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오역을 지적하였을 때 감사해야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2. 10. 12:49

 

오역을 지적하였을 때 감사해야

 

 

기적 같은 일이 있는데

 

부처님 원음이 오늘날까지 전해 온 것은 기적같은 일이라 한다. 이는 원음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법이 득세하는 것을 막아 내기 위한 것이었고 또한 원음이 오염되고 훼손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었다. 그래서 1차 결집이 끝난 후에 합송하여 구전하였다. 이는 문자에 의한 기록 보다 여럿이서 합송한 구전을 더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구전된 가르침은 스리랑카에서 문자로 기록 되었다. 기원전 80-94년의 일이다. 이는 전쟁과 극심한 기근 등으로 인하여 불교의 존립자체가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루위하라사원에서 삼장과 주석서를 쓰게 된 것이다. 이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문자화된 원음이 빛을 본 것은 서양학자들에 연구에 의해서 이었다. 19세기 빠알리성전협회가 설립되어 로마글자로 표현되었다. 이후 영어로 독일어로 일본어 등 으로 번역되었다. 한국에서도 전재성박사가 1999년 상윳따니까야 일부를 번역함으로써 우리말로 원음을 접하게 되었다.

 

부처님은 원음은 더 이상 구전되지 않는다. 문자화 되어 있어서 누구나 읽을 수 있다. 더구나 인터넷시대를 맞이 하여 검색만 하면 누구나 원음을 접할 수 있다. 과거 소수만 접할 수 있었던 가르침을 누구나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전도선언은 결실을 맺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정보가 오픈되고 공유화 되는 디지털시대에 부처님 원음이 바로 우리 옆에 있는 것이다.

 

두 종류의 번역서를 비교해 보았더니

 

한국에는 현재 두 종류의 빠알리니까야 번역본이 있다. 전재성박사의 번역본과 초불연의 대림-각묵스님의 번역본이다. 이렇게 두 종류의 번역본을 가지게 된 것은 불자들로서 다행스런 일이다. 부처님 원음을 더 자세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한종류의 번역본만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번역자의 오역이나 탈역이있었을 정확하게 전달 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본 다면 두 개의 번역서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두 번역서를 비교하면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빠알리원본과 영역본까지 비교해 보면 금방 드러난다.

 

두 종류의 빠알리니까야 번역본에 대하여 비교검토 하는 글을 쓰고 있다. 이렇게 쓰게 된 동기는 M스님이 전재성님 번역본을 폄하하는 글을 보았기 때문이다.

 

M스님은 전재성님의 번역본이 오류투성이라 하였다. 이렇게 재가자의 번역에 대하여 의문으로 보는 것은 승가에서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승가에서 번역된 것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스님이 번역하면 더 신뢰가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아마 스님은 수행도 하였고 더구나 현지에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더 신뢰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번역은 수행이나 현지에서 사는 것과 무관한 것이다.

 

번역을 하려면 수행은 물론 언어학적 인문학적 소양도 있어야 한다. 특히 언어학적 소양이 문제가 된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7개 국어를 아는 번역자가 유리할 것임에 틀림 없다. 여러 가지 판본을 놓고 대조 해 가며 번역한다면 실수가 적어 질 것이기 때문이디.

 

M스님의 견해는 맞는 것일까? 그래서 비교해 보기로 하였다. 스님들 대부분이 스님이 번역한 책을 선호한다는데 그 책은 오류가 없는지 확인 하고 싶었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부터 비교하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영역본인 빅쿠보디의 CDB도 참고 하였다. 비교해 보니 M스님이 말한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주제넘게 번역비교를 한다고

 

상윳따니까야 1권을 번역비교 하고 있다. 블로그에 번역비교방을 만들어 틈틈히 비교하고 있다. 2013 9월부터 시작 하였으니 만 2년이 넘었다. 현재 일곱 번째 상윳따인 브라흐마나상윳따까지 비교하였다. 이런 비교에 비난도 많다. 학자도 아니고 스님도 아닌 것이 주제넘게비교한다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방식대로 비교하고 있다. 누구나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빅쿠보디에 크게 의존한 초불연 번역서

 

길고 짧은 것은 대 보면 알 수 있다. 빠알리원문을 놓고 일대일 비교하면 금방 드러난다. 더구나 영역까지 옆에 놓으면 얼마나 많이 참고하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번역서는 영역본과 매우 유사하다. 심지어 주석을 그대로 우리말로 번역해 놓았는가 하면 영역의 주석을 참고하라고까지 하였다. 이는 각주에서 “보디스님 455~456 488번 주해를 참조할 것” (초불연 상윳따 1, 741번 각주) 라는 문구로 알 수 있다.

 

초불연에서는 번역방침에 있어서 자주불교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막상 번역해 놓은 것을 보면 빅쿠보디에 크게 의존한 듯 하다. 이는 각묵스님의 상윳따니까야 해제를 보면 알 수 있다.

 

각묵스님은 해제글에서 역자가 꼭 밝히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본서 번역에 있어서 보디 스님이 10여 년간 노력하여 번역 출간한 ‘상윳따 니까야’ 영역본인 The Connected Discourses of the Buddha(vol. 1&2)를 많이 참조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보디 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달아 놓은 주옥 같은 주해들은 역자의 번역과 주해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상윳따니까야 1권 해제, 94P) 라고 밝힌 바 있다. 초불연 번역서가 빅쿠보디의 영역본 CDB에 크게 의지하였다는 것이다.

 

데드카피(dead copy), 엎어 놓고 베끼는 것

 

오랫동안 개발업무를 하였다. 과거 이십년간 전자제품을 개발하였다. 처음에는 선진국제품을 따라가기에 바빴다. 가장 빠른 방법은 카피(copy)하는 것이다. 그런데 카피도 크게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데드카피(dead copy)이고 또 하나는 일반카피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데드카피이다.

 

데드카피란 무엇인가? 다름 아닌 엎어 놓고 베끼는 것이다. 하나도 틀림 없이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다. 마치 짝퉁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이렇게 처음 진입할 때는 엎어 놓고 베끼는 것이다.

 

데드카피하여 잘 작동 된다면 그 다음 단계는 원가 절감과 품질 개선이 이루어진다. 이는 진일보한 단계이다. 이것이 진정한 카피라 볼 수 있다. 짝퉁에서 자체모델로 발전되는 것이다. 그러나 원천은 오리지널에 있다. 그래서 오리지널에다 새 옷을 입힌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처음에는 이렇게 데드카피에부터 진입한다.

 

팔만대장경은 짝퉁

 

해인사에 팔만대장경이 있다. 불자라면 자긍심이 있는 문화유산이고 동시에 세계문화유산이다. 그런데 팔만대장경은 우리가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전에도 대장경이 있었다. 전란으로 불에 타 없어진 것이다. 이후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그렇다면 대장경은 한국이 최초일까? 그렇지 않다.

 

지난 2011년 팔만대장경 천년을 맞이하여 흥미로운 기사가 떴다. 팔만대장경은 짝퉁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팔만대장경은 가짜라고 하였다. 이는 교계신문 기사 제목으로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려대장경의 불편한 진실과 빠알리삼장(2011-02-25)’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렇다면 왜 팔만대장경이 짝퉁이고 가짜일까? 이에 대하여 현대불교신문 기사를 보면 초조대장경의 저본은 송나라의 개보대장경이다. 저자는 “글씨는 개보대장경을 엎어놓고 베낀 것이며, 이 초조대장경을 다시 베낀 물건이 현재 해인사에 보관돼 있는 재조대장경”이라고 밝혔다. “(현대불교신문, 2011-02-18) 라 하였다. 이는 팔만대장경 천년을 맞이 하여 전산화 작업에 참여 하였던 오윤희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밝힌 내용이다.

 

현재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최초가 아니라 하였다. 최초는 송나라 시대 개보대장경이라 하였다. 이 개보대장경을 엎어 놓고베낀 것이 초조대장경이고, 초조대장경을 저본으로 해서 만든 것이 팔만대장경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초조대장경은 데드카피본라 볼 수 있고, 팔만대장경은 카피본이라 볼 수 있다.

 

베끼려면 엎어 놓고 베껴야

 

개발할 때 늘 듣는 말이 있었다. “베끼려면 확실하게 베껴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도 틀림 없이 그대로 베끼라는 것이다. 이럴 때 엎어 놓고 베낀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번역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베끼려면 엎어 놓고 베껴야 한다. 원본 그대로 베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생각이 들어 간다면 원음이 잘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베껴도 원본을 베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오자 탈자가 없다. 그렇다고 남이 해 놓은 것을 베끼라는 말이 아니다.

 

문제가 되는 초불연 번역

 

두 개의 번역서를 비교하다 보면 종종 오역이 발견된다. 또한 탈역 등도 종종 발견된다. 그런데 원문과 전혀 무관한 것도 발견된다. 이럴 경우 빠일리원문과 두 번역본, 그리고 빅쿠보디역을 비교해 보면 금방 드러난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있는 전사의 경2(A5.76)’이 그렇다. 대체 어떤 문제일까? 먼저 문제가 되는 초불연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어떤 마을이나 성읍을 의지하여 머문다. 그는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몸을 보호하지 않고 말을 보호하지 않고 마음을 보호하지 않고 마음챙김을 확립하지 않고 감각기능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않은 채 마을이나 성읍으로 탁발을 하러 들어간다. 그는 거기서 제대로 몸을 감싸지도 않고 제대로 옷을 입지도 않은 여인을 본다. 제대로 몸을 감싸지도 않고 제대로 옷을 입지도 않은 그런 여인을 보고서 애욕이 그의 마음을 물들게 한다. 그는 애욕에 물든 마음으로 청정수행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간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여기 어떤 무사가 칼과 방패를 들고 활과 화살 통을 매고 상호 밀집된 전쟁터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그는 견뎌내고 분투한다. 그러나 적들이 그를 죽여 버리고 끝장을 내버리듯이, 이 인간은 그와 같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인간은 이러하다. 비구들이여, 비구들 가운데는 이러한 첫 번째 무사와 같은 인간이 있다.

 

(무사 경2, 앙굿따라니까야 A5:76, 대림스님역

 

 

이 경의 빠알리어 제목은 Dutiyayodhājīvūpama sutta이다. 이를 전재성님은 전사에 대한 비유의 경2’라 하였다. 다섯 가지 전사의 타입에 대하여 탁발나가는 빅쿠에 대하여 비유하고 있다. 마치 빅쿠가 탁발 나가는 것을 전사가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본 것이다.

 

이 경은 탁발과정에서 여인을 보았을 때 그 경계를 보기 위한 것이다. 평소 부처님 가르침을 잘 따르는 자라면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으나 막행막식 하듯이 아무렇게나 사는 자는 전투에서 사망할 수 있음을 말한다.

 

누구의 번역이 맞는 것일까?

 

어느 빅쿠가 탁발을 나갔다가 제대로 몸을 감싸지도 않고 제대로 옷을 입지도 않은여인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빅쿠는 그 여인을 보고 마음이 흔들려 재가의 삶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첫 번째 전사의 비유를 들며 전투에서 죽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문제는 그 다음 구절이다.

 

구절을 보면 그는 애욕에 물든 마음으로 청정수행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라 되어 있다. 이 문구가 다른 번역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어떻게 다른가? 전재성님은 그는 배움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지 않고 성적교섭을 행한다.”라 하였다. 대림스님은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라 하였는데, 전재성님은 성적교섭을 행한다라 하였다. 완전히 다른 번역이다. 대체 누구의 번역이 맞는 것일까?

 

비교해 보면 드러난다

 

문제의 번역을 다른 것과 비교해 보았다. 길고 짧은 것은 대보면 금방 드러난다. 빠알리원문과 빅쿠보디의 영역본 ‘The Numrrical Discourses of the Buddha(NDB)’를 참고 하였다.

 

 

1. 빠일리원문

 

Idha bhikkhave bhikkhu aññatara gāma vā nigama vā upanissāya viharati. So pubbanhasamaya nivāsetvā pattacīvaramādāya tameva gāma vā nigama vā piṇḍāya pavisati arakkhiteneva kāyena arakkhitāya vācāya arakkhitena cittena anupaṭṭhitāya satiyā asavutehi indriyehi.

 

So tattha pasasti mātugāma dunnivattha vā duppāruta vā. Tassa ta mātugāma disvā dunnivattha vā duppāruta vā rāgo citta anuddhaseti.

 

So rāgānuddhasitena cittena sikkha apaccakkhāya dubbalya anāvīkatvā methuna dhamma patisevati. (TPS, A5.76)

 

 

2. 대림스님역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어떤 마을이나 성읍을 의지하여 머문다. 그는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몸을 보호하지 않고 말을 보호하지 않고 마음을 보호하지 않고 마음챙김을 확립하지 않고 감각기능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않은 채 마을이나 성읍으로 탁발을 하러 들어간다.

 

그는 거기서 제대로 몸을 감싸지도 않고 제대로 옷을 입지도 않은 여인을 본다. 제대로 몸을 감싸지도 않고 제대로 옷을 입지도 않은 그런 여인을 보고서 애욕이 그의 마음을 물들게 한다.

 

그는 애욕에 물든 마음으로 청정수행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간다. (초불연, A5.76)

 

 

3. 전재성님역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수행승은 어떤 마을이나 도시의 근처에 산다. 그는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었으나, 신체를 수호하지 않고 언어를 수호하지 않고 마음을 수호하지 않고 새김을 확립하지 않고 감각능력을 제어하지 않고, 마을이나 도시로 탁발하러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본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하여, 그는 배움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지 않고 성적교섭을 행한다.” (성전협, A5.76)

 

 

4. 빅쿠보디역

 

“Here, some bhikkhu dwells in dependence upon a certain village or town. In the morning, he dresses, takes his robe and bowl, and enters that village or town for alms, with body, speech , and mind unguarded , without having established mindfulness, his sense faculties unrestrained.

 

There he sees women with their dress in disarray and loosely attired. When he sees them, lust invades his mind.

 

With his mind invaded by lust, he has sexual intercourse without having disclosed his weakness and given up the training.” (NDB, A5.76)

 

 

세 번역을 비교해 보면 가장 마지막 문장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대림스님은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라 하였다. 원문은 어떨까? 원문을 보니 관련된 문장이 “methuna dhamma patisevati”이다. 여기서 키워드는  ‘methuna’이다. 이는  sexual intercourse; coupling’의 뜻으로 성적행위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성적교섭을 행한다.”라 하였다. 빅쿠보디 역시 “he has sexual intercourse”라 하여 역시 성적 교환을 갖는다.”라고 번역하였다. 대림스님만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라 하여 다르게 번역하였다. 대림스님은 왜 그렇게 번역하였을까? 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번역하였을까?

 

편집과정에서 실수?

 

대림스님이 “methuna dhamma patisevati”라는 문구에 대하여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라고 번역한 것은 명백한 오역이다. 아니 실역일 수도 있다. 편집과정에서 교정이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어지는 전사의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라는 말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오역이 아니라 편집과정에서 실수라 본다.

 

누구든지 실수 할 수 있다. 이 세상이 실수 없이 사는 완벽한 인간은 존재 하지 않는다. 실수가 발견 되었을 때 즉각적으로 수정하고 다시는 재발하지 않게 하면 되는 것이다.

 

방대한 빠알리니까야를 번역하는데 있어서 실수가 나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오자나 탈자는 물론 심지어 오역 또는 탈역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니까야를 읽다 보면 이런 실수는 종종 발견된다. 이런 실수에 대하여 글로써 남긴다. 그러나 어느 번역자는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예를 보았다.

 

문제를 대하는 번역자의 태도

 

언젠가 글을 하나 썼다. 초불연 번역을 보고서 문제를 발견한 것이다. 무엇보다 문제를 대하는 번역자의 태도에 대하여 문제 삼았다. 이에 대하여 올려 놓은 글이 무한책임을 지는 자세로, 번역과 윤문(潤文)(2014-05-18)라는 제목의 글이다. 글에서 초불연의 윤문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책이 출간되고 난 다음 실수가 발견 되었을 때 개정판을 낸다. 또 내용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윤문과정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초불연 각묵스님은 재가자로 이루어진 윤문팀운영을 하겠다고 말했다. 이것이 참으로 놀라웠다. 왜 놀라운가? 윤문이란 번역자가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타인을 시켜서 잘못을 골라 내게 하고 더구나 윤문까지 맡긴다고 하였을 때 번역자의 도리가 아님을 비판하였다. 이를 전재성님의 예를 들어 설명하기도 하였다.

 

카페에서 강퇴당하였는데

 

전재성님의 경우 상윳따니까야와 맛지마니까야 초판본이 나온 후에 수 년간 오로지 교정에만 온 힘을 기울였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재가자로 구성된 윤문팀을 가동하겠다고 하니 매우 무책임하다고 비판하였다. 그래서 윤문팀 운영에 대하여 “남이 똥싸 놓은 것 치우는 격”이라 하였다.

 

아마 이 말에 자극 받았나 보다. 몇 일 후 초불연 카페에 들어 가려 하였으나 들어 갈 수 없었다. ‘강퇴당한 것이다. 그래서 강제탈퇴되어 해당카페에 접근하실 수 없습니다라는 충격적 문구를 발견하였다. 사유는 무엇일까? 강제탈퇴이유를 보니 욕설, 인신공격등이 이유라 한다.

 

 

 

 

그날 이후로 초불연 카페에 들어 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카페에 글을 쓴다거나 댓글을 다는 등의 행위를 한 것도 아니다. 요즘 말로 눈팅만 열심히 한 것이다. 이는 카페에 축적되어 있는 소중한 자료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교리에 대하여 질의응답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문안인사 드리듯이 매일 방문하였다. 그러나 강퇴 당하였다.

 

카페에 글을 쓰지도 않았음에도 강퇴당한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할까? 대단히 부당하다고 본다. 또 대단히 비겁하다고 본다. 번역에 있어서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건설적 방향으로 의견을 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되돌아 온 것은 입장불가이었다.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한 전재성님

 

이후 여러 차례 카페지기 각묵스님에게 쪽지를 보내 풀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묶고 놓고 있다. 참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번역에 대하여 비교하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행위가 과연 강퇴당할 만한 욕설, 인신공격에 해당되는 것일까? 잘못을 지적해 주면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전재성님과 매우 대비된다.

 

전재성님도 오역이 있었다. 이를 사실대로 비교하여 글을 남겼다. 문제가 되는 번역을 보면 초불연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님 번역은 정반대로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고양이의 경(S20.10)에서(2013-10-15)’라는 제목의 글과, 쥐가 고양이를 먹었나? 고양이가 쥐를 먹었나? 논란의 고양이의 경(S20.10)(2013-10-19)’라는 제목을 가진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권으로 만들어진 통합본 상윳따니까야에 필명 진흙속의연꽃이 언급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가문의 광인가? 통합본 상윳따니까야에 실린 ‘진흙속의연꽃’(2015-03-13)’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전재성님은 통합본 머리말에서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였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리고 이번에 통합개정판에서는 ‘진흙속의 연꽃 님’의 지적 ‘고양이의 경’의 우화에서 생쥐와 고양이의 위치가 역전되지 않았나 하는 점에 대해 검토한 결과 역자가 생물학적 관점을 정당화하려고 성급하게 번역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화적인 논리의 관점을 복원하고, 이전의 번역은 – 사실상 이전 번역은 오늘날 보면, 생물학적으로 더욱 명증적이기 때문에 – 빠알리어로 환원하여 퇴현 판본을 만들어 주석에 집어넣어서 이전의 번역도 함께 고려 하도록 실었습니다.

 

(전집해제 32p, 통합본 상윳따니까야, 전재성박사)

 

 

 

 

 

 

이와 같은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다. 후원자도 아니고 교정자도 아님에도 필명이 서문에 올라 것이다. 그래서 가문의 영광이라 하였다.

 

오역을 지적하였을 때 감사해야

 

한국에는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다. 어느 번역서가 맞는지는 개인의 취향일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방대한 번역에 있어서 실수가 없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오자, 탈자 등의 실수가 보인다. 그러나 가장 큰 실수는 오역이다. 원문과는 정반대로 번역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브라흐마짜나경(S6.1)에서 ‘pamuñcantu saddha’번역에 대한 것이다. 이 문구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라고 번역하였다. 이에 반하여 성전협 전재성님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라고 정반대로 번역하였다.

 

이는 절에 가면 주련에서 볼 수 있는 ‘神光不昧 萬古徽猷(신광불매 만고휘유) 入此門來 莫存知解(입차문래 막존지해)’라는 문구와 같은 개념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신령스런 광명이 어둡지 않아 만고에 빛나니 이 문에 들어 오거던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이다. 중요한 말은 입차문래 막존지해이다. 절 문에 들어 서는 순간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믿음이나 신앙, 사상을 내려 놓으라는 것이다. 그래야 가르침을 받아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세상에 진리를 펴려고 하였을 때 가장 먼저 한 말이 기존의 신념이나 사상, 믿음 등을 먼저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pamuñcantu saddha’라 한 것이다. 이는 자신의 신앙을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라고 올바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정반대로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라고 정반대로 번역하였다. 이것이 오역이다. 이런 오역을 지적하였을 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강퇴로 대응하고 있다.

 

 

2015-12-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