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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문의 세 가지 명지와 부처님의 세 가지 밝은 지혜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15. 17:43

 

바라문의 세 가지 명지와 부처님의 세 가지 밝은 지혜

 

 

 

악기훗따(aggihutta), 불의 제사

 

불의 신을 아그니(agni)라 한다. 빠알리어로는 악기(aggi)라 한다. 상윳따니까야 바라문상윳따에 불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바라문이 있었다. 이름은 악기까(aggika)이다.

 

이 경과 관련하여 전재성님은 그때 바라문 악기까 바라드와자가 불의 신에게 공양하겠다. 불의 제사를 지내겠다.’라고 생각하고 버터로 유미죽을 준비하고 있었다.”(S7.8) 라고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의 경우 그 무렵 불에 헌공하는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나는 불에 헌공할 것이다. 나는 아그니호뜨라제사를 거행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버터를 넣은 우유죽을 마련하고 있었다.” (S7.8)  라고 되어 있다.

 

두 번역에 차이가 있다면 사람호칭과 제사명칭이다. 고유명사인 사람 호칭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악기까라 하여 원어 그대로 불렀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이름을 우리말로 풀어 악기까에 대하여 불에 헌공하는 자의 뜻으로 하였다. 그런데 불의 제사라는 뜻의 악기훗따(aggihutta)’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원어 그대로 아그니후뜨라라 하였다. 이는 산스크리트어 이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악기훗따에 대하여 우리말로 풀어 불의 제사라 하였다.

 

불의 제사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상세하게 설명하여 놓았다. 각주에 따르면 모든 제사 특히 공공제사는 모든 공물을 반드시 불(aggi, agni)에 헌공한다. …그러므로 불에 공물을 바치는 이 아그니후뜨라야말로 모든 제사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675번 각주) 라 하였다.

 

세 가지 명지

 

불의 제사를 주관하는 바라문 악기까는 부처님의 탁발하기 위하여 들어 오는 것을 보았다. 보고 나서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Tīhi vijjāhi sampanno

jātimā sutavā bahu,
Vijj
ācaraasampanno

so ma bhuñjeyya pāyasanti

 

[악기까]

세 가지 명지를 갖추고

훌륭한 가문에 속하며 많은 것을 배운

지혜와 실천을 두루 갖춘 님이

나의 유미죽을 즐겨야 하리.”(S7.8,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바라문계급의 우월성을 의미한다. 이는 세 가지 명지(Tīhi vijjāhi)’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바라문이 말하는 세 가지 명지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세 가지 베다, 즉 리그 베다, 사마 베다, 야주르 베다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Srp.I.231) 라 하였다.

 

세 가지 밝은 지혜

 

하지만 부처님이 생각하는 세 가지 명지는 다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게송으로 답한다.

 

 

Bahumpi palapa jappa

na jaccā hoti brāhmao,
Anto kasambusa
kiliṭṭho

kuhanā parivārito.


pubbe niv
āsa yo vedī

saggāpāyañca passati,
Atho j
ātikkhaya patto

abhiññā vosito muni.


Et
āhi tīhi vijjāhi

tevijjo hoti brāhmao,
Vijj
ācaraasampanno

so ma bhuñjeyya pāyasanti.

 

[세존]

많은 격언을 암송하더라도

안에는 쓰레기로 더럽혀지고

위선으로 둘러싸여 있으면

가문이 좋다고 성직자가 될 수 없네.

 

전생의 생존을 알고

천상과 지옥을 보는 성자는

태어남의 소멸을 성취하고

곧바른 앎을 완성했네.

 

이 세 가지의 명지로

세 가지 학문을 아는 바라문이 되니

지혜와 실천을 두루 갖춘 이가

나의 유미죽을 즐겨야 하리.” (S7.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세 가지 명지에 대하여 바라문과 달리 말하였다. 세 가지 명지는 베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기 위한 지혜를 말한다. 즉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인 숙명통’, 천상과 지옥을 보며 중생들이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볼 줄 아는 지혜인 천안통’, 그리고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인 누진통을 말한다. 이 세 가지 밝은 지혜에 대하여 떼웟자(tevijja)라 하였다.

 

만뜨라를 중얼거리는 것에 대하여

 

게송에서 많은 격언을 암송하더라도라 하였다. 여기서 격언이라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만뜨라를 의미한다. 바라문이 제사 지낼 때 반드시 주문을 외게 되어 있다. 그런데 주문 외는 행위가 무익하다는 것이다. 말로만 욀 뿐 실천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뜨라를 중얼거리는 것에 대하여 이띠붓까에서는 이렇게 표현 되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성직자에 관한 한, 단지 중얼거리는 것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이교도가 아니라, 단지 법다운 증득으로 세 가지 명지의 소유자가 된다고 정의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나는 성직자에 관한 한, 단지 중얼거리는 것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이교도가 아니라, 단지 법다운 증득으로 세 가지 명지의 소유자가 된다고 정의하는가?” (It.98,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중얼거린다고 하였다. 이는 성직자가 중얼거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성직자는 브라흐마나(Brahmana)를 말한다. 바라문 성직자이다. 성직자가 중얼거리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단지 중얼거리는 것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이교도는 곧,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어 단지 베다-경전을 외우기만 하는 자를 말한다.”(ItA.II.134)라 하였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듯한 다라니 독송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도 수 많은 주문을 들을 수 있다.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팔만사천 법문이 있음에도 불자들은 긴 다라니를 독송한다. 다라니기도라는 이름으로 108독을 하는가 하면 철야하기도 한다. 모든 기도에 빠지지 않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말한다.

 

어느 절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을 보았다. 스님과 신도가 함께 독송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다라니 독송하는 속도가 무척 빠르다. 마치 녹음기를 몇 배속 시켜 놓은 듯 하다. 그런데 스님의 독송소리를 들으니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듯하다. 알 수 없는 소리로 매우 빠르게 말할 때는 무언가 취해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신도들은 차분히 매우 빠른 속도로 빠짐 없이 독송한다. 그러나 스님만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듯하다 잠잠해진다. 또 그러다 갑자기 꽥 소리 지르듯이 독송한다. 마치 내키는 대로 독송하는 것 같다.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종교인들이 이 장면을 보았다면 매우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전생을 아는 지혜, 숙명통

 

부처님은 만뜨라를 단지 외우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세 가지 명지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것은 만뜨라를 외서 아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다. 부처님을 깨달음으로 이끈 세 가지 명지는 어떤 것일까? 먼저 숙명통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전생의 여러 가지 삶에 관하여 예를 들어 ‘한번 태어나고 두 번 태어나고 세 번 태어나고…천 번 태어나고 십만번 태어나고 수많은 파괴의 겁을 지나고 수많은 세계의 발생의 겁을 지나고 수많은 세계 파괴와 세계 발생의 겁을 지나면서, 당시에 나는 이러한 이름과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그곳에서 죽은 뒤에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그 자신의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상세히 기억한다. 이것이 첫 번째 명지의 증득이다. 방일 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정진하는 자에게 그러하듯, 무명이 부서져 명지가 생겨나고, 어둠이 부서져 빛이 생겨난다.”(It.9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첫 번째 명지 숙명통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정형구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가 생겨남으로 인하여 빛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밝은 지혜, 보다 높은 지혜라는 의미로 윗자(vijjā)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내세와 윤회를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윤회하는 중생의 삶을 기억하는 것이 깨달음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천안통

 

부처님은 세 가지 밝은 지혜로서 숙명통과 천안통과 누진통에 대하여 설명한다. 천안통에 대해서는 수행승이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뭇삶들을 관찰하여,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등장하는 뭇 삶들에 관하여 ‘어떤 뭇 삶들은 신체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고귀한 님들을 비난하고 잘못한 견해를 지니고 잘못된 견해에 따라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 것이다. … 이와 같이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뭇 삶들을 관찰하여,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등장하는 뭇 삶들에 관하여 분명히 안다.”(It.98, 전재성님역)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첫 번째 명지인 숙명통이라는 것이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두 번째 명지라 불리우는 천안통은 ‘타자’에 대한 것이다. 과거 또는 전생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의 과보가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음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인과응보에 대한 것이고 또한 연기에 대한 것이다. 타자의 다양한 뭇삶들의 행태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지혜가 생겼을 때 무명이 부서져 명지가 생겨나고, 어둠이 부서져 빛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번뇌가 소멸 되는 누진통

 

마지막으로 누진통이 있다. 누진통에 대해서는 수행승이 번뇌를 부수어 번뇌 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증득하고 깨달아 성취한다.” (It.98, 전재성님역)고 하였다. 이것이 번뇌를 부숨에 대한 앎의 명지 누진통을 말한다. 여기서 마음에 의한 해탈이라고 한 것은 삼매를 통해서 탐욕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지혜에 의한 해탈은 지혜를 통에서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 의한 해탈은 사마타로 실현되고, 지혜에 의한 해탈은 위빠사나로 실현된다.

 

세 가지 명지는 깨달음의 조건

 

부처님은 세 가지 명지를 말씀 하셨다.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 이렇게 세 가지 밝은 지혜가 떼윗자라 하였다. 이는 바라문들이 말하는 세 가지 베다를 뜻하는 떼윗자와 다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 가지 명지로 성자가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명지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에서는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S56.11)라 표현 되어 있다.

 

세 가지 명지는 깨달음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단지 사성제를 이해 하는 차원 이상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세 가지 명지가 성자가 되는 조건임을 말하고 단지 입으로만 중얼거리는 이교도가 아니라 나는 그를  세 가지 명지를 지닌 자라고 부른다.”(It.98)라 하였다.

 

나의 유미죽에 대하여

 

부처님은 불의 제사를 지내는 악기까 바라문에게 세 가지 명지의 진정한 의미에 대하여 알려 주었다. 그런데 세 번째 게송에서 “ ‘나의 유미죽을 즐겨야 하리”(S7.8) 라는 구절이 있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말하였을까? 주석에 따르면 바라문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라 한다. 여기서 나의 유미죽(ma bhuñjeyya)’라 한 것은 부처님이 바라문의 입장에서 그 시를 보정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바라문은 제사 지내면서 세 가지 베다를 외기만 하면 지혜가 생겨나고 청정해지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만뜨라를 외는 바라문에게 유미죽을 들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세 가지 명지에 대하여 전혀 다른 해석을 하였다. 그래서 세 가지 명지를 증득한 성자에게 유미죽을 드려야 함을 바라문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시를 읊은 대가로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바라문은 감동하였다. 그래서 존자 고따마께서는 드십시오. 그대야말로 바라문입니다. (Bhuñjatu bhava gotamo. Brāhmao bhavanti)”(S7.8) 라 하였다. 여기서 부처님에 바라문이라 한 것은 부처님을 진정한 바라문으로 여긴 것이다. 세 가지 명지를 갖춘 부처님이야말로 진정한 공양 대상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드십시오(Bhuñja)’하였다.

 

여기서 드십시오라는 구절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바라드와자는 쌀을 황금의 발우에 가득 채워서 드렸다.” (Srp.I.232)라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공양은 의미가 없다. 출가 수행자들은 조리된 음식만 탁발하기 때문이다. 황금발우에 쌀을 가득 채워 주어 보았자 조리해서 먹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한다.

 

 

Gāthābhigīta me abhojaneyya

sampassata brāhmaa nesa dhammo,
G
āthābhigīta panudanti buddhā

dhamme sati brāhmaa vuttiresā.


Aññena ca kevalina
mahesi

khīāsava kukkuccavūpasanta,
Annena p
ānena upaṭṭhahassu

khetta hi ta puññapekkhassa hotīti.

 

[세존]

시를 읊은 대가로 주는 것을 향유하지 않으리.

바라문이여, 그것은 올바른 님에게 옳지 않네.

시를 읊은 대가로 주는 것을 깨달은 님들은 물리치네.

바라문이여, 원리가 있다면, 그것이 진솔한 삶이네.

 

번뇌가 부서지고 회환이 소멸된

원만하고 위대한 선인에게

다른 음식과 음료수로 공양하라.

공덕을 바라는 자에게 그는 복밭이 되리.”(S7.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진정한 공양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바라문들은 만뜨라를 읊은 댓가로 공양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것도 황금 발우에 쌀을 담아서이다. 그러나 수행승은 조리된 것만 수용하므로 맞지 않다. 그리고 시를 읊은 대가로 공양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공덕을 바라는 자에게 그는 복밭이 되리

 

번뇌 다한 성자에게 조리된 음식을 공양하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비즈니스 하듯이 주고 받는 거래가 아니다. 청정한 성자에게 공양하는 것은 지금 당장 대가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미래와 내세를 위하여 선업공덕을 쌓는 것이다. 그렇게 공양하였을 때 성자는 복밭(puññapekkhassa)이 된다고 하였다. 이 게송과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주석서를 이용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내가 긴 시간을 탁발하면서 서 있었을 때 그대는 단 한숟가락의 음식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제 내가 모든 부처의 공덕을 마치 돗자리 위에다 참께를 펴듯이 드러내자 [그대는 주고자 한다.] 그러니 이 음식은 말하자면 [바라문들이 찬미가(만뜨라)를 읊어서 삶을 연명하듯이] 게송을 읊어서 얻는 것과 같다. 이것이 게송을 읊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내가 먹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이러한 법이 있어서모든 깨달은 자들은 이러한 법을 따르고 법에 확고하여 그들의 삶을 영위한다. 이것이 그들의 삶의 방법이다. 그들은 그런 음식은 제쳐두고 법답게 음식을 얻는다.” (S.A.i.232)

(초불연 상윳따1 680번 각주)

 

 

각주에 따르면 시를 읊은 대가로 음식을 얻어 먹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바라문과 같은 방식으로 살지 않음을 말한다. 세 가지 베다를 독송하는 것에 그치는 바라문의 삶과 세 가지 밝은 지혜를 가진 성자의 삶은 다른 것이다.

 

 

 

2015-09-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