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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선정 상태에서는 호흡이 끊어진다, 부처님의 대반열반(大般涅槃)

담마다사 이병욱 2015. 7. 3. 19:23

 

4선정 상태에서는 호흡이 끊어진다, 부처님의 대반열반(大般涅槃)

 

 

대반(大般)의 뜻은?

 

한자어로 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는 말이 있다. 열반이라는 말은 알지만 그 앞에 붙은 대반의 뜻은 무엇일까? 대반열반이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마하빠리닙바나(mahāparinibbāna)’라 한다. Mahāparinibbāna‘mahā(Great)+pari(all round) +nibbāna(extinction)’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빠리(pari)‘all round; altogether; completely’의 뜻으로 한자어로 음역하였을 때 반()이라 한다. 대반열반에서 은 빠리를 음역한 것이다. 대반열반의 뜻은 위대하고 완전한 소멸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죽음을 일컫는 말이다.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

 

부처님의 열반에 대해서는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서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웅장한 소설적 구성으로 표현 되는 경을 읽어 보면 인간적인 부처님을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야에서 단편이 보인다. 그것은 부처님의 열반에 대한 것이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handa dāni, bhikkhave, āmantayāmi vo – ‘vayadhammā sa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ā’ ti. Aya tathāgatassa pacchimā vācā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지금 너희들에게 말한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한 것이다.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유훈이다.

 

(Parinibbānasutta -완전한 열반의 경, 상윳따니까야 S6.15, 전재성님역)

 

 

 

nibbana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은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appamādena sampādethā)”이었다. 여기서 sampādethā‘tries to accomplish; supplies; prepares’ 의 뜻으로 , 完遂, 現成, める의 의미이다. 따라서 ‘appamādena sampādethā의 의미는부지런히 성취하라또는 성취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가?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구체적으로 열반을 말한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초불연 각묵스님은 방일하지 말고 [해야 할 바를] 성취하라.”라고 번역하였다.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마음챙김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불방일과 동의어인 마음챙김(sati)이야말로 부처님 45년 설법을 마무리하는 굉장한(satisaya)가르침이라고 주석서와 복주석서는 강조하고 있다.(644번 각주)”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appamādena sampādethā 에 대하여 Strive to attain the goal by diligence.”라 번역하였다.

 

일반사람들의 죽음과 부처님의 열반

 

일반사람들의 죽음과 부처님의 열반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부처님의 열반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첫번째의 선정에 드셨다. 첫번째의 선정에서 깨어나 두번째의 선정에 드셨다. 두번째의 선정에서 깨어나 세번째의 선정에 드셨다. 세번째의 선정에서 깨어나 네번째의 선정에 드셨다. 네번째의 선정에서 깨어나 무한공간의 세계에 드셨다. 무한공간의 세계에서 나와서 무한의식의 세계에 드셨다. 무한의식의 세계에서 나와서 아무것도 없는 의식의 세계에 드셨다. 아무것도 없는 의식의 세계에서 나와서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에 드셨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에서 나와서 아무것도 없는 의식의 세계에 드셨다. 아무것도 없는 의식의 세계에서 나와서 무한공간의 세계에 드셨다. 무한공간의 세계에서 나와서 네 번째 선정에 드셨다. 네번째의 선정에서 나와서 세번째의 선정에 드셨다. 세번째의 선정에서 나와서 두번째의 선정에 드셨다. 두번째의 선정에서 나와서 첫번째의 선정에 드셨다. 첫번째의 선정에서 나와서 두번째의 선정에 드셨다. 두번째의 선정에서 나와서 세번째의 선정에 드셨다. 세번째의 선정에서 나와서 네번째의 선정에 드셨다. 네번째의 선정에서 나와서 곧바로 완전한 열반에 드셨다.

 

(Parinibbānasutta -완전한 열반의 경, 상윳따니까야 S6.15, 전재성님역)

 

 

마지막 구절 네번째의 선정에서 나와서 곧바로 완전한 열반에 드셨다. (Catutthā jhānā vuṭṭhahitvā samanantara bhagavā parinibbāyi)”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 곧바로(samanantara)’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Srp.I.224에 따르면, 두 가지의 곧바로가 있는데, 1) 네 번째 선정에서 일어나 잠재의식(유분, bhavaga)의 상태에 들어가 완전한 열반에 들거나 2) 네 번째 선정에서 일어나 선정적인 요소들을 다시 한번 점검을 하고 곧바로 잠재의식의 상태로 들어가 완전한 열반에 든다. 세존에게서 최종적인 완전한 열반은 두 번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1439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곧바로라는 말은 바왕가(bhavaga)에 들어가 열반에 든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바왕가는 아비담마 용어로서 ‘the sub- consciousness’라 하고 한자어로 유분(有分) 또는 잠재의식(潜在意識)이라 한다. 전재성님의 경우 디가니까야에서는 존재의 흐름의식이라 설명하였다. 초불연에서는 원어대로 바왕가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immediately after this the Blessed one attained final Nibbana”라 하였다.

 

여래는 위대한 힘을 성취하여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드시자 완전한 열반과 동시에 사함빠띠브라흐마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완전한 열반의 경(Parinibbānasutta,S6.15) 게송1

비 고

빠알리어

Sabbeva nikkhipissanti,

bhūtā loke samussaya;

Yattha etādiso satthā,

loke appaipuggalo;

Tathāgato balappatto,

sambuddho parinibbuto

6구게

전재성님역

[싸함빠띠]

세상에 견줄 데 없는

여기 계신 이 스승처럼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누구나 몸을 버리지만

여래는 위대한 힘을 성취하여

완전히 깨달은 님으로 열반하셨네.”

6구게

각묵스님역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필경에는 몸을 내려놓는구나.

이 세상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스승

힘을 갖추셨고 완전하게 깨달으신 여래

그분도 이처럼 완전한 열반에 드시는구나!”

4구게

빅쿠보디역

“All beings in the world

Will finally lay the body down,

Since such a one as the Teacher,

The peerless person in the world,

The Tathagata endowed with the powers,

The Buddha, has attained final Nibbana."

6구게

 

 

 

Tathāgato balappatto에서 발라(bala)’는 여래십력을 말한다. 전재성님의 번역과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뉘앙스가 다르다. 전재성님의 경우 여래십력의 힘으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었고 그 힘으로 열반에 든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각묵스님역을 보면 부처님이 십력을 갖추었음에도 열반에 든 것처럼 묘사 되어 있다.

 

설산동자의 투신설화로 유명한 게송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드시자 완전한 열반과 동시에 제석천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완전한 열반의 경(Parinibbānasutta,S6.15) 게송2

비 고

빠알리어

Aniccā vata sa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 vūpasamo sukho

 

전재성님역

[제석천]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니

, 생겨나고 사라지는

그 현상의 적멸이야말로 지복일세.”

 

각묵스님역

형성된 것들[諸行]은 참으로 무상하여

일어났다가는 사라지는 법이라네.

일어났다가는 다시 소멸하나니

이들의 가라앉음 진정한 행복일세.”

 

빅쿠보디역

"Impermanent indeed are formations;

Their nature is to arise and vanish.

Having arisen, they cease:

Their appeasement is blissful”

 

 

 

 

이 게송은 매우 유명하다. 초기경전 도처에 등장하고 있다. 한역으로는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으로 번역된다. 특히 설산동자의 투신설화로 유명하다. 이 게송과 관련하여 오욕락과 적멸락, 환희의 경(S1.11)(2013-10-04)’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게송을 분석해 보면

 

게송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표를 만들 수 있다.

 

 

 

빠알리 게송

 

앞생멸

Aniccā vata sakhārā

Uppādavayadhammino

 

諸行無常 是生滅法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니

현상생멸

뒷생멸

Uppajjitvā nirujjhanti

tesa vūpasamo sukho ti

 

生滅滅已 寂滅爲樂

 

, 생겨나고 사라지는

그 현상의 적멸이야말로 지복일세

오온생멸

 

 

 

 앞생멸에 대한 것은 ‘Uppādavayadhammino’라 하였고, 뒷생멸은 ‘Uppajjitvā nirujjhanti’라 하였다. 이렇게 다르게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현상’과 ‘오온’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앞생멸은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다는 제행무상을 말한 것이고, 뒷생멸은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이 무상하다는 오온무상을  말한다. 왜냐하면 오온이 무상함을 인식하는 자만이 열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전율의 의미는?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드시자 완전한 열반과 동시에 아난다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완전한 열반의 경(Parinibbānasutta,S6.15) 게송3

비 고

빠알리어

Tadāsi ya bhisanaka,

tadāsi lomahasana;

Sabbākāravarūpete,

sambuddhe parinibbute

 

전재성님역

[아난다]

모든 탁월한 특징을 구족하신

완전히 깨달은 님께서 열반에 드시니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두려운 일이고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전율할 일이네.”

 

각묵스님역

“[최상의 계행 등] 모든 덕을 구족하신

정등각자의 완전한 열반에 드셨을 때

그때 [생긴 지진은] 무서웠고,

그때 [생긴 지진은] 모골이 송연했네.”

 

빅쿠보디역

“Then there was terror,

Then there was trepidation,

When the one perfect in all excellent qualities,

The Buddha, attained final Nibbana."

 

 

 

 

게송에서 두려움과 전율이라는 말이 나온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것에 대하여 아난다는 두려운일이고 전율할 일이네라 하였다. 여기서 앞의 두려움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 볼 수 있고, 뒤의 전율은 부처님이 열반에 들어 갔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한편으로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슬픈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율을 느낄 정도로 감동적인 일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든 것에 대하여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두려운 일이고(Tadāsi ya bhisanaka)라 하였다. 여기서 두려운 일이라는 말은 bhisanaka의 번역이다.  bhisanaka‘horrible; dreadful; awe-inspiring’의 뜻이다. 정말 무섭고 공포스럽고 두려운 것을 말한다. 부처님이 열반하였으니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두려운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구를 보면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전율할 일이네(tadāsi lomahasana)”라 하여 전혀 앞구절과 전혀 다른 뉘앙스이다. 이는 빠알리어 lomahasana‘Bristling of the hair of the body caused by astonishment or fear or delight’의 뜻이기 때문이다. 무서워 두려운 것이라기 보다 경탄스러울 정도로 털끝이 곤두서는 감동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완전한 열반이 감동스런 것임을 말한다.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의 사자후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 감동하게 되어 있다. 부처님이 사자후를 토할 때 이는 당당하고 의미 있는 선언이다. 특히 삿된 견해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는 처음에는 두려움이 들고, 그 다음에는 전율이 일어나고 감동에 빠질 것이다. 부처님의 사자후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 인간세상이 천상보다 공덕행과 수행에 적합한가?(2014-08-08)’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Yepi te bhikkhave, devā dīghayukā vaṇṇavanto sukhabahulā uccesu vimānesu ciraṭṭhitikā, tepi tathāgatassa dhammadesana sutvā yebhuyyena bhaya santāsa savega āpajjanti. Aniccāva kira bho maya samānā niccamhāti amaññimha, addhuvāva kira bho maya samānā dhuvambhāti amaññimha, maya'pi kira bho aniccā addhuvā asassatā sakkāyapariyāpannāti.

 

 

수행승들이여, 저 장수하는 하늘사람들은 아름답고 지극히 행복하고 높은 궁전에 오래도록 살아도 여래의 설법을 듣고 대부분 '벗이여, 우리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상주하지 않는 것을 상주한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실로 영원하지 않고 견고하지 않고 상주하지 않지만 개체가 있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다' 라고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

 

(Sīha sutta-사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78, 전잭성님역)

 

 

천상의 존재들은 오래 살다 보니 영원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삿된 견해를 말한다. 범천계의 지배자라 착각하고 있는 하느님도 마찬가지 이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천상의 존재들에게 전도된 생각을 일깨워 준다.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든가,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든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든가, 완전하지 않은 것을 완전하다든가,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뒤바뀐 생각을 지적해 준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처음에는 두려움에 떨 것이다. 항상하는 존재가 아니라 윤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두렵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사성제 등 핵심 가르침을 설했을 때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면 전율할 것이다. 일곱생 이내에 윤회를 끝낼 수 있기 때문에 다시는 나고 죽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전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감동이다.

 

부처님의 사자후를 접하였을 때 처음에는 두렵지만 점차 전율하고 되고 마침내 감동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 (bhaya santāsa savega)”라고 표현되어 있다.

 

4선정 상태에서는 호흡이 끊어진다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드시자 완전한 열반과 동시에 아누룻다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완전한 열반의 경(Parinibbānasutta,S6.15) 게송4

비 고

빠알리어

Nāhu assāsapassāso,

hitacittassa tādino;

Anejo santimārabbha,

cakkhumā parinibbuto

 

Asallīnena cittena,

vedana ajjhavāsayi;

Pajjotasseva nibbāna,

vimokkho cetaso ahū

 

전재성님역

[아누룻다]

확고한 마음을 지닌 완전한 분에게

들숨도 날숨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네.

욕망이 없는 지멸을 성취하여

눈을 갖춘 님은 완전한 열반에 드셨네.

 

물러서지 않는 마음으로

죽음의 고통을 참아내고

등불이 꺼지는 것처럼

그분의 마음은 참으로 해탈되었네.”

 

각묵스님역

마음이 확고하신 분, 여여하신 분에게는

들숨날숨이 없으셨으니

욕망을 여의신 분, 눈을 가지신 분께서는

평화로움으로 기우셔서 완전한 열반에 드셨네.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고통스런] 느낌을 감내하셨으니

등불이 꺼지듯 그렇게

그분의 마음은 해탈하셨네.”

 

빅쿠보디역

“There was no more in-and-out breathing

In the Stable one of steady mind

When unstirred, bent on peace,

The one with Vision attained final Nibbana.

 

"With unshrinking mind

He endured the pain;

Like the quenching of a lamp

Was the deliverance of the mind”

 

 

 

 

첫 번째 게송에서 들숨도 날숨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네(Nāhu assāsapassāso)”라 하였다. 이는 사선정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라 하였다.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죽기전에 이미 숨이 끊어진 것을 진술하는 것이기도 하다.(1445번 각주)”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각묵스님은 빅쿠보디의 견해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보디스님에 의하면 스리랑카의 와나라따 아난다 장로는 여기서 들숨날숨이 끊어진 것이 세존의 입멸보다 먼저 된 사실에 주목하였다고 한다. 게송을 정확하게 읽으면 이미 들숨날숨이 없는 것은 세존께서 제4선에 드셨기 때문이라고 이해 해야 한다. 4선의 육체적 특징은 들숨날숨이 끊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4한적한 곳에 감 경(S36.11) 등을 참조할 것. 그러므로 여기서 들숨날숨이 없는 것은 일반사람들이 임종하여 들숨날숨이 없는 것과는 확연히 구분된다는 것이다.

 

(653번 각주, 각묵스님)

 

 

각주에 따르면 부처님은 사선정에 들기 전에 이미 숨이 끊어진 것이다. 이는 사선정의 상태의 특징이라고 하였다.

 

각묵스님은 빅쿠보디의 견해를 인용하여 각주에서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빅쿠보디의 견해는 어떤 것일까? CDB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빅쿠보디의 426번 각주를 발견할 수 있었다.

 

 

VAT remarks: "The absence of in-and-out breathing (in pada a) refers to the state in the fourth jhana, where breathing ceases, from which the Buddha passed away. This is not the ordinary cessation of breathing that sets in

when anyone dies.

 

The verse states something remarkable: that already before 'dying' there was no breathing." on "the Stable one" (tadi), see below n. 435. On the ceasing of the breath in the fourth jhana, see 36:11 (IV 217,8-9).

 

Spk: Bent on peace (santi ārabbha): bent upon, depending upon, leaning towards Nibbana without residue. The One with Vision-he with the five eyes-attained final Nibbiina through the full quenching of the aggregates (khandhaparinibbāna). On the five eyes, see n. 370; on the two kinds of parinibbana, see General Introduction, p. 50. At DN II 157,13 this pada reads: ya kālam akari muni; "when the Sage passed away."

 

(CDB 426번 각주, 빅쿠보디)

 

 

사선정 상태에서 호흡이 끊어졌다는 것은 상윳따니까야 S36:11을 참고 하라고 하였다. 열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수행승이여, 그런데 나는 이어서 모든 형성된 것의 사라짐에 관해서 설한다. 첫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언어가 사라지고, 두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사유와 숙고가 사라지고, 세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희열이 사라지고, 네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호흡이 사라지고, 무한 공간에 도달한 자에게는 물질에 대한 지각이 사라지고, 무한의식에 도달한 자에게는 무한공간에 대한 지각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도달한 자에게는 무한의식의 세계에 대한 지각이 사라지고.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에 도달한 자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대한 지각이 사라진다.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도달한 자에게는 지각과 느낌이 사라진다. 번뇌가 부수어진 수행승에게는 탐욕도 사라지고 성냄도 사라지고 어리석음도 사라진다.

 

(한적한 곳의 경, 상윳따니까야 S36.11,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1선정에서 언어가 사라지고, 2선정에서 숙고가, 3선정에서 희열이 사라진다고 하였다. 4선정에서는 호흡이 사라진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4선정에서 열반에 들었으므로 열반에 들기 전에 이미 호흡이 사라진 것이다. 이는 일반사람들의 죽음과는 다른 것이다.

 

바왕가는 한 존재의 정체성과 같은 것

 

일반사람들은 임종시에 호흡이 멈추면 죽는 것으로 되어 있다. 숨을 들이 마셨지만 내쉬지 못하였을 때 호흡이 멈추는 것이다. 그래서 공식적 사망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부처님의 경우 특별하다. 그것은 4선정에서 열반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바왕가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바왕가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세존께서는 선을 증득하시고 선에서 출정하신 뒤 선의 구성요소들을 반조하신 후에, 무기(abyakata)요 괴로움의 진리[고제]인 바왕가의 마음으로 반열반하셨다.(647번 각주)”라고 설명하였다. 각묵스님은 덧 붙여서 모든 유정들도 죽을 때는 반드시 바왕가(죽음의 마음)의 상태에서 죽는다.”라고 하였다.

 

바왕가와 관련하여 수 많은 글을 올렸다. 그 중에 하나가 미소지으며 죽을 있다면(2011-08-06)’이다.

 

바왕가는 한 존재의 정체성과 같은 것이다. 지금 내 얼굴모습과 성향은 모두 바왕가로 보여진다. 얼굴은 죽기전까지 결코 다른 존재와 같은 형태로 변하지 않을 것이고, 성격 또한 성자가 되어 계보를 바꾸기 전까지 타고난 성향을 그대로 유지한다.

 

이처럼 나를 나처럼 여기게 하는 몸과 성향을 바왕가라 볼 수 있는데, 이는 죽기전의 표상을 대상으로 생겨난 재생연결식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재생이 되었다는 것은 또 다른 존재로 일생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윤회는 바왕가의 연속이라 볼 수 있다. 바왕가와 바왕가의 사이에 죽음의식과 재생연결식이 있어서 끊임없이 이 존재에서 저 존재로 조건에 따르 상속되는 마음이 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다행히도 천상에 나게 되었다면 일생을 행복하게 보낼지 모르지만, 불행하게도 지옥과 같은 악처에 태어나게 되었다면 죽을 때까지 한 개체의 몸과 성향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초기불교에 있어서 죽음과 재생은 매우 합리적으로 보여진다.

 

“그렇네” “그렇군” “그렇구나” “그러려니”

 

부처님은 번뇌가 소멸하지 않으면 죽음뒤에 정신과 물질의 과정이 계속된다고 말씀 하셨다. 번뇌는 탐진치로 대표되는데, 이런 오염원이 소멸되었을 때 더 이상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한다. 이는 죽기전에 보는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표상이 없으니 마음의 대상이 없어서 마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못하고, 그 마음은 서로 조건에 따라 상속하는 것으로 보는데, 한 존재의 마지막 죽음의 마음에서 아무런 내생에 대한 표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음 또한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불생불멸의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아라한은 업을 짓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행위를 하긴 하되 나중에 재생이 되는 업을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은 악업은 물론 선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아라한의 마음이라 하고, 아비담마 술어로는 ‘작용만 하는 마음(kriya-citta)’이라 한다.

 

이는 단순한 마음의 작용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행위에 대하여 어떤 과보도 만들어 내지 않는다. 따라서 업으로 확정되지도 않고 업의 결과도 생산하지 않는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그렇네” “그렇군” “그렇구나” “그러려니” 할 뿐이지 집착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2015-07-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