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하느님 머리 위로 공중가부좌를 하고, 브라만교를 비판하며 성립한 불교

담마다사 이병욱 2015. 5. 19. 19:30

 

하느님 머리 위로 공중가부좌를 하고, 브라만교를 비판하며 성립한 불교

 

 

 

 

세계를 감각기관으로 나누었을 때

 

불교의 세계관이 있다.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만들어진 세계를 말한다. 이를 크게 삼계(三界)’라 한다. 욕계, 색계, 무색계를 말한다. 이들 세계는 각기 또 다른 세계로 분화 되어 가장 아래로는 지옥(niraya)에서부터, 가장 위로는 비상비비상처천(nevasaññānāsaññāyatana)에 이르기 까지 모두 31개의 세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manussa)은 욕계에 속한다. 인간 바로 위에는 사천왕천(cātu-māha-rajikā)이다. 사천왕천부터 타화자재천(paranimmita-vasa-vatti)까지를 욕계 천상이라 한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다섯 가지 감각기관를 구족하고 있어서 감각적 욕망을 즐기며 수명대로 사는 존재들을 말한다. 이를 욕계천상이라 한다.

 

천상이라 하여 같은 천상이 아니다. 욕계천상은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서 오감으로 감각적 쾌락을 향유하며 살지만, 색계나 무색계의 존재는 다르다.

 

색계의 존재는 감각기관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중에서 안이의(眼耳意)만 기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무색계 존재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중에서 의(, 마노)만 기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색계에서 무상유정천(assañña-satta)의 경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중에서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만 기능하여 의()가 기능하지 않는다.

 

범천계(梵天界)는 무엇을 말하는가?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 천상의 존재에 대하여 감각기관의 유무에 따라 나누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색계와 무색계의 천상은 욕계천상과 비교하여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세계인 명상 수행의 차제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조직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색계와 무색계 천상은 욕계천상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수승한 천상이다.

 

범천계(梵天界)라는 말이 있다. 범천이라 하면 브라만교의 최고신을 말하지만 범천계라 하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색계와 무색계를 모두 포함하여 범천계라 한다. 색계 초선천에서부터 무색계 비상비비상처천에 이르기 까지 색계와 무색계 전체를 통틀어 범천계라 한다.

 

초기경에 따르면 범천(Brahma)들은 자신들이 범천계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색계에서도 초선천에 해당되어 수명이 가장 적은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범천들은 자신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로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까의 경에서 보는 것처럼 너무 오래 살아 과거 전생을 새까맣게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을 부처님이 일깨워 준다.

 

하느님의 자만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범천의 잘못된 견해를 일깨워 주는 경이 있다. 그것이 브라흐마 상윳따(S6)’에 실려 있는 다른 견해의 경(Aññatarabrahmasutta, S6.5)’이다.

 

부처님이 사왓티에 계실 때의 일이다. 경에 따르면 어떤 하느님(Brahma: 범천)에게 잘못된 견해가 생겨났다고 하였다. 하늘의 지배자라 볼 수 있는 하느님이 생각하기를 여기에 올 수 있는 수행자나 성직자는 올 수 없다.(natthi so samao vā brāhmao vā yo idha āgaccheyyā, S6.5)”라 한 것이다.

 

여기서 여기‘idha’의 번역어이다. 여기란 하느님의 세계, 즉 범천계를 말한다. 색계와 무색계를 통틀어 범천계라 하는데, 하느님은 자신이 범천계의 지배자임을 은연중에 나타낸다. 아무리 수행을 많이 하였더라도 자신들의 영역에 결코 들어 올 수 없음을 자신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하느님의 자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잘못된 견해를 가진 것을 깨우쳐 주기로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신통으로 제압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경에 따르면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사이에 제따 숲에서 모습을 감추고 하늘나라에 모습을 나타내셨다. (S6.5)”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런 정형구는 하느님이 등장하는 경에서 종종 볼 수 있다. 마치 순간 이동하듯이 범천계로 들어 간 것이다.

 

하느님 머리 위로 공중가부좌를 하고

 

하느님에 따르면 그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도 범천계에 올 수 없다고 하였다. 하느님 나라에 하느님외에는 올 수 없다는 자만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신통으로 보기 좋게 범천계에 나타났다. 어떻게 나타났을까?

 

경에 따르면 세존께서는 그 하느님의 머리 위 공중에 가부좌를 하고 불의 삼매에 들었다.”라고 되어 있다. 하느님의 머리 꼭대기에 그것도 공중부양된 상태로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들어 간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영역에 침범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 보다 더 높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부처님의 제자들도 범천계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신통제일이라는 목갈라나 존재는 세존께서는 어디에 계실까?”라고 의문한다. 천안통으로 보니 부처님이 하느님 머리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이에 목갈라나 존자도 신통을 사용하여 범천계로 이동한다.

 

경에 따르면 목갈라나 역시 하느님 바로 머리 위에 가부좌를 틀고 공중에 앉아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경의 표현대로 라면 가장 위에 부처님이 있고, 그 바로 아래에 목갈라나 존자가 있다. 목갈라나 바로 아래에는 자부심과 자만으로 가득찬 하느님이 앉아 있다. 하느님의 머리 꼭대기에 부처님과 목갈라나가 공중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다.

 

또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깟싸빠 존자도, 마하 깝삐나 존자도, 아누룻다 존자도 차례로 범천계에 나타난다. 그래서 가장 위에서부터 차례로 부처님, 목갈라나, 깟싸빠, 마하 깝삐나, 아누룻다 순으로 하느님 머리 바로 순으로 공중가부좌를 튼 것이다. 수행자들은 절대로 범천계에 들어 올 수 없다는 하느님의 생각은 여지 없이 무너진 것이다.

 

하느님의 권위는 무너지고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은 범천계에 나타났다. 나타나서 신통으로서 하느님의 머리 꼭대기에 그것도 공중에 앉아 삼매에 들었다. 이는 하느님의 권위가 무너졌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목갈라나 존자는 하느님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한다.

 

 

Ajjāpi te āvuso sā diṭṭhi,

yā te diṭṭhi pure ahu;

Passasi vītivattanta,

brahmaloke pabhassara

 

[목갈라나]

그대가 예전에 지녔던 견해를

그대는 아직도 갖고 있는가?

하느님의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찬란한 광휘를 보고 있는가?”

 

(Aññatarabrahmasutta-다른 견해의 경, 상윳따니까야 S6.5, 전재성님역)

 

 

목갈라나 존자는 하느님의 잘못된 견해를 지적하고 있다. 수행자나 성직자는 결코 범천계를 넘볼 수 없다고 하지만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는 범천계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찬란한 광휘와 나타났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광휘는 하느님 세계를 관통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부처님의 지혜광명은 어디까지 뻗치는가?

 

초전법륜경에 부처님의 지혜광명과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꼰단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였을 때 천지가 진동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또한 이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리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S56.11)”라고 표현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무량한 빛이 우주 구석구석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어느 곳까지 미친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범천계 뿐만 아니라 아비지옥에 까지 미친 것이다.

 

아비지옥은 오역죄를 저지른 자들이 태어나는 곳이다. 부모를 죽이거나 올바른 수행자나 성직자를 죽이거나 습관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과 같은 무거운 죄를 지은 자들이다. 그런데 그곳은 칠흑 같은 어둠이다. 그래서 앞을 볼 수 없다.

 

주석에 따르면 아비지옥은 칠흑 같은 암흑은 시각의식의 생기를 막는 암흑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Smv. 433)”라 설명되어 있다. 빛이라고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지옥중생들도 부처가 출현하였을 때는 빛을 비로소 보게 된다. 이에 대한 감격을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 해 놓았다.

 

 

그곳에 태어난 존재들은 그 빛으로 ‘벗이여, 다른 존재들도 참으로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 일만 세계가 흔들리고 동요하고 격동하면서,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라고 세존의 앞에서 직접 듣고 세존의 앞에서 직접 배웠습니다.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Acchariyabbhutta Sutta , 맛지마니까야 M123,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아비지옥에 사는 존재들은 처음으로 빛을 접하였다. 그래서 그제서야 상대방의 얼굴을 알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벗이여, 다른 존재들도 참으로 여기에 태어났다.(M123)”라고 서로가 서로를 비로소 알아 본 것이다.

 

경에서 설명된 아비지옥은 ‘빛의 사각지대’이다. 그래서 그 어떤 빛도 비추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출현 할 때는 빛이 비친다. 그래서 비록 칠흑같이 어두운 지옥일지라도 부처님이 출현하면 서로가 서로를 알아 보는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광명은 이제까지 한번도 빛이 도달하지 않았던 아비지옥에 이르기 까지 환하게 밝혔다. 이는 무엇일 말할까? 부모를 살해하는 등 중죄를 지어 비록 아비지옥에 고통받고 있는 존재라도 빛이 도달함에 따라 구원의 가능성이 제시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신들의 위력(devānubhāvanti)’을 뛰어 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신은 다름아닌 하느님(브라흐마: 범천)을 의미한다.

 

경에 따르면 하느님이 출현할 때는 전조가 있다고 한다. 디가니까야에 따르면 벗들이여, 광대한 빛이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나는 징조들이 보이면, 하느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광대한 빛이 생겨나고 광명이 나타나는 것은 하느님이 나타나는 전조이기 때문입니다. (D18)”라 하였다. 새벽이 밝아 오는 것이 태양이 떠 오르는 전조이듯이 하느님이 나타날 때는 먼저 광명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 광명은 고작 출현한 지역에 한정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광명은 아래로는 아비지옥에서부터 위로는 가장 높은 천상까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래서 목갈라나 존자는 하느님의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찬란한 광휘를 보고 있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잘못을 시인하는 하느님

 

부처님은 자만에 빠진 하느님에게 신통과 빛으로 보여 주었다. 그리고 목갈라나는 하느님이 잘못된 견해에 빠져 있다고 충고 하였다. 이에 하느님은 다음과 같이 시인한다.

 

 

Na me mārisa sā diṭṭhi,

yā me diṭṭhi pure ahu;

Passāmi vītivattanta,

brahmaloke pabhassara;

Svāha ajja katha vajja,

aha niccomhi sassato

 

[하느님]

벗이여, 예전에 가졌던 견해를

나는 지금 갖고 있지 않네.

하느님의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찬란한 광휘를 나는 보고 있네.

오늘 나는 항상하고 영원하다.’라고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나.”

 

(Aññatarabrahmasutta-다른 견해의 경, 상윳따니까야 S6.5, 전재성님역)

 

 

하느님은 자신의 견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잘못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나는 항상하고 영원하다(aha niccomhi sassato)”라는 영원주의적 견해를 말한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주석서에 의하면 이 범천은 두 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어떤 사문도 자신의 세계에 올 수 없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상견(常見)이었다. 첫 번째 견해는 부처님과 제자들이 그의 영역에 오심으로 해서 부서졌고, 두 번째 견해는 세존의 설법을 듣고 예류도에 확립됨으로 해서 부서졌다. 그래서 그는 항상하고 견고하다는 견해를 버린 것이다. (SA.i.213)

 

(606번 각주, 각묵스님)

 

 

각주에 따르면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것은 영역과 상견이다. 하느님은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도 하느님 영역에 미칠 수 없다고 자만하였으나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은 하느님의 머리 위에 가부좌를 틀었다. 그래서 영역이 무너졌다.

 

하느님은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을 때 진리로서 받아 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사성제를 설법하였을 때 어느 누구도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진리로 받아 들이게 되었을 때 흐름에 든 자가 되었다면 영원주의나 허무주의 등 기존의 삿된견해는 깨지게 된다. 하느님 역시 마찬가지 이었을 것이다.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의 사자후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 감동하게 되어 있다. 부처님이 사자후를 토할 때 이는 당당하고 의미 있는 선언이다. 특히 삿된 견해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는 처음에는 두려움이 들고, 그 다음에는 전율이 일어나고 감동에 빠질 것이다. 부처님의 사자후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저 장수하는 하늘사람들은 아름답고 지극히 행복하고 높은 궁전에 오래도록 살아도 여래의 설법을 듣고 대부분 '벗이여, 우리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상주하지 않는 것을 상주한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실로 영원하지 않고 견고하지 않고 상주하지 않지만 개체가 있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다' 라고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

 

(Sīha sutta-사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78, 전잭성님역)

 

 

천상의 존재들은 오래 살다 보니 영원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삿된 견해를 말한다. 범천계의 지배자라 착각하고 있는 하느님도 마찬가지 이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천상의 존재들에게 전도된 생각을 일깨워 준다.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든가,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든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든가, 완전하지 않은 것을 완전하다든가,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뒤바뀐 생각을 지적해 준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처음에는 두려움에 떨 것이다. 항상하는 존재가 아니라 윤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두렵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사성제 등 핵심 가르침을 설했을 때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면 전율할 것이다. 일곱생 이내에 윤회를 끝낼 수 있기 때문에 다시는 나고 죽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전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감동이다.

 

부처님의 사자후를 접하였을 때 처음에는 두렵지만 점차 전율하고 되고 마침내 감동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Atha kho bhagavā ta brahmāna savejetvā에 대하여 그 하느님을 감동시키고 나서라 하였을 것이다.

 

색계초선천을 보면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은 신통으로서 하느님을 굴복시켰다. 이런 사실을 안 하느님을 따르는 무리의 한 신이 벗이여, 목갈라나여, 목갈라나와 깟싸빠, 깝삐나, 아누룻다와 같은 위대한 신통과 크나큰 위력을 지닌 다른 세존의 제자들도 있습니까?(S6.5)”라고 물어 본다. 여기서 하느님을 따르는 무리‘brahmapārisajjo’의 번역어이다. 초불연에서는 범중천이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Brahma's assembly replied’라 하였다. 범중천은 어떤 위치에 있는 존재들일까? 불교의 세계관에서 색계초선천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1) 대범천(大梵天, mahā-brahma)

위대한 신들의 하느님 세계, 수명 1

 

2) 범보천(梵輔天, brahma-purohitā)

하느님을 보좌하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수명 1/2

 

3) 범중천(梵衆天, brahma-pārisajjā

하느님의 권속인 신들의 하느님 세계, 수명 1/3

 

 

수명으로 서열이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범천은 색계 초선천에서 가장 높은 천상에 있다. 수명이 1겁이다.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사함빠띠, 바까 브라흐마가 대범천에 속한다. 본 경에서 하느님도 대범천임을 알 수 있다.

 

색계 초선천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천상이 범중천이다. 수명이 1/3겁이다. 그런데 명칭을 보면 하느님의 권속인 신들이라 하였다. 대범천(mahā-brahma) 큰 하느님이라 본다면 범중천은 작은 하느님들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범중천은 대범촌을 주인으로 모시는 일종의 식솔들임음 알 수 있다.

 

육신통이란 무엇인가?

 

큰 하느님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굴복하였다. 이런 과정을 작은 하느님들(범중천)이 지켜 보았을 것이다. 이는 권위의 상실이다. 부처님에 의하여 큰 하느님(대범천)이 무참히 깨진 것이다. 그래서 작은 하느님들이라 볼 수 있는 범중천이 목갈라나 존자에게 신통을 지닌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묻는 것이다. 이에 목갈라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Tevijjā iddhipattā ca,

cetopariyāyakovidā;

Khīāsavā arahanto,

bahū buddhassa sāvakā

 

[목갈라나]

세 가지 명지와 신통의 힘을 갖추고

타인의 마음을 아는 데 숙달하고

모든 번뇌를 소멸한 많은

거룩한 님들이 깨달은 님의 제자들이네.”

 

(Aññatarabrahmasutta-다른 견해의 경, 상윳따니까야 S6.5, 전재성님역)

 

 

세 가지 명지는 한역으로 삼명(三明)이라 한다. 숙명통과 천안통과 누진통을 말한다. 자신의 전생에 대하여 새기는 숙명통, 타인의 업과 과보를 아는 천안통, 번뇌에 대한 궁극적인 앎인 누진통이다. 삼명은 여섯 가지 곧바른 앎, 즉 육신통의 일부이다.

 

육신통은 어떤 것일까? 각주에 따르면 육신통은 보다 높은 지혜의 넓은 범주 속으로 초월적 능력을 포함시킴으로써 명상을 통해 얻어 질 수 있는 정신적 성취의 유형에 대한 확장된 해석을 제공한다.(1754번 각주)”라고 설명되어 있다. 육신통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여덟 가지 종류의 초월적 능력[神足通: iddhi]

2) 멀고 가까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하늘귀[天耳通: dibbasota]

3) 타인의 마음의 길에 대한 앎[他心通: cetopariyañāa]

4) 자신의 전생에 대하여 새김[宿命通: pubbenivasānussati]

5) 타인의 업과 과보를 아는 하늘눈[天眼通: dibbacakkhu]

6) 번뇌에 대한 궁극적인 앎[漏盡通: āsavakkhayañāa

 

이 가운데 첫 다섯 가지 곧 바른 앎은 세속적인 것이고 명상수행자의 장식물로서는 바람직 할지 몰라도 해탈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마지막의 번뇌의 소멸에 대한 곧바른 앎[漏盡通]은 출세간적이고 점진적인 수행의 절정에 해당하는 것이다.

(1754번 각주, 전재성님)

 

 

육신통 중에서 누진통만이 출세간적이라 하였다. 그리고 점진적이라 하였다. 이는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성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선정과 곧바른 앎의 경에서 누진통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나는 번뇌를 부수었으므로 번뇌 없이 마음의 해탈,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현세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하였다. (S16.9)”라 하였다.

 

브라만교를 비판하며 성립한 불교

 

인도에서 불교가 성립된 것은 역사적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그것은 그 때 당시 주류인 브라만교를 바판하며 성립 되었기 때문이다. 브라만교의 최고신이자 제의 대상인 하느님(브라흐마: 범천)을 부정한 것이다. 그리고 변치 않는 자아가 있어서 몸만 바꾸어 윤회한다고 보는 아뜨만을 부정하였다.

 

신흥종교인 불교는 기존의 주류이자 지배종교를 비판하고 부정하였다. 그런 비판의 대상은 최고신인 하느님이다. 그래서 초기경에서 하느님은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다. 우주적 수명과 높은 위치 때문에 자신을 전능한 창조자라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망상적 유형으로서 바까하느님을 들 수 있다.  

 

부처님은 망상적 하느님을 일깨워 준다. 여기에 제자까지 참여 하기도 한다. 경에서는 신통제일 목갈라나 존자와 부처님의 수제자라 볼 수 있는 깟싸빠존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깝삐나와 아누룻다가 등장하여 모두 네 명의 제자들이 등장한다. 이들 제자들은 신통으로 하느님의 머리 위에 공중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이는 하느님의 권위에 대한 부정이다. 이를 지켜 본 하느님의 권속들이 지켜 본다.

 

부처님과 제자들은 범천계를 지배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하느님을 굴복 시켰다. 윤회 할 수밖에 없는 범부중생에 지나지 않음을 알려 준 것이다. 그리고 가르침을 알려 주자 감동하였다. 이는 윤회에서 벗어남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 사는 것 보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삶에 감동한 것이다. 부처님 설법을 들었을 때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 것이다.

 

 

 

2015-05-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