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태어남이 괴로움이라면“나는 태어남을 기뻐하지 않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3. 9. 17:07

 

 

태어남이 괴로움이라면“나는 태어남을 기뻐하지 않네 

 

 

왜 항상 가사를 수지 해야 하는가?

 

상윳따니까야 수행녀의 모음(S5)에서 여섯 번째 경은 짤라의 경이다. 경에 따르면 수행녀 짤라가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을 하기 위해 싸밧티 시로 들어갔다.(S5.6)”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발우와 가사를 들고라 하였다. 탁발하러 가기 때문에 발우를 들고 가는 것을 이해가 가지만 가사, 즉 큰옷을 뜻하는 대가사를 들고 가야만 하는 것일까?

 

율장대품에 따르면 가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수행승에게 세 가지 옷이 주어지는데 그 중에 겉옷개념으로 큰 옷이라는 뜻의 상가띠에 대한 내용이 있다. 탁발을 나갈 때 큰옷이 거추장스러움에도 들고 가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왜 이런 계율이 생겨났을까? 이에 대하여 율장대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Tena kho pana samayena aññataro bhikkhu andhavane cīvara nikkhipitvā santaruttarena gāma piṇḍāya pāvisi. Cora ta cīvara avaharisu. So bhikkhu duccoo hoti lūkhacīvaro. Bhikkhū evamāhasu: "kissa tva āvuso, duccoo lūkhacīvaro" ti. Idhāha1 āvuso, andhavane cīvara nikkhipitvā santaruttarena gāma piṇḍāya pāvisi. Corā ta cīvara avaharisu. Tenāha duccoo lūkhacīvaro"ti. Bhagavato etamattha ārocesu. "Na bhikkhave, santaruttarena gāmo pavisitabbo. Yo paviseyya, āpatti dukkaassā" ti.

 

 

한때 수행승이 안다바나 숲에서 옷을 벗어놓고 하의와 상의만으로 마을로 탁발하러 들어갔다. 도둑이 그 옷을 가져갔다. 그 수행승은 헤진 옷-거친 옷을 걸쳤다. 수행승들이 이와 같이 말했다.

 

[수행승들]

벗이여, 왜 그대는 헤진 옷-거친 옷을 입었는가?”

 

[수행승]

벗이여, 여기 안다바나 숲에 옷을 벗어 놓고 하의와 상의만으로 마을로 탁발하러 들어갔다. 도둑이 그 옷을 가져갔다. 그래서 나는 헤진 옷-거친 옷을 걸쳤다.”

 

세존께 그 사실을 알렸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하의와 상의만으로 마을로 탁발하러 들어가서는 안 된다. 들어가면 악작죄가 된다.”

 

(옷을 벗어놓기 위한 조건, 율장대품 Vin298, 685p, 전재성님역)

 

 

 

 

 

율장대품에 따르면 옷을 벗어 놓고 탁발하러 가면 안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되어 있다. 옷이 거추장럽다 하여 숲에 놓고 탁발하러 가면 옷을 도둑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의와 상의만으로 마을로 탁발하러 들어가서는 안 된다라는 계율이 생겨난 것이다.

 

경에서 옷을 벗어 놓고라 하였다. 여기서 옷은 세 벌의 옷 가운데 대의(大衣), 죽 상가띠를 말한다. 각주에 따르면 옷을 벗어 놓는 것에 대해서는 상실죄법 29(Nissag.29)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래서 대의, 즉 상가띠는 항상 어깨에 매고 다니거나 들고 다님을 알 수 있다.

 

왜 태어남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수행녀 짤라가 탁발을 마치고 선정에 들기 위하여 숲으로 들어 갔다. 이때 악마 빠삐만이 선정에 드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소름끼치는 공포심을 조장하며 수행녀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서는 수행녀여,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라며 묻는다. 이에 수행녀는 벗이여, 나는 태어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악마 빠삐만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한다.

 

 

  

짤라의 경(Cālāsutta, S5.6)

  

빠알리어

Kinnu jāti na rocesi

jāto kāmāni bhūñjati,
Ko nu ta
idamādapayi

jāti māroca bhikkhunīti.

rocesi

전재성님역

[빠삐만]

왜 태어남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태어나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네.

수행녀여, 태어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누가 그대에게 가르쳤는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각묵스님역

왜 그대 태어남을 좋아하지 않는가?

태어나면 감각적 욕망을 즐기게 된다.

비구니여, 태어남을 좋아하지 말라고

대체 누가 이것을 받아들이라 했는가?”

좋아하지 않는가?

 

빅쿠보디역

"Why don't you approve of birth?

Once born, one enjoys sensual pleasures.

Who now has persuaded you of this:

'Bhikkhuni, don't approve of birth'?"

don't you approve

 

 

 

번역을 보면 서로 다른 부분이 있다. “왜 태어남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왜 그대 태어남을 좋아하지 않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한 빠알리구문은 “Kinnu jāti na rocesi”에 대한 구절이다.

 

여기서 rocesi가 키워드이다. Rocesiroceti의 형태로서 ‘gave one's consent; liked’의 뜻이다.  승낙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기는 왜 울음으로써 세상에 신고할까?

 

태어남이 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사람들은 기뻐하고 축하해 준다. 그러나 정작 아이는 울음으로서 이 세상에 온 신고를 마친다. 사람들은 태어난 아기를 축하해 주지만 정작 아기는 왜 울음으로써 세상에 신고할까? 태어남이 즐거운 것이라면 웃으며 태어나야 할 것이지만 울음으로 일생을 시작한다면 어떤 큰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유행가 중에 갑돌이와 갑순이 노래가 있다. 갑순이가 시집 간 날 첫날밤에 한 없이 울었드래요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시집간날 첫날을 울음으로 시작 하였다면 그 여인의 일생은 운명지워진 것이 아닐까?

 

영화 박하사탕이 있다. 이 영화는 시간이 거꾸로 돌아 간다. 이런 영화를 시간역행영화라 한다. 철교의 철길에서 마주 오는 기차를 향하여 , 옛날로 되돌라 갈래!”라고 절규하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 된다. 죽음의 장면에서부터 시계가 거꾸로 돌아 간다. 그래서 영화가 끝날 때는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가 철교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젊은 주인공은 왜 눈물을 흘렸을까? 그것도 아무 이유 없이 철교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을까? 아마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여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닐까? 실제로 영화는 주인공이 , 옛날로 되돌라 갈래!”라고 절규하며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것으로 끝이 난다.

 

아기가 울음으로 이 세상을 신고한다는 것은 아기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 같다. 아니 모든 인간의 운명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죽어야 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인간의 한계를 아기가 울음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아기가 탄생하는 것은 생노병사의 괴로운 인생을 살아 가는 것에 대한 일종의 암시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머니, 왜 저를 낳으셨나요?”

 

사람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인간이 괴로움의 바다라면, 태어남이 괴로움이라면 사람들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원망할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 왜 저를 낳으셨나요?”라고 원망하며 모든 책임을 부모에게 전가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업력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태어날 만한 업을 지었기 태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모를 탓할 수 없다. 탓한다면 자신의 업이다. 그리고 자신이 과거에 지은 업을 원망해야 한다.

 

게송에서 “Jāti khvāha āvuso na rocemīti.”에 구절에 대한 번역은 벗이여, 나는 태어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도반이여, 나는 태어남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한 것은 부적절하다. 이 구문과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I don't approve of birth, friend."라 하였다. 번역하면 친구여, 나는 태어남을 동의(승낙) 하지 않는다라가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태어나고 싶다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업력에 의해서 태어남을 말한다.

 

짤라 빅쿠니 답송하기를

 

악마 빠삐만은 태어난 이상 욕망을 마음껏 즐기라고 말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시 태어남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는 초전법륜경 집성제에서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yāya tahā pono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S56.11)”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오욕락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면 새로운 태어남을 유발하고 만다. 그래서 악마 빠삐만은 즐기며 살라고 말한다. 하지만 번뇌 다한 수행녀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내친다.

 

 

  

짤라의 경(Cālāsutta, S5.6)

  

빠알리어

Jātassa maraa hoti

jāto dukkhāni phussati,
Bandha
vadha pariklesa

tasmā jāti na rocaye.


Buddho dhammamadesesi

jātiyā samatikkama,
Sabbadukkhappahā
āya

yo ma sacce nivesayi.


ye ca rūpūpagā sattā

ye ca āruppahāyino,
Nirodha
appajānantā

āgantāro punabbhavanti.

 sacce nivesayi

전재성님역

[짤라]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감옥에 갇히고 살해당하는 환난의

괴로움들을 태어나서 경험하니,

나는 태어남을 기뻐하지 않네.

 

태어남에서 뛰어 넘는 가르침을

부처님께서 설하였으니

모든 괴로움에서 버리게 하시고

나를 진실에 들게 하셨네.

 

미세한 물질의 세계에 사는 뭇삶도

비물질의 세계에 사는 자들도

괴로움의 소멸을 알지 못하여

다시 태어남으로 복귀하는 것이네.”

진실에 들게 하셨네

각묵스님역

태어난 자에게는 죽음이 있어서

태어난자야말로 속박, 살해, 뇌로움 등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로다.

그러므로 태어남을 좋아하면 안되노라.

 

태어남을 완전히 건너는 법을

나의 스승 부처님은 가르치셨으니

괴로움을 모두 다 제거할 수 있도록

그분은 나를 진리에 안주하게 하셨도다.

 

색계에 도달한 자들과

무색계에 확고한 자들도

소멸을 꿰뚫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남[再生]으로 돌아 오도다.”

진리에 안주하게 하셨도다

빅쿠보디역

"For one who is born there is death;

Once born, one encounters sufferings

Bondage, murder, affliction-

Hence one shouldn't approve of birth.

 

"The Buddha has taught the Dhamma,

The transcendence of birth;

For the abandoning of all suffering

He has settled me in the truth.

 

" As to those beings who fare amidst form,

And those who abide in the formless--

Not having understood cessation,

They come again to renewed existence. "

settled me in the truth

 

  

나는 태어남을 기뻐하지 않네

 

첫 번째 게송을 보면 태어남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유는 누구나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어난 자에게는 죽음이 있다.(Jātassa maraa hoti)”라고 하였다. 이는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 있습니다 .(stn574)”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태어나면 누구나 죽을 운명에 처해 있고 누구도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기대수명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라 하였다. 이는 감옥에 갇히고 살해당하는 환난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태어난 자에 대하여 애처롭다고 하였다. 또 목숨이 짧아 고통으로 엉켜 있다고 하였다. 태어남 그 자체는 축복이 아니라 괴로움이라 볼 수 있다.

 

악마 빠삐만은 태어남을 기쁨으로 보았다. 그것은 태어난 이상 감각적 욕망을 마음껏 충족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태어남이 없다면 감각적 욕망을 즐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번뇌 다한 수행녀는 태어남이 축복이 아니라 괴롭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태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함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태어남을 기뻐하지 않네라 한 것이다.

 

나를 진실에 들게 하셨네

 

어떻게 해야 다시 태어남이 없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두번째 게송에서 태어남을 완전히 건너는 법을 나의 스승 부처님은 가르치셨으니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태어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태어남은 괴로움이라 하였다. 이는 고성제에서도 태어남도 괴로움이고(jātipi dukkhā)”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태어남이 괴로움이라면 태어나지 않는 것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것은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으로 실현된다. 그래서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에 대하여 모든 괴로움에서 버리게 하시고 나를 진실에 들게 하셨네.”라 한 것이다.

 

전재성님의 번역에서 나를 진실에 들게 하셨네. (yo ma sacce nivesayi)”라 하였다. 여기서 진실이라는 말은 ‘sacca’의 번역어이다. 초불연에서는 진리라 하였고, 빅쿠보디는 truth’라 하였다. 그렇다면 ‘sacca’의 번역어는 진실일까 진리일까?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sacce에 대하여 최승진실, 즉 열반을 뜻한다.(1234번 각주)”라 하였다. 이는 주석에 근거하지 않는 각주이다.

 

Sacca에 대하여 PCED194에서는 ‘Truth’로 되어 있다. Truth진실, 사실, 진상, 진리, 진심의 뜻이다. Sacca의 또 하나의 뜻은 ‘The Four Noble Truths’ (ariya-sacca)를 지칭한다. 사성제를 삿짜라고도 하는 것이다.

 

Sacca에 대하여 진실이나 진리 어느 쪽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문맥으로 파악하였을 때 “yo ma sacce nivesayi”에서의 Sacca는 사성제의 진리를 뜻한다기 보다 열반을 뜻하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nivesayinivesa의 형태로서 ‘settlement; abode; house’의 뜻이다. ‘머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yo ma sacce nivesayi”라는 말은 나를 진실(열반)에 머물게 한다라는 뜻이 된다. 이는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진리(사성제)에 머물게 한다라는 표현 보다 나를 진실(열반)에 들게 하셨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인다.

 

다시 태어남으로 복귀하는 것은

 

사성제의 진리를 실천하여 열반에 든 자들은 다시 태어남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성제의 진리를 모르는 자들은 세세생생 윤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령 팔만사천대겁을 사는 비상비비상처천의 천신들도 복과 수명이 다하면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모른다. 이는 소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소멸이 있는 것임에도 소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의 소멸을 알지 못하여(Nirodha appajānantā)”라 하였다.

 

괴로움의 소멸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시 태어남으로 복귀하는 것이네(āgantāro punabbhavanti)”라 하였다. 이는 사성제의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 저기 태어나 오랜 세월 윤회했네

 

사성제의 진리를 알았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동시에 윤회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다시 태어날 행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려면 괴로움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왜 네 가지 성스런 진리 중에 고성제라 하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 한 것도,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함을 말한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마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게송에서는 태어남이 괴로움이라 하였다. 태어남이 축복이 되어야 하나 고성제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태어남이 괴로움이라 하였다. 이는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재난을 보았기 때문이다.

 

죽을 수밖에 운명이라면 태어남은 괴로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기뻐한다. 그러나 아기들은 태어나면 울음으로써 이 세상에 신고한다.

 

 

Catunna ariyasaccāna

yathābhūta adassanā,

Sasara dīghamaddhāna

tāsu tāsveva jātisu.

 

Tāni etāni diṭṭhāni

bhavanetti samuhatā,

Ucchinna mūla dukkhassa

natthidāni punabbhavoti.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여기 저기 태어나

오랜 세월 윤회했네.

 

이들 진리를 보았으니

존재의 통로는 부수어졌고

괴로움의 뿌리는 끊어졌고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어졌네. (D16. S56.21)

 

 

 

2015-03-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