴로운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4) 수행승들이여, 미각은 괴로운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5) 수행승들이여, 촉각은 괴로운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6) 수행승들이여, 정신은 괴로운 것이니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운 것이라면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Dukkha chandarāgasutta -내적인 괴로움과 욕망과 탐욕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173, 전재성님역)

 

 

전재성님은 우직하게 빠짐 없이 다 번역하였다. 생략된 구문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번역방식은 니까야 전권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세 개의 빠알리 경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CDB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Bhikkhus, you should abandon desire for whatever is suffering. . . . You should abandon lust for whatever is suffering . . . . You should abandon desire and lust for whatever is suffering. And what is suffering? The eye is suffering . . . The mind is suffering; you should abandon desire and lust for it.  Bhikkhus, you should abandon desire and lust for whatever is suffering.”

 

(1 71 (4)-173 (6) Desirefor Suffering (Internal), Etc., CDB, 빅쿠보디역)

 

 

빅쿠보디역을 보면 세 개의 경을 한묶음으로 처리하였다. 이는 ‘1 71 (4)-173 (6) Desirefor Suffering (Internal), Etc.’라고 경의 제목을 붙인 것에서 알 수 있다. 초불연과 비슷한 방식이다. 다만 초불연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래도 원문 중의 일부가 소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한다?

 

반복구문은 생략해도 좋은 것일까? 이에 대하여 이전에 빠알리니까야 반복구문, 이대로 생략해도 좋은가?(2013-08-31)’니까야 반복구문 뻬얄라(peyyala), 삽입인가 생략인가(2014-02-25)’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이전에 올린 글에서 반복구문 생략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빠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한다라고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초불연 니까야 해제에서 각묵스님이 반복구문생략에 대한 입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스님의 견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경을 번역하면서 이러한 정형구를 모두 복원해서 번역할 까 고민하였다. 그러나 Ee, Be, Se와 태국본과 여러 나라에 남아 있는 필사본들 등 전통적인 모든 판본에서 예외 없이 생략해서 편집한 이런 입장과 이런 태도를 존중하는 것이 후학의 태도라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판본에서 생략한 정형구는 대부분 생략하여 옮기기로 하였다.

 

(각묵스님, 상윳따니까야 1권 해제)

 

 

반복구문을 생략하여 점 세 개로 처리하는 것을 뻬이얄라(peyyāla)라고 한다. 각묵스님이 뻬이얄라 처리한 것에 대하여 필사본을 들고 있다. 스리랑카본(Se), 미얀마본(Me), TPS(Ee)에서 뻬이얄라 처리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 판본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 알 수 없다. 그러나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빠알리원문을 보면 생략되어 있지 않다.

 

각묵스님은 뻬이얄라 처리한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초불연 해제에 따르면 거듭말하지만 이것은 역자가 임으로 생략한 것이 결코 아니다. Ee, Be, Se에서 모두 생략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을 다 살려 독송하거나 편집하거나 번역한다면 기력도 소진되고, 전체 뜻을 파악하는데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고, 많은 종이가 낭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모든 판본은 이렇게 생략하여 편집하고 있고, 영역본을 비롯한 모든 번역서에서도 생략하고 있다.” (각묵스님, 상윳따니까야 1권 해제) 라고 하였다. 반복구문을 임으로 생략하지 않았음을 강조 하고 있다.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런데 뻬이얄라 처리한 이유로서 1) 기력소진, 2) 전체를 파악하는데 장애, 3) 종이 낭비. 4) 전통적인 판본의 전통 이렇게 네 가지를 들고 있다. 하지만 이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인터넷에 빠알리 원문이 생략 되지 않고 모두 빠짐 없이 올려져 있다면 완역을 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전체를 번역하는데 기력소진을 이유로 든다면 납득하기 어렵다.

 

또 종이낭비라 하였는데 이 역시 이해 하기 힘들다. 빠알리 니까야가 베스트 셀러 처럼 수백만 부 팔리는 것이 아님에도 종이낭비라 하여 번역하지 않은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정보통신시대에 인터넷에 경전을 올려 놓으면 종이 값이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종이가 아까워서 다 번역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면 누가 이해 할까?

 

각묵스님은 정형구를 모두 빠짐 없이 모두 올려 놓으면 전체를 파악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하였다. 이는 반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빠짐 없이 다 올려져 있는 경전을 보면 오히려 전체적으로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영역본에 지나치게 의존?

 

그렇다면 초불연에서 뻬이얄라 처리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필사본이 모두 뻬이얄라 처리 된 것을 이유로 드는 등 네 가지 이유로 설명하고 있지만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빅쿠보디의 CDB에 대한 언급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각묵스님은 니까야 해제에서 역자가 꼭 밝히고 싶은 것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빅쿠보디와 CDB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본서 번역에 있어서 보디 스님이 10여 년간 노력하여 번역 출간한 ‘상윳따 니까야’ 영역본인 The Connected Discourses of the Buddha(vol. 1&2)를 많이 참조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보디 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달아 놓은 주옥 같은 주해들은 역자의 번역과 주해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각묵스님, 상윳따니까야 해제 ‘맷는 말’)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니까야를 한글로 번역하는데 있어서 빅쿠보디의 영역본 CDB를 참조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참조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는 참고로 비교하고 대조하여 봄이라는 뜻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영역본에 크게 의지하였음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래서일까 구성이 유사하다. 뻬이얄라 처리하는 것도 똑 같다.  혹시 참조가 지나쳐 영역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 아닐까? 

 

빅쿠보디의 뻬이얄라처리에 대한 견해를 보면

 

빅쿠보디의 빠알리니까야 영역본 CDB를 보면 뻬이얄라처리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CDB에 해제에 따르면 빅쿠보디는 다음과 같이 뻬이얄라 처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Readers of the Pali suttas are invariably irked, and sometimes dismayed, by the ponderous repetitiveness of the texts. In SN these are more blatant than in the other Nikayas, even to the extent that in whole vaggas the suttas might differ from one another only in regard to a single word or phrase.

 

Besides this type of reiterative pattern, we also come across the liberal use of stock definitions, stereotyped formulas, and pericopes typical of the Niksyas as a whole, stemming from the period when they were transmitted orally.

 

It is difficult to tell how much of the repetition stems from the Buddha himself, who as an itinerant teacher must have often repeated whole discourses with only slight variations, and how much is due to zealous redactors eager to ring every conceivable change on a single idea and preserve it for posterity.

 

It is hard, however, not to suspect that the latter have had a heavy hand in the redaction of the texts. To avoid excessive repetitiveness in the translation 1 have had to make ample use of elisions. In this respect I follow the printed editions of the Pali texts, which are also highly abridged, but a translation intended for a contemporary reader requires still more compression if it is not to risk earning the reader's wrath.

 

On the other hand, I have been keen to see that nothing essential to the original text, including the flavour, has been lost due to the abridgement. The ideals of considerateness to the reader and fidelity to the text sometimes make contrary demands on a translator

 

The treatment of repetition patterns in which the same utterance is made regarding a set of items is a perpetual problem in translating Pali suttas. When translating a sutta about the five aggregates, for example, one is tempted to forgo the enumeration of the individual aggregates and instead turn the sutta into a general statement about the aggregates as a class. To my mind, such a method veers away from proper translation towards paraphrase and thus risks losing too much of the original text.

 

My general policy has been to translate the full utterance in relation to the first and last members of the set, and merely to enumerate the intermediate members separated by ellipsis points. Thus, in a sutta about the five aggregates, I render the statement in full only for form and consciousness, and in between have "feeling . . . perception . . . volitional formations . . .," implying thereby that the full statement likewise applies to them. With the bigger sets I often omit the intermediate terms, rendering the statement only for the first and last members.

 

This approach has required the frequent use of ellipsis points, a practice which also invites criticism. Several consulting readers thought I might improve the aesthetic appearance of the page (especially in Part N) by rephrasing repetitive passages in a way that would eliminate the need for ellipsis points.

 

I accepted this suggestion in regard to repetitions in the narrative framework, but in texts of straight doctrinal exposition I adhered to my original practice. The reason is that I think it an important responsibility of the translator, when translating passages of doctrinal significance, to show exactly- where text is being elided, and for this ellipsis points remain the best tool at hand.

 

(The Repetitions 41-42P, General In froduction, CDB, 빅쿠 보디)

 

 

빅쿠 보디는 반복구문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이는 ‘The Repetitions’ 서문에서 “빠알리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다루기힘든 반복구문은 항상 괴롭히고, 때로 낙담하게 한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반복구문에 대하여 부처님이 진짜 반복구문으로 말씀 하셨는지 의문이라 하였다. 또 빅쿠보디는 반복구문에 대하여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 하였다. 스승에서 제자에게 구전으로 전승할 때 반복구문을 만들어 외우기 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반복구문이 부처님의 직설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반복구문을 과감하게 생략하였음을 밝히거 있다.

 

테라와다에서 빅쿠를 부처님 모시듯 하는 이유

 

현재 한국에는 두 종류의 빠알리니까야 번역서가 있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번역서를 선택하여 읽을 수 있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행운이다. 이렇게 두 종류의 번역서가 나오기 까지 목숨을 걸고 번역하다 시피한 번역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경전은 빠짐 없이 번역해야 한다. 어느 것 한가지라도 누락하거나 더하면 안된다.

 

테라와다에서는 빅쿠를 부처님 모시듯 한다. 왜 그런가? 빅쿠가 가르침을 설할 때 빠짐 없이 전달하기 때문이다. 빠알리 삼장에 실려 있는 내용에 대하여 더 하거나 빼는 것도 없고 자신의 견해를 실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없다. 오로지 부처님 그분이 말씀 하신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테라와다 에서는 스승은 한분이라 하였다. 부처님 그분을 말한다. 빅쿠는 단지 스승인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테라와다 빅쿠가 법을 전할 때 사실상 부처님이 말씀 하시는 것과 같다. 그래서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빅쿠를 부처님 모시듯 한다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이 법문할 때 경전을 좀처럼 인용하지 않는다. 들어 보면 대부분 자신과 주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다 보니 경전 문구를 이용하면 덜 깨우친 사람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설령 경을 인용한다고 하더라도 왜곡해서 말하기도 한다. 더하거나 빼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스님이 말한 것이 다르고 저 스님이 말한 것이 다르다.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엿장수 맘대로?

 

어떤 이는 초기경전을 한권으로 요약하고자 한다. 한권으로 된 빠알리경전을 말한다. 그렇다면 경의 선별기준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편찬자의 취향에 따라 선별된다. 좀 심하게 말하면 엿장수 맘대로이다. 과연 한권으로 된 경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두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경전을 한권으로 만들면 좋다. 그렇다고 엿장수맘대로 경을 선별하자는 것이 아니다. 여러 권으로 되어 있는 것을 한권으로 만드는 것이다. 맛지마니까야가 세 권으로 되어 있다면 한권으로 만들기 식이다. 이미 이런 시도는 전재성님의 번역물을 보면 알 수 있다.

 

현재 성전협의 번역물을 보면 맛지마니까야, 디가니까야, 상윳따니까야가 단권으로 출간 되어 있다. 여러 개의 경을 한권으로 만든 것이다. 종이를 얇게 하고 글자 크기를 작게 하거나 심지어 두 칼럼으로 편집 하였다. 이것이 단권화 작업이다. 그 외 어떤 시도도 가르침을 훼손하는 것이다.

 

번역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빠짐 없이 번역해야 한다. 전달하는 자는 더하고 빼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려 주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반복구문 생략은 바른 방법이 아니다. 반복구문은 외기 좋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빠짐 없이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다. 니까야 번역에서 반복구문을 생략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2015-01-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