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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인(乞人)과 걸사(乞士)의 차이는? 바라문 여인의 아들 브라흐마데와

담마다사 이병욱 2015. 4. 27. 19:34

 

걸인(乞人)과 걸사(乞士)의 차이는? 바라문 여인의 아들 브라흐마데와

 

 

한국불교에서는 출가를 하면 집에서 멀리 떠난다. 세상과 인연을 끊다시피 하며 깊은 산중에서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 출가승은 사람들이 사는 곳 가까이 살았다. 가장 큰 이유는 탁발이다. 직업을 갖지 않고 생산활동을 하지 않는 수행승들이 걸식하려면 마을 가까운 숲에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살던 마을에서 출가한 자가 자신이 살았던 마을로 탁발나가는 경우 자신의 부모집에서 걸식할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브라흐마데와경(S6.3)’이다.

 

경에서 브라흐마데와는 바라문 여인의 아들이다. 아마 바라문출신 홀어머니와 살았던 것 같다. 이로 보았을 때 브라흐마데와는 바라문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브라흐마데와가 탁발나간 것에 대하여 싸밧티 시에서 집집마다 탁발을 하면서 자신의 어머니가 사는 집에 이르렀다.( Sāvatthiya sapadāna piṇḍāya caramāno yena sakamātu nivesana tenupasakami, S6.3)”라고 표현 되어 있다. 여기서 집집마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sapadāna을 번역한 것이다. 각주에 따르면 차제로의 뜻이다. 차례대로 탁발한다는 뜻이다. 부자집 등을 골라 가며 탁발하는 것이 아니라 순서대로 탁발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신의 어머니가 살던 집으로 탁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걸인과 걸사의 차이는?

 

요즘 길거리에 돌아 다니는 탁발승이 있다. 조계종에서는 승려의 위의를 고려하여 탁발이 금지 되어 있음에도 거리에서 탁발승을 볼 수 있는 것은 여법하지 않는 것이라 보여진다. 그럼에도 탁발의 전통이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하여 한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종종 탁발승을 볼 때가 있다. 회색 승복을 입고 목탁을 치는 경우도 있고,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식당 안으로 불쑥 들어와서 주문을 외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식당주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영업방해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두 말 하지 않고 천원짜리 한장으로 쥐어 주면서 빨리 내 보낸다.

 

부처님 당시 빅쿠들은 어떻게 탁발을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발우를 든 채 집안으로 들어 가지 않고 집 앞을 한 집씩 방문하는 것(Srp.I.205)”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런 탁발방식은 도시의 거리에서 볼 수 없다. 거리의 탁발승은 아무 가게나 불쑥 들어가서 목탁을 치거나 주문을 외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걸인과 걸사는 다르다. 걸인은 아무 집이나 골라서 들어가서 빌어 먹는 사람을 말한다. 잘 사는 집, 부유해 보이는 집, 인심 좋아 보이는 집을 골라서 빌어 먹는 것이다. 그러나 빅쿠를 뜻하는 걸사는 다르다. 부자집이든 가난한 집이든 차례로 탁발한다. 그래서 자신의 부모가 사는 집도 탁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걸인의 경우 집안으로 불쑥 들어가서 슬픈 표정으로 동냥을 한다. 그러나 걸사는 집안으로 들어 가지 않는다. 차례대로 탁발을 하지만 문 밖에서 조용히 서 있을 뿐이다. 이런 빅쿠에 대하여 PCED194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bhikkhu:

A fully ordained disciple of the Buddha is called a bhikkhu. "Mendicant monk" may be suggested as the closest equivalent for "Bhikkhu", literally it means "he who begs" but bhikkhus do not beg. They silently stand at the door for alms. They live on what is spontaneously given by the supporters. He is not a priest as he is no mediator between God and man. He has no vows for life, but he is bound by his rules which he takes of his own accord. He leads a life of voluntary poverty and celibacy. If he is unable to live the Holy Life, he can discard the robe at any time.

 (빠알리 전자사전 PCED194)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빅쿠:

구족계를 받은 부처님의 제자를 빅쿠라 한다. 걸식에 의존하는 승려는 가장 빅쿠다운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빅쿠는 문자적으로 ‘구걸하는 자’를 의미하지만 실제로 구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조용히 자선을 바라며 문 바깥에 서 있다. 그들은 보시자가 자발적으로 주는 것에 의지하여 살아 간다. 그는 신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도 아니고 성직자도 아니다. 그는 생계를 위한 어떤 것도 하지 않겠다고 천명한다. 다만 자신이 준수하는 계율안에서 살아간다. 그는 자발적 빈곤과 금욕적 생활을 한다. 만일 그가 성스런 삶을 살 자신이 없다면, 그는 언제든지 가사를 버릴 수 있다.

(진흙속의연꽃역)

 

 

Noble_Way

  

 

탁발하는데 있어서 원칙이 있는 것이다. 집집마다 차례대로 탁발하는 것뿐만 아니라 절대 집안으로 들어 가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They silently stand at the door for alms.(그들은 조용히 자선을 바라며 문 바깥에 서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탁발승들을 보면 부유해 보이는 가게 등을 골라 탁발하며 더구나 불쑥 들어가서 목탁을 치든지 주문을 왼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에서 거리의 탁발승들은 걸사라기 보다 걸인에 가깝다.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vs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경에서 브라흐마데와는 부처님의 교단에 출가하였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홀로 떨어져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그러기 위해 양가의 자제들이 당연히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 그 위 없는 청정한 삶을 바로 현세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이런 형태의 구문은 정형화 되어 있다. 그래서 어느 경에서든지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어지는 정형구를 보면 아라한 선언문이다. 이에 대하여 두 번역자의 번역이 약간 차이가 난다.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Khīā jāti,

vusita brahmacariya,

kata karaīya,

nāpara itthattāyā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전재성님역)

 

태어남은 다 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각묵스님역)

 

 

두 번역에서 가장 차이 나는 부분이 nāpara itthattāyā에 대한 번역이다. 전재성님은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 윤회의 종식을 선언하였고, 각묵스님은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 윤회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 하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윤회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 다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 구절은 아라한이 해탈하여 스스로 깨달은 바를 선언한 것이다. ‘nāpara itthattāyā는 원래 다시는 이와 같은 상태에 이르지 않는다.’는 뜻인데, 붓다고싸는 다시는 존재의 다발[五蘊]의 상속이 없다.( āpara khandhasantāna natthi)’란 해석을 내리고 있다. 필자는 일상적 용어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한다.

 

(1308번 각주, 전재성님)

 

 

아라한 선언 마지막 구절에 대한 설명이다. ‘nāpara itthattāyā에 대하여 직역하면 다시는 이와 같은 상태에 이르지 않는다.’라는 뜻이지만 일상적 용어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 하였다. 이는 의역이다. 이 같은 상태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남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윤회의 종식이다. 그러나 각묵스님의 경우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 하였다. 이는 직역에 가깝다. 그리고 붓다고사의 주석을 존중한 번역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주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1) 이러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이와 같이 16가지 방법으로 [다시] 할 일을 다 해 마치기 위해서, 혹은 [다시] 오염원을 멸진하기 위해서 도를 닦아야 할 일이 다시 없다는 뜻이다.

2) 혹은 여기서 어떤 존재란 어떤 존재로부터라는 뜻이다. 즉 지금 존재하는 오온의 지속으로부터 다시 다음의 다른 오온의 지속이 존재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니, 이 오온을 철저히 알고 머물기 때문에 마치 뿌리가 잘려진 나무와 같다고 철저하게 알았다는 말이다.”(SA.i.205)

 

(579번 각주, 각묵스님)

 

 

초불연 번역을 보면 주석의 견해를 중시하여 직역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 하였는데 이는 윤회의 종식을 말한다. 그런데 각주에 따르면 itthattāyā에 대하여 여격으로 해석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이런 존재가 되기 위해서다시 오지 않는다는 뜻이라 하였다. ‘itthattāyā가 명백히 중성 추상명사이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itthattāyā는 탈격이 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CDB를 찾아 보면 “Destroyed is birth, the holy life has been lived, what had to be done has been done, there is no more for this state of being.”라 되어 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을 보면 “there is no more for this state of being”라고 되어 있어서 어떤 존재로도 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주석의 견해를 중시한 직역이라 볼 수 있다. 이 부분과 관련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This is the stock canonical description of the attainment of arahantship. The sentence beginning "He directly knew," according to Spk, shows "the plane of reviewing" (paccavekkhanabhumi).

 

The commentaries propose two ways of interpreting nāpara itthattāyā, depending on whether the last word is taken as dative or ablative. Spk: "Now there is no development of the path again done ‘for this state' (itthabhāvāya = itthattāyā as dative), that is, for the state of the sixteen tasks or for the destruction of the defilements. (The 'sixteen 434 tasks' are the four tasks of the path-full understanding, abandonment, realization, and development (as at 56:11; V 422,3-30)-taken in conjunction with each of the four supramundane paths.) Or alternatively: itthattaya =itthabhavato (the ablative, ‘beyond thisness'). Now there is no further continuum of aggregates beyond this present continuum of aggregates. These five aggregates stand fully understood like a tree cut down at the root."

 

I take itthattaya as a dative meaning "for this state of being," i.e., for existence in any state of being, so that the phrase conveys the saine sense as the alternative "roar of liberation," natthi dani punabbhavo, "Now there is no renewed existence" (see 22:27 (III 29,30), etc.). Elsewhere (e.g., at DN I 1 7,33; MN II 130,16 fall.; AN I 63,30-64,18) itthatta signifies the human state (or perhaps the entire sensory realm) as contrasted with higher states of being. As the stem form itthatta is clearly neuter, it is difficult to accept the commentarial explanation of itthattaya as an

ablative.

 

(CDB 376번 각주, 빅쿠보디)

 

 

대체적으로 초불연 각주와 거의 같은 내용이다. 특히 해탈과 관련하여 see 22:27’라 하였다. 찾아 보면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이 없다.(akuppā me ceto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전재성님역)”이라 번역 되어 있다. 문맥상 같은 의미이다. 청정한 삶을 산 것과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룬 것이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 결과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고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 하였다. 결국 윤회가 종식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우호적인 사함빠띠 하느님(Brahma: 범천)

 

브라흐마데와는 부처님의 교단에 출가하여 출가의 목적을 성취하였다. 아라한이 된 것이다. 아라한이 되면 공양받을만 하다. 걸인에게 보시하여도 공덕을 쌓는 다고 하는데 아라한에 공양하면 매우 큰 공덕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사함빠띠 브라흐마가 알려 주고자 한 것이다.

 

사함빠띠는 바라문 여인의 집앞에 나타난다. 그것도 천상의 신답게 즉시 나타난다. 경에서는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사이에라 하였다. 이렇게 순간이동 하듯이 나타난 사함빠띠 브라흐마는 브라흐마데와의 어머니가 사는 집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런데 공중에 서서라 하였다. 범천에 사는 존재인 사함빠띠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경에 따르면 범천에 사는 존재는 몸이 깃털처럼 가벼운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기쁨을 먹고 산다고 하였다. 또 빛으로 빛나는 존재라 하였다. 그래서 공중에 서서라 하였을 것이다.

 

사함빠띠가 바라문 여인의 집앞에 나타난 것은 아들이 나타나는 것을 알리는 것과 같다. 아라한이 된 브라흐마데와에게 공양하면 큰 과보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한 것이다.

 

초기경에서 사함빠띠 브라흐마는 우호적이다. 부처님을 돕는 역할을 한다. 반면 비후호적 브라흐마도 있다. 바까 브라흐마 같은 경우이다. 주석에 따르면 사함빠띠 브라흐마는 깟싸빠 부처님 시대에 싸하까라는 장로이었다. 그는 첫 번째 선정에서 목숨을 마치고 한 우주기[]를 사는 하느님[일겁범천]이 되었다.(Srp.I.199)”라고 설명 되어 있다.

 

하느님의 길(brahmapathaṃ)

 

사함빠띠는 바라문 여인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구 분

Brahmadevasutta(브라흐마데바의 경, S6.3) 1

 

빠알리어

Dūre ito brāhmai brahmaloko,

Yassāhuti paggahāsi nicca;

Netādiso brāhmai brahmabhakkho,

Ki jappasi brahmapatha ajānantī.

brahmapatha

전재성님역

[싸함빠띠]

바라문 여인이여, 그대는 언제나 헌공하지만,

하늘나라는 여기서 멀고 또 머네.

바라문 여인이여, 하느님에 대한 헌공은 이렇지 않네.

하느님의 길을 알지 못하며

무엇을 읊조리는가?

하느님의 길

각묵스님역

바라문녀여, 그대 항상 베푸는 헌공을 섭수하는

범천의 세상은 여기로부터 멀다네.

바라문녀여, 범천은 그런 음식 먹는 자가 아니니

범천에 이르는 길을 모르면서 왜 중얼대고 있는가?

범천에 이르는 길

빅쿠보디역

"Far from here, madam, is the brahma world

To which you offer a constant oblation.

Brahma does not eat such food, lady:

So why mumble, not knowing the path to Brahma?

the path to Brahma

 

 

게송에서 하느님의 길이 있다. 이는 ‘brahmapatha의 번역어이다. 주석에 따르면 착하고 건전한 네 가지 선정의 길이라 하였다. 초불연에서는 범천에 이르는 길이라 하였는데, 유익한 선을 닦아서 범천의 세상에서 사는 길이라 설명하였다. 구체적으로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초기불전에서는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사범주)을 범천에 이르는 길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삼명경(D13)과 맛지마니까야 수바경(M99)을 들수 있다. 맛지마니까야 수바경에 따르면 하느님의 길에 대하여 바라문 청년이여, 힘센 나팔수가 사방에 어려움 없이 소리를 알리듯, 자애로운 마음의 해탈이 이와 같이 닦여지면, 한계 지어진 활동은 거기에 남지 않고 거기에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바라문 청년이여, 이것이 하느님과 함께 사는 길입니다.(M99)”라고 설명되어 있다.

 

바라문 여인은 아들이 탁발 오는지 모른다. 출가하여 아라한이 된 아들은 차례로 탁발하여 자신의 어머니 집 앞에서 조용히 멈추어 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사실을 모를 가능성이 높다. 왜 그런가? 무언가 읊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되 단어가 ‘jappasi’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진언(만트라)’같은 것을 외고 있는 것이라 하였다.

 

바라문 여인은 잘 못 알고 있는 것이 많다. 대표적으로 하느님(브라흐마, 범천)에게 헌공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하느님 사함빠띠는 헌공이 잘 못 되었다고 알려 준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헌공은 이렇지 않네라 하였다. 왜 이렇게 말하였을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범천의 세계에 사는 하늘사람들은 기쁨의 삼매로 살아가지 인간처럼 각종 양념을 넣어 끓인 유미죽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Srp.I.207)”라 하였다. 바라문 여인은 마치 인간에게 공양하는 것처럼 죽을 제단에 올려 놓은 것이다.

 

범천에 사는 하늘사람들은 유미죽을 먹을 수 없다. 이는 법구경에서 ,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결코 없어도 빛이 흐르는 하느님 세계의 하느님들처럼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리라.(Dhp200)”라는 표현을 보면 알 수 있다. 범천의 세계에서는 인간들과 같이 거친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음식으로 먹고 사는 것이다.

 

또 범천의 세계는 빛나는 존재로서 공중에 날아다니며 오래 산다. 그래서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언제 어느 땐가 오랜 세월이 지나가면, 세계는 괴멸되는 때가 있다. 세계가 괴멸될 때에 대부분의 뭇삶들은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세계에 태어난다. 그들은 거기서 마음으로 만들어진 존재로서 기쁨을 먹고 살고 스스로 빛나고 공중으로 날아다니고 영광스럽게 살면서 오랜 세월을 지낸다.(D1)”라고 묘사 되어 있다.

 

범천에 사는 사함빠띠 브라흐마가 공중에 서서 바라문 여인에게 충고하는 장면을 보면 경전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방대한 경전은 문구하나라도 서로 연결 되어 있다.

 

아라한이 된 아들이 문앞에

 

사함빠띠는 바라문 여인의 유미죽헌공이 질못 되었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바라문 여인이 믿는 범천은 기쁨을 먹고 살기 때문에 유미죽을 먹을 수 없다. 그 대신 성자를 위해 공양하라고 한다. 아라한이 된 아들이 문앞에 와 있으니 그에게 유미죽을 공양하면 커다란 공덕을 지을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서 알려 준다.

 

 

구 분

Brahmadevasutta(브라흐마데바의 경, S6.3) 2

 

빠알리어

Eso hi te brāhmai brahmadevo,

Nirūpadhiko atidevapatto;

Akiñcano bhikkhu anaññaposī,

Yo te so piṇḍāya ghara paviṭṭho.

Nirūpadhiko

전재성님역

바라문 여인이여, 여기 그대의 브라흐마데바가 있으니

집착의 대상이 없이

하늘사람을 뛰어넘는 수행승은

아무 것도 갖지 않고 처자를 부양하지 않네.

지금 그가 탁발하러 집으로 들어와 있네.

집착의 대상이 없이

 

각묵스님역

바라문녀여, 참으로 그대의 브라흐마데와는

존재의 근거가 다하였고 신들을 능가했으니

무소유를 행하고 남을 부양하지 않는 비구인

그분이 탁발하러 그대의 집에 들어왔다오.

존재의 근거가 다하였고

빅쿠보디역

"This Brahmadeva, madam,

Without acquisitions, has surpassed the devas.

Owning nothing, nourishing no other,

The bhikkhu has entered your house for alms.

Without acquisitions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다라는 말이 ‘nirūpadhiko’이다. 주석에 따르면 번뇌의 형성[]과 욕망[]의 모든 집착의 대상을 떠난 것이라 설명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존재의 근거가 다하였고라고 번역하였다. 업형성력과 감각적 욕망에 대한 존재의 근거가 다하였다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오온이 남아있기 때문에 오온으로서 존재의 근거가 다하였고라고 부연설명하고 있다.

 

초불연에서 존재의 근거가 다하였고라 한 것은 난해한 표현이다. 논장이나 주석에서 표현되어야 할 표현이 시어에 적용된 케이스라 보여진다.  PCED194에 따르면 ‘nirūpadhiko’nirupadhika의 형태로서 無依的, 無依著的, 無依の, 依著なき라 설명되어 있다. 우리말로 집착 없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듯 하다.

 

같은 주석을 인용하였지만

 

 

구 분

Brahmadevasutta(브라흐마데바의 경, S6.3) 3

 

빠알리어

Āhuneyyo vedagu bhāvitatto,

Narāna devānañca dakkhieyyo;

Bāhitvā pāpāni anūpalitto,

Ghāsesana iriyati sītibhūto.

vedagu

전재성님역

공양받을만하고 자제하는 지혜로운 님은

인간과 신들의 헌공을 받을만하리.

모든 악을 제거하고 오염이 없으니

청정하게 탁발하러 다닌다네.

지혜로운 님

각묵스님역

공양 올려 마땅한 지혜의 달인 자신을 닦은 그는

인간과 신들의 보시 받아 마땅하도다.

사악함 모두 없앴고 물들지 않으며

침착한 그분이 탁발음식을 찾아 왔도다.

지혜의 달인

빅쿠보디역

"Gift-worthy, knowledge-master, inwardly developed,

He deserves offerings from humans and devas.

Having expelled all evil, unsullied,

Cooled at heart, he comes seeking alms.

knowledge-master

 

 

지혜로운 님vedagu의 번역이다. Vedagu베다에 능통한이라는 뜻이지만주석에서는 여덟 가지 고귀한길[팔정도]에 정통한뜻이라 한다. 초불연에서는 지혜의 달인이라 하였는데 네 가지 도라 불리는 지혜들에 의해서 괴로움의 끝에 도달한 자라 하였다. 같은 주석을 인용하였지만 서로 다른 해석이다. 빅쿠보디는 knowledge-master’라 하여 지식의 장인뜻으로 번역하였다.

 

지팡이를 들고 다녀도

 

 

구 분

Brahmadevasutta(브라흐마데바의 경, S6.3) 4

 

빠알리어

Na tassa pacchā na puratthamatthi,

Santo vidhūmo anigho nirāso;

Nikkhittadaṇḍo tasathāvaresu,

So tyāhuti bhuñjatu aggapiṇḍa.

Vidhūmo

(smokeless; passionless)

전재성님역

그에게는 뒤도 없고 앞도 없네.

고요하여 성냄을 떠나 번뇌가 없고 탐욕이 없네.

약자나 강자에게나 폭력을 여의니

그는 그대의 첫 번째 공양을 받을만하리.

성냄을 떠나

각묵스님역

그분에게는 뒤도 없고 앞도 없어

고요하고 연기 없고 매듭 끊고 근심 없도다.

약하거나 강한 자들에 대해 몽둥이를 내려놓은 분

바로 그분이 최상의 탁발음식인 그대의 헌공을 드시기를!

연기 없고

빅쿠보디역

"For him there is nothing behind or in front

Peaceful, smokeless, untroubled, wishless;

He has laid down the rod towards frail and firm:

Let him eat your oblation, the choicest alms.

smokeless

 

 

탁발자는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이다. 그런데 뒤도 없고 앞도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뒤는 과거를 말하고 앞은 미래를 말한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존재의 다발[오온]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뜻이다. 그는 언제나 평정한 상태인 것을 의미한다.(Srp.I.207)”라고 설명되어 있다.

 

탁발자는 폭력을 여읜 자라 하였다. 그래서 약자나 강자에게나 폭력을 여의니라 하였다. 여기서 약자나 강자는 tasathāvaresu의 번역어이다. 주석서에 따르면 약자는 범부를 뜻하고, 강자는 번뇌다한 자를 뜻한다고 되어 있다. 맛지마니까야 주석서에서는 약자에 대하여 갈애를 가진 자들이고, 강자에 대하여 갈애가 없는 자들이라 하였다. 또한 강자에 대하여 움직이는 동물이라 할 수 있고, 약자에 대하여 식물이라 볼 수도 있다.

 

폭력을 여읜다는 말이 있다. 이는 Nikkhittadaṇḍo tasathāvaresu의 번역어이다. 주석에 따르면 그가 비록 지팡이를 들고 다녀도, 누군가를 때릴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내려 놓는다.”라고 되어 있다. 초불연에서는 몽둥이를 내려놓은 분이라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laid down the rod(막대기를 내려놓고)”라 번역하였다.

 

첫 번째 공양인가 최상의 공양인가

 

 

구 분

Brahmadevasutta(브라흐마데바의 경, S6.3) 5

 

빠알리어

Visenibhūto upasantacitto,

Nāgova danto carati anejo;

Bhikkhu susīlo suvimuttacitto,

So tyāhuti bhuñjatu aggapiṇḍa.

bhuñjatu aggapiṇḍa

 

전재성님역

그 수행승은 대중을 떠나서 마음이 고요하고

잘 훈련된 코끼리처럼 동요 없이 걸으며

계율을 잘 갖추고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네.

그는 그대의 첫 번째 공양 받을만하리.

첫 번째 공양

각묵스님역

무리에서 벗어나 마음이 평화로워서

잘 훈련된 꼬끼리처럼 꼿꼿하게 걷도다.

계를 잘 지키고 마음이 잘 해탈한 비구

바로 그분이 최상의 탁발음식인 그대의 헌공을 드시기를!

최상의 탁발음식

빅쿠보디역

"Aloof from the crowd, with peaceful mind,

Like a naga he fares, tamed, unstirred.

A bhikkhu of pure virtue, well liberated in mind:

Let him eat your oblation, the choicest alms

the choicest alms

 

 

빠알리 게송에서 ‘bhuñjatu aggapiṇḍa가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첫 번째 공양이라 하였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최상의 탁발음식이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the choicest alms’이라 하였다. aggapiṇḍa에서 agga의 뜻은 ‘the highest; the top-most’이다.

 

크나큰 과보를 받으려면

 

 

구 분

Brahmadevasutta(브라흐마데바의 경, S6.3) 6

 

빠알리어

Tasmi pasannā avikampamānā,

Patiṭṭhapehi dakkhia dakkhieyye;

Karohi puñña sukhamāyatika,

Disvā muni brāhmai oghatiṇṇa”nti.

ogha

전재성님역

바라문 여인이여, 이제 거센 흐름을 건넌 성자를 보고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으로

공양을 받을 만한 그에게 공양을 올려

그대에게 미래의 안락이 될 공덕을 쌓으리.”

거센 흐름

각묵스님역

그분에게 청정한 믿음 가져 흔들리지 않고

공양받아 마땅한 분께 공양물을 드리라.

바라문녀여, 폭류를 건넌 그 성자를 뵙고

공덕 짓고 행복한 미래를 맞으라.”

폭류

빅쿠보디역

"With confidence in him, free from wavering,

Present your offering to one who deserves it.

Having seen a sage who has crossed the flood,

o madam, make merit leading to future bliss. "

the flood

 

 

바라문 여인은 이제까지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 왔다. 그것은 잘 알지 못하여 발생한 것이다. 유미죽을 범천에게 올리며 주문을 외는 것 등을 말한다. 이런 잘못에 대하여 사함빠띠 브라흐마는 알려준다. 그리고 차례차례 탁발함에 따라 아라한이 된 아들에게 공양을 올리면 최상의 보시가 될 것이라 알려준다. 숫따니빠따 라따나경에서도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사람들이 있어, 참사람으로 칭찬 받으니,  바른길로 가신님의 제자로서 공양 받을 만 하며,  그들에게 보시하면 크나큰 과보를 받습니다.(Sn 2.1)”라 하였다.

 

 

2015-04-2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