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자꾸만 어리석은 자는 모태에 드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23. 18:41

 

자꾸만 어리석은 자는 모태에 드네

 

 

사람들은 자꾸만 자꾸만 태어난다. 자꾸만 자꾸만 태어나서 무덤을 증대시킨다. 이에 관한 게송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우다야의 경(S7.12)’이다.

 

맛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신 분?

 

한때 부처님이 사왓티에 계실 때 바라문 우다야의 집으로 탁발나갔다. 그때 우다야는 세존의 발우에 밥을 채워 드렸다라고 하였다. 둘째 날도 부처님은 우다야의 집으로 갔다. 역시 발우에 밥을 채워 주었다.

 

셋째 날에 이르자 우다야는 귀찮은 수행자 고따마가 자꾸만 오는구나. (pakaṭṭhakoya samao gotamo punappuna āgacchatīti)”라고 말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각묵스님은 사문 고따마께서 계속해서 오시는 것을 보니 참으로 맛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신 분입니다.”라고 번역하였다.

 

두 번역에 차이가 있다. 왜 그럴까?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Srp.I.257에 따르면, ‘맛에 대한 탐욕(ragagiddha)’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단어는 sk. Pra- krs에서 유래한 것으로 쉬게 놔두지 않는다.’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초불연에서는 붓다고사의 주석을 근거로 하여 맛에 대한 집착이 강한자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성전협에서는 귀찮은 수행자의 의미로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This pesky ascetic Gotama keeps coming again and again”라 하였다. ‘pesky ascetic’의 의미는 귀찮은 고행자의 뜻이다.

 

빠알리어 pakaṭṭhaka의 뜻은 ‘troublesome, annoying;’의 의미이다. 귀찮게 한다는 뜻이다. 바라문 우다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한 두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찾아 오는 것이 귀찮았을 것이다. 그래서 저 귀찮은 고따마가 자꾸만 오네라 한 것이다. 그럼에도 맛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신 분이라 번역한 것은 지나친 의역이라 본다. 붓다고사의 주석을 그대로 따른 주석적 번역이라 본다.

 

자꾸만 하늘의 왕은 비를 내리네

 

세 번 찾아 간 부처님을 트러블메이커 정도로 생각하는 바라문에게 부처님은 게송으로 깨우침을 주었다.

 

 

1.

Punappuna ceva vapanti bīja

punappuna vassati devarājā,
Punappuna
khetta kasanti kassakā

punappuna dhaññamupeti raṭṭha

 

 

[세존]

자꾸만 사람들은 씨앗을 뿌리고

자꾸만 하늘의 왕은 비를 내리네.

자꾸만 농부가 밭을 갈면

자꾸만 하늘의 왕은 다른 나라로 간다.”(S7.12, 전재성님역)

 

 

[세존]

계속해서 사람들은 씨앗을 뿌리고

계속해서 신의 왕이 비를 내리고

계속해서 밭가는 자는 들판을 갈고

계속해서 곡식은 영토에서 자란다.” (S7.12, 각묵스님역)

 

 

“Again and again, they sow the seed;

Again and again, the sky-god sends down rain;

Again and again, ploughmen plough the field;

Again and again, grain comes to the realm.” (S7.12, 빅쿠보디역)

 

 

게송을 보면 자꾸만또는 계속해서또는 Again’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Punappuna을 번역한 것이다. 영어로 ‘again and again’의 뜻이다.

 

사람들은 자꾸만 자꾸만 씨앗을 뿌린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사람들이 한 번 곡물을 심었다고 해서 이제 그만하며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다음에도 계속해서 곡물을 심는다. 마찬가지로 하루 비가 내리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다음 날에도, 계속해서 다음 해에도 반드시 비가 내린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부유해진다.” (712번 각주)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바라문 우다야가 세 번째 공양을 올리고 마음을 거두어 버린 것에 대한 충고의 말이라 볼 수 있다.

 

하늘의 왕과 신의 왕

 

번역에서 하늘의 왕과 신의 왕이 있다. 이는 devarājā의 번역어이다. 여기서 deva의 의미는  ‘1. a deity; 2. the sky; 3. a rain cloud; 4. a king’로서 네 가지 의미가 있다.

 

전재성님은 deva에 대하여 하늘로 번역하여 하늘의 왕은 비를 내리네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deva에 대하여 신으로 번역하여 신의 왕이 비를 내리고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the sky-god’라 하여 하늘의 신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구름이 있어야 비가 온다. 구름을 누가 만들까? 옛날사람들은 하늘의 신이 만들었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숫따니빠따 다니야의 경(Sn1.2)’에서도 하늘이여 비를 뿌리거든 뿌리소서(atha ce patthayasī pavassa deva)라 하였다.

 

deva에 대하여 신이라기 보다 하늘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본다면 비가 오는 것에 대하여 하늘의 왕은 비를 내리네라고 번역한 것이 자연스럽다. 빅쿠보디도 the sky-god’라 하여 비슷한 의미로 번역하였다.

 

세 번째와 네 번째 게송을 보면 자꾸만 농부가 밭을 갈면 자꾸만 하늘의 왕은 다른 나라로 간다.”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하늘의 축복이 모든 나라에 미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비가 계속해서 내려야 농부는 밭을 갈고 농사를 지을 수 있다. 그래서 점점 부유해진다. 농부가 부유해지면 나라도 부유해 질 것이다. 비가 자꾸만 자꾸만 내리면 축복이 온 나라에 골고루 퍼져 나감을 알 수 있다.

 

자꾸만 거지는 빌어먹고

 

2.

Punappuna yācakā yācayanti

punappuna dānapatī dadanti,
Punappuna
dānapatī daditvā

punappuna saggamupenti hāna.

 

 

자꾸만 거지는 빌어먹고

자꾸만 시주들은 보시한다.

자꾸만 시주들이 보시하면

자꾸만 그들은 하늘나라로 가네.” (S7.12, 전재성님역)

 

 

계속해서 걸식자는 걸식을 하고

계속해서 보시의 주인은 보시를 하고

계속해서 보시의 주인은 보시 한 뒤에

계속해서 천상으로 올라가노라.” (S7.12, 각묵스님역)

 

 

“Again and again, the mendicants beg;

Again and again, the donors give;

When donors have given again and again,

Again and again they go to heaven.” (S7.12, 빅쿠보디역)

 

 

 

구걸자 ‘yācakā’에 대하여

 

자꾸만 거지는 빌어먹는다고 하였다. 여기서 거지는 ‘yācakā’를 말한다. 영어로 a ‘beggar; one who requests’의 뜻이다. 구걸하는 거지를 의미한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yācakā에 대하여 걸식자라 하여 마치 탁발승의 이미지를 떠 오르게 번역하였다. 이와 같은 점잖은 이미지의 번역은 yācakā라는 말에 맞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이띠붓따까 비의 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사람이 어떻게 비를 내리지 않는 자가 되는가? 수행승들이여, 세계에 어떤 사람은 수행자, 성직자, 극빈자, 노숙자, 아첨구걸자, 구걸자와 관련하고, 먹을 것, 마실 것, 의복, 탈 것, 화환, 향료, 크림, 침대, 주거, 등불과 관련해서, 일체의 사람들에게 보시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사람이 이렇게 비를 내리지 않는 자가 된다.

 

(vuṭṭhisutta- 비의 경, 이띠붓다까 It64, 전재성님역)

 

 

여기서 수행자, 성직자, 극빈자, 노숙자, 아첨구걸자, 구걸자와 관련된 빠알리어가 samaabrāhmaakapaaddhikavanibbakayācakāna’라는 긴 복합어이다.

 

이 복합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수행자는 악을 그만 둔 수행자뿐만 아니라 단지 출가한 수행자를 의미하고, 성직자는 단지 악을 짓지 않는 성직자뿐만 아니라 출생에 의한 성직자를 의미하고, 극빈자는 헐벗은 가난한 자를 말하고, 노숙자는 길거리에서 지내며 벌이를 하지 않는 자를 말하고, 아첨자는 ‘바람직하고 원하는 것이고 마음에 드는 것을 제 때에 비난 없이 믿음의 마음으로 주면, 천상의 하느님세계에 간다.’라는 방식으로 보시를 유도하고 보시를 찬탄하며 돌아다니는 자이다. 구걸자는 오로지 ‘한 주먹만 주십시오. 한 홉만 주십시오. 한 잔만 주십시오.’라고 조금만 구걸하며 돌아다니는 자이다.”  (It.64, 1018번 각주)라 되어 있다.

 

복합어 가장 마지막에 있는 yācakā라는 말에 대하여 구걸자라 번역되었다.  뜻은 오로지 한 주먹만 주십시오. 한 홉만 주십시오. 한 잔만 주십시오라고 구걸하며 돌아다니는 자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yācakā의 번역어는 거지라 한 것이 맞다.

 

빅쿠보디는 the mendicants’라 하였다. 이는 자비를 바라는 자라는 의미로 탁발승의 의미가 더 짙다. 실제로 백과사전에는 mendicant에 대하여 탁발수도회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게송에서의 yācakā의 의미는 한푼 두푼 달라고 요구하는 거지의 뜻이다.

 

자꾸만 어리석은 자는 모태에 드네

 

 

3.

Punappuna khīranikā duhanti

punappuna vaccho upeti4 mātara,
Punappuna
kilamati phandati ca

punappuna gabbhamupeti mando.

Punappuna jāyati mīyati ca

punappuna sīvathika haranti,

 

 

자꾸만 목우는 젖을 짜고

자꾸만 송아지는 어미를 찾네.

자꾸만 사람들은 지치고 두려워하고

자꾸만 어리석은 자는 모태에 드네.

자꾸만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으니

자꾸만 사람들은 시체를 묘지로 옮기네.” (S7.12, 전재성님역)

 

 

계속해서 소치기는 젖을 짜고

계속해서 송아지는 어미를 찾고

계속해서 사람들은 지치고 동요하고

계속해서 우둔한 자는 모태에 들고

계속해서 태어나고 또 죽고

계속해서 시체를 공동묘지로 나르도다.” (S7.12, 각묵스님역)

 

 

“Again and again, the dairy folk draw milk;

Again and again, the calf goes to its mother;

Again and again, one wearies and trembles;

Again and again, the dolt enters the womb;

Again and again, one is born and dies;

Again and again, they take one to the cemetery.” (S7.12, 빅쿠보디역)

 

 

난해한 구절이 있는데

 

가장 난해한 구절이 있다. 그것은 자꾸만 사람들은 지치고 두려워하고 (Punappuna kilamati phandati ca)”라는 구절이다. 왜 사람들은 지치고 두려워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이 그 다음 구절 계속해서 우둔한 자는 모태에 들고라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모태에 드는 이유에 대하여 앞행의 지치고 두려워하는이유에 해당된다.”라고 하였다. 모태에 드는 것이 안전하다는 뉘앙스이다.

 

지친다는 의미로 번역된 빠알리어는 ‘kilamati’이다. 이는 ‘is wearied or fatigued’의 뜻이다. 두렵다는 의미로 번역된 빠알리어는 ‘phandati’로서 이는 ‘trembles; throbs; stirs.’의 의미이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지치고 동요하고라 하였다. 대체 무엇에 동요한다는 말일까?

 

빅쿠보디는 ‘wearies and trembles’라 하여 지치고 떠는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Phandati에 대하여 동요하다’’는 뜻의 번역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두렵고 무섭다라는 뜻에 더 가깝다.

 

소치기라고?

 

첫 번째 구절에서 자꾸만 목우는 젖을 짠다 (Punappuna khīranikā duhanti)”라고 하였다. 여기서 khīranikā‘a milk-giving cow’의 뜻이다. 우유를 만들어 내는 소라는 뜻이다. 전재성님은 목우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the dairy folk’라 하여 젖소의 의미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소치기는 젖을 짜고라 하였다. 이는 명백한 오역(誤譯)이다. 왜 오역인가? 소치기라는 말은 원문에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구 자꾸만 송아지는 어미를 찾네라는 구절과 전혀 맞지 않는다.

 

 

Cow and calf

 

 

어미소는 우유를 계속 만들어 낸다. 그러면 송아지는 어미소의 젖을 찾는다. 마찬가지로 삶에 지치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은 안온함을 찾는다. 송아지가 어미소의 젖을 찾듯이 모태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만 어리석은 자는 모태에 드네라 하였다.

 

각묵스님의 번역 계속해서 소치기는 젖을 짜고 계속해서 송아지는 어미를 찾고라는 번역은 전혀 맞지 않는다. 두 구절간에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것이다. 이는 목우는 젖을 만들어 내고 송아지는 젖을 찾는다라 하는 것이 맞다.

 

자꾸만 모태에 들다 보면 무덤만 늘어 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자꾸만 사람들은 시체를 묘지로 옮기네.”라 하였다. 이와 관련된 게송이 있다. 그것은 단 한사람만이 일 겁을 살아도 뼈들도 그 더미가 산과 같다.”(It.17) 라는 구절이다.

 

더 이상 태어나지 않기 위해

 

4.

Maggañca laddhā

apunabbhavāya

na punappuna

jāyati bhūripaññoti.

 

 

그러나 더 이상 태어나지 않기 위해

길을 성취한 님,

광대한 지혜를 얻은 님은

결코 자꾸만 태어나지 않네.” (S7.12, 전재성님역)

 

 

그러나 이제 도를 얻으면

다시 태어남이란 없나니

광활한 통찰지를 가진 자에게

계속해서 태어남이란 없도다.” (S7.12, 각묵스님역)

 

 

“But when one has obtained the path

That leads to no more renewed existence,

Having become broad in wisdom,

One is not born again and again!” (S7.12, 빅쿠보디역)

 

 

 

2015-09-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