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데바닷따는 아라한이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5. 6. 20. 15:31

 

데바닷따는 아라한이었을까?

 

 

부처님이 마가다 국의 안다까빈다에 계셨을 때의 일이다. 경에 따르면 바깥은 칠흑같이 어둠이었고 더구나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이때 사함빠띠 브라흐마가 나타났다. 초기경전에서는 늘 우호적인 입장의 브라흐마이다. 사함빠띠는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한다모두 아홉 개의 게송이 있는데 그 중 여덟 번째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Bhiyyo pañcasatā sekkhā,

dasā ca dasadhā dasa;

Sabbe sotasamāpannā,

atiracchānagāmino.

 

[싸함빠띠]

제자가 오백 명 보다 많아

백 명의 십 배의 십 배

모두 진리의 흐름에 들어

축생에는 결코 떨어지지 않네.”

 

(Andhakavindasutta-안다까빈다의 경, 상윳따니까야 S6.13,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흐름에 든 자(sotasamāpannā)’는 축생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기서 축생이라는 말은 ‘tiracchāna’이다. 영어로 ‘an animal; a beast’의 뜻이다. ‘Atiracchānagāmino’‘a(부정접두어)+tiracchāna(an animal)+gāmi(one who goes)’의 뜻으로 축생으로 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성자의 흐름에 든자, 즉 수다원이 되면 악처에 떨어질 정도로 중죄를 저지를 수 없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수다원에 남아 있는 번뇌는 어느 정도일까?

 

수다원이 된다는 것은 유신견과 회의적 의심과 계금취의 결박이 풀린 상태를 말한다. 그런 수다원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매우 미미한 것이라 한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큰 대지와 내가 손톱 끝에 집어든 이 흙먼지와 어느 쪽이 더 큰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이 큰 대지가 훨씬 크고 세존께서 손톱 끝에 집어 든 흙먼지는 아주 작습니다. 세존께서 손톱 끝에 집어 든 흙먼지를 큰 대지와 비교한다면 백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천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며 또한 그 십만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올바른 견해를 갖추고 진리에 대한 올바른 꿰뚫음에 도달한 고귀한 제자들에게는 이미 파괴되어 끝나 버린 괴로움이 더 많고 남아 있는 괴로움은 아주 적다. 많이 잡아 일곱 번을 더 환생한다 할지라도, 아직 남아 있는 괴로움을 이미 파괴되어 끝나 버린 괴로움과 비교하면 백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천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며 또한 그 십만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나까시카경-Nakhasikhāsutta-손톱 끝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1,전재성님역)

 

 

수다원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손톱 끝에 있는 때보다 적음을 말한다. 아직 남아 있는 번뇌는 이미 파괴 되어 버린 번뇌와 비교하면 최대 십만배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일반사람들이 십만개의 번뇌를 가지고 있다면 수다원에게는 한 개 정도 밖에 되지 않음을 말한다.

 

괴로움과 번뇌는 사실상 동의어라 볼 수 있다. 수다원에게 남아 있는 괴로움은 극히 미미하다. 그래서 일곱생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이 보장되어 있다. 이는 경에서 많이 잡아 일곱 번을 더 환생한다 할지라도(upanidhāya yadida sattakkhattuparamatā)”라 하였다. 여기서 ‘sattakkhattuṃ’일곱번의 윤회속에서 일곱번째의 뜻이라고 각주 되어 있다. 그런데 번역에서 환생이라는 표현은 부적절하다. 영혼을 가진 자가 몸 만 바꾸어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적절한 단어는 재생이다. 그래서 바꾼다면 많이 잡아 일곱 번을 더 재생한다 할지라도가 될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어지간한 번뇌는 모두 소멸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남아 있는 번뇌는 극히 미미 하기 때문에 악처에 떨어질 정도로 중죄를 저지를 수 없다. 그럼에도 악처에 떨어진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데바닷따의 경우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데바닷따는 승단을 분열시키고 부처님을 살해 하려는 과보로 아비지옥에 떨어졌다. 그런데 Ppn(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에 따르면 데바닷따는 한때 교단에서 커다란 존경을 받았고 부처님이 칭찬한 11번째 장로이었다라고 소개 되어 있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과연 데바닷따는 아라한이었을까?

 

데바닷따와 관련하여 초불연 상윳따니까야 2권 선근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득과 존경과 명성에 압도되고 전도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데와닷따의 선근은 뿌리가 뽑혀 버렸다.

 

(선근경, 상윳따니까야 S17.32, 각묵스님역)

 

 

 

Devadatta

 

 

데바닷따는 교단의 지도자가 되고자 하였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8년 전에 데바닷따는 부처님은 연로하니 승단의 지도권을 자신에 물려 달라고 했던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그를 꾸짖었다. 복수를 맹세한 데바닷따는 부처님을 살해 하고 강제로 교단을 접수하려는 공작을 꾸몄다.

 

초기경전에서 데바닷따가 아라한이었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출가한 다음 해에 신통을 얻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세속적인 신통이다.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선근 등으로 불리는 비난 받지 않는 법의 뿌리가 뽑히지 않았더라면 데바닷따는 천상에 태어나거나 도와 과를 증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SA.ii.211, 상윳따2 592번 각주)”라 하였다. 도와 과를 증득하지 못하였다면 수다원 단계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11번째 장로이었다 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수행승들이여, 이것들을 수행에 의해서 끊어져야 하는 번뇌라고 한다.(M2)”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 대한 각주를 보면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아비달마에서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의한 번뇌는 되돌아 오지 않는 길(불환향)에서 존재에 의한 번뇌와 무명에 의한 번뇌는 거룩한 길에서 제거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행의 과정을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사람의 경지에 법수적으로 배열하는 것은 반드시 옳다고 볼 수는 없다. SN.II.239에 따르면, 이득과 칭송과 명성은 진리를 깨달은 님에게도 유혹이라고 말한다.

 

(맛지마니까야 68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의 견해를 인용 없이 전재성님의 견해를 말한 것이다. 사쌍팔배의 성자라도 이득과 명예와 칭송 앞에서는 무너질 수 있음을 말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있어도 악처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하였으나 이익과 명예와 칭송 앞에서는 무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법수적으로 배열하는 것은 반드시 옳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한번 소멸 된 번뇌는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원칙일 것이다. 만일 번뇌가 다시 일어난다면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니라 볼 수 있다. 데바닷따가 아라한이었다면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무너졌다면 아라한이었다고 볼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데바닷따는 아라한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것도 성자의 흐름에 들지도 못한 범부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쉽게 넘어 갔을 것이다.

 

 

2015-06-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