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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본능을 자극해 보지만, 끼사 고따미 이야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5. 2. 16. 20:49

 

모성본능을 자극해 보지만, 끼사 고따미 이야기

 

 

초기불교경전을 보면 수 많은 이름이 등장한다. 그 중에는 동명이인도 없지 않다. 고따미라는 이름 역시 동명이인이 등장한다. 한사람은 부처님의 양어머니인 고따미빅쿠니를 말하고, 또 한사람은 빅쿠니상윳따에 등장하는 고따미빅쿠니를 말한다.

 

빠삐만이 말하기를

 

빅쿠니상윳따에 고따미의 경(S5.3)’이 있다. 수행녀 고따미가 사왓티에서 탁발을 하고 식사를 끝낸 후 대낮을 보내기 위해 안다 숲으로 들어 갔다. 이때 악마 빠삐만이 나타났다. 선정에 드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이다. 빠삐만은 고따미를 보자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Gotamīsutta(고따미의 경, S5.3)

  

빠알리어

Kinnu tva hataputtāva

ekamāsi rudammukhī,
Vanamajjhagatā ekā

purisa nu gavesasīti.

rudammukhī

전재성님역

[빠삐만]

그대 아들을 잃어버리고

홀로 슬퍼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가?

외롭게 숲속 깊이 들어와

혹시 남자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슬퍼하는 얼굴을 하고

각묵스님역

아들 잃고 눈물 가득한 얼굴로

왜 그대 홀로 앉아 있는가?

숲속 깊숙이 혼자 들어와서는

그대 남정네를 찾고 있는가?”

눈물 가득한 얼굴로

 

빅쿠보디역

"Why now, when your son is dead,

Do you sit alone with tearful face?

Having entered the woods all alone,

Are you on the lookout for a man?"

with tearful face

 

 

 

 

고따미의 표정을 묘사하고 있는 구절을 보면 번역자마다 다르다. 전재성님은 슬퍼하는 얼굴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눈물 가득한 얼굴이라 하였다. 이와 관련된 빠알리어가 Rudammukhī이다.

 

Rudammukhīrudammukhīrudamukha의 형태로서 ‘with tearful face, 의 뜻이다. rudamukha‘ruda+mukha(face)’  형태이다. Rudarud의 형태로서 ‘weep(울다, 슬퍼하다)’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rudammukhī눈물 가득한 얼굴이나  슬퍼하는 얼굴이나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미 빅쿠니가 된 수행녀의 눈에서 눈물이 난다고 볼 수 없다. 다만 빠삐만이 과거 아들을 잃은 것을 상기 하였을 때 슬퍼 보였기 때문에 슬퍼하는 얼굴이라 표현 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빅쿠보디는 with tearful face’라 함으로써 각묵스님의 번역과 일치한다.

 

끼사 고따미와 관련된 이야기(Kisagotamivatthu)

 

수행녀 고따미는 아들을 잃었다. 이는 법구경 인연담에도 등장한다. 이에 대하여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 수행녀 고따미의 인연담(2012-12-08)’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법구경 287번 게송에 실려 있는 인연담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DhpA.II.270-275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계실 때, 끼싸 고따미와 관련된 이야기(Kisagotamivatthu)이다.

 

한때 싸밧티 시에 사십 고띠의 재산을 지닌 부호가 살았는데 그 재산이 갑자기 숯으로 변했다. 상인은 비탄해 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와서 ‘네가 가게에 숯을 쌓아놓고 팔면, 사람들이 ‘상인들이 옷이나 기름이나 꿀이나 당밀을 파는데 당신은 여기서 숯을 파는 군요’하면, ‘내 것을 내가 팔지 못하면, 무엇을 합니까?’라고 말해라.’고 했다.

 

그런데 아주 가난한 집 딸인 끼싸 고따미(Kisa Gotami)-‘끼싸’는 갸날팠던 그녀의 몸매를 뜻한다-가 와서 ‘상인들이 옷이나 기름이나 꿀이나 당밀을 파는데 당신은 여기서 노란 황금을 파는 군요’라고 말했다. 상인은 ‘자매여, 황금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말하자, 그녀가 숯을 그의 손에 집어주자 노란 황금으로 변했다. 그는 그녀가 결혼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켰다.

 

그녀는 시집가서 그 아들이 걸음마를 한 즈음에 죽었다. 그녀는 죽음에 대해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비탄에 잠겨 죽은 아기를 되살리려고 등에 업고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내 아들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라고 물으며 약을 구하러 다니자 사람들이 비웃었다.

 

어떤 슬기로운 자가 ‘여인이여, 나는 그대의 아들을 치료할 수 있는 방도를 모르지만,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을 나는 알고 있소’라고 말하고 그녀를 부처님께 인도했다.

 

그녀는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나의 아들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데 사실입니까?’라고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아들이나 딸이나 다른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서 흰 겨자씨를 구해 오면 살려 주겠다.’라고 했다.

 

끼싸 고따미는 죽은 아이를 등에 업고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아들이나 딸이나 다른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을 찾았다. 그러던 중에 집집마다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없다는 것과 마을마다 산 자 들보다 죽은 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서 흰 겨자씨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인 것을 알았다.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그녀에게 생자필멸의 도리를 일깨우며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 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4)’고 가르쳤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끼싸 고따미여, 흰 겨자씨를 구했는가?’ ‘세존이시여,못 구했습니다. 온 마을에 죽은 자가 산 자보다 많았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대만이 아이를 잃었다고 헛되이 생각했다. 이것은 모든존재의 견고한 법칙이다. 죽음의 왕은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 모든 존재를 거센 흐름처럼 휩쓸어서 고통의 바다에 빠뜨린다.’라고 법문을 하고 이어서 시로써 자식과 가축에 도취되어, 마음이 사로잡혀있는 사람, 홍수가 잠든 마을을 앗아가듯, 죽음이 그를 앗아간다.(Dhp287)’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그녀는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했다. 많은 다른 사람들은 흐름에 든 경지, 한번 돌아 오는 경지, 한번 돌아 오지 않는 경지를 성취했다.

 

(끼싸 고따미와 관련된 이야기(Kisagotamivatthu), 법구경287번 게송 인연담, 전재성님)

 

 

 

Kisagotami

 

 

고따미와 관련된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특히 집집마다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없다는 것과 마을마다 산 자 들보다 죽은 자들이 많다라는 말은 매우 유명하다. 그래서 법문을 할 때 종종 고따미와 관련된 이야기가 인용된다.

 

초불연의 인연담을 보면

 

고따미인연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짤막하게 각주하였다. 대체로 법구경 인연담과 유사하다. 빅쿠보디 역시 짤막하게 설명 하여 놓았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인연담형식으로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전재성님이 번역한 법구의석의 인연담과 다른 부분이 있다. 각묵스님은 고따미에 대하여 부잣집에 시집가서 구박을 받은 것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법구의석에는 그런 표현이 없다. 각묵스님의 인연담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끼사고따미 비구니는 사왓티의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그녀는 아주 말랐기(kisa) 때문에 끼사(kisa)라 불리웠고 고따미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부잣집에 시집가서 구박을 받았지만 사내아이를 낳자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막 걸을만 했을 때 아이는 죽어버렸다. 그녀는 죽은 아이를 허리에 끼고 거의 미쳐서 아들을 살리려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그녀를 불쌍히 여긴 사람들이 세존께로 보내었고 세존께서는 아직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안에서 겨자씨를 구해 오면 아들을 살려주겠노라고 하셨다. 그녀는 하루종일 겨자씨를 구하러 다녔지만 헛수고였다.

 

그녀는 마침내 죽음은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아이를 공동묘지에 내려놓고 세존께 와서 출가하도록 허락해달라고 하였다. 그때 그녀는 예류과를 얻었다.

 

출가한 뒤 어느 날 그녀가 깊이 위빳사나를 닦고 있는데 세존께서 광휘로운 모습으로 오셔서 설법하셨고 그래서 아라한이 되었다.

 

그후 그녀는 항상 남루한 옷만을 입고(luka-cavara-dhara) 다녔다고 했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 하나의 모음(A1:14:5-12)에서 부처님께서는 끼사 고따미 비구니를 남루한 옷을 입는 자들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칭송하셨다.

 

법구경 주석서(DhpA.ii.270-275)에 그녀에 대한 행장이 상세하게 나타난다.

 

(초불연 상윳따1 532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의 각주에 실려 있는 인연담을 보면 전재성님의 법구경인연담과 차이가 난다.전재성님의 인연담에는 보이지 않는 구박받은 이야기, 공동묘지이야기, 예류과 이야기가 다르다.

 

예류과 이야기를 보면 죽음은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아이를 공동묘지에 내려놓고 세존께 와서 출가하도록 허락해달라고 하였다. 그때 그녀는 예류과를 얻었다.”라 하였다. 그러나 법구경 인연담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그대만이 아이를 잃었다고 헛되이 생각했다. 이것은 모든 존재의 견고한 법칙이다. 죽음의 왕은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 모든 존재를 거센 흐름처럼 휩쓸어서 고통의 바다에 빠뜨린다.’라고 법문을 하고 이어서 시로써 자식과 가축에 도취되어, 마음이 사로잡혀있는 사람, 홍수가 잠든 마을을 앗아가듯, 죽음이 그를 앗아간다.’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그녀는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했다.”라 하여 어떻게 예류과를 성취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숲에서 두려움이 생기니

 

악마 빠삐만은 수행녀 고따미에게 과거의 아픈 기억을 떠 올리게 한다. 그러면서 왜 슬픈 얼굴을 짓고 있는지 물어 본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혹시 남자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purisa nu gavesasīti)”라고 물어 본다. 각묵스님은 그대 남정네를 찾고 있는가?”라 하였고, 빅쿠보디는 Are you on the lookout for a man?”라 하였다.

 

왜 빠삐만은 자식을 잃어 버리는 고따미빅쿠니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였을까? 이에 대한 각 번역자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숲에서 남자를 찾고자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하여 숫따니빠따 성자의 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가령 숲 속에 있더라도 불의

화염 같은 높고 낮은 것들이 나타나고,

아낙네는 해탈자를 유혹합니다.

아낙네로 하여금 유혹하도록 하지 마십시오.” (stn703)

 

 

수행자들은 숲에서 보냈다. 그런데 숲에 여인네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Prj.II.492)을 보면, 아낙네(Nāriyo)에 대하여 숲속에 놀러 오거나 땔감을 구하러 온 여인, 이렇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문제는 놀러 오는 여인이다.

 

숲에 놀러 오는 여인은 율장대품 지체높은 친구들의 이야기(Vin.I.23)’에도 나온다. 이 때 부처님은 기녀를 찾아 다니는 공자들에게 그대들에게 어떠한 것이 더욱 훌륭한 일인가? 여자를 찾는 것인가, 자기자신을 찾는 것인가?”라고 물은 바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숲은 수행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은밀하게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서는 “숲을 잘라버려라. 나무는 말고, 숲에서 두려움이 생기니 수행승들이여, 숲과 덤불을 자르면 그대들은 숲에서 벗어나리. (Dhp283)”라 하였다.

 

남자도 이미 지난 일이네

 

악마 빠삐만은 수행녀 고따미를 모욕하였다. 숲에서 선정에 들려는 것에 대하여 마치 성자를 유혹하는 아낙네 쯤으로 여겨 혹시 남자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purisa nu gavesasīti)”라고 물었기 때문이다. 이에 고따미빅쿠니는 다음과 같에 게송으로 답한다.

 

 

 

  

Gotamīsutta(고따미의 경, S5.3)

  

빠알리어

Accanta mataputtā'mhi

purisā etadantikā,

Na socāmi na rodāmi

na ta bhāyāmi āvuso.


Sabbattha vihatā nandi

tamokkhandho padālito,
Jetvāna maccuno sena

viharāmi anāsavāti.

purisā etadantikā

전재성님역

[고따미]

언제나 자식을 잃은 어머니도 아니고

남자도 이미 지난 일이네.

나는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으니

벗이여, 그대를 두려워하지 않네.

 

모든 환락은 부서졌고

어두운 존재의 다발은 파괴되었으니

죽음의 군대에 승리하여

속세의 번뇌 없이 나는 살아가네.”

남자도 이미 지난 일이네

각묵스님역

이전에 아들이 죽은 것으로

남자를 찾는 일도 이미 끝났네.

도반이여, 슬퍼하지도 울지도 않는 나는

그대를 두려워하지도 않도다.

 

모든 곳에서 즐기는 것 파괴되었고

어둠의 무더기는 흩어졌으니

죽음의 군대를 철저하게 정복하여

이제는 번뇌 없이 편안하게 머무노라.”

남자를 찾는 일도 이미 끝났네

빅쿠보디역

"I've gotten past the death of sons;

With this, the search for men has ended.

I do not sorrow, I do not weep,

Nor do I fear you, friend.

 

"Delight everywhere has been destroyed,

The mass of darkness has been sundered.

Having conquered the army of Death,

I dwell without defiling taints."

the search for men has ended

 

 

 

 

게송에서 남자를 찾는 일도 이미 끝났네(purisā etadantikā)”라는 말이 있다. Etadantikā‘etad(see eso) +antikā(being at the end of)’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Etadantikā의 의미는 끝을 보는 것의 뜻이다. 그래서 purisā etadantikā의 의미는 남자는 이것으로 끝이다라는 뜻이다. 이 구절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끼싸 고따미는 인간에게 가치 있고 사랑스런 모든 것이 덧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들에 대한 태도나 남편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1206번 각주)”라고 각주 하였다.

 

모성을 자극하는

 

악마 빠삐만이 혹시 남자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모성을 자극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잃은 아들을 떠 올리게 하면서 다시 아이를 가지는 것이 어떤지 넌지시 떠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고따미빅쿠니는 남자를 찾는 일도 이미 끝났네(purisā etadantikā)”라 하였다. 더 이상 새로운 인연을 만들지 않겠다는 말로 볼 수 있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각묵스님은 남자를 찾는 일도 이미 끝났네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한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이전에 아들이 죽은 것으로 남자를 찾는 일도 이미 끝났네라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빅쿠보디는 “I’ve gotten past the death of sons; With this, the search for men has ended”라 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Padas ab read: Accanta mataputtāmhi/purisā etadantikā. A pun seems to be intended between two senses of being "past the death of sons." I translate in accordance with the paraphrase of Spk: "I have 'gotten past the death of sons' as one for whom the death of a son is over and done with. Now I will never again undergo the death of a son . . . . The ending of the death of sons is itself the ending of men. Now it is impossible for me to seek a man." etadantikā occurs too at Thi 138b

 

(CDB 340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의 각주에 따르면 아들의 죽음으로, 아들의 죽음과 함께 남자는 끝이 났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I’ve gotten past the death of sons”라 하여 이전에 아들이 죽은 것으로 인하여 더 이상 남자를 찾지 않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모든 환락은 부서졌고 어두운 존재의 다발은 파괴되었으니

 

악마 빠삐만이 혹시 남자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purisa nu gavesasīti)”라 하였을 때 이를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남자를 유혹하는 의미일 수 있고, 또 하나는 모성을 자극하는 말일 수 있다. 경에서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미 출가한 빅쿠니에게 성자를 유혹하는 아낙네로 볼 수 없다. 다만 과거에 아들을 잃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을 상기 시키면서 모성본능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말이 혹시 남자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출가하여 아라한이 된 고띠미에게 있어서 더 이상 새로운 인연은 필요치 않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존재의 실상을 보아 버린 아라한은 모든 환락은 부서졌고 어두운 존재의 다발은 파괴되었으니 죽음의 군대에 승리하여 속세의 번뇌 없이 나는 살아가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악마 빠삐만은 수행녀 끼싸 고따미는 나에 대하여 알고 있다.”라고 알아채고 괴로워하며 슬퍼하며 바로 그곳에서 사라졌다고 경에 기록 되어 있다.

 

 

 

2015-02-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