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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2. 12. 20:09

 

여자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부처님의 가르침에 남녀차별이 있을 수 없다. 누구나 승가의 일원이 되면 태생을 묻지 않는다.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바라문이나 최하위의 노예나 승가의 구성원이 되면 모두 동등한 부처님의 제자들이다. 다만 먼저 들어 오고 나중에 들어옴의 차이에 따라 구별은 있을 수 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이다.

 

부처님은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땔감이 다르지만 불꽃은 같은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고귀하네.(S7.9)”라고 말씀 하셨다. 어떤 땔감에서도 불꽃은 같다. 마찬가지로 지혜도 같다는 것이다. 미천한 가문에서도 지혜로운 자가 생겨 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여자라고 하여 남자 보다 지혜가 못하다거나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보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바로 그것이 상윳따니까야 소마의 경(S5.2)’이다.

 

대낮의 식후 좌선에 들기 위해

 

경에 따르면 소마빅쿠니가 사왓티에서 탁발을 마치고 숲으로 들어 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대낮을 보내기 위해 안다숲으로 갔다라고 하였다. 각묵스님은 한거를 위하여 장님들의 숲으로 갔다라고 번역하였다. 한편은 대낮을 보내기 위해서라 하였고, 또 한편은 한거(閑居)를 위해서라 하였다.

 

전재성님은 안다숲으로 간 것에 대하여 대낮을 보내기 위해서라 하였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Divāvihārāya : Srp.I.189에 따르면, ‘대낮의 식후 좌선에 들기 위해라는 뜻이다.

 

(1194번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은 주석을 인용하여 안다숲으로 간 것에 대하여 대낮의 식후 좌선에 들기 위해라고 짤막하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주석의 견해를 중시하는 초불연의 번역서에는 각주가 보이지 않는다.

 

주석서를 중시하였다라고 천명하였지만

 

초불연 번역서는 주석을 매우 중시한다고 하였다. 이는 빠알리니까야 번역서 각권 해제에 따르면 번역에 임하는 태도라는 선언문에 어긋난다. 선언문을 보면 네 가지 항목중에 가장 첫번째로 첫째로, 주석서를 중시하였다라고 천명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경에 대한 이해는 단순한 언어학적 소양만으로는 결코 성취되지 않는다. 경은 부처님의 직계제자들이 이해하고 받아 들였던 그분들의 안목을 빌지 않고서는 결코 심도 있게 이해 될 수 없다. (중략) 이 문제를 철저하게 고민한 것이 바로 주석서 문헌(Atthakatha)이다. 그러므로 주석서는 삼장에 대한 가장 오래된 권위이다.

 

(초불연 각권 번역서 해제)

 

 

초불연의 해제에 따르면 초불연의 번역방침 일순위는 주석서를 중시하는 것이다. 번역자들이 종종 주석서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초불연에서 만큼은 주석서의 견해를 받아 들이겠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받아 들이겠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주석서에 쓰여진 것은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주석서를 중시하는 초불연에서 주석서의 견해를 받아 들이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유에 대하여 알 수 없다. 주석의 견해가 잘못된 것인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소마의 경에서도 ‘Divāvihārāya’에 대하여 분명히 주석서의 견해가 있음에도 무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CDB를 많이 참고하였다고

 

초불연의 번역을 대할 때는 빅쿠보디의 번역문과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초불연에서 빅쿠보디의 견해를 많이 참조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유는 초불연 번역서 해제에 따르면 본서 번역에 있어서 보디 스님이 10여년간 노력하여 번역 출간한 상윳따니까야영역본인 ‘The Connected Discourses of the Buddha(Vol1 &2)’를 많이 참고 하였다는 것이다.”라고 밝혀 놓은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번역문의 형식과 각주는 거의 일치한다.

 

왜 주석서를 따르지 않았을까?

 

빅쿠보디는 ‘Divāvihārāya’와 관련된 문구에 대하여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CDB를열어 보니 “Having plunged into the Blind Men's Grove, she sat down at the foot of a tree for the day's abiding.”라 되어 있다. 번역하면 그녀는 장님의 숲에 들어가서 한낮의 머무름을 위하여 나무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가 된다.

 

이런 번역은 각묵스님이 번역한 한거를 위하여 장님들의 숲으로 갔다:라는 번역과 다르다. 빅쿠보디가 말한 ‘the day's abiding’라는 말은 일시적 머무름을 뜻하지만, 각묵스님이 번역한 한거라는 말은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집안에 한가하게 있음의 뜻으로 전혀 다른 말이다.

 

빠알리어 Divāvihārāya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전에 따르면 ‘rest during the heat’라 되어 있다. ‘더위를 피하여 쉰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각묵스님의 한거라는 말은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주석서에서는 대낮의 식후 좌선에 들기 위해(Srp.I.189)”라 하였다.

 

주석서를 중시하는 초불연의 번역방침이라면 각주에 당연히 선정에 들기 위하여 숲으로 들어 갔다라고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두 가지 이유로 보고 있다. 하나는 빅쿠보디의 번역방침을 따르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빅쿠보디의  CDB 에서도 이 단어와 관련하여 각주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Divāvihārāya’라는 말에 대하여 단지 머무름의 의미로만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거라 하였는데 이런 기조는 전번역서에 그대로 유지 된다.

 

번역비교를 해보면

 

초불연에서 ‘Divāvihārāya’에 대하여 한거라 번역하였을 때 이후 경의 내용을 보면 번역에 많은 무리가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맥이 맞지 않고 경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예를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Somāsutta(소마의 경, S5.2)

  

빠알리어

Atha kho māro pāpimā somāya bhikkhuniyā bhaya chamhitatta lomahasa uppādetukāmo samādhimhā cāvetukāmo yena somā bhikkhunī tenupasakami.

uppādetukāmo samādhimhā

전재성님역

그런데 악마 빠삐만이 수행녀 쏘마에게 소름끼치는 공포심을 일으켜서 선정에 드는 것을 방해하려고 수행녀 쏘마가 있는 곳으로 찾아 왔다.

선정에 드는 것을 방해하려고

각묵스님역

그때 마라 빠삐만은 소마 비구니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일으키고 털이 곤두서게 하여 한거를 내팽개치게 하려고 소마 비구니에게 다가갔다.

한거를 내팽개치게 하려고

빅쿠보디역

Then Mara the Evil one, desiring to arouse fear, trepidation,

and terror in the bhikkhuni Soma, desiring to make her fall

away from concentration

fall

away from concentration

 

 

 

이 문장을 보면 ‘Divāvihārāya’에 대하여 왜 주석서에서 대낮의 식후 좌선에 들기 위해(Srp.I.189)”라 하였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uppādetukāmo samādhimhā라는 문구로 알 수 있다.

 

첫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처럼

 

‘uppādetukāmo samādhimhā에서 uppādetukāmo‘uppādetu+ukā의 결합어이다. uppādetu ‘producer’의 뜻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ukā‘a louse’의 뜻으로 엉망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uppādetukāmo’의 뜻은 엉망으로 만들다의 의미가 된다.

 

무엇을 엉망으로 만드는가? 그것은 뒤에 나오는 ‘samādhimhā로 알 수 있다. 여기서 samādhimhā는 삼매(samādhi)에 들어 가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uppādetukāmo samādhimhā의 뜻은 삼매에 들어가는 것을 엉망으로 만든다의 뜻이 된다. 이는 전재성님이 번역한 선정에 드는 것을 방해하려고라고 번역한 것과 일치 한다. 또 빅쿠보디가 “fall away from concentration”라 번역한 것과도 일치한다. 그럼에도 각묵스님은 한거를 내팽개치게 하려고라 하여 엉뚱하게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은 번역에서 한거라는 말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후 번역에 무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동떨어진 번역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엉뚱하게 번역하였다라 한 것이다.

 

 빠알리어 본문에 분명히 ‘samādhimhā라는 말이 있음에도 이를 삼매 또는 선정으로 번역하지 않고 한거의 뜻으로 번역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아마 처음부터 한거라는 말에 집착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마치 첫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처럼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한거라는 말이 들어간 경이 많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엉뚱한 번역이 되었는데 아마 대대적인 수정 작업이 필요하리라 본다.

 

각묵스님이 ‘uppādetukāmo samādhimhā에 대하여 한거를 내팽개치게 하려고라 하여 엉뚱하게 번역하였다. 이는 명백한 오역이다. 왜 그럴까? samādhi라는 말이 키워드이기 때문이다.

 

소마빅쿠니가 탁발을 마치고 숲으로 돌아 왔는데, 이를 단지 하릴 없이 시간을 보낸다는 뜻의 한거로 번역한 것이 모든 잘못의 시작으로 본다. 그러다 보니 samādhi에 대하여 삼매 또는 선정이라 번역하지 않고 한거라 한 것이다. 이는 주석서의 견해를 중시한다는 초불연 번역방침에도 어긋나고, 무엇 보다 오역으로 인하여 독자들을 오독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두 손가락만큼의 지혜를 지닌 여자

 

악마 빠삐만은 탁발에서 돌아 온 빅쿠니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수행을 방해하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방해하는가? 다음과 같은 여성 차별적 문구로 알 수 있다.

 

 

 

Somāsutta(소마의 경, S5.2)

  

빠알리어

Yanta isīhi pattabba

hāna durabhisambhava,
Na ta
dvagulapaññāya

sakkā pappotumitthiyāti.

dvagulapaññāya

전재성님역

[빠삐만]

성자만이 도달할 수 있을 뿐

그 경지는 성취하기 어려우니

두 손가락만큼의 지혜를 지닌 여자로서는

그것을 얻을 수가 없네.”

두 손가락만큼의 지혜

각묵스님역

선인들이 도달한 경지는

성취하기가 참으로 어려우니

여인의 두 손가락만큼의 통찰지로는

도저히 그것을 얻을 수 없도다.”

두 손가락만큼의 통찰지

빅쿠보디역

"That state so hard to achieve

Which is to be attained by the seers,

Can't be attained by a woman

With her two-fingered wisdom."

two-fingered wisdom

 

 

 

악마 빠삐만은 수행녀 앞에 나타나 남녀 차별성의 발언을 한다. 그것은 두 손가락만큼의 지혜(dvagulapaññāya)’로 요약될 수 있다. 여인이 수행을 한다고는 하지만, 수행을 해 보았자 고작 두 손가락을 벌렸을 때 만큼의 지혜에 해당되지 않음을 말한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두 손가락만큼의 지혜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잴 수 있는 만큼의 크기로, 아주 작은 양을 의미한다.”라고 주석의 인용 없이 각주 하였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주석을 인용하여 두 손가락만큼의 통찰지란 제한된 통찰지라 하면서, “혹은 [여자들은] 손가락 두 개로 솜뭉치를 잡고 거기서 실을 뽑아 내기 때문에 여인을 두 손가락만큼의 통찰지를 가진 자라 부른다.(SA.i.189)”라 하였다.

 

두 손가락만큼의 지혜와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Spk: That state (thana): arahantship. With her two-fingered wisdom (dvagulapaññāya): with limited wisdom (parittapaññāya); or else this is said of women because they cut the thread while holding the cotton ball between two fingers.

 

Spk-pt and Thi-a 65 offer a different explanation: "From the age of seven on they are always testing whether the rice is cooked by taking grains out from the pot and pressing them between two fingers. Therefore they are said to have 'two-fingered wisdom.'" It should be noted that it is Mara who voices this ancient bias. See too Mvu III 391,19, where we find dvagulaprajññāye strimātrāye.

(CDB 336번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의 각주에서 or else this is said of women because they cut the thread while holding the cotton ball between two fingers.”라는 문장은 각묵스님이 각주한 혹은 [여자들은] 손가락 두 개로 솜뭉치를 잡고 거기서 실을 뽑아 내기 때문에 여인을 두 손가락만큼의 통찰지를 가진 자라 부른다.(SA.i.189)”라고 설명한 것과 일치한다.

 

또 빅쿠보디는 복주석서(Spk-pt)를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이는 각묵스님이 번역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편 복주석서와 장로니게’(ThigA.65)는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일곱살 때부터 여자들은 솥으로부터 쌀[]을 끄집어내어 손가락 두 개로 눌러서 밥이 되었는가를 살핀다. 그래서 그들은 두 손가락만큼의 통찰지를 가졌다고 일컬어진다.”(SAT.i.196)

 

(초불연 상윳따1 529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은 dvagulapaññāya’라는 말에 대하여 두 손가락만큼의 통찰지라 하였다. 통찰지라는 말에 대하여 두 손가락만큼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통찰지라는 말 대신 지혜라는 표현이 더 나을 듯 하다. 통찰지는 최상의 지혜를 가진 자에게만 붙여 주는 칭호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남존여비사상

 

악마 빠삐만은 조용한 숲에 들어가 선정삼매를 취하려는 빅쿠니에게 두 손가락만큼의 지혜를 가졌다고 조롱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여인의 몸으로 아무리 수행을 하여도 궁극적 지혜를 깨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는 뿌리 깊은 남존여비사상에 기인한다.

 

대승한역경전 중에 대애도비구니경이 있다. 아마 앙굿따라니까야 고따미의 경(A8.51)’를 원류로 하여 만들어진 위경이라 본다. 그런데 이 대애도비구니경을 보면 마치 악마 빠삐만이 여인에 대하여 두 손가락의 지혜라고 말한 것을 연상케 하는 구절이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만약 여인들로 하여금 사문을 만들지 않았다면 부처님 정법이 마땅히 천세를 머물러 크게 일어나 널리 퍼져서 모두가 귀의하여 모두 제도함을 입을 것이니라. 이제 여인들이 나의 법 중에 있어 사문이 된 까닭으로 마땅히 오백세를 제감(除減)하여 법이 감소되고 쇠잔해 질 것이니라.

 

왜그런가 하면 아난아, 여인은 다섯 곳에서 사문이 될 수 없느니라. 무엇을 다섯 곳이라 하는가?

 

첫째, 여인은 여래지진등정각이 되지 못하며,

둘째, 여인은 전륜성왕이 되지 못하며,

셋째, 여인은 제칠(第七) 범천왕이 되지 못하며,

넷째, 여인은 제석천왕[飛行皇帝]이 되지 못하며,

다섯째, 여인은 마천왕(魔天王)이 되지 못하느니라.

 

이와 같은 오처(五處)는 모두 마땅히 장부라야 지존이 될 수 있나니, 장부라야 부처가 될 수 있으며, 전륜성왕이 될 수 있으며, 제석천왕이 될 수 있으며, 마천왕이 될 수 있으며, 범천왕이 될 수 있으며, 인중왕(人中王)이 될 수 있느니라.

 

아난이여, 모든 여인은 비유컨대 독사와 같으니라. 사람이 비록 잡아 죽여 몸을 자르고 그 뇌를 끄집어 내어 이 독사는 비록 죽은 것이지만, 사람이 이것을 보면 마음 속으로 놀라고 두려워 하나니, 여인도 비록 사문이 되었으나 악로(惡露)가 짐짓 있어 일체 남자가 휘둘리게 되나니, 이러한 까닭에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도를 얻지 못하게 하나니라.

 

(한역 대애도비구니경)

 

 

여인은 부처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륜성왕 등이 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이런 이유는 빠알리니까야의 고따미의 경과 대조적이다.

 

팔경법과 관련하여 대애도비구니경의 오리지널 버전이라 볼 수 있는 앙굿따라니까야 고따미의 경(A8.51)에서는 여인의 지혜에 대하여 폄하하는 내용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여인의 몸으로 출가한 빅쿠니승가의 일원이 빅쿠승가의 일원일원부터 도움을 받아야 된다는 내용은 있지만, 여인이 지혜 부족하여 최상의 지혜를 깨칠 수 없다는 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소마 빅쿠니가 게송으로 답하기를

 

악마 빠삐만이 소마 빅쿠니앞에 나타나 조롱하였다. 이에 소마빅쿠니는 빠삐만임을 알아차렸다. 빠삐만이 소름끼치는 공포심을 일으켜 선정에 드는 것을 방해하고자 하는 것을 안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시로서 말하였다.

 

 

 

 

Somāsutta(소마의 경, S5.2)

  

빠알리어

Itthibhāvo ki kayirā

cittamhi susamāhite,
Ñā
amhi vattamānamhi

sammā dhamma vipassato.


Yassa nūna siyā eva

itthāha purisoti vā,
Kiñci vā pana aññasmi

ta māro vattumarahatīti.

vipassato

전재성님역

[쏘마]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나는 남자다 또는 여자다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한다면,

그는 악마일 뿐이리.”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

각묵스님역

마음이 삼매에 잘 들고

지혜가 이미 현전하고

바르게 법을 꿰뚫어 보는데.

여자의 존재가 도대체 무슨 문제랴.

 

만일 어떤 사람에게

나는 여자라거나 나는 남자라거나

나는 무엇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면

전적으로 그것은 마라에게나 어울리도다.”

바르게 법을 꿰뚫어 보는데

빅쿠보디역

"What does womanhood matter at all

When the mind is concentrated well,

When knowledge flows on steadily

As one sees correctly into Dhamma.

 

one to whom it might occur,

'I'm a woman' or 'I'm a man'

Or 'I'm anything at all'-

Is fit for Mara to address."

As one sees correctly into Dhamma

 

 

 

 

bhikkhuni

 

 

 

‘vipassato’에 대하여

 

첫 번쩨 게송을 보면 ‘vipassato’라는 빠알리어가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라고 번역하였다. 이렇게 번역한 이유로 가이거의 주석을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Vipassato : Ggs.I.201에 따르면, 여기서 남성으로 표시 된 것은  직접 쏘마와 관계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오히려 쏘마가 자신은 남성의 지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1198번 각주, 전재성님)

 

 

‘vipassato’에 대하여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라 하여 명사로 번역하였다. Vipassato에 대한 PCED194를 보면 ‘vipassato = ( vipassa + ato ) 字尾: a<>ato 陽性单数,复数離格이라 되어 있다.  ‘vipassato’vipassato = ( vipassati + o )로도 설명된다. 이 경우 陽性,陰性单数處格의 의미이다. 여기서 vipassati‘sees clearly; has intuition.’의 뜻으로 ‘to obtain spiritual insight’의 의미이다. ‘최상의 진리를 성취한 것을 말한다.

 

소마 빅쿠니는 최상의 진리를 성취한 자이다. 그런 자에게는 지혜가 항상 나타나게 될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소마빅쿠니는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 한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최상의 진리를 성취한 자이다. 남녀를 떠나서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 자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깨달음을 완성하였다는 말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여자인 것이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방해요소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소마비쿠니는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Itthibhāvo ki kayirā)”라 하였다.

 

여기서 Itthibhāvo‘Itthi(woman)+bhāvo(Being)’의 뜻이고, ki ‘what?’의 뜻이고, kayirā ‘karoti’ 의 형태로서 ‘does’의 뜻이다. 그래서 “Itthibhāvo ki kayirā라는 말은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또는 여자의 존재가 도대체 무슨 문제랴또는 What does womanhood matter at all”로 번역된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빅쿠보디는 첫 번째 게송과 관련하여 길게 각주 하였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Spk: When knowledge flows on steadily (Ñāamhi vattamānamhi): while the knowledge of the attainment of fruition is occurring. As one sees correctly into Dhamma: seeing into the Dhamma of the four truths, or into the five aggregates that form the object of insight in the preliminary phase of practice.

 

Spk-pt: By mentioning the occurrence of the knowledge of fruition attainment, the commentator shows that she has been dwelling in nondelusion regarding the four truths. Seeing into (vipassantassa; or, "seeing with insight"): for one seeing distinctly by the penetration of nondelusion; for one seeing into the five aggregates themselves in the preliminary portion (of the practice) prior to the breakthrough to the truths

 

Spk explains in terms of the knowledge of fruition attainment because Soma, being already an arahant, would have been dwelling in the concentration of fruition. In elucidating vipassantassa, Spk-pt, in the first clause, connects the word with the realization of the Four Noble Truths on the occasion of the supramundane path; in the second, it takes the word as signifying vipassana in the technical sense of the preparatory work of insight meditation that leads to the path and fruition.

(CDB 337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의 각주는 초불연 530번 각주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특히 ‘vipassato’에 대하여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라 하여 명사로 번역하였으나, 빅쿠보디는

“As one sees correctly into Dhamma”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바르게 법을 꿰뚫어 보는데라 번역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담마는 무엇을 말할까? 빅쿠보디는 담마에 대하여 주석과 복주석을 인용하여 사성제라 하였다. 그래서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주석가와 복주석서의 저자는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사성제를 관통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으며(.1 530번 각주)”라 하였다.

 

깨달은 자는 성이나 어떠한 규정도 초월한다

 

두 번째 게송을 보면 남녀 차별을 부정하고 있다. 이는 깨달음에 있어서 나는 남자다 또는 여자다(itthāha purisoti vā)”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itthāha purisoti vā : 깨달은 자를 남자다, 여자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다.’라고 본래 규정할 수 없음을 상기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깨달은 자는 성이나 어떠한 규정도 초월한다. 이경의 시들은 쏘마의 이름으로 Thig.60-61에서도 발견된다.

 

(1201번 각주, 전재성님)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들은 모두 깨달을 수 있다. 깨닫는데 있어서 빈부귀천이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성의 차별 역시 있을 수 없다. 만일 누군가 여자라서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마구니라 볼 수 있다. 이는 소마의 경에서 소마빅쿠니가 나는 남자다 또는 여자다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한다면, 그는 악마일 뿐이리.”라고 분명히 말하였기 때문이다.

 

여자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

 

부처님은 차별을 두지 않았다. 여자도 궁극적 경지에 오를 수 있음을 말씀 하셨다. 이는 고따미의 경에서 아난다와 부처님의 대화로 확인 할 수 있다.

 

 

Atha kho āyasmā ānando bhagavanta etadavoca: bhabbo nu kho bhante, mātugāmo tathāgatappavedite dhammavinaye agārasmā anagāriya pabbajitvā sotapattiphala vā sakadāgāmiphala vā anāgāmiphala vā arahattaphala vā sacchikātunti?

 

[아난다]

세존이시여, 여인들이 여래께서 설한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해서, 흐름에 든 경지나, 한번 돌아오는 경지나, 돌아오지 않는 경지나, 거룩한 경지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Bhabbo ānanda mātugāmo tathāgatappavedite dhammavinaye agārasmā anagāriya pabbajitvā sotāpattiphalampi sakadāgāmiphalampi anāgāmiphalampi arahattaphalampi sacchikātunti.

 

 

[세존]

아난다여, 여인들이 여래께서 설한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해서, 흐름에 든 경지나, 한번 돌아오는 경지나, 돌아오지 않는 경지나, 거룩한 경지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고따미경-Gotamīsutta-고따미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8.51,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여인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궁극적 경지, 즉 아라한이 될 수 있음을 말씀 하셨다. 여자라도 누구나 가르침을 실천하면 흐름에 든 경지(sotāpatti:수다원)’, ‘한번 돌아오는 경지(sakadāgāmi: 사다함)’, ‘돌아오지 않는 경지(anāgāmi: 아나함)’, ‘거룩한 경지(arahatta: 아라한)’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분명히 말씀 하셨다. 그럼에도 여자는 깨달을 수 없다느니, ‘여자라서 성불할 수 없다느니 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는 그는 마구니임에 틀림 없다.

 

 

 

2015-02-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