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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과 분별론자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0. 22. 10:20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 분별론자

 






적극적 구걸자가 있는데

 

지하철 역 등에서 구걸하는 자가 있다. 이를 거지 또는 걸인이라 한다. 대체로 한 곳에 앉아 불쌍하고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적극적으로 구걸하는 자들도 있다. 이집 저집 다니면서 구걸하거나 거리에서 손을 내미는 걸인을 말한다.

 

걸인은 빌어먹는 자들을 말한다. 그런데 어떤 걸인은 당당하다. 초기경에 따르면 아첨구걸자(vanibbaka)’가 이에 해당된다. 구걸하긴 구걸하되 당당하게 구걸하는 자를 말한다. 주석에서는 “바람직하고 원하는 것이고 마음에 드는 것을 제 때에 비난 없이 믿음의 마음으로 주면, 천상의 하느님세계에 간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처럼 적극적 구걸자는 자신에게 보시하면 천상에 태어날 공덕을 짓는다고 말하며 보시를 유도한다.

 

우리사이에 어떤 차이가

 

수행자도 밥을 빌어 먹는다. 그렇다면 걸인과 수행자는 어떻게 다를까? 같은 수행자라도 부처님의 교단으로 출가한  수행자와 이교수행자는 또 어떻게 다를까? 부처님이 사왓티에 계실 때 바라문 걸식수행자가 찾아 왔다. 찾아와서는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ahampi kho1 bho gotama bhikkhako bhavampi bhikkhako idha no ki nānākaraanti?

 

[바라문]

존자 고따마여, 저도 걸식자이고 그대도 걸식자입니다.

우리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S7.20, 전재성님역)

 

 

바라문출신 걸식자는 걸식자에 대하여 ‘bhikkhaka’라 하였다. 각주에 따르면 빅칵카(bhikkhaka)일반걸식자를 뜻한다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 교단으로 출가한 빅쿠(bhikkhu)와는 다른 말이다.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a beggar; mendicant’라 되어 있다. 걸인 또는 거지를 뜻한다.

 

악취가 나는 법을 따를 때

 

바라문 걸식자는 부처님에게 같은 걸식자가 아니냐고 하였다. 이는 얻어 먹고 다니는데 있어서 같은 걸식자 개념으로 본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차이를 설명해 주었다.

 

 

Na tena bhikkhako hoti

yāvatā bhikkhate pare,
Vissa
dhamma samādāya

bhikkhu hoti na tāvatā.

 

[세존]

다른 사람에게 걸식을 한다고

그 때문에 걸식자가 아니니

악취가 나는 가르침을 따른다면

걸식수행자가 아니네.” (S7.20, 전재성님역)

 

 

똑같이 밥을 빌어 먹고 다닌다고 하여 모두 같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악취가 나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Vissa dhamma samādāya)’으로 차이를 설명하였다. 여기서 악취나는 가르침은 ‘Vissa dhamma를 뜻한다

 

빠알리어 Vissa라는 말은 ‘a smell like raw flesh’의 뜻이다. 날고기에서 비린내가 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Vissa dhamma는 악취나는 법을 뜻한다. 이는 바라문교를 포함한 육사외도의 가르침은 악취가 나는 법임을 말한다.

 

공덕마저 버리라 하였는데

 

부처님은 외도의 가르침은 악취가 나는 것이라 하였다. 악취나는 가르침을 따르는자가 걸식 하였을 때 이는 빌어 먹는 걸인과 다름 없다. 그러나 부처님 교단에 출가하여 계행을 지키며 청정한 삶을 살아 가는 걸식자는 다르다. 그래서 이교를 포함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걸인에 대하여 빅칵카(bhikkhaka)라 하였고, 부처님의 교단 수행자에 대하여 빅쿠(bhikkhu)라 하여 구분 하였다. 이와 같이 말씀 하신 부처님은 어어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말씀 하셨다.

 

 

Yodha puññañca pāpañca

bāhitvā brahmacariyavā,
Sa
khāya loke carati

sa ve bhikkhūti vuccati.

 

[세존]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청정하게 삶을 살며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자가

그야말로 걸식 수행승이네” (S7.20, 전재성님역)

 

 

첫번째 구절에서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Yodha puññañca pāpañca bāhitvā)”라 하였다. 악함(papa)을 버린다는 말은 이해 할 수 있다. 그런데 공덕(puñña)도 버리라고 하였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여 공덕을 쌓는 것은 장려 된다. 그럼에도 공덕을 버린다고 하였다. 이는 각주를 보아야 알 수 있다.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공덕을 닦아 천상계에 태어나는 것마저 버리는 것은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수행승을 두고 하는 말이다.”(1662번 각주) 라 하였다. 이렇게 설명을 들으니 모든 것이 명확하다.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

 

육조단경에 불사선불사악이라는 말이 있다. 이를 잘못 해석하면 악도 행하지 않고 선도 행하지 않는다는 말로 오해 할 수 있다. 부처님은 출재가를 막론하고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장려 하였는데 공덕을 짓지 말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

 

불환자까지는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공덕을 쌓는다. 그러나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공덕을 쌓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선행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매우 잘못 된 것이다. 아라한도 선행을 한다. 다만 색계나 무색계 천상에 태어나기 위한 욕망이 소멸 되었으므로 선행을 해도 더 이상 공덕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육조는‘不思善不思惡(불사선불사악)’이라 하였는데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육조단경에 不思善不思惡(불사선불사악)’이라는 말이 있다. 무문관 23칙이기도하다. 불교사전에서는 선악 (善惡)의 사량 (思量), 곧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생각을 끊은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사량분별하지 않기 위해서 악은 물론 선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시대의 최고강백이라 일컬어지는 무비스님은 어떻게 말하였을까? 스님은 불사선불사악하라. 그런 망상으로 사량 분별. 사변으로 결정해 놓은 그런 선이니 악이니 하는 그 따위 것을 다 집어치우자 이것이지요. 우리가...”라 하였다. 그리고 쌍차쌍조(雙遮雙照) 중도와 공의 논리로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오해할 수 있다. 선도 악도 하지 않는다고 하여 공덕행마저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분별론자(Vibhajjavādin)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자들은 악행을 멀리하고 공덕행을 지어야 한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초기경전에서 불사선불사악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부처님이 꾸살라(kusala)라 하여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장려 하였다. 이는 십선행을 말한다. 그런데 사량분별한다고 하여 불사선불사악이라 한다면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깨달은 자는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부처님은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akusala)를 멀리하고 착하고 건전한 행위(kusala)를 장려 하였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선불사악(思善不思惡)이 된다. 이는 선과 악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분별론자가 된다.

 

선사들은 늘 분별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바라문 청년이여, 그것에 대해 나는 분별하여 말하는 사람입니다. (Vibhajjavādo kho ahamettha māava)” (M99)라 하였다. 부처님은 자신을 분별론자라 하였다. 여기서 분별하여 말하는 사람‘Vibhajjavādo’을 말한다.

 

부처님은 무엇을 분별하였을까? 주석에 따르면 오온에 대한 분별이다. 예를 들어 몸에 대하여 32가지 신체기관으로 분해하고 해체하여 요소별로 관찰하지 않는 이상 그것에 대해 중생이라거나 사람이라거나 인간이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음을 말한다. 이렇게 오온에 대하여 분별해서 보았을 때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분별하여 말하는 사람입니다.”라 한 것이다.

 

선종에서 본 다면 부처님은 사량분별론자에 해당된다. 그런데 분별론자인 부처님은 한번도 선을 생각하지 말라(不思善)’고 말을 한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선을 적극 장려하였다. 이는 십선행으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선종에서는 불사선불사악이라 하여 혼란을 주고 있다. 물론 무분별의 공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근기가 약한 일반사람들에게는 선도 악도 행하지 않는 것으로 비추어 질 수 있다. 수행자에게는 막행막식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법구경에도 동일 게송이


게송에서 부처님은 걸식에 의존하는 빅쿠에 대하여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청정하게 삶을 살며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자라 하였다. 이렇게 사는 걸식자는 악취나는 가르침으로 사는 걸식자와 다르다. 그래서 같은 걸식자라도 빅칵카(bhikkhaka)와 빅쿠(bhikkhu)로 구분된다그런데 이 걸식자의 경(S7.20)에 실려 있는 게송은 법구경에서도 보인다는 사실이다. 법구경 266번과 267번 게송이 그것이다. 전재성님의 법구경을 보면 빠알리원문은 동일하지만 번역을 약간 달리 해 놓았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다른 사람에게 밥을 빈다고

그것으로 수행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부패한 원리를 지닌다면,

그만큼 수행승이 되지 못한다. (Dhp266)

 

공덕과 악행을 버리고

여기서 청정한 삶을 살면서

신중히 세상을 거닌다면,

그가 바로 수행승이라 불린다. (Dhp267)

 

 

 

2015-10-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