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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한 자를 헤코지한 과보, 꼬깔리까의 경

담마다사 이병욱 2015. 6. 5. 18:24

 

청정한 자를 헤코지한 과보, 꼬깔리까의 경

 

 

입으로 짓는 업을 구업이라 한다. 좋은 이야기이든 나쁜 이야기이든 입을 통해서의도적인 것은 모두 구업이 된다. 그렇다면 인터넷시대에 글쓰기는 신구의 삼업 중에 어디에 들어갈까? 당연히 구업에 들어 간다. 인터넷에 글을 쓰고 사진과 동영상을 올리는 행위, 그리고 댓글을 다는 의도적인 행위는 모두 구업에 속한다.

 

인터넷 댓글에 시달려 자살하였다는 뉴스를 종종 듣는다. 이렇게 본다면 악의적 의도가 실린 글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실제로 말 한마디의 위력은 대단하다. 좋은 의미로 본다면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을 수도 있다. 나쁜 의미로 본다면 말한마디에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릴 수도 있다.

 

나는 의도가 행위()라고 말한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업을 지을 때 의도가 실려야 업이 된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꿰뚫음의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나는 의도가 행위라고 말한다. 의도하고 나서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행위한다.(A6.63)”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맛지마니까야 우빨리의 경에서 “따빠씬이여, 이와 같이 구분되고 이와 같이 구별되는 세 가지 행위 가운데 나는 악한 행위를 짓고 악한 행위를 행함에 있어서 신체적 행위이나 언어적 행위가 아니라 정신적 행위가 가장 비난할 만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M56)”라고 말씀 하셨다. 신구의 삼업 중에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가 가장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빅쿠 보디에 따르면  부처님은 정신적인 의도를 업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파악을 했고 비의도적인 신체적-언어적 행위는 업을 만들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신구의 삼업은 모두 의도에서 시작 되기 때문에 정신적 행위가 가장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보는 것이다.

 

나쁜 의도를 가진 꼬깔리까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도 신체적으로 지은 행위 못지 않게 중하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꼬깔리까의 경을 보면 알 수 있다. 경에 따르면 수행승 꼬깔리까는 나쁜 의도를 가졌다.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 대하여 나쁜 욕망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닌 것이다. 이렇게 험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Prj. II. 473에 따르면 그는 꼬깔리라는 부호의 아들로 그가 세운 승원에서 살았다. 한 때 부처님의 위대한 두 제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장로가 그와 함께 조용히 우기를 보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아무한테도 그들의 존재를 알리지 않기로 약속했다.

우기가 끝나자 꼬깔리야는 두 위대한 제자들의 존재를 주민들에게 알리고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는 것을 비난했다. 주민들은 알리지도 않고 나무라는 것에 대해 항의했으나 서둘러 두 장로에게 버터와 사탕과 의복으로 공양을 올렸다.

 

장로들은 꼬깔리야의 권유로 공양이 주어진 것을 알고는 그것을 받기를 거절했다. 공양이 자기에게 올려지기를 기대했던 꼬깔리야는 ‘스스로 취하지도 않고 나에게 주지도 않았다’고 실망했다.

 

그들은 세존께 갔다가 안거나 지난 후에 오백 명 정도의 수행승들과 함께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 순차적으로 여러 나라를 유행하다가 돌아왔다. 주민들은 존경을 표하고 많은 공양을 올리자 이번에는 모두 받아서 승단에 나누어 주었다.

꼬깔리야는 ‘장로들이 예전에는 소욕지족이었는데, 지금은 탐욕에 사로잡혀 악한 욕망이 있는 자들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는 장로들을 직접 비난하고는 분노하여 사왓티에 있는 부처님을 찾아갔다.

 

부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꼬깔리야가 두 위대한 제자들에 대해 험담을 하는 것으로 이 경이 시작한다.

(1392번 각주)

 

 

꼬깔리야는 두 상수제자가 나쁜 욕망에 지배 받고 있다고 거듭 말한다. 세 번에 걸쳐서 말했을 때도 부처님은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자애롭다.”라고 두둔 하였다. 이에 꼬깔리까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 식으로 묘사 되어 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전재성님역을 보면 꼬깔리까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인사드리고 오른쪽으로 돌고 나서 나가 버렸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초불연의 각묵스님은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아 [경의를 표한]뒤에 물러갔다.”라고 정중하게 표현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된 빠알리어 문구는 “Atha kho kokāliko bhikkhu uṭṭhāyāsanā bhagavanta abhivādetvā padakkhia katvā pakkāmi.”이다. 여기서 퇴장을 의미하는 나가버렸다와 정중하게 물러남을 의미하는 물러났다와 관련된 빠알리어는 ‘pakkāmi’이다, 이는 ‘stepped forward; went away.’의 뜻이다.

 

또 한편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대괄호치기 이용하여 “[세 번] 돌아 [경의를 표한]뒤에라 하였다. 이에 해당되는 말이 ‘padakkhiā이다. 이말은 ‘to go round, keeping the right side turned towards a respectful person or an object of veneration; circumambulation.’의 뜻이다. 어디에도 세 번 돈다는 말은 없다. 그래서일까 초불연 번역을 보면 대괄호를 이용하여 “[세 번] 돌아 [경의를 표한]뒤에라 하였다. 하지만 대괄호를 빼 버리면 돌아 뒤에가 되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상한 번역이 되어 버린다. 전재성님의 경우 오른쪽으로 돌고라 하여 직역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and departed, keeping him on his right”라 하여 직역하였다.

 

마르멜로스 열매

 

번역에서 가장 차이가 많이 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종기에 대한 것이다. 꼬깔리까가 부처님면전에서 퇴장하듯 나간 뒤 얼마 되지 않아 병명을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경에 따르면 처음에는 겨자씨(sāsapa) 만한 종기이었으나 날이 갈수록 커져셔 콩알(mugga), 대두콩(kalāya), 대추씨(kolaṭṭhi), 아말라까열매(āmalaka), 칠엽수열매(beluvasalāuka) 만큼이나 커졌다고 하였다.

 

여기서 칠엽수 열매라 불리는 beluvasalāuka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익은] 빌바열매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ripe beluva fruits”라 하였다.  칠엽수열매와 관련하여 전재성님은 학명이 ‘Aegle Marmelos’라 하였다.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다.

 

 

Aegle marmelos, commonly known as bael, Bengal quince,[1] golden apple,[1] stone apple, wood apple, bili,[2] is a species of tree native to India. It is present throughout Southeast Asia as a naturalized species.[3] The tree is considered to be sacred by Hindus. Its fruits are used in traditional medicine and as a food throughout its range.

(Aegle marmelos, 위키백과)

 

 

마르멜로스는 인디아 원산으로서 황금사과 등으로 불린다. 나무는 힌두교에서 신성시하고 있다. 열매는 전통적으로 약재로 사용된다. 마르멜로스 열매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Fruit

The bael fruit has a smooth, woody shell with a green, gray, or yellow peel. It takes about 11 months to ripen on the tree and can reach the size of a large grapefruit or pomelo, and some are even larger. The shell is so hard it must be cracked with a hammer or machete. The fibrous yellow pulp is very aromatic. It has been described as tasting of marmalade and smelling of roses. Boning (2006) indicates that the flavor is "sweet, aromatic and pleasant, although tangy and slightly astringent in some varieties. It resembles a marmalade made, in part, with citrus and, in part, with tamarind."[6] Numerous hairy seeds are encapsulated in a slimy mucilage.

 

 

A ripe bael fruit in India

 

 

beluvasalāuk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칠엽수라 번역하였다. 칠엽수는 위키백과에 따르면 낙엽이 지는 교목으로서, 높이 30m, 2m 안팎의 큰 나무이다. 잎은 57개의 작은잎으로 이루어진 큰 손꼴 겹잎으로 마주 달린다. 초여름이 되면, 여러 개의 분흥색을 띤 흰꽃이 원추꽃차례를 이루면서 달린다. 각각의 꽃은 4개의 꽃잎과 꽃 밖으로 나오는 긴 수술을 가지고 있다. 열매는 지름 5㎝ 정도 되는 공 모양인데, 가을에 익으면 3쪽으로 갈라진다. 일본의 특산종으로서 한국에서는 경기 이남에서 관상용으로 심고 있다.(칠엽수)”라고 설명되어 있다. 마로니에와 유사한 나무이다. 설명문에 따르면 칠엽수 열매는 5센티 정도로 공모양이라 하였다. 초불연에서는 beluvasalāuka에 대하여 “[익은] 빌바열매라 하였다. 하지만 빌바라는 말은 검색되지 않는다.

 

편집상의 실수

 

꼬깔리까의 몸에 난 종기는 칠엽수 열매만큼이나 커졌다. 그리고 종기가 터져서 피와 고름이 나왔다고 하였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괴질에 걸린 것이다. 그런데 초불연의 번역서를 보면 마치 독을 마신 물고기처럼 그는 까달리(파초) 잎사귀들 위에 누워 있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 문구와 관련된 번역은 전재성님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빅쿠보디역에도 나와 있지 않다. 그런데 각묵스님역을 보면 이 문구에 대하여 주석을 인용하여 주석서에 의하면 제따 숲의 대문 앞에 있는 파초 잎사귀에 위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AA.v.590”라고 되어 있다.

 

 빠알리 원문을 찾아 보았다. 원문에서 초불연의 번역된 문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초불연 앙굿따라니까야 꼬깔리까경(A10:89)’에 실려 있는 내용을 그대로 가져다 붙인 결과라 보여진다. 더구나 각주까지 그대로 가져다 붙여 놓았다. 이는 편집상의 실수라 보여진다. 전재성님역의 앙굿따라니까야 꼬깔리까의 경에 따르면 그래서 그 수행승 꼬깔리까는 독을 삼킨 물고기처럼 되어 파초의 잎 위에 누웠다.(A10.89)”라 되어 있다.

 

세 개의 경은 어떤 차이가 있나?

 

꼬깔리까의 경은 상윳따니까야 뿐만 아니라 숫따니빠따에도 보이고, 앙굿따라니까야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발견된다. 내용은 동일하지만 약간씩 다른 부분도 있다. 어떤 부분이 다를까?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파초구문

22게송

상윳따니까야

(꼬깔리까의 경, S6.10)

없음

1-4게송(stn657-660)

숫따니빠따

(꼬깔리야의 경, Sn3.10)

없음

1-22게송(stn657-678)

앙굿따라니까야

(꼬깔리까의 경, A10.89)

있음

1-4게송(stn657-660)

 

 

파초구문: “그래서 그 수행승 꼬깔리까는 독을 삼킨 물고기처럼 되어 파초의 잎 위에 누웠다.”

 

 

표를 보면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그래서 그 수행승 꼬깔리까는 독을 삼킨 물고기처럼 되어 파초의 잎 위에 누웠다.”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으나 상윳따니까야와 숫따니빠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점은 게송에 대한 것이다. 숫따니빠따에서는 부처님이 모두 22개의 게송(stn657-678)을 읊는 것으로 표현 되어 있다. 그러나 상윳따니까야와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처음 네 개의 게송(stn657-660)만 소개 되어 있다.

 

홍련지옥의 기간은?

 

꼬깔리까는 몸에 종기가 생겨 그 병으로 인하여 죽었다. 경에 따르면 고깔리까가부처님의 상수제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게 악의를 품고 험담하였기 때문에 병에 걸려 죽었고 더구나 홍련지옥에 떨어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홍련지옥에 떨어지면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압부다라는 시간의 단위를 도입하여 설명한다. 이를 비유로서 설명한 것이 씨앗이다. 어떤 사람이 있어서 백년이 지날 때 마다 한알의 씨앗을 주어 꼬살라국의 이십카리의 씨앗이 다 없어져도 일 압부다의 지옥의 기간이 다 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는 몇 년, 몇 백년, 몇 천년, 몇 십만 년이 아닌 무량한 시간을 말한다. 구업과 의업을 지은 죄의 과보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홍련지옥의 기간에 대하여 수 많은 시간의 단위로 설명하고 있다. 가장 기본단위라 볼 수 있는 압부다부터 시작하여, 니랍부다, 아바바, 아하하, 아따따, 황련지옥, 백수련지옥, 청련지옥 백련지옥, 홍련지옥 순이다. 상수제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게 적의를 품은 죄에 대한 대가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다. 그런데 게송에서는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업에 대하여 게송으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 입에 도끼가 생겨난다

 

 

 

구 분

Kokālikasutta(꼬깔리까경, S6.10) 게송1

비고

빠알리어

Purisassa hi jātassa,

Kuhārī jāyate mukhe;

Yāya chindati attāna,

Bālo dubbhāsita bhaa.

 

전재성님역

[세존]

사람이 태어날 때

참으로 입에 도끼가 생겨난다.

어리석은 이는 나쁜 말을 하여

그것으로 자신을 찍는다네.

 

각묵스님역

사람이 태어날 때 입에 도끼가 함께 생겨나서

어리석은 이는 나쁜 말로 자신을 찍도다.

 

빅쿠보디역

"When a person has taken birth

An axe is born inside his mouth

With which the fool cuts himself

Uttering defamatory speech.

 

 

 

 

 

입에 도끼가 생겨난다는 것은 언어적 악행을 뜻한다. 아무 생각 없이 내 뱉은 말이 해로움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말한다. 입과 관련된 말이 Mukha이다. 무카라는 말이 얼굴을 뜻하기도 하지만 (the mouth)’을 뜻하기도 한다. 이는 숫따니빠따 stn608에서도 확인 된다.

 

바셋타의 경(Sn3.9)에 따르면 머리카락이나 어깨에도 없고 귀에도 눈에도 입에도 코에도 없고 입술에도 없고 눈썹에도 없습니다.(stn608)”라 하였다. 여기서 입에도라는 말이 Mukha이다. 빠알리일본어 사전에 따르면 무카에 대하여 , 入口, ; , , 前面; 頂点으로 되어 있어서 입()의 뜻이 가장 앞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게송을 보면 우리말 속담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는다는 말이 연상된다. 이 속담은 잘될 거라고 믿고 있던 일이 틀어지거나 믿고 있던 사람이 배신하여 해를 입게 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믿는 도끼에 대하여 언어적 악행으로 바꿀 수 있다. 남을 헤코지 하면 제 발등을 찍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최악의 패

 

 

구 분

Kokālikasutta(꼬깔리까경, S6.10) 게송2

비고

빠알리어

Yo nindiya pasasati,

Ta vā nindati yo pasasiyo;

Vicināti mukhena so kali,

Kalinā tena sukha na vindati.

 

전재성님역

비난 받아야 할 것을 찬양하고

찬양해야 할 것을 비난하니,

입으로써 불운을 쌓고

그 불운으로 안락을 얻지 못하네.

 

각묵스님역

책망받아 마땅한 것을 칭송하거나

칭송받아 마땅한 것을 책망하는 자

입으로 최악의 패를 모은 것이니

그런 최악의 패로는 결코 행복을 얻지 못하리.

 

빅쿠보디역

"He who praises one deserving blame,

Or blames one deserving praise,

Casts with his mouth an unlucky throw

By which he finds no happiness.

 

 

 

 

 

빠알리게송에서 kali가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불운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최악의 패라 하였다. 주석에 따르면 kali라는 말은 주사위 놀이에 사용된다고 하였다. 초불연 각주를 보면 최악의 패에 대하여 “kali는 인도 전통 노름의 네 가지 패 가운데서 가장 나쁜 패를 일컫는다.”라고 되어 있다. 빅쿠보디는 각주에서 Literally it should be rendered: "The fool collects a disaster with his mouth." Kali means both the losing throw at dice and adisaster.(cdb 404번 각주)”라고 설명 해 놓았다.

 

재수없는 놈을 만났다. 오늘은 공쳤구나

 

이 게송은 상윳따니까야 접촉의 경(S1.22)’에 실려 있는 게송과 유사하다. 게송을 보면 누구든지 허물이 없이 청정한, 순수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악은 어리석은 자 자신에게 돌아가리. 미세한 먼지가 바람을 거슬러 날리듯이. (S1.22)”라 되어 있다. 순수한 자, 선량한 자, 청정한 자를 해코지 하면 바람을 거슬러 먼지를 날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찬양해야 할 것을 비난하면 입으로써 불운을 쌓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빅쿠보디는 CDB 각주에서 접촉의 경에 실려 있는 게송과 관련하여 사리뿟따외 목갈라나 존자의 에 대한 꼬깔리야의 중상모략에 대한 것과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라 하였다. 실제로 숫따니빠따 꼬깔리야의 경 stn662게송과 같은 내용이다. 법구경에서도 유사한 게송이 있는데 죄악이 없고 청정하여 허물이 없는 님에게 해를 끼치면, 티끌이 바람 앞에 던져진 것처럼, 악의 과보가 어리석은 그에게 돌아간다. (Dhp125)”라는 내용이다.

 

법구경 인연담을 보면 사냥꾼 꼬까(koka)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사냥꾼 꼬까의 이름은 꼬깔리까경에서 꼬깔리까와 비슷하다. 참사람을 헤코지 하는 것에 대한 과보가 어떤 것인지 인연담으로 설명한 것이다.

 

인연담에서 사냥꾼 꼬까는 사냥하다가 한 수행승을 만났는데 재수없는 놈을 만났다. 오늘은 공쳤구나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청정한 비구에 대하여 내 앞에 불쑥 나타났으니 네 개들의 밥이나 되라.”라고 악의를 품어 정신적 악업을 지었다.

 

사냥꾼의 정신적인 악업은 결국 자신의 발등을 찍게 된다. 사냥꾼이 개를 풀어 놓자 장로비구는 허겁지겁 나무로 올라 가게 된다. 그러다가 노랑가사가 떨어져서 사냥꾼을 덥쳤다. 이를 본 사냥개들이 노랑가사를 뒤집어 쓴 사냥꾼을 물어 죽여 버렸다. 사냥꾼이 비구를 보고 나서 한마디 뱉은 것이 화근이 되어 자신의 개에게 물려 죽은 것이다. 이를 두고 찬양해야 할 것을 비난하니,입으로써 불운을 쌓았다.’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에게 적의를 품는다면

 

 

구 분

Kokālikasutta(꼬깔리까경, S6.10) 게송3

비고

빠알리어

Appamattako aya kali,

Yo akkhesu dhanaparājayo;

Sabbassāpi sahāpi attanā,

Ayameva mahantaro kali;

Yo sugatesu mana padosaye.

 

전재성님역

도박으로 돈을 잃거나

모든 재산과 함께 자신마저 잃어도

그 불운은 오히려 작지만,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에게 적의를 품는다면,

그 불운이야말로 참으로 큰 것이네.

 

각묵스님역

노름에서 자기의 모든 재산을 잃고

자기자신까지 [잃는 자]

그의 최악의 패는 오히려 하찮은 것일지니

바른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 마음을 더럽힌 자

그의 최악의 패는 아주 낭패스러운 것이 되노라.

 

빅쿠보디역

"Trifling is the unlucky throw

That brings the loss of wealth at dice,

[The loss] of all, oneself included;

Worse by far-this unlucky throw

Of harbouring hate against the fortunate ones

 

 

 

 

 

도박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되어 있다. 그래서 도박 하는 것에 대하여 돈을 잃고 재산을 잃고 심지어 자신까지 잃어 버린다고 하였다. 그런데 더 큰 손실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순수하고 순진한자, 청정한자를 헤코지 하는 것이다. 이를 불운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최악의 패라 하였다.

 

수가따, 부처님인가 아라한인가?

 

순진한자, 청정한자, 올바른 자에 대한 빠알리어가 sugata이다. 이 수가따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이라 하여 직역하였고, 각묵스님은 바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 하여 의역하였다. 각묵스님은 의역한 이유에 대하여 수가따는 대부분 선서로 옮겨 부처님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바른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AA.iii.3)라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초불 상1 620번 각주)”라 하였다. 이번에는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았다. 수가따와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Spk paraphrases padas a-c: "This misfortune is trifling, that is, the loss of wealth at dice along with all that one owns too, including oneself." Spk glosses sugatesu, "fortunate ones," in pada e as sammaggatesu puggalesu, "persons who have rightly attained"; thus here the term refers more widely to all arahants, not only to the Buddha. The verse is also at Uv 8:4, minus pada c (which Norman considers a later addition), and at P-Dhp 301, which includes pada c but with saddhammam pi in place of SN's sabbassa pi. For a

theory regarding the historical evolution of the verse, see GD, p. 268, n. to 659.

(CDB 405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에 따르면 수가따에 대하여 persons who have rightly attained”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부처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라한이라 하였다. 이는 각묵스님의 번역문 바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 한 것과 일치 한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부처님의 열 가지 별칭의 하나인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으로 번역하였다.

 

언어적 정신적 악행의 과보는

 

 

구 분

Kokālikasutta(꼬깔리까경, S6.10) 게송4

비고

빠알리어

Sata sahassāna nirabbudāna,

Chattisati pañca ca abbudāni;

Yamariyagarahī niraya upeti,

Vāca manañca paidhāya pāpaka”

 

전재성님역

언어나 정신으로 악함을 기도하여

거룩한 님을 비난하는 사람은

오 압부다와 십만 니랍부다의 시간을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다네.”

 

각묵스님역

성자들을 비난하는 자

말과 마음으로 악을 지어

10만과 36니랍부다 동안

그리고 5압부다만큼 더 지옥에 떨어질지니.”

 

빅쿠보디역

"What wise man here would seek to define

An immeasurable one by taking his measure?

He who would measure an immeasurable one

Must be, I think, an obstructed worldling."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업을 지어도 악처에 떨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살인 등과 같이 신체적 악행을 해야만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의도를 가졌을 때, 특히 순진한 사람을 괴롭히고 청정한 자를 헤코지 하였을 때 지옥에 떨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게송에서는 압부다와 관련된 시간 단위가 소개 되어 있다. 게송의 경우 아라비아 숫자 보다 한글로 표현 해 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초불연의 경우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여 10만 등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아라비아 숫자는 시어에서 부적절한 표현이라 본다.

 

불분명한 수치계산

 

게송에서 시간을 뜻하는 빠알리어가 있다. “Sata sahassāna nirabbudāna백천니랍부다의 뜻이다. (Sata)에 천(sahassāna)을 곱하면 십만니랍부다가 된다. “Chattisati pañca ca abbudāni”삼십육오압부다라는 뜻이다. 삽십육(Chattisati)과 오(pañca)의 압부다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36니랍부다 동안 그리고 5압부다만큼라 번역하였다. 전재성님은 오 압부다라 하여 삼십육을 언급하지 않았다. 초기경에서 백천이라 하면 백곱하기 천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삼십육오압부다라 한다면 삼십육 곱하기 오압부다가 아닐까? 이런 복작한 계산법이 있어서일까 빅쿠보디는 “measure an immeasurable one”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시간을 나타내는 단위와 관련하여 628번 각주를 참고 하라고 하였다. 이는 빅쿠보디의 CDB 409번 각주와 같은 내용이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Spk explains the scale for measuring time as follows:

one koti = ten million years;

a koti of kotis = one pakoti;

a koti of pakotis = one kotipakoti;

a koti of kotipakotis = one nahuta;

a koti of nahutas = one ninnahuta;

a koti of ninnahutas = one abbuda;

twenty abbudas = one nirabbuda.

(CDB 409번 각주, 빅쿠보디)

 

 

이러한 계산법이 “10만과 36니랍부다 동안 그리고 5압부다만큼인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빠알리원문에서는 “Chattisati pañca ca abbudāni”라 하여 압부다단위로 되어 있어나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36니랍부다 동안 그리고 5압부다만큼라 되어 있어서 니랍부다와 압부다가 혼재 되어 있어서 어떤 수치를 말하는지 분명치 않다. 그럴 경우 빅쿠보디처럼 차라리 ‘immeasurable one”라고 처리하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다.

 

순진한 자를 헤코지하면

 

일반적으로 신체적인 행위에 따른 업이 가장 무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신체적 행위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지옥과 같은 악처에 떨어지는 무거운 업으로 본다. 그러나 살인을 하기 전에 이미 정신적으로 업을 지었다.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살인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우발적으로 일어난 살인에 대해서는 같은 살인이라 하더라도 형량이 적게 적용된다. 계획적인 살인을 하였다면 중형을 면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의도가 개입되었느냐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의도가 가장 중요하다. 이는 정신적인 행위와도 관련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신체적 행위이나 언어적 행위가 아니라 정신적 행위가 가장 비난할 만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M56)”라고 말씀 하셨다.

 

신체적 행위 못지 않고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 특히 악업은 매우 무겁다. 꼬깔리까의 경에 따르면 꼬깔리까는 상수제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게 신체적인 행위를 하여 업을 지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정신적으로 악업을 품고 언어적으로 험담을 하고 다녔다. 그 결과 괴질에 걸려 죽어서 홍련지옥에 태어났다고 설명되어 있다. 경에서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순진한 자, 청정한 자에 대하여 악의를 품거나 해코지 하거나 해치지 말라는 것이다. 악한 자, 오염된 자에 대하여 악의를 품거나 험담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큰 죄로 보지 않으나, 순진한자나 청정한 자에 대하여 비난하는 것은 커다란 중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비난 받아야 할 것을 찬양하고 찬양해야 할 것을 비난하니, 입으로써 불운을 쌓고 그 불운으로 안락을 얻지 못하네.(S6.10)”라 하신 것이다.

 

 

2015-06-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