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해탈자가 부처님인가 수행녀인가? 시수빠짤라의 경(S5.8)

담마다사 이병욱 2015. 3. 17. 18:31

 

해탈자가 부처님인가 수행녀인가? 시수빠짤라의 경(S5.8)

 

 

 

빠산다와 사사나

 

빅쿠니 상윳따에서 세 번째 여덟 번째 경은 시수빠짤라빅쿠니에 대한 이야기이다. 빅쿠니가 탁발을 마치고 안다 숲에 머물고 있을 때 악마 빠삐만이 수행녀여, 그대는 어떠한 이교도의 가르침을 기뻐하는가? (Kassa nu tva bhikkhunī pāsaṇḍa rocesīti?)”라며 묻는다. 여기서 이교도의 가르침pāsaṇḍa의 번역어이다.

 

pāsaṇḍa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외도의] 교의이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creed’라 하였다. 여기서 creed신조, 주의, 신념의 뜻이다.

 

악마 빠삐만은 이교도의 가르침에 대하여 빠산다라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사사나와 다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주를 보면 빠산다에 대하여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이교도의 가르침을 뜻하는 빠산다는 덫을 놓는 것이라 하였고, 반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사사나는 덫을 푸는 것이라 하였다.

 

스스로 부처님이라 하는 자

 

이교도의 가르침에 빠져 들면 덫에 걸려드는 것이다. 이는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알고 지내는 법우님의 친구도 그런 케이스라 보여진다.

 

법우님에 따르면 친구와 함께 춘천에 있는 어느 절에 갔었다고 한다. 꽤 큰 절로 전국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몰릴 정도로 ‘M스님의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M스님은 자신을 스스로 부처님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친구는 스님의 법문을 듣고 감동하여 그 스님을 따라 출가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던 재산도 모두 바쳤다고 하였다.

 

자신을 부처님이라 한다든지 자신을 재림 예수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경우 사이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때 잘 나갈지 모르지만 대부분 당대에서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인 부처나 예수라 하였을 때 쉽게 넘어 가는 것 같다. 더구나 그런 사람들의 제자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법을 따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교도의 가르침에 빠진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빠삐만이 비아냥 거리며 말하기를

 

악마 빠삐만이 수행녀 시수빠짤라에게 이교도의 가르침을 기뻐하는가?’라며 묻는다. 이에 수행녀는 나는 이교도의 가르침을 기뻐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빠삐만은 마치 비아냥 거리듯이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한다.

 

 

  

Sīsūpacālāsutta(시수빠짤라의 경, S5.8)

비고

빠알리어

Kinnu uddissa muṇḍāsi

samaī viya dissasi,
Na ca rocesi pāsa
ṇḍa

kimiva carasi momuhāti.

samaī

전재성님역

[빠삐만]

왜 머리를 삭발했는가?

그대는 수행녀처럼 보이는데,

이교도의 가르침을 기뻐하지 않으면서

어리석게 무엇을 하고 있는가?”

수행녀

각묵스님역

[마라]

누구를 스승으로 머리를 깍았는가?

그대는 여자 출가 사문처럼 보이도다.

그런데도 교의를 좋아 하지 않는다니

무엇 때문에 그대는 멍청하게 다니는가?”

여자 출가 사문

빅쿠보디역

“Under whom have you shaved your head?

You do appear to be an ascetic,

Yet you don't approve of any creed,

So why wander as if bewildered?”

ascetic

 

 

두 한글번역을 보면 차이가 난다. 첫 번째 구절을 보면 전재성님은 왜 머리를 삭발했는가?”라 하였는데, 각묵스님은 누구를 스승으로 머리를 깍았는가?”라 하여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빅쿠보디는 Under whom have you shaved your head?”라 하여 각묵스님의 번역과 형태가 같다.

 

머리를 깍는다는 말은 출가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이와 관련된 빠알리어가 Kinnu uddissa muṇḍāsi”이다. 여기서 Kinnu ‘what? 또는 who?’ 의 뜻이고, uddissa ‘with reference to’의 뜻이고, muṇḍāsimuṇḍa의 형태로서 shaven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빅쿠보디가 Under whom have you shaved your head?”라고 번역한 것이 타당해 보인다.

 

분위기와 맞지 않는 표현

 

각묵스님의 번역어 중에 그대는 여자 출가 사문처럼 보이도다라 하였다. 여기서 보이도다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초불연 번역서에서는 부처님의 말씀 하실 때 문체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악마 빠삐만이 보이도다라 한 것은 경에서의 분위기와 맞지 않아 보인다.

 

초불연에서 여자 출가 사문이라 한 것은 samaī에 대한 번역어이다. 사전에 따르면 ‘a nun, 女沙門(女沙彌), 沙門尼 (沙彌尼)’라 되어 있다. 사마나에 대하여 수행자라 번역하지만 때로 빅쿠를 지칭하는 것처럼 사마니에 대하여 빅쿠니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수행녀라 하였다.

 

빠알리 게송에서 네 번째 구문을 보면 “kimiva carasi momuhāti”라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어리석게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 하였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무엇 때문에 그대는 멍청하게 다니는가?”라 하여 격하게 표현하였다.

 

이는 어리석다멍청하다의 차이이다. 이와 관련된 빠알리어가 momuha이다. 이는 ‘dull; silly; bewildered’의 뜻이다. 빅쿠보디는 So why wander as if bewildered?”라 하여다. 이는 왜 갈피를 못잡은 듯이 방황하는가?”라는 뜻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탁발을 다녀 온 후 안다숲에서 선정에 들려 하는 것에 대한 비아냥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교도의 가르침으로 간주하고서 이교도의 가르침에 따르는 수행녀에 대하여 어리석은 행위로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멍청하다라 하였는데 경에서 사용하기에는 비속적인 말이라 볼 수 있다.

 

시수빠짤라 빅쿠니가 답송하기를

 

악마 빠삐만은 수행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바른 가르침이 아니라 한다. 그런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 어리석게 보았다. 이에 수행녀는 다음과 같이 세 개의 게송으로 답한다.

 

 

  

Sīsūpacālāsutta(시수빠짤라의 경, S5.8)

비고

빠알리어

Ito bahiddhā pāsaṇḍā

diṭṭhīsu pasīdanti te,
Na tesa
dhamma rocemi

na te dhammassa kovidā.

Atthi sakyakule jāto

buddho appaipuggalo,
Sabbābhibhū māranudo

sabbatthamaparājito,
Sabbattha mutto asito

sabba passati cakkhumā.


Sabbakammakkhayappatto

vimutto upadisakhaye,
So mayha
bhagavā satthā

tassa rocemi sāsananti.

vimutto

전재성님역

[씨쑤빠짤라]

외도인 이교도들은

잘못된 견해를 믿으니

나는 그들의 가르침을 기뻐하지 않네.

그들은 참다운 가르침을 잘 모르네.

 

여기 싸끼야 족의 집에 태어난 이,

깨달은 님, 견줄 데 없는 님,

모든 것 극복하고 악마를 제거하고

모든 것에 정복되지 않으며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집착이 없는 님,

눈 있는 자로서 모든 것을 본다네.

 

모든 업력의 멸진에 이르러

집착이 파괴되어 해탈했으니

세상의 존귀한 님이 나의 스승이네.

나는 그의 가르침을 기뻐한다네.”

해탈했으니

각묵스님역

[시수빠짤라]

외도들의 교의를 따르는 자들은

그들의 견해를 믿지만

그들의 가르침을 나는 좋아하지 않나니

그들은 법에 능숙치 못하기 때문이랴.

 

사꺄 가문에 태어난 부처님 계시어

그 어떤 인간과도 비견할 수 없으니

그분 모든 것을 지배하고, 마라를 정복한 분

모든 곳에서 패하지 않는 분

모든 곳에서 해탈한 분, 집착 않는 분

눈을 갖춰 모든 것을 보시는 분이로다.

 

모든 업의 멸진을 증득하신 그분

재생의 근거를 부수어 해탈하신 그분

그분 세존께서는 바로 나의 스승이시니

그분의 교법을 나는 좋아 하느니라.”

해탈하신 그분

 

빅쿠보디역

“Outside here the followers of creeds

Place their confidence in views.

I don't approve of their teachings;

They are not skilled in the Dhamma.

 

 "But there's one born in the Sakyan clan,

The Enlightened one, without an equal,

Conqueror of all, Mara's subduer,

Who everywhere is undefeated,

Everywhere freed and unattached,

The one with Vision who sees all.

 

"Attained to the end of all kamma,

Liberated in the extinction of acquisitions,

That Blessed one is my Teacher:

His is the teaching I approve.”

Liberated

 

 

 

 

maha vihara

 

 

 

능숙치 못하다?

 

첫 번째 게송에서 전재성님은 그들은 참다운 가르침을 잘 모르네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그들은 법에 능숙치 못하기 때문이랴라 하였다. 이는 “na te dhammassa kovidā에 대한 번역어이다.

 

여기서 dhammassa ‘dhamma + assa’형태로서 assa‘may be, to this’의 뜻이다. Kovidā‘clever; well-versed; expert’의 뜻이다. 따라서 “na te dhammassa kovidā의 뜻은 이와 같은 훌륭한 가르침을 모른다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법에능숙치 못하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아비담마 교학적 번역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일곱 가지 공덕

 

두 번째 게송에서 “Atthi sakyakule jāto buddho appaipuggalo”이 있다. 전재성님은 여기 싸끼야 족의 집에 태어난 이, 깨달은 님, 견줄 데 없는 님이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사꺄 가문에 태어난 부처님 계시어 그 어떤 인간과도 비견할 수 없으니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But there's one born in the Sakyan clan, The Enlightened one, without an equal”라 하였다.

 

이는 부처님에 대한 설명이다. 마치 여래십호에서 처럼 부처님의 별칭을 나열하는 듯 하다. 이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Atthi sakyakule jāto          싸끼야 족의 집에 태어난 님

2) buddho                        깨달은 님

3) appaipuggalo,                 견줄 데 없는 님
4) Sabb
ābhibhū māranudo          모든 것 극복하고 악마를 제거한 님

5) sabbatthamaparājito,          모든 것에 정복되지 않은 님
6) Sabbattha mutto asito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집착이 없는 님

7) sabba passati cakkhumā.      눈 있는 자로서 모든 것을 보는 님

 

 

두 번째 게송을 보면 시수빠짤라 빅쿠니가 부처님의 공덕을 일곱 가지로 찬탄하고 있다. 이처럼 부처님 공덕을 찬탄하는 게송을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첫 번째 싸끼야 족의 집에 태어난 님(Atthi sakyakule jāto)’에 대한 것은 부처님이 싸끼야족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숫따니빠따 라따나경(Sn2.1)’에서는 싸끼야 족의 성자가 삼매에 들어 성취한 지멸과 소멸과 불사와 승묘, 이 사실과 견줄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stn225)”라 하였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도 견줄 수 없는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이 세상에 견줄 수 없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세 번째항을 보면 부처님에 대하여 견줄 데 없는 님 (appaipuggalo)’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다. 초불연에서는 비견할 수 없다라 하였고, 빅쿠보디는 동등한 자가 없다는 뜻으로 ‘without an equal’라 하였다.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 어떤 다른 가르침도 부처님 가르침과 비교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라따나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a kiñci vitta idha vā hura vā     양낀찌 윗땅 이다 와- 후랑 와-
Saggesu v
ā ya ratana paīta,       삭게수 와- 양 라따낭 빠니-

Na no sama atthi tathāgatena          나 노 사망 앗티 따타-가떼나
Idampi buddhe ratana
paīta         이담삐 붓데 라따낭 빠니-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이 세상과 내세의 어떤 재물이라도,

천상의 뛰어난 보배라 할지라도,

여래에 견줄 만한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stn224)

 

 

라따나경에 따르면 이 세상과 저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과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를 보물로 비유하고 있다. 인간세상 뿐만 아니라 천상의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보배가 있다고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만 못하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일 말할까? 부처님이야말로 가장 큰 보배임을 말한다.

 

해탈자를 수행녀로 보았을 때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 하여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였다면 부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 번째 게송을 보면 자신을 해탈로 이끈 부처님의 은혜를 찬탄하고 있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전재성님의 번역과 다르다. 해탈을 성취한 자에 대하여 부처님이라고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전재성님은 해탈을 성취한 이가 수행녀 자신인듯이 번역해 놓았다. 어느 번역이 맞는 것일까?

 

세 번째 게송에서 “Sabbakammakkhayappatto  vimutto upadisakhaye”가 있다. 전재성님은 모든 업력의 멸진에 이르러 집착이 파괴되어 해탈했으니라 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해탈한 것인가? 문맥상 수행녀라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이는 두 번째 게송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것으로서 부처님에 대한 설명은 사실상 끝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세 번째 게송은 수행녀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렇게 본다면 가르침을 실천하여 해탈한 자는 수행녀 자신이다. 그래서 수행녀는 세상의 존귀한 님이 나의 스승이네. 나는 그의 가르침을 기뻐한다네.(So mayha bhagavā satthā  tassa rocemi sāsananti)라 한 것이다.

 

그러나 각묵스님역을 보면 세 번째 게송에서도 부처님 공덕에 대한 찬탄이 이어지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멸진에 이르러 해탈한 것도 부처님이라 하였다. 그래서 모든 업의 멸진을 증득하신 그분 재생의 근거를 부수어 해탈하신 그분이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Attained to the end of all kamma, Liberated in the extinction of acquisitions”라 하였다. 이는 모은 업의 종식을 얻었고, 집착의 소멸로 자유를 얻었다라는 뜻이 된다. 누가 얻었는가? 이에 대하여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Spk explains vimutto upadisakhaye in pada d thus: "He is liberated into Nibbana, known as the extinction of acquisitions, as object." The expression is also at MN I 454,3-4 and II 260,22-23.

 

Spk-pt defines “the end of all kamma" (sabbakammakkhaya) as arahantship and “the extinction of acquisitions" as Nibbana. See too 4:25 and n. 324.

 

(CDB 356번 각주)

 

 

빅쿠보디에 따르면 집착에서 해방된 것에 대하여 “He is liberated into Nibbana”라 하였다. 여기서 ‘He’라 한 것으로 보아 부처님을 지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각묵스님의 번역과도 일치한다. 그러면서 맛지마니까야 ‘MN I 454,3-4’를 보라고 한다.

 

맛지마니까야를 찾아 보았다. ‘메추라기에 대한 비유의 경우다인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집착은 괴로움의 뿌리이다.’라고 알고 나서 집착을 부수고 집착 없이 해탈한다.(M66)”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집착 없이 해탈한다라는 말이 게송에 실려 있는 ‘vimutto upadisakhaye’라는 문구와 일치한다.

 

복주석(Spk-pt)에 따르면 업의 종식이라는 뜻의 sabbakammakkhaya는 아라한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도 아라한이고 가르침을 실천하여 깨달은 자도 아라한이다. 이렇게 본다면 시수빠짤라빅쿠니 역시 아라한이다. 따라서 세 번째 게송은 가르침을 실천하여 업력이 멸진되고 해탈을 이룬 자신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가르침을 주신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것이 세 번째 게송이라 볼 수 있다.

 

해탈자를 부처님으로 보았을 때

 

그러나 또 한 편으로 두 개의 게송이 모두 부처님에 대한 찬탄으로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모든 업력이 파괴되어 해탈한 자가 부처님을 지칭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공덕에 대한 찬탄은 더 추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1) Atthi sakyakule jāto          싸끼야 족의 집에 태어난 님

2) buddho                        깨달은 님

3) appaipuggalo,                 견줄 데 없는 님
4) Sabb
ābhibhū māranudo          모든 것 극복하고 악마를 제거한 님

5) sabbatthamaparājito,          모든 것에 정복되지 않은 님
6) Sabbattha mutto asito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집착이 없는 님

7) sabba passati cakkhumā.      눈 있는 자로서 모든 것을 보는 님

8) Sabbakammakkhayappatto        모든 업력의 멸진에 이른 분

9) vimutto upadisakhaye         집착이 파괴되어 해탈한 분

 

 

두 번째와 세 번째 게송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나열해 보니 모두 아홉 가지가 된다. 이런 공덕을 가진 부처님을 스승으로 가진 것에 대하여 수행녀는 다행으로 여기고 자랑스러워 한다.

 

아홉 가지 공덕 중에 아홉번 째 항 ‘vimutto upadisakhaye’ 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MN I 454,3-4 and II 260,22-23’를 참고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이띠웃따카(여시어경) Itv123에서도 나온다고 하였다. 찾아 보니 게송 부위에 일체의 업의 소멸에 이르러 의착이 완전히 파괴되어 해탈했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대상을 비교해 보면

 

시수빠짤라수행녀는 악마를 향하여 세 개의 게송을 읊었다. 그런데 세 개의 게송을 자세히 보면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게송은 이교도에 대한 것이고, 두 번 째는 부처님에 대한 것이고, 세 번째는 수행녀자신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구분에 이의가 있을 수 있다.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게송에 대하여 모두 부처님의 찬탄으로 보았을 때 그렇다. 그러나 문맥상 세 번째는 수행녀 자신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표로 구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게송

게 송

대상1

대상2

게송 1

외도인 이교도들은

잘못된 견해를 믿으니

나는 그들의 가르침을 기뻐하지 않네.

그들은 참다운 가르침을 잘 모르네.

이교도

이교도

게송 2

여기 싸끼야 족의 집에 태어난 이,

깨달은 님, 견줄 데 없는 님,

모든 것 극복하고 악마를 제거하고

모든 것에 정복되지 않으며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집착이 없는 님,

눈 있는 자로서 모든 것을 본다네.

 

부처님

부처님

게송 3

모든 업력의 멸진에 이르러

집착이 파괴되어 해탈했으니

세상의 존귀한 님이 나의 스승이네.

나는 그의 가르침을 기뻐한다네.

수행녀

부처님

 

 

대상 1과 대상 2의 차이점은 세 번째 게송에서 발생한다. 모든 업력의 멸진에 이르고 집착이 파괴 되어 해탈한 자가 누구를 지칭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그분이라 명백하게 부처님이라 하였다. 하지만 빅쿠보디와 전재성님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명확하게 표현 하지 않았다. 다만 빅쿠보디는 각주에서 부처님을 지칭하는 것임을 암시하였다. 전재성님은 어떤 암시도 없이 있는 그대로 번역하였다.

 

세 번째 게송에 대하여 부처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녀 자신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세 개의 게송이 각각 다른 대상을 갖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아라한 되었다는 것은 해탈을 의미한다. 그래서 집착이 파괴되어 해탈했으니라는 구절에 대하여 수행녀 자신으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아름다운 게송

 

수행녀 시수빠짤라는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 존귀한 스승님을 찬탄하였다. 이는 일곱 가지로 요약된다. 그런 부처님은 어떤 부처님일까? 여래십호에서도 열 가지 공덕으로 표현 되어 있다. 그러나 더욱 더 많은 공덕을 가진 부처님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게송이 있다. 이띠웃따까(여시어경)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일체의 세계를 곧바로 알고

일체의 세계에서 여실히 알아

일체의 세계에서 벗어나

일체의 세계에 의착하지 않는다.

 

현명한 자로서 일체에서 승리하고

일체의 계박을 풀고

그는 최상의 적멸,

두려움 없는 열반을 얻는다.

 

번뇌가 부서지고 고뇌가 없고

의혹을 끊은 그 깨달은 님은

일체의 업의 소멸에 이르러

의착이 완전히 파괴되어 해탈했다.

 

그 분이 세존이신 깨달은 님,

바로 위없는 사자.

천상과 더불어 세계를 위해

하느님의 수레바퀴를 굴린다.

 

이처럼 신들과 인간이

깨달은 님에게 피난처를 찾고

위대한 두려움 없는 자에게

무리지어 귀의한다.

 

길들여진 자로서 길들여진 자 가운데 최상자

고요한 자로서 고요한 자 가운데 선인.

해탈한 자로서 해탈한 자 가운데 위없는 자

건넌 자로서 건넌 자 가운데 최승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대한

두려움 없는 님에게 귀의하니,

천상을 포함한 세계에서

그와 비교될 만한 자는 없다.”

 

(세계에 대한 이해의 경, 이띠붓따까 112, It121, 전재성님역)

 

 

 

2015-03-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