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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목소리 이런 법문(法門)

담마다사 이병욱 2016. 1. 6. 15:54

 

 

이런 목소리 이런 법문(法門) 

 

 

사람의 목소리는 잘 늙지 않는다고 한다. 나이를 먹음에 따라 얼굴에 주름이 지고 노화되어 늙어 가지만 목소리만큼은 쉽게 늙지 않는다. 그래서 흘러간 노래를 부르는 노가수들을 보면 겉모습은 늙었지만  목소리만큼은 꾀꼬리처럼 아름답다.

 

목소리로만 접하며 일을 한다. 직접대면하며 일 하는 경우는 드물다. 전화와 이메일로만 일을 하다 보니 상대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른다. 오로지 목소리로 밖에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런데 목소리만 들어 봐도 어느 정도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목소리의 강약에 따라 말투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지식이나 교양, 전문성 정도가 파악된다.

 

일반적으로 스님들의 목소리는 약간 느릿하며 여유가 있다. 그런 느낌은 글로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스님들이 글을 보내 왔을 때 특유의 느릿하고 여유있고 부드러움을 느낀다. 목소리도 마찬가지이다. 글이나 말이나 목소리는 그 사람의 얼굴이자 인격과도 같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말을 잘하는 사람일까?

 

새내기 수행승의 헌정시

 

상윳따니까야 방기사의 품에 사리뿟따의 경(S8.6)’이 있다. 이 경은 말솜씨와 목소리를 다루고 있다. 시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수행승 방기사가 사리뿟따 존자의 설법에 감탄하여 헌정시를 읊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Gambhirapañño medhāvī

maggāmaggassa kovido,
S
āriputto mahāpañño

dhamma deseti bhikkhuna.

 

[방기싸]

지혜가 깊고 슬기롭고

길과 길 아님을 알며

큰 지혜를 가진 싸리뿟따는

수행승들에게 가르침을 설하네.

 

 

2.

Sakhittena'pi deseti

vitthārena'pi bhāsati,
S
āikāyiva nigghoso

paibhāna udīrayi.

 

간략하게 가르치기도 하고

상세하게 가르치기도 하네.

구관조의 목소리처럼

자유자재한 말솜씨를 발휘하네.

 

 

3.

Tassa ta desayantassa

suanti madhura gira,
Sarena rajan
īyena

savaīyena vaggunā,
Udaggacitt
ā muditā

sota odhenti bhikkhavoti

 

매혹적이고 듣기에

즐거운 미묘한 목소리로

가르침을 설할 때

그 감미로운 소리를 듣고

수행승들은 한껏 고무되어

기뻐하며 귀를 기울이네.”

 

(Sāriputtasutta- 사리뿟따의 경, 상윳따니까야 S8.6, 전재성님역)

 

 

사리뿟따의 목소리에 매료 된 방기사

 

첫 번째 게송을 보면 사리뿟따의 공덕에 대하여 찬양하고 있다. 사리뿟따존자에 대하여 큰 지혜를 가진 싸리뿟따(Sāriputto mahāpañño)’라 하였다. 이는 지혜제일로서 사리뿟따를 말한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 제일의 품(Etadaggavagga)’에서 부처님은 사리뿟따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나의 제자 수행승 가운데 싸리뿟따는 위대한 지혜를 가진 님 가운데 제일이다. (Etadagga bhikkhave mama sāvakāna bhikkhūna mahāpaññāna yadida sari)”(A1.197) 라 하였다.

 

지혜제일(mahāpaññāna) 사리뿟따는 부처님을 대신 해서 종종 설법을 했던 것 같다. 이는 경에서 그 때 존자 싸리뿟따는 수행승들을 우아하고 유창하고 명료하고 뜻을 전달하는 법문으로 교화하고 북돋우고 고무시키고 기쁘게 했다.”(S8.6) 라는 문구에서도 알 수 있다. 지혜제일 사리뿟따는 법문을 잘 하기도 했지만 목소리도 매우 좋았음을 알 수 있다.

 

방기사의 시를 보면 사리뿟따존자의 목소리에 매료 된 듯 하다. 마치 박깔리가 부처님의 32상에 매료 되어 설법은 들어 오지 않고 얼굴만 빤히 쳐다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두 번째 게송을 보면 목소리가 구관조(Sāikā)와 같다고 하였다. 구관조는 어떤 새일까?

 

구관조(Sāikā)는 어떤 새일까?

 

각주에 따르면 구관조(九官鳥)앵무새의 일종이라 하였다. 이를 한자어로 미음조(美音鳥), 백설조(白舌鳥), 사리조(舍利鳥) 라고 한다. 영어로는 ‘a myna-bird’이다.

 

검색창을 통항여 ‘myna-bird’에 대하여 찾아 보았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myna는 서남아시아가 원산이라 한다. 특히 인도라 하였다. 여기서 ‘myna’라는 말은 인도대륙에서 찌르레기를 뜻하는 starling’ 라는 말 대신 사용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myna’는 말하는 새(talking bird), 즉 앵무새로 간주되기도 하는데 마치 인간의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 내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myna(위키백과)

 

 

구관조라 불리는 살리까(Sāikā)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법을 설할 때에 장로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달콤한 잘 익은 망고를 맛보고 날개로 미풍을 일으키며 감미로운 목소리를 내는 구관조를 닮았다.”(Srp.I.276) 라고 설명되어 있다. 사리뿟따존자의 목소리가 매우 매혹적이었음을 말한다.

 

전혀 다른 번역을 발견하였는데

 

두 번째 게송에서 번역이 다름을 발견하였다. 네 번째 구절에서 전재성님은 자유자재한 말솜씨를 발휘하네.”라 하였으나 각묵스님은 영감을 쏟아 내도다.”라 하였다. 전혀 다른 번역이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전재성님은 네 번째 구절 ‘paibhāna udīrayi’에 대하여 독자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udīrayi’에 대하여 ‘udīyyati’로 읽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테라가타 ‘Thag.1232’를 들고 있다. 그래서 “Thag.1232를 참조하면 알 수 있다.”(1748번 각주) 라고 하였다. Thag.1232에서는 udīrayi’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Thag.1232’를 찾아 보았다. 왕기사의 품에 실려 있는 것과 내용이 똑같다. 그런데 이 게송은 THE TIPITAKA사이트에서 찾은 것이다. 사이트에서는 테라가타 ‘1244게송이라 되어 있다. 이 게송이 들어 가 있는 품을 ‘Mahā nipāto’라 하는데 왕기사 장로의 시가 15개 들어 있다.

 

문제의 문구 ‘paibhāna udīrayi’와 관련하여 빅쿠보디의 CDB를 찾아 보았다. “He teaches briefly, He speaks in detail. His voice, like that of a myna bird, Pours forth inspired discourse.” 라 되어 있다. 네 번째 구절을 보면 “Pours forth inspired discourse”라 되어 있어 영감있는 교설을 준다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초불연 번역과 일치한다.

 

초불연에서는 영감을 쏟아내도다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석을 인용하여 사리뿟따 장로가 법을 설하는 감미로운 목소리는 마치 구관조가 잘 익은 달콤한 망고를 맛 보고 양 날개를 퍼덕이며 바람을 일으키고 감미로운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SA.i.276)”(777번 각주) 라 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CDB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Spk paraphrases pada c as if it contained an implicit verb hoti and treats pada d as an independent sentence with paibhāna as subject.

 

It seems more fitting, however, to take nigghoso in pada c as the subject of udīrayi and paibhāna as its object, and I translate accordingly.

 

Spk explains the simile: “The elder's sweet voice, as he teaches the Dhamma, is like the voice of a myna bird when, having tasted a sweet ripe mango, it strikes up a breeze with its wings and emits a sweet sound.”

 

Spk glosses the verb with uṭṭhahati, and paraphrases with an intransitive sense: “Inspired discourse rises up (from him) endlessly, like waves from the ocean.” This implies that Spk reads udiyyati, the Be reading of Th 1232.

 

(CDB 512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는 문제의 ‘paibhāna udīrayi’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사리뿟따의 설법과 음성에 대하여 구관조로 비유하였는데, 이를 like that of a myna bird, Pours forth inspired discourse”라고 해석하였다. 구관조처럼 영감있는 교설을 쏟아낸다는 뜻이다. 이에 대하여 arises’의 뜻을 가진 빠일리어 uṭṭhahati를 인용하여 마치 대양에서 파도가 밀려 오는 것처럼 끊임 없는 영감이 일어난다.(Inspired discourse rises up (from him) endlessly, like waves from the ocean)라는 뜻으로 설명한 것이다.

 

빅쿠보디는 udīrayi와 관련하여 udiyyati’의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미얀마 육차결집본(Be)’ 테라가타 1232번 게송이 그렇게 쓰여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은 그래서 Be에 따라 udiyyati’로 해석하여 자유자재한 말솜씨를 발휘하네로 전혀 다르게 번역하였다.

 

시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한 새내기 수행승 방기사가 보기에 사리뿟따 존자의 설법이 마치 구관조와 같다고 보았다. 지혜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갖춘 설법을 말한다. 그런 설법을 듣고 있다 보면 마치 대양에서 끊임 없이 파도가 밀려 오는 것처럼 영감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게송을 보면 사리뿟따의 설법에 대한 찬탄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영감을 쏟아 내도다”(각묵스님역)  “Pours forth inspired discourse”(빅쿠보디역) 라 한 것은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반면 전재성님은 사리뿟따의 설법의 자유자재함과 말쏨씨에 역점을 두었다. 그래서 자유자재한 말솜씨를 발휘하네라 하였다. 이 문구와 관련된 말이 ‘paibhāna인데 이말에 대한 영어를 보면 Understanding, intelligence, wisdom; readiness or confidence of speech, promptitude, wit’라 되어 있다. 여기에 영감을 뜻하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이해, 교양, 지혜, 확신에 찬 언설, 신속, 위트 와 같은 말이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사리뿟따는 지혜도 있을 뿐만 아니라 시기적절하게 자유자재로 말을 잘 구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요즘말로 하면 말발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자유자재한 말솜씨를 발휘하네라 하였을 것이다.

 

환상적 목소리란?

 

말솜씨가 좋으면 들을만하다. 거기에 지혜까지 겸비 되어 있다면 금상첨화이다. 그런데 세 번째 게송을 보면 매혹적이고 듣기에 즐거운 미묘한 목소리라 하였다. 지혜와 말솜씨와 매혹적인 목소리가 결합한다면 환상적이라 볼 수 있다. 다름 아닌 천상의 목소리와 같다. 그런데 부처님의 목소리가 바로 천상의 목소리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 브라흐마유의 경(M91)’에서는 부처님 목소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So ārāmagato parisati dhamma deseti na ta parisa ussādeti. Na ta parisa apasādeti. Aññadatthu dhammiyāva kathāya ta parisa sandasseti samādapeti samuttejeti sampahaseti.

 

Aṭṭhagasamannāgato kho panassa bhoto gotamassa mukhato ghosoniccharati. Vissaṭṭhoca viññeyyo ca mañchu ca savanīyo ca bindu ca avisārī ca gambhīro ca ninnādi ca. Yathāparisa kho pana so bhava gotamo sarena viññāpeti. Na cassa bahiddhā parisāya ghoso niccharati.

 

Te tena bhotā gotamena dhammiyā kathāya sandassitā samādapitā samuttejitā sampahasitā uṭṭhāyāsanā pakkamanti apalokayamānāyeva avijahantā bhāvena.

 

[웃따라]

그는 승원에 들어가 대중에게 가르침을 설하되, 대중에게 아첨하거나 대중을 매도하지 않고, 반드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훈계하고 교화하고 격려하고 기쁘게 합니다.

 

존자 고따마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여덟 가지 요소를 갖춥니다. 또렷하고, 명료하고, 감미롭고, 듣기 좋고, 청아하고, 음조 있고, 심오하고, 낭랑합니다. 그러나 존자 고따마의 목소리는 청중이 있는 곳까지 알려지지만, 그 목소리가 청중을 떠나서까지 퍼져가지는 않습니다.

 

대중은 존자 고따마의 가르침으로 훈계 받고 교화되고 격려 받고 기쁨에 넘쳐, 오로지 그만을 바라보며, 한눈 팔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납니다.

 

(Brahmāyusutta-브라흐마유의 경, 맛지마니까야 M91, 전재성님역)

 

 

부처님 당시 바라문 브라흐마유가 있었다. 그는 백이십세로 베다에 통달한 스승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처가 출현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제자 웃따라를 보내서 존자 고따마 주위에 퍼져 있는 명성이 진실인지 아닌지또는 그 존자 고따마가 그와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았다. 이에 웃따라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자신의 스승 브라흐마유에게 고하는 장면이다.

 

경에 묘사된 것은 부처님의 목소리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목소리를 보면 팔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또렷하고, 명료하고, 감미롭고, 듣기 좋고, 청아하고, 음조 있고, 심오하고, 낭랑합니다. (vissaṭṭhoca viññeyyo ca mañchu ca savanīyo ca bindu ca avisārī ca gambhīro ca ninnādi ca)”라는 말로 표현 되어 있다. 이것이 훌륭한 목소리의 여덟 가지 조건이다.

 

여덟 가지 목소리는 디가니까야 자나바싸바의 경(Janavasabhasutta, D18)’에도 실려 있다. 야차가 말하기를 하느님 싸낭꾸마라의 목소리라 하였다. 다름 아닌 범천의 목소리, 즉 천상의 목소리를 말한다. 부처님은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것이다.

 

표로 비교해 보면

 

목소리가 또렷함(vissaṭṭho)’은 잘 통해서 장애가 없는 것을 말한다. 명료함(viññeyyo)은 지적임과 동의어로서 의미를 분명히 한다는 뜻이다. 감미로움(mañchu)은 감미롭고 부드럽다는 뜻이다. 듣기좋음(savanīyo)은 듣기에 알맞고 귀에 즐겁다는 뜻이다. 청아함(bindu)은 일체가 되어 흩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음조있음(avisārī)은 명료하여 혼란이 없다는 뜻이다. 심오함(gambhīro)은 단전으로부터 깊이 일으킨다는 뜻이다. 낭랑함(ninnādi)은 큰 비구름의 북소리처럼 크게 울린다는 뜻이다.

 

이 번역과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편견없고, 분명하고, 감미롭고, 듣기좋고, 울려 퍼지고, 음조가 좋고, 심오하고, 낭랑합니다.”(M91) 라고 하였다. 빅쿠보디의 MDB에서는 “it is distinct, intelligible, melodious, audible, ringing, euphonious, deep, and sonorous.”라 하였다. 세 번역을 비교해 보았다.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No

빠알리어

전재성님역

대림스님역

빅쿠보디역

비고

1

vissaṭṭho

또렷하고

편견없고

distinct

차이 있음

2

viññeyyo

명료하고

분명하고

intelligible

 

3

mañchu

감미롭고

감미롭고

melodious

 

4

savanīyo

듣기 좋고

듣기좋고

audible

 

5

bindu

청아하고

울려 퍼지고

ringing

 

6

avisārī

음조 있고

음조가 좋고

euphonious

 

7

gambhīro

심오하고

심오하고

deep

 

8

ninnādi

낭랑합니다

낭랑합니다

sonorous

 

 

 

 

차이가 나는 것은 첫 번째 ‘vissaṭṭho’이다. 전재성님은 또렷하고라 하였으나 초불연에서는 편견없고라 하였다.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면 ‘vissaṭṭha’‘1) let loose; sent (out); released, dismissed; thrown; 2). distinct, well enunciated’라 되어 있다. 두 번째 의미인 ‘distinct’의 뜻이 강하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의 또렷하고와 빅쿠보디의 ‘distinct’가 합당한 번역이라 본다. 그러나 초불연 대림스님역 편견없고라는 번역은 빠알리 원어의 의미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본문과도 동떨어진 번역이라 볼 수 있다.

 

갖가지 법문(法門)을 보면

 

바쁘게 살아 가는 현대인에게 시간은 돈이다. 법문을 듣기 위하여 이동하면 하루가 지나가 버린다. 이런 때 인터넷을 활용하면 효과적이다. 그런데 불교TV나 불교방송, 유튜브 등에서 보는 법문을 보면 천차만별이다. 갖가지 성향을 가진 법사들이 갖가지 목소리로 법문을 한다. 이때 얼굴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목소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법문을 한자어로 法門(법문)’이라 한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부처의 교법으로 중생을 열반에 들어가게 하는 문이라는 뜻이라 한다. 그래서 법문한다고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해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알아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언젠가 부처님오신날 의왕에 있는 C사의 J스님 법문을 들었다. 그런데 J스님은 호통치듯이 법문한다. 신도들 앞에서 보시이야기를 하면서 보시하지 않는 것에서 야단치듯이 말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웃종교와 비교하면서, 이웃종교는 십일조를 하기 때문에 그 공덕으로 부자가 많다고 하며 열등감을 조장한다. 이른바 호통법문이다.

 

유튜브에서 본 어느 스님은 연설하듯이 법문한다. 그것도 불교와 전혀 관련이 없는 외전을 말한다. 마치 연설하듯이 말끝마다 힘주어 말한다. 국회의원이 청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것 같다. 스님의 연설법문이다.

 

불교TV와 유튜브에 실려 있는 K스님은 사투리가 매우 심하다. 말끝 마다 억수로 억수로라는 말이 남발된다. 그리고 즉흥적이다. 한번 가열되면 마치 폭주 하듯이 달리는 증기관차와 같다. 스님의 사투리법문이다.

 

도심포교로 성공한 J스님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고도한 동의어와 과도한 의성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스님은 법문할 때 정말 진짜로 참말와 같은 동의어를 남발 한다. 더구나 말에 힘을 주거나 길게 늘어 뜨려 과도한 의성어를 사용한다. 아마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법문을 들어 보면 비불교적이다. 부처님 대신 예수나 하나님으로 치환하면 마치 목사가 설교하는 것 같아 보인다. 스님의 국적불명법문이다.

 

최악의 법문

 

그런데 위에 언급된 것들을 모두 모아 놓은 듯한 최악의 법문이 있다. 불교TV에소도 볼 수 있고 유튜브에 무더기로 올려져 있는 SD스님의 법문이다. 그런데 이 스님은 특징이 있다. 주로 칠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즉문즉설식으로 한다. 10분 이내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요즘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같아 보인다. 질문자의 질문에 척척 답할 뿐만 아니라 칠판에 그림까지 그려 가며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SD스님의 법문이 왜 최악일까?

 

유튜브에서 본 SD스님의 법문은 비불교적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부처님이야기는 별로 없다. 주로 자신의 이야기이다. 마치 원맨쇼 하듯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마구 쏟아 낸다. 그러다 보니 듣기에 황당한 내용도 많다.

 

SD스님은 자신에 대하여 천상 저편에서 온 자라는가 하면 모든 것을 다 아는 자라는 식으로 말한다. 은연 중에 마치 자신이 깨달은 자, 부처인 것처럼 말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매우 좋아 한다. 가려운데를 시원하게 긁어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기 영합위주의 법문을 한다.

 

받아 적을 것이 별로 없는 것이 SD스님 법문이다. 그런데 스님은 자신의 메시지메 전달하는데 있어서 과도한 액션을 취한다. 그것은 동의어 반복과 의성어로 나타난다. 더구나 억센 경상도 사투리까지 동원된다.

 

스님이 목젖을 이용하여 과도한 의성어를 사용하였을 때 듣는 사람은 불편하다. 당사자는 연설하듯이 말끝마다 힘주어 말하고 더구나 과도한 의성어를 사용함에 따라 본인의 스트레스는 해소될지 모르지만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트레스를 유발하게 만든다. 그런 사항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튜브에 동영상 법문은 계속 올라온다.

 

빤냐와로 삼장법사 법문을 들으면

 

최악의 법문이 있다면 듣기 좋은 법문도 있다. 최악의 법문과는 모든 면에 있어서 대조적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근거로 법문하고 표준말을 사용하고 목소리가 부드럽다. 무엇보다 듣고 나면 남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듣게 된다. 그런 법문으로서 일묵스님의 아비담마법문, 범일스님의 니까야 법문, 빤냐와로 삼장법사의 대념처경 법문을 들 수 있다.

 

빤냐와로 삼장법사의 법문을 들으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요인은 목소리에 있다. 마치 여덟 가지 목소리 조건을 다 갖춘 것 같다. 그것은 또렷하고, 명료하고, 감미롭고, 듣기 좋고, 청아하고, 음조 있고, 심오하고, 낭랑합니다.”(M91) 라는 말이다. 이런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부담 없다. 표준어를 사용하여 완급을 조절하며 말할 때 귀에 쏙쏙 들어 온다. 새벽에 빤냐와로 삼장법사의 대념처경 9강을 들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는 과거의 일들을 떠 올려서는 안된다 미래의 계획들도 미리 앞당겨서 생각해서는 안된는 것이 철칙입니다. 현재 일어난 것, 현재 생각난 것들 만 대상으로 반드시 해야 된다 그래서. 그것을 지혜의 단계에서 문소성, 수소성, 생각을 떠 올려 가지고 그것을 기억해 내는 것들 그건 충분히 가능합니다. 기억을 통해서. 그 다음에 책을 통해서 책을 읽어 가지고 그것을 인해서 환희심도 일어나고 마음을 딱 붙잡아 두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와나마야라고 하는 것은 그것과 차원을 달리 해서 실제 현상들이 변해 가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대상입니다. 그래서 바와나마야를 할 경우에는 과거나 미래는 반드시 일으켜서는 안된다. 지금 현재 일어난 것, 생각이면 생각, 물질적 현상이면 물질적 현상,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만 대상으로 해야 된다는 것이 틀립니다.”

 

(빤냐와로 삼장법사, 대념처경09)

 

 

유튜브 동영상에서 일부 옮긴 것이다. 그런데 조회수를 보면 80여회 밖에 되지 않는다. 갖은 의성어와 사투리로 범벅이 된 비불교적 법문과 비교하면 너무 조회수가 낮다. 이렇게 본다면 반드시 조회수가 많다고 하여 좋은 법문이라 볼 수 없다. 마치 유명하다고 하여 모두 다 훌륭하다고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좋은 법문은 숨어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발견하였을 때는 진흙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듯 하다. 정법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새벽에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접하였을 때 일어나서 경행을 하였다.

 

경행을 할 때 법문을 듣는다. 스마트폰에서는 걸어 가고 있을 때는 걷고 있다라고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갓찬또와 갓차미띠 빠자나띠(gacchanto vā gacchāmīti pajānāti)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라는 말이 낭랑하게 들려 온다. 빠알리어로 경을 읽어 주고 우리말로 해석하고 또 이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방식이다.

 

빤냐와로 삼장법사 법문을 들으면 목소리가 맑고 또렷하다. 말에 완급이 있어서 생각할 여유를 갖게 만들기도 한다. 무엇보다 부처님 원음을 그대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문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2016-01-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