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묵언수행은 이교도나 하는 것, 자자와 포살이 있어야 승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6. 1. 20. 21:54

 

묵언수행은 이교도나 하는 것, 자자와 포살이 있어야 승가

 

 

 

나홀로 수행 하였을 때

 

나홀로 살아 가는 사람에게 향상은 더디다. 홀로 독살이 하는 수행승은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다. 특히 새내기 수행승이 토굴에서 독살이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H스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H스님에 따르면 사미계를 함께 받은 동료 스님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스님은 계를 받고 나서 강원에도 선방에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신 자신의 집 근처 토굴에서 홀로 수행했다고 한다. 조용한 곳에서 조금만 수행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한다.

 

처음에는 수행이 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점점 이상하게 변했다는 것이다. 토굴에 앉아 있어도 마을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지나쳐서 머리에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치 머리에 벌레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를 번뇌라 본 것이다. 그래서 웅웅거리는 소리를 참지 못하여 벽에 머리를 짓이겼다고 한다. 누군가 옆에서 보았다면 틀림 없이 미친 행위로 보았을 것이다. 이렇게 홀로 수행한지 여러 달이 지났을 때 완전히 미친사람처럼 되었다고 했다. 나중에 정신병원에 있게 되었다고 한다.

 

홀로 토굴에서 독살이 하며 수행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진도가 잘 나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은 함께 하는 것이 낫다고 한다. 대중생활 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대중생활 하다 보면 남으로부터 배우기도 하고 자신의 잘못을 지적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독살이 하는 것 보다 더 향상된다고 하였다.

 

자자란 무엇일까?

 

승가공동체의 최소인원은 네 명이다. 그러나 열명 가량이 되어야 완전한 승가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대중이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였을 때 지켜야 할 규범이 있을 것이다. 특히 잘못에 대하여 지적해 줄 수 있는 제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자자포살이다. 이 중 자자에 대한 이야기가 상윳따니까야 방기사품(S8)에 실려 있다. 자자란 무엇일까?

 

부처님이 사왓티 시  미가라뚜 강당에 계셨을 때이다. 경에 따르면 5백명의 아라한과 함께 있었다고 한다. 마침 보름날 포살일 참회모임날이었다. 이 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Handadāni bhikkhave, pavārayāmi vo. Na ca me kiñci garahatha kāyika vā vācasika vā

 

[세존]

 "자 수행승들이여, 지금 그대들은 마음 편히 말하라. 그대들이 볼 때 내가 몸이나 말로 행한 것에 무언가 비난해야 할 것이 있는가?"

 

(Pavāraasutta-참회의 모임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8.7, 전재성님역)

 

 

참회모임이란 무엇일까? 이는 빠와라나(pavāraā)를 말한다. 한역으로 자자(自恣)라 한다. 영어로는 ‘invitation’라 하여 ‘a ceremony at the rainy retreat’라 소개 되어 있다. 어떤 행사일까? 이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에서 잘 나타나 있다. 부처님은 비난해야 할 것이 있는가?”라며 물어 보신 것이다. 안거기간 중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고백하고 참회 하는 것이다.

 

제가 몸이나 말로 행한 것에 무언가 비난해야 할 것이 있습니까?”

 

자자는 안거가 끝났을 때 행하는 의식이다. 보름밤에 모여 연장자부터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파라와나에 대하여 참회의 모임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내가 몸이나 말로 행한 것에 무언가 비난해야 할 것이 있는가?”라고 물어 보았다. 여기에 정신적인 것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마음속에 있는 것은 대중들에게 알려 질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에 있어서 잘못을 물은 것이다. 이에 대중들 중에 우두머리 격인 사리뿟따는 이렇게 말한다.

 

 

[싸리뿟따]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볼 때 세존께서는 몸이나 말로 행한 것에 아무 것도 비난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길을 생겨나게 하고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길을 만들어지게 하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길을 알려주는 분으로 길을 아는 분, 길을 찾으신 분, 길을 꿰뚫어보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세존이시여, 제자들은 지금 길을 쫓아서 나중에 그 길을 구현하는 자로 살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마음 편히 말씀하십시오. 세존께서는 제가 몸이나 말로 행한 것에 무언가 비난해야 할 것이 있습니까?”

 

(Pavāraasutta-참회의 모임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8.7, 전재성님역)

 

 

 

a ceremony at the rainy retreat

 

 

 

사리뿟따는 자신의 행위가 혹시 비난 받아야 있는 것인지 물어 보고 있다. 이에 부처님은 싸리뿟따여, 내가 볼 대 그대에게는 그대의 몸이나 말로 행한 것에 아무 것도 비난할 것이 없다.”라고 분명히 말씀 해 주신다. 이렇게 자신이 잘못된 점이 있는지 상하를 막론하고 물어 보는 것이 자자이다.

 

수행의 경지로 분류하였을 때

 

경에 따르면 이날 모임에서 단 한명도 비난 받을 행위를 한 자가 없었다. 아마 모두 아라한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재미 있는 통계가 있다. 오백명의 아라한에 대하여 수행의 경지로 분류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알 수 있다.

 

 

Imesampi khvāha sāriputta pañcanna bhikkhusatāna na kiñci garahāmi kāyika vā vācasika vā. Imesa hi sāriputta pañcanna bhikkhusatāna saṭṭhi bhikkhū tevijjā, saṭṭhi bhikkhū chaabhiññā, saṭṭhi bhikkhū ubhatobhāgavimuttā. Atha itare paññāvimuttāti.

 

싸리뿟따여, 저들 오백 명의 수행승들 가운데 육십 명의 수행승들은 세 가지의 명지에 정통한 님이며, 육십 명의 수행승들은 여섯 가지 곧바른 앎을 성취한 님이고, 육십 명의 수행승들은 지혜에 의한 해탈과 마음에 의한 해탈을 함께 성취한 님이고, 또한 다른 사람들은 지혜에 의한 해탈만을 성취한 자이다.”

 

(Pavāraasutta-참회의 모임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8.7, 전재성님역)

 

 

세 가지 명지는 삼명을 말한다. 이는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을 말한다. 이렇게 삼명을 갖춘 아라한이 60명이라 하였다. 이는 5백명 중의 12%에 해당된다. 이는 선정과 관련이 되어 있다. 사선정 상태에서 삼명이 가능한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날 초야에 숙명통, 중야에 천안통, 후야에 누진통의 지혜로서 깨달았다고 하는데 이는 부처님의 경지에 근접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60명의 아라한이 여섯 가지 곧바른 앎을 성취했다고 한다. 이는 육신통의 지혜를 말한다. 삼명을 포함하여 여섯 가지 신통을 가진 것이다. 이는 신족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경지에 가장 가까이 갔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6신통의 경지에 이른 아라한은 500명 중에 12%에 해당된다.

 

경을 보면 지혜에 의한 해탈과 마음에 의한 해탈(ubhatobhāgavimuttā)이 있다. 이를 구분해탈또는 양면해탈이라 한다. 이 양면해탈자는 무색계삼매와 더불어 아라한과를 증득한 자를 말한다. 오백명의 아라한 중에 60명이라 하였으니 12%에 해당된다.

 

지혜에 의한 해탈(paññāvimuttā)’이 있다. 이를 혜혜탈이라 하는데 무색계삼매없이 아라한과를 증득한 자가 해당된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오백명의 아라한 중에서 삼명, 육신통, 양면해탈자를 제외한 모두가 해당된다고 하였다. 아렇게 본다면 오백명의 아라한 중에 120명을 제외한 320명이 해당된다. 비율은 64%에 이른다. 오백명의 아라한 중에 대부분이 혜해탈자들이다.

 

오백명 중에  삼명과 육신통을 닦아 아라한이 된자가 모두 120명이다. 이는 선정수행으로 성취된 것이다. 특히 신통은 사선정상태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선정과 곧바로 앎의 경(S16.9)에 따르면 삼명과 육신통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양면해탈자와 혜해탈자는 신통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신통이 있는 아라한은 120명이고 비신통아라한은 380명이다. 신통아라한의 비율이 24%로 소수이고, 비신통아라한의 비율이 76%로서 다수이다.

 

경행 중에 벌레를 밟아 죽인 아라한

 

신통을 가진 아라한은 소수이다. 그 중에서도 육신통을 가진 아라한은 12%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신통을 가진 아라한이 어떤 경우에 유리할까? 법구경 1번 게송 인연담에 짝꾸빨라 장로 이야기가 있다.

 

짝꾸빨라 장로는 경행 중에 벌레를 밟아 죽였다. 이를 본 일부 수행승들이 비난 하였다. 아라한이 된 장로가 벌레를 밟아 죽였다는 것이다. 사실 짝꾸빨라 장로는 장님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봉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경행중에 벌레를 죽인 것이다.

 

부처님은 장로가 잘못이 없다고 하였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이는 의도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나는 의도가 행위라고 말한다. 의도하고 나서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행한다. (Cetanāha bhikkhave kamma vadāmi, cetayitvā kamma karoti kāyena vācāya manasā)” (A6.63) 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업으로써 효력이 발생하려면 의도가 있어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짝꾸빨라 장로는 선천적으로 눈이 멀어서 경행 중에 벌레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의도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잘못도 없다고 했다.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하여

 

짝꾸빨라 장로이야기에 대하여 신통과 관련 되어 회자 되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아라한의 신통에 대한 것이다. 신통이 있는 아라한이 길을 걸을 때 벌레를 밟아 죽일 염려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신통의 힘으로 걷기 때문이라 하였다. 걸을 때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하여 걷기 때문에 벌레를 밟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우스개 소리 일 수 있다. 그러나 선정수행을 하여 신통을 갖춘 아라한과 신통을 갖추지 않은 아라한의 차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신통도 신통 나름이라는 것이다. 삼명만을 갖춘 아라한이 아니라 육신통을 다 갖추어야 벌레를 밟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육신통 중에 신족통은 원하는 초월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에 따르면 하나에서 여럿이 되고..”등으로 설명 되는데 모두 열 가지 신통변화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오백명의 아라한 중에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하여 벌레를 죽이지 않을 아라한은 육신통을 갖춘 자로서 12%에 불과하다.

 

묵언수행에 대하여

 

자자는 어떻게 시작 되었을까? 이는 율장대품에 상세히 기록 되어 있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꼬살라국의 한 처소에서 수행승들이 안거에 들어갔다고 한다. 화합을 중요시 하는 수행승들은 매우 모범적인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이는 우리는 결코 서로 말을 걸거나 대화를 하지 말자. 먼저 마을에서 탁발에 돌아 온 자가 자리를 마련하고 발 씻을 물과 발받침과 발걸레를 준비하고, 개수통을 씻어 놓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조달하자.”(Vin.I.157) 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문제는 대화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마치 묵언수행을 하는 것처럼 일체 말을 하지 않고 오로지 눈빛으로 손짓으로 안거기간 동안 행위 할 뿐이었다.

 

마침내 안거가 끝나고 수행승들은 부처님을 찾아 뵈었다. 이에 대하여 대품에서는 수행승들은 안거가 끝나면 세존을 찾아 뵈러 가는 것이 관행이었다.” (Vin.I.157)라고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을 찾아 뵌 수행승들은 안거기간에 일어났던 일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다. 특히 화합을 위하여 아무 말 하지 않고 눈빛과 손짓으로 행위 한 것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묵언수행한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어리석은 자들은 불편하게 살았으면서도 평안하게 살았다고 자인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어리석은 자들은 축생의 삶을 살았으면서도 평안하게 살았다고 자인하고 있다. 이 어리석은 자들은 양의 삶을 살았으면서도 평안하게 살았다고 자인하고 있다. 이 어리석은 자들은 나태의 삶을 살았으면서도 평안하게 살았다고 자인하고 있다. 어찌 이 어리석은 자들이 이교도가 지키는 묵언의 맹세를 지킬 수 있단 말인가?”

 

(자자의 인연, 율장대품 제4장 자자의 다발 Vin.I.157, 전재성님역)

 

 

수행승들은 안거 기간 중에 묵언한 것에 대하여 칭찬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매우 어리석은 자들이라 하였다.  외도나 하는 묵언수행을 했다는 것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묵언수행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보인 것이나 들린 것이나 의심된 것을 통해서 자자를 행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교도가 지키는 묵언의 맹세를 지키지 말라. 지키면, 악작죄가 된다. 수행승들이여, 안거에 든 수행승에게 세 가지 경우 즉, 보인 것이나 들린 것이나 의심된 것을 통해서 자자를 행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것에 의해서 그대들은 서로 함께 따르며, 죄악에서 벗어나고, 계율을 존중할 것이다.”

 

(자자의 인연, 율장대품 제4장 자자의 다발 Vin.I.157, 전재성님역)

 

 

이것이 자자가 시작된 연유이다. 이교도의 묵언수행처럼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지적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보인 것이나 들린 것이나 의심된 것에 대하여 자자를 통하여 말해야 된다는 것이다.

 

자자와 포살이 있어야 승가이다

 

말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다. 눈빛이나 손짓 등으로 대화 할 수 있는 것이다. 또는 문자로서 대화 할 수 있다. 이렇게 말을 하지 않으면 다툼이 일어 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매우 어리석다고 하였다. 이교도 들이나 하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승가공동체 화합을 생명으로 한다. 화합을 깨뜨리는 행위는 말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그렇다고 입을 다물어 버리면 축생의 삶이나 다름 없다. 또 이교도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보는 묵언수행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더구나 무문관이라 하여 독살이 하며 일체 대화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부처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

 

부처님은 공동체 생활을 강조하였다. 함께 모여 살았을 때 향상을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자와 포살로서 가능하다. 만약 승가에 자자와 포살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토굴에서 나홀로 독살이하면 무어라 불러야 할까? 승가라 볼 수 없을 것이다. 자자와 포살이 있어야 승가이다. 말로서 참회하고 잘못을 지적해 주었을 때 향상이 있다.

 

 

 

2016-01-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