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도 좋지만,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담마다사 이병욱 2015. 7. 23. 15:30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도 좋지만,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카스트제도가 있다. 버려야 할 낡은 전근대적인 신분제도를 말한다. 그러나 과학문명이 발달한 현대에서도 카스트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은 그들끼리 모여 살고 그들끼리 정보를 교류하고 그들끼리 자리물림을 한다. 고대인도에 카스트제도가 있었다. 부처님당시 카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초기경전과 율장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바라문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상윳따니까야에서는 별도로 바라문의 모음(S7)’이 있을 정도이다.

 

다난자니 바라문녀가 있었는데

 

바라문의 모음을 보면 부처님당시 지배적인 종교와 신흥종교와의 갈등 양상이 엿 보인다. 특히 다난자니의 경과 악꼬사까의 경이 그렇다.

 

다난자니라는 바라문녀가 있었다. 바라드와자 가문에 시집온 바라문 여인을 말한다. 그런데 이 바라문녀는 가문의 전통과는 달리 부처님을 신봉하였다. 경에 따르면 다난자니는 항상 부처님에게 귀의한다는 말을 하였다. 그것도 매우 기쁜 목소리로 읊조린다고 하였다. 다음과 같이 세 번 말한다.

 

 

  

Dhanañjānīsutta-다난자니의 경(S7.1)

  

빠알리어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ā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

전재성님역

[다난자니]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합니다.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합니다.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합니다.”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각묵스님역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자께 귀의합니다.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자께 귀의합니다.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자께 귀의합니다.”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자

빅쿠보디역

Homage to the Blessed one, the Arahant, the Perfectly Enlightened one!

Homage to the Blessed one, the Arahant, the Perfectly Enlightened one!

Homage to the Blessed one, the Arahant, the Perfectly Enlightened one!

the Blessed one, the Arahant, the Perfectly Enlightened one

 

 

 

이 구문을 보면 매우 익숙하다. 테라와다불교에서 법회할 때 늘 낭송되는 구문이기 때문이다. 또 신심 있는 불자라면 마치 주문 외듯이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라고 암송한다.

 

부처님 당시 불자들은 부처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고따마나 싸끼야 같은 이름을 말한다. 외도들은 주로 고따마나 싸끼야 같은 족성을 불렀다. 그러나 부처님제자들은 열 가지 별칭 중의 하나를 불렀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바가와(bhagava)이다. 이를 한자어로 세존이라 한다. 다난자니의 경에서는 바가와를 포함하여 아라하따(arahata), 삼마삼붓다(sammāsambuddha) 세 가지가 소개 되어 있다. 열 가지 별칭 중에 가장 핵심이 되는 별칭이 세 가지로 압축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번역비교를 해보면

 

번역을 보면 두 번역을 보면 차이가 있다. 부처님을 표현 하는 것에 대하여 세 가지로 소개 되어 있는데 바가와, 아라한, 삼마삼붓다에 대한 번역상의 차이가 있다.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경우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합니다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자께 귀의합니다라 하였다.

 

세존을 뜻하는 바가와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세상에 존귀한 님이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그분 세존이라 하였다. 각묵스님이 그분이라 한 것은 땃사(tassa) 를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땃사는 바가와 뿐만 아니라 아라한, 삼마삼붓다에도 다 걸린다. 그래서 제대로 번역한다면 그분 세존-그분 아라한- 그분 정등각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바가와 앞에만 그분을 써서 마치 세존이라는 단어에 한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세존과 아라한 사이에 을 사용하여 번역하였으나 이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점이 자판에 없을 뿐만 아니라 특수 기호로서 찾아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자께라 표현한 것은 시어로서 맛이 떨어진다. 여기서 마이너스(-) 표시한 것은 점을 찾지 못하여 임시 방편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Homage to the Blessed one, the Arahant, the Perfectly Enlightened one!”라 하였다.  바가와에 대하여 ‘the Blessed one’라 하였는데 과연 이런 표현이 바람직한지 의문스럽다. 아마 기독교적 사고 방식에서 표현된 것이라 보여진다.

 

테라와다 예경문에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라는 말은 반드시 들어 간다. 삼귀의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되고 언제 어느 때나 주문 외듯이 암송되는 문구이다. 마치 우리나라 불자들이 틈만 나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또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며 염불하는 것과 같다. 그런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는 일반적으로 세 번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한국테라와다불교에서는 어떻게 낭송할까?

 

테라와다불교 보리수선원이 있다. 홈페이지에 소개 되어 있는 예불의식을 보면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에 대하여 모든 번뇌를 떠나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거룩한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로 되어 있다. 이는 원문과 동떨어진 번역이다. 첫 번째로 모든 번뇌를 떠나라는 말은 무엇을 지칭하는 말일까? 바가와, 아라한, 삼마삼붓다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설명이다. 두 번째로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세 번째로 거룩한 부처님이라 하였다. 이 역시 근거를 갖지 못한다. 더구나 모든 번뇌를 떠나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이라 하여 거룩한 부처님의 형용어구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바가와, 아라한, 삼마삼붓다가 개별적으로 사용되는 것과 다른 내용이다.

 

삼키지도 못하고 내뱉지도 못할 질문

 

바라문녀는 틈만 나면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를 하였다. 그러나 지배종교의 성직자들로 이루어져 있는 바라문들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에 바라문이 바라문의 남자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어느 바라문은 이 가엾은 여인은 언제 어느 때나 머리를 빡빡 깍은 수행자들을 찬탄한다. 가엾은 여인이여, 지금 내가 그대의 스승의 입을 닥치게 만들겠다.(S7.1)”라고 말한다. 여기서 빡빡 깍은 수행자들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부처님과 제자들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 빅쿠들은 모두 머리를 삭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바라문녀는 부처님을 좋아 하였다. 마치 죄수처럼 삭발한 부처님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늘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합니다.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러면서 부처님 가르침을 논파한 자를 아직까지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바라문들은 바라문녀의 부처님찬탄에 화가 나기 시작 하였다. 자신들 보다 부처님을 더 받드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르침은 아무도 논파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여기에 더 자극 받았다. 또한 바라문녀가 가보십시요, 가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라 한 말에도 자극 받았다. 과연 그분이 어떤 분인지 화가 난 채로 부처님을 방문하였다. 그래서 바라문은 부처님을 찾아 뵙고 다음과 같이 꼼짝하지 못할 말을 던졌다.

 

 

 

  

Dhanañjānīsutta-다난자니의 경(S7.1)

  

빠알리어

Kisu chetvā sukha seti,

kisu chetvā na socati;

Kissassu ekadhammassa,

vadha rocesi gotamā

ekadhammassa,

vadha

전재성님역

[바라문]

무엇을 없애면 편안히 잠자며

무엇을 없애면 슬프지 않은가?

어떤 하나의 원리를 죽이는 것을

고따마여, 당신은 가상히 여기는가?”

어떤 하나의 원리를 죽이는 것을

 

각묵스님역

무엇을 끊은 뒤에 깊이 잠들고

무엇을 끊고 나면 슬퍼하지 않습니까?

어떤 하나의 법 죽이는 것을

당신은 허락하십니까, 고따마시여?”

어떤 하나의 법 죽이는 것을

 

빅쿠보디역

"Having slain what does one sleep soundly?

Having slain what does one not sorrow? <346>

What is the one thing, 0 Gotama,

Whose killing you approve?"

What is the one thing, 0 Gotama,

Whose killing

 

 

 

 

이 게송은 상윳따니까야 도처에 등장한다. 상윳따니까까야 ‘S1.71, S2.3, S11.21’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게송에 대한 상세한 해설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전재성님은 주석을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Srp.I.228에 따르면, 그는 다음과 같은 의도로 이러한 질문을 했다 : 그가 나는 이러이러한 죽음을 찬성한다.’고 말하면, 나는 그를 살해자라고 부르며 그의 수행자라는 주장에 도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어떠한 죽임에도 동의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가 탐욕을 죽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왜 그대는 수행자로서 유행하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수행자 고따마는 이 모순된 질문을 삼키지도 못하고 내뱉지도 못할 것이다.

 

(1453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삼키지도 못하고 내뱉지도 못할 것이다.”라 하였다. 붓다고사는 왜 이렇게 설명하였을까? 이는 경에서 다난자니 바라문녀가 부처님을 찬양하여 논파할 수 있는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다. 바라문은 부처님을 논파 하기 위하여 위 게송을 읊은 것이다.

 

어떤 하나의 원리를 죽이면 된다는데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있다. 고민이 많은 사람이다. 풀리지 않는 문제 봉착 하였거나 이러저러한 번뇌에 휩싸였을 때, 너무 기분이 좋아 들떠 있을 때도 잠을 못 이룬다. 그러나 잠 못 이루는 가장 큰 이유는 분노하였을 때 이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지나쳐서 화가 치밀어 올랐을 때 자다가도 깰 것이다. 그런데 바라문은 어떻게 하면 편안히 잠을 잘 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물어 본다. 또 무엇을 없애면 슬퍼 하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물어 본다.

 

키워드는 편안히 자는 것(sukha seti)슬픔 없는 것(na socati)이다. 바라문은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그것은 자신이 편하지 않다는 말이다. 화가 나서 잠을 편안히 잘 수 없다는 말이다.

 

바라문은 또 한편으로 슬프다고 하였다. 대체 무엇이 슬픈 것일까? 이에 대하여 이 가엾은 여인(vasali)’이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와살리 (vasali)라는 말은 바라문이 불가촉천민에게 사용하는 모독적인 말이다. 바라문녀가 부처님을 찬양하는 것을 슬픔으로 본 것이다.

 

바라문은 부처님에게 편안히 자는 것(sukha seti)슬픔 없는 것(na socati)에 대하여 질문한다. 그런데 둘 다를 만족 시키는 하나의 법이 무엇인지 물어 본다. 이에 대하여 어떤 하나의 원리를 죽이는 것을라 하였다. 참으로 어려운 번역어이다. 각묵스님은 어떤 하나의 법 죽이는 것을라 하였다. 더욱더 어려운 말이다.

 

번역된 시어만 보고서는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산문의 내용을 곰곰히 읽어 보고 붓다고사의 주석을 읽어 보면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어떤 답을 기대하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라문녀를 죽이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매번 나모 땃사…”하며 부처님을 찬양하는 바라문녀를 내쫒으면 간단히 문제가 해결된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화날 일도 없고 불가촉천민과 같은 바라문녀를 보며 슬퍼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부처님 답송하기를

 

바라문은 붓다고사의 말처럼 모순된 질문을 하여 삼키지도 못하고 내뱉지도 못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만약에 부처님이 바라문녀를 내쫒으라고 한다면 살해자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고, 만약에 그대로 두게 하라고 한다면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이 되어 방일함을 뜻한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로지도 못하는 질문을 하여 부처님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부처님의 답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Dhanañjānīsutta-다난자니의 경(S7.1)

  

빠알리어

Kodha chetvā sukha seti,

kodha chetvā na socati;

Kodhassa visamūlassa,

madhuraggassa brāhmaa;

Vadha ariyā pasasanti,

tañhi chetvā na socatī

visamūlassa,

madhuraggassa

전재성님역

[세존]

분노를 없애면 편안히 잠자고

분노를 없애면 슬프지 않네.

참으로 바라문이여,

뿌리에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를 죽이는 것을 성자는 가상히 여기니,

그것을 없애면 슬프지 않기 때문이네.”

뿌리에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각묵스님역

[세존]

분노를 끊은 뒤에 깊이 잠들고

분노를 끊고 나면 슬퍼하지 않노라.

바라문이여, 분노는 뿌리에는 독이 있고

꼭대기에 꿀이 듬뿍 들어 있어서

이런 분노 죽이는 것 성자들은 칭송하니

이것을 끊고 나면 슬퍼 않기 때문이니라.”

분노는 뿌리에는 독이 있고

꼭대기에 꿀이 듬뿍 들어 있어서

 

빅쿠보디역

"Having slain anger, one sleeps soundly;

Having slain anger, one does not sorrow;

The killing of anger, 0 brahmin,

With its poisoned root and honeyed tip:

This is the killing the (toble ones praise,

For having slain that, one does not sorrow."

its poisoned root and honeyed tip

 

 

 

 

부처님의 답송은 바라문이 바라던 것과는 전혀 의외의 말이다. 바라문은 자신의 질문에 부처님이 이러지도 저로지도 못할 것이라 보았다. 바라문녀를 내 보내라고 하든지 아니면 아무런 답을 못해 침묵할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마치 허를 찌르듯이 분노에 대하여 말씀 하였다.

 

분노에 수반되는 쾌감

 

부처님은 바라문의 질문 편안히 자는 것(sukha seti)’슬픔 없는 것(na socati)’에 대하여 분노라는 말 하나로 간단히 해결하였다. 분노를 없애면 편안히 잘 수 있고 슬픔도 없는 것이라 하였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잡은 것이다.

 

부처님은 분노의 성질에 대하여 말씀 하였다. 분노에 대하여 뿌리에는 독(visamūlassa)’이 있고 꼭지에 꿀(madhuraggassa)’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욕먹은 자를 욕하고, 매 맞은 자를 다시 때리면 즐거움이 생겨난다.(Srp.I.97)”라 설명 되어 있다. 이는 분노에 수반되는 쾌감을 말한다.

 

화를 내면 낼수록 더 화가 나는 것은 화를 즐기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지독히 미워 하여 험담을 하면 쾌감을 느낀다. 상사가 부하를 야단 칠 때 주눅드는 것 보면 더욱 더 야단친다. 학대하면 학대 당하는 자는 고통스러워 하는데 그것을 보고 더욱 더 학대 한다.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은 사실상 화내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성자들은 화를 내지 않는다. 탐진치가 소멸 되었으므로 화 낼 일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바라문녀를 못마땅해 하며 화를 내는 바라문에게 분노를 없애라고 말한다. 그래서 분노하지 않으면 편안히 잠도 잘 수 있고 슬프지도 않다고 하였다. 일석이조이고 겟투(Get Two)이다. 그렇다면 분노하지 않으면 왜 잠을 잘 잘 수 있을까? 이는 자애의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자애수행을 하면 잠을 편안히 잔다

 

자애는 분노와 상극이다. 분노가 사라지면 그 자리에 자애가 자리 잡는다. 그래서 자애수행을 하면 열한 가지 이익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편안히 잠자고, 행복하게 깨어나고, 악몽을 꾸지 않고, 사람들에게 아낌을 받고, 귀신들에게조차 사랑을 받고, 신들이 보호해 주고, 불이든 독약이든 거의 해를 입지 않고, 빠르게 삼매에 들고, 안색이 맑고, 당황함이 없이 임종에 들고, 더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하느님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A11.15)”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바라문이 편안하게 잠을 잘 잘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분노의 마음을 내려 놓는 것이다. 분노와 자애는 상극이므로 분노의 마음이 사라졌을 때 자애의 마음이 일어나 잠을 편안히 잘 수 있을 것이다.

 

죽여야 할 것은 무엇인가?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분노를 죽이라고 하였다. 이는 바라문이 기대하였던 바라문녀를 죽이라는 말과 전혀 다른 말이다. 바라문녀를 내쫒아 버리면 잠도 편안히 잘 수 있고 불가촉천민처럼 보는 슬픔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최악으로서 바람직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분노를 죽이라고 하였다. 그런 분노는 얼마든지 죽여도 된다. 분노를 살해 하였다고 하여 비난 받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분노를 죽이는 것을 성자는 가상히 여기니라 하였다.

 

분노를 죽였을 때 어떻게 될까? 자애의 마음으로 잠을 편안하게 잘 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슬퍼 하지도 않는다. 바라문녀가 매번 나모 땃사….”하여도 분노를 죽여 버렸다면 천박하다고 슬픔 마음을 내지도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분노 하나 죽임으로써 편안히 자는 것(sukha seti)’슬픔 없는 것(na socati)’ 둘 다 모두 해결 되었다.

 

바라문은 부처님을 시험하고자 하였다. 분노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떠 보려고 하였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무너졌다. 그러자 바라문은 부처님을 떠 받들게 된다. 바라문녀가 나모 땃사…”했던 것 못지 않게 열렬한 신봉자로 변한다. 경에 따르면 존자 고따마여, 훌륭하십니다. 존자 고따마여, 훌륭하십니다.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수행승의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 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다하도록 귀의합니다.(S7.1)”라고 표현 되어 있다.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오늘날 테라와다 불교에서 가장 많이 불려지는 말이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이다. 예경문으로서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말과 같다. 한국불자들이 나무아미타불이나 나무관세음보살 하며 염불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한국불자들은 염불한다면 부처님을 염하지는 않는 것 같다. 대부분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염하기 때문이다.

 

불자이면서 부처님을 염하지 않고 보살이나 타방국토의 부처님을 염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 불자라면 석가모니 부처님을 염해야 할 텐데 언제 어디서나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염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들은 부처님을 염하였다. 그것은 부처님 별칭을 부르는 것이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공포나 전율이나 소름이 끼치는 두려움이 생겨나면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깨달은 님, 세상의 존귀한 님이다.(S11.3)”라고 염하라고 하였다. 일종의 수호주문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열 가지를 세 가지로 줄이면 더 간단해 진다. 열 가지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바가와, 아라한, 삼마삼붓다만을 따로 떼어내서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라고 세 번 염하는 것이다. 그것도 기뿐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신심도 날 뿐만 아니라 두려움도 없어질 것이다.

 

불자들이 나무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하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주문은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라 본다. 우리말로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말이다.

 

 

 

 

 

 

2015-07-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