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초고령화시대와 불교수행공동체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28. 14:04

 

 

초고령화시대와 불교수행공동체

 

 

 

 

 

 

요즘 100세 시대라 한다. 가면 갈수록 기대 수명이 늘어나 100세 시대를 바라 보게 되었다. 그래서 보험 등 모든 것들이 100세 시대를 가정하여 새롭게 전략을 짜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100세 시대라 하는데 과연 삶의 질은 따라 갈 수 있을까? 나이가 듦에 따라 필연적으로 병이 들고 또한 오래 살게 됨에 따라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는데 100세까지 산다는 것은 축복일까?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

 

상윳따니까야에 대부호의 경(S7.14)가 있다. 한때 부자이었으나 자식들로부터 당한 바라문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경에 따르면 어떤 대부호인 바라문이 비천하고 초라한 옷을 입고 세존께서 계신곳으로 찾아 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주고 받은 뒤에 한 쪽으로 물러나 앉았다.”라 되어 있다.

 

대부호 바라문이 거지 행색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런데 바라문은 부처님 가까운 곳에 앉아서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주고 받은 뒤에라 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나누고라 하였다. 이 문구는 정형구이다. 경이 시작 될 때 의례히 삽입 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역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주고 받은 뒤에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나누고는 서로 다르다. 빠알리 원문을 찾아 보니 “Upasakamitvā bhagavatā saddhi sammodi sammodanīya katha sārāīya vītisāretvā ekamanta nisīdi.”라 되어 있다.

 

여기서 sammodi‘exchanged friendly greetings’의 뜻이다. Sammodanīya‘to be rejoiced; pleasant.’의 뜻이고, sārāīya‘fit to be remembered 또는 what should be reminded.’의 뜻이고, vītisāreti‘To remind mutually’의 뜻이다.

 

문제의 번역어는 ‘sārāīya vītisāretvā이다. 이를 직역하면 서로 떠 올리게 하며의 뜻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라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안부를 주고 받은 뒤에라 하였다. 초점은 기억과 안부이다.

 

사람을 만나면 가장 먼저 인사를 한다. 그런 인사는 존경의 표시이다. 만약 존경하지 않는다면 인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학생이 선생을 보고서도 지나친다면 존경하지 않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한때 대부호이었던 바라문이 부처님을 만났을 때 인사 하였을 것이다. 부처님도 역시 인사하여 반갑게 맞이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에서는 인사라는 말이 빠져 있다. 이는 ‘saddhi sammodi’서로 인사하며라는 뜻임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기억을 강조 하여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라 하였다. 반면 전재성님의 번역을 보면 가장 먼저 인사를 나누고라 하여 ‘saddhi sammodi’의 뜻을 번역하였다. 이어서 안부를 주고 받은 뒤에라 하여 ‘sārāīya vītisāretvā의 의미를 번역하였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When they had concluded their greetings and cordial talk,”라 하였다. 번역해 보면 인사를 나누고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었다의 뜻이 된다. 하지만 초불연 번역을 보면 인사와 관련된 빠알리 ‘sammodi’가 있음에도 이를 환담을 나누었다라 하였고, 더구나 유쾌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라 하였는데 이는 지나친 의역이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유쾌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만남이라는 것이 유쾌한 만남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거지가 된 대부호 역시 그다지 유쾌한 만남은 아니다. 단지 부처님이 인사와 함께 따뜻하게 맞아 준 것 뿐이다. 그래서 빅쿠보디는 ‘cordial talk’라 하여 따뜻한, 정중한, 진심의 이야기라는 식으로 번역하였다. 또 전재성님은 안부를 주고 받은 뒤에라는 정형구로 처리 하였다.

 

거지가 된 대부호 바라문

 

한때 대부호이었던 바라문은 어떻게 하다 거지가 되었을까? 이는 바라문의 말에서 알 수 있다. 바라문은 저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자식들이 그 아내들과 모반하여 저를 집에서 쫓아냈습니다.”라고 하였다. 아들이 재산인 시대에 네 명의 아들로부터 버림 받은 것이다. 그것도 아내들이 공모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당시 바라문들의 타락상과도 관련이 있다.

 

숫따니빠따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Sn2.7)’에 따르면 법이 무너진 바라문의 타락상을 묘사 하고 있다. 그 중에 아내는 지아비를 경멸하게 되었습니다.” (stn314) 라는 구절이 있다. 대규모 동물희생제등이 유행하고 감각적 욕망에 사로 잡힌 타락한 바라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부호이었던 바라문은 집에서 쫓겨 났다. 이에 부처님은 자식들에게 이런 시를 읊어 보라고 권유한다.

 

 

1.

Yehi jātehi nandissa

yesañca bhavamicchisa,
Te ma
dārehi sampuccha

sāva vārenti sūkara

 

내가 그들의 탄생을 기뻐하고

내가 그들의 성장을 원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아내들과 모반하여

나를 개나 돼지를 몰아내듯 몰아내었네.

 

2.

Asantā kira ma jammā

tāta tātāti bhāsare,
Rakkhas
ā puttarūpena

pajahanti vayogata.

 

착하지도 못한 비열한 자들이

나를 아버지, 아버지라 부르네.

아들의 형상을 한 야차들이

나이든 늙은이를 버리네.

 

3.

Assova jiṇṇo nibbhogo

khādanā apanīyati,
B
ālakāna pitā thero

parāgāresu bhikkhati.

 

늙은 말이 여물도 없이

말구유에서 쫓겨 나듯이

나는 자식들의 늙은 아버지이지만

디른 집에서 밥을 비네.

 

4.

Daṇḍova kira me seyyo

yañce puttā anassavā,
Ca
ṇḍampi goa vāreti

atho caṇḍampi kukkura.

 

불효한 자식들이 있는 것보다

지팡이가 나에게 더욱 나은 것이네.

사나운 황소도 몰아내고

사나운 개도 몰아내네.

 

5.

Andhakāre pure hoti

gambhīre gādha medhati,
Da
ṇḍassa anubhāvena

khalitvā paitiṭṭhatīti

 

어둠속에서 앞으로 가도

심연에서 바닥을 찾으니.

지팡이의 힘에 의지해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네.”

 

(Mahāsāasutta-대부호의 경, 상윳따니까야 S7.14, 전재성님역)

 

 

게송을 보면 불효자식에 대한 질책의 의미가 담겨 있다. 나이 들어 늙었다고 쫓아 낸 것에 대하여 아들의 형상을 한 야차들(Rakkhasā puttarūpena)”이라 하였다. 버려진 노인은 남의 집에서 밥을 빌어 먹을 수밖에 없다. 이때 도움이 되는 것이 지팡이라 하였다. 그런 지팡이는 어둠속에서 앞을 갈 때 유용하고 더구나 깊은 웅덩이 같은 바닥을 미리 알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정통바라문들은

 

게송으로만 본다면 불효를 하는 자식들에 대한 질책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부처님당시 바라문사회에서 법이 무너졌음을 말한다. 정통바라문들은 그렇지 않았음을 말한다. 이는 바라문인생사주기로 설명될 수 있다.

 

정통바라문에 인생사주기가 있다. 학생기, 가주기, 임서기, 유행기를 말한다. 이중 학생기와 가주기는 재가의 삶이고, 임서기와 유행기는 출가의 삶이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서 재가의 삶과 출가의 삶을 살아 가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 하였다.

 

할 일을 다 해 마친 바라문은 50세가 되면 집에서 나와 숲에 들어가 명상(요가)을 하며 살았다. 75세가 되면 숲에서 나와 걸망을 짊어 지고 이곳저곳 다니며 걸식하며 살았다. 이렇게 사는 것은 공부한 진리를 직접 체험하여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이었다.

 

부처님은 바라문의 삶에 대하여 불교식으로 재해석하여 바라문의 삶의 방식을 받아 들였다. 그래서 바라문의 삶이란 그 근원적 의미에서 거룩한 삶이라 보았던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아라한의 삶을 말한다. 그래서 경전에서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라 하였을 때 아라한과 같은 거룩한 삶을 말한다.

 

지팡이(daṇḍa)의 의미는?

 

한때 대부호이었던 바라문은 자식들에게 쫓겨나 걸식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는 바라지 않던 것이었다. 그러나 정통바라문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하고 이상적인 삶이다. 그런데 게송에서 지팡이(daṇḍa)가 나온다. 오로지 믿을 것은 지팡이 하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지팡이의 의미는 무엇일까?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이 지팡이는 걸식하는 수행자를 의미한다.”(1619번 각주) 라고 하였다.

 

지팡이는 수행자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많은 수행승들의 경(S4.21)’에서 그런데 그 때 악마 빠삐만이 한 성직자의 모습으로 몸을 나타내어 큰 상투를 틀고, 영양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늙어서 서까래처럼 된 등을 구부리고,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우담바라 나무로 된 지팡이를 들고, 수행승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S4.21) 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우담바라로 된 나무지팡이를 든 늙은 수행자에 대하여 등이 굽었고 콜롤콜록 기침하는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재가의 삶을 살다가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출가의 길을 걷는 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인도철학자 이거룡 교수는 어느 강연에서 가장 잘산 사람,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들만이 출가할 수 있고 훌륭한 수행자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출가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다. 거지가 출가 할 수 없다. 삶에 지친 자들이 출가 해도 훌륭한 수행자가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세상이 싫어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자들이 도피하듯이 출가 한다고 하여 훌륭한 수행자가 될 수 없다.

 

이 세상을 잘 산 자들, 잘 배운 자들, 크게 성공한 자들이 때가 되었을 때 미련없이 포기한 출가 만이 훌륭한 수행자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한때 대부호이었던 바라문은 출가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모은 재산으로 감각적 쾌락이나 누리며 남은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극도로 타락한 바라문의 자식들은 이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강제로 출가 시켜 버린 것이라 볼 수 있다.

 

초고령화시대에

 

상윳따니까야 대부호의 경을 보면 불효막심한 자식들을 고발하는 경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지혜롭게 살지 못한 바라문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고발하는 경이라고도 볼 수 있다.

 

대부호이었던 바라문은 정통바라문의 삶을 살지 않았다. 인생사주기로 알려진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지 않은 것이다. 이는 부처님 당시 타락한 바라문의 삶이 경에 잘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준비 된 자만이 출가할 수 있고, 많이 배운 자만이 출가 할 수 있고, 인생을 성공적으로 산 자만이 출가 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출가 하였을 때 훌륭한 수행자가 될 것이다. 그 결과 삶의 완성도 이루어질 것 이다.

 

오로지 지팡이 하나에만 의지하여 유행하고 걸식하는 출가수행자의 삶은 존경되어야 한다. 오늘날 초고령화시대를 맞이 하여 오로지 집에서만 나홀로 지내는 노인의 경우 자식들에게 큰 부담이 될 것이다. 그럴 경우 차라리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불교수행공동체 생활을 하면

 

공동체 생활을 하면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 특히 출가공동체가 그렇다. 함께 모여 살면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 것이다. 나홀로 고독하게 있다 보면 발전이 없다. 그러나 함께 모여 살다 보면 그 중에 반드시 배울만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함께 살면 모두를 향상으로 이끈다. 이렇게 본다면 비록 재산이 많아도 모두 사회에 환원하고 수행자로서 공동체의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본다.

 

김송호 박사는 불교TV에서 노후대책으로서 미래수행공동체를 제안하였다. 김박사는 바라문인생사주기를 참고하여 임서기에 대하여 봉사의 시기로 보았고, 유행기에 대하여 마무리시기로 보았다. 비록 숲에 들어 가 살지 못하지만 50세부터 75세까지는 봉사의 삶을 살면 된다는 것이다. 유행기라 하여 걸망매고 걸식하며 사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이때는 인생을 마무리 하는 단계로서 노인공동체를 제안하였다.

 

가면 갈수록 노령화 되는 초노령화 사회에 접어 들었다. 베이비붐세대가 노령화로 진입할 때 더욱 노후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 한다. 앞으로 한 세대만 지나면 지나가는 사람 셋 중에 한명은 노인이 될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급속하게 노령화가 진행되는 시기에 개인적으로 노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방법은 모여 사는 것이다. 노후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왕이면 수행공동체가 더 나을 것이다.

 

수행공동체에서는 수행을 하며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인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인연없는 중생은 구제할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불교와 인연이 없는 사람, 인연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금 밖에 없어서 인연이 닿지 않는다면 고독하게 살다가 고독사하기 쉬울 것이다. 갈수록 초고령화 되는 시대에 함께 모여 사는 것 만이 미래 노인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라 본다. 그것도 불교수행공동체라면 금상첨화 일 것이다.

 

 

 

2015-09-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