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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빠삐만의 행위는 전형적인 스토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2. 1. 19:05

 

악마 빠삐만의 행위는 전형적인 스토커

 

 

칠년동안 추적하였건만

 

상윳따니까야 마라상윳따에 칠년추적의 경이 있다. 악마 빠삐만이 부처님을 칠년 동안 쫓아 다닌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의 경의 제목에 대한 설명을 보면 칠년이란 깨달음을 얻기 전 6년과 깨달으신 뒤 1년을 뜻한다.(초불연 상1 507번 각주)”라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번역서에서는 이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빅쿠보디는 주석을 인용하여 Spk explains the seven years of pursuit as the Buddha's six years (of striving) before the enlightenment and the first year after(cdb 316번 각주)라고 설명하였다.

 

이어서 빅쿠보디는 다음과 같이 경의 제목이 칠년인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길게 설명해 놓았다.

 

 

However, the next sutta, which apparently follows in immediate temporal sequence, is the temptation by Mara's daughters, which other sources clearly place right after the enlightenment (see n. 322). The present sutta seems to confirm this by locating the dialogue with Mara at the foot of the Goatherd's Banyan Tree, in the vicinity of the Bodhi Tree. The commentaries generally assign the Buddha's stay under this tree to the fifth week after the enlightenment (see Ja I 78,9-11).

 

Seeking to gain access (otarapekkho). Spk: He thought: "If I see anything improper (ananucchavika1'Jl) in the ascetic Gotama's conduct through the body door, etc., I will reprove him." But he could not find even a dust mote (of misconduct) to be washed away. On otiira (= vivara, Spk) see 35:240 (IV 178,13-16, 33), 35:243 (IV 185,11-15; 1 86,27-30), 47:6 (V 147,17-18, 27-28), 47:7 (V 149,7, 16).

 

(cdb 316번 각주, 빅쿠보디)

 

 

이러한 설명은 초불연 상윳따1 508번 각주에도 기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긴 설명이 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이해 하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전재성님은 주석의 견해를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스토커로서의 악마 빠삐만

 

칠년추적의 경에 따르면 교할한 악마 빠삐만의 모습이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이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고 난 다음 우르벨라 마을의 아자빨라 니그로다 나무아래 계셨을 때 이다. 경에서는 악마 빠삐만이 칠년 동안 세존을 쫓아다니면서 기회를 엿보았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다.(S4.24)”라 되어 있다. 마치 악마 빠삐만이 스토커처럼 보인다.

 

스토커(stalker,stoker)상대방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고의적으로 쫓아다니면서 상대방에게 위협을 가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상윳따니까야 마라상윳따에 실려 있는 악마 빠삐만의 행위는 전형적인 스토커에 해당된다.

 

빠삐만이 도발하기를

 

스토커로서 악마 빠삐만은 게송으로서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Sattavassasutta(칠년추적의 경, S4.24)

  

빠알리어

sokāvatiṇṇo nu vanamhi jhāyasi

citta nujito uda patthayāno,

Āgu nu gāmasmimakāsi kiñci

kasmā janena na karosi sakkhi
Sakkh
ī na sampajjati kena ci teti.

jhāyasi

전재성님역

[빠삐만]

슬픔에 잠겨 숲속에서 선정을 닦는구나.

재산을 잃었는가, 뭔가 갖고 싶은가?

마을에서 무슨 죄라도 지었는가?

왜 사람들과 사귀지 않고,

누구와도 교제를 하지 않는가?”

선정을 닦는구나

각묵스님역

슬픔에 빠져 숲에서 禪을 닦는가?

재산을 잃었는가, 갈망하는 것이 있는가?

마을에서 어떤 범죄라도 저질렀는가?

왜 그대 사람들과 친구 되지 않는가?

누구도 그대와 친교 맺지 못하는가?”

禪을 닦는가?

빅쿠보디역

"Is it because you are sunk in sorrow

That you meditate in the woods?

Because you've lost wealth or pine for it,

Or committed some crime in the village?

Why don't you make friends with people?

Why don't you form any intimate ties?"

meditate

 

 

 

빠알리어 첫 번째 구절에서 ‘vanamhi jhāyasi’가 있다. 이에 대하여 모두 숲속에서 명상을 하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선정을 닦는구나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닦는가?”라 하였고, 빅쿠보디는 “meditate”라 하였다. 여기서 각묵스님은 닦는가?’라 하여 한자어 을 사용하였다. 과연 이런 번역방식은 타당한 것일까?

 

단어에 집착하는 번역문을 보면

 

빠알리니까야를 한글로 번역한 번역서를 보면 대부분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가급적 한자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전재성님의 번역을 보면 한자어를 최소화 하였다. 불사에 대하여 불사(不死)’라고 번역한 케이스가 있는데, 이는 어쩔수 없이 뜻을 설명해야 할 경우이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말로만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한자어를 많이 사용하였다는 사실이다. 한글로 번역되어 있는 문장에서 괄호치기로 한자어를 넣어 다시 설명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다시 태어남[再生], 독존(獨尊), 아라한[應供], 완전히 깨달은 분(正等覺),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 네쌍의 인간들이요[四雙]’ 등 무수히 많다. 우리말로 번역해 놓은 다음에 이처럼 괄호치기를 이용하여 한자어를 부연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런 번역방식에 대하여 찬성하는 사람도 있다. 경전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한다는 의미로 보아 번역자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괄호치기를 이용한 번역방식은 보는 이로 하여금 때로 불편을 초래한다. 번역문을 죽 읽어 나가는데 있어서 자꾸 걸림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번역문을 보았을 때 문장 전체로 파악해야 한다. 또 문맥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단어 하나의 의미로 파악하는 것과 다르다. 따라서 거시적으로 문장과 문맥으로 파악하였을 때 그 뜻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데 단어 하나의 의미를 둔다면 마치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것과 같다.

 

 

 

banyan

 

 

 

초불연에서 괄호치기를 이용한 한자어나 한글설명을 보면 단어에 집착한 듯 하다. 이는 나무를 보는 것과 같다. 그리고 시냇물이 흐를 때 중간에 바위가 있어서 흐름을 방해하는 것과 같다. 경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문장 전체를 파악해야 한다. 나무 보다는 숲을 보는 것이다.

 

왜 번역문에 한자어를 사용하는가?

 

문장에서 괄호치기가 있으면 매끄럽지 못하다. 그런데 문장에 한자어가 단독으로 있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초불연 번역에서 닦는가?”라는 구절이 대표적이다. 한글로 이라 해도 알 수 있을 텐데 굳이 한자어를 단독으로 하여 닦는가?”라 하였을 때 이는 매우 생소한 번역이다. 마치 한글 번역문에 영어 알파벳이 들어가 있는 것과 같다. 한자어 자체가 외국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초불연에서 외국어와 다름 없는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번역한 것은 파격이다.

 

‘jhāyasi’에 두 개의 뜻이 있는데

 

이제 막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의 면전에 악마가 나타났다. 나타나서 부처님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는 식으로 말한다. 재산을 잃지 않았는지, 무언가 갖고 싶어서 그런지, 마을에서 죄지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닌지 묻는다. 그래서 빠삐만은 슬픔에 잠겨 숲속에서 선정을 닦는구나.”라고 말한다. 이는 “vanamhi jhāyasi”에 대한 번역어이다.

 

여기서 선정을 닦는다는 말이 ‘jhāyasi’이다. 그런데 빠알리 사전을 보면 놀랍게도 jhāyasi의 뜻은 명상한다는 뜻과 함께 또 하나의 뜻이 있다. 그것은 ‘burns; to be on fire’로서 타버린다의 뜻이다.

 

이렇게 두 개의 뜻을 가지고 있는  ‘jhāyasi’에 대하여 타버린다의 뜻으로 번역하면 어떨까? 그래서 ‘sokāvatiṇṇo nu vanamhi jhāyasi’ 문구에 대하여 슬픔에 잠겨 숲속에서 애태우고 있구나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렇게 애태우다는 식으로 번역하면 이후 이어지는 재산을 잃었는가, 뭔가 갖고 싶은가? 마을에서 무슨 죄라도 지었는가?”라는 문구와 잘 들어 맞는다. 하지만 어느 번역자도 ‘jhāyasi’에 대하여 ‘burns’의 뜻이 아닌 ‘meditates’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슬픔에 잠겨 선정을 닦는다는 식으로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번역이 되었다.

 

모든 존재에 대한 탐욕을 버려

 

악마 빠삐만의 도발적인 질문에 부처님은 어떻게 답하였을까?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Sattavassasutta(칠년추적의 경, S4.24)

  

빠알리어

Sokassa mūla palikhāya sabba

anāgu jhāyāmi asocamāno,
Chetvāna sabba
bhavalobhajappa

anāsavo jhāyāmi pamattabandhu.

bhavalobhajappa

전재성님역

[세존]

나는 슬픔의 뿌리를 모두 잘라 버렸으니

슬픔도 없고 죄악도 없이 선정을 닦는다네.

모든 존재에 대한 탐욕을 버려,

방일의 벗이여, 나는 번뇌 없이 선정에 들었네.”

존재에 대한 탐욕

각묵스님역

슬픔의 뿌리를 모두 파 버리고

죄를 범함도 없고 슬픔도 없이 선을 닦을 뿐이네.

존재를 재촉하는 탐욕 모두 잘라

번뇌 없이 나는 참선을 한다네. 방일의 친척이여.”

존재를 재촉하는 탐욕

빅쿠보디역

"Having dug up entirely the root of sorrow,

Guiltless, I meditate free from sorrow.

Having cut off all greedy urge for existence,

I meditate taintless, 0 kinsman of the negligent! "

greedy urge for existence

 

 

 

 

부처님은 악마 빠삐만이 제기 한 것에 대하여 부정한다. 부처님은 슬픔의 뿌리를 잘라 버렸기 때문에 슬픔도 없고 죄악도 없이 선정에 든다고 하였다. 또 모든 존재에 대한 탐욕도 버려 버렸기 때문에 번뇌 없이 선정에 든다고 하였다.

 

여기서 bhavalobhajappa이 있다. 이 복합어에 대하여 전재성님운 존재에 대한 탐욕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존재를 재촉하는 탐욕이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greedy urge for existence’라 하였다. ‘존재를 재촉하는 탐욕이라는 뜻이다. 각묵스님의 번역과 비슷하다.

 

번뇌가 다한 자의 감관은?

 

부처님은 슬픔의 뿌리를 모두 뽑아 버렸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슬픔(soka)은 번뇌와 동의어이다. 부처님은 이제 막 깨달음을 얻었을 때 번뇌는 모두 소멸 되었다. 그런 부처님의 감관은 매우 맑았다. 이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후 브라흐마 사함빠띠의 청원을 받고 세상에 진리를 알려 주려고 가는 길에 만난 우빠까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도중에 만난 우빠까는 부처님에게 그대의 감관은 매우 깨끗하고 모습은 아주 밝습니다. 그대는 누구를 모시고 있으며, 그대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또 그대는 누구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까?(M26)”라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번뇌가 다한 자의 감관은 매우 맑았다는 사실이다.

 

그대는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이런 사실을 안 악마 빠삐만은 이번에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Sattavassasutta(칠년추적의 경, S4.24)

  

빠알리어

Ya vadanti mamedanti

ye vadanti mamanti ca,
Ettha ce te mano atthi

na me samaa mokkhasīti.

 

전재성님역

[빠삐만]

어떤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라 말하고,

나의 것에 대해 말하지만,

수행자여, 그대의 정신이 거기에 있으면

그대는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리.”

 

각묵스님역

“ ‘이것은 나의 것이라 말해지는 것도 있고

나의 것이라 말하는 자들 또한 있도다.

사문이여, 만일 그대 마음이 여기에 존재한다면

그대는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빅쿠보디역

"If you have discovered the path,

The secure way leading to the Deathless,

Be off and walk that path alone;

What's the point of instructing others?"

 

 

 

 

 

부처님이 위 없는 더 이상 깨달을 것 이 없는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었다면 당연히 번뇌가 있을 수 없다. 번뇌가 없기 때문에 감관은 매우 맑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칠년이나 추적한 악마 빠삐만은 부처님의 경지를 이해 못하는 것 같다. 부처님이 선정에 들지만, 선정에서 나오면 자아의식이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것이라는 유아견에 사로 잡혀 있다면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말한다.

 

빠삐만이 “~있도다.”라 하였는데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악마 빠삐만이 “~있도다.”라 번역하였다. 이렇게 ‘~도다라는 말을 빠삐만이 말한 것으로 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

 

초불연 번역을 보면 하나니’ ‘하도다식의 옛날방식의 문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주로 부처님에게 적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빠삐만이 “~이라 말하는 자들 또한 있도다.”라 하였다. 부처님에게나 적용되는 하도다식의 표현에 대하여 빠삐만에게도 적용하는 것은 번역의 일관성에 대한 문제를 야기 한다.

 

결코 그대는 나의 길을 보지 못하리

 

악마 빠비만은 유아견을 가지고 있는 한 자신의 수중에 있다고 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송으로 답한다.

  

 

  

Sattavassasutta(칠년추적의 경, S4.24)

  

빠알리어

Ya vadanti na ta mayha

ye vadanti na te aha,
Eva
pāpima jānābhi

na me maggampi dakkhasīti.

 

전재성님역

[세존]

그들이 말하는 것은 나의 것아니고

그렇게 말하는 자들 가운데 나는 없네.

빠삐만이여, 그대는 이와 같이 알아야 하리.

결코 그대는 나의 길을 보지 못하리.”

 

각묵스님역

그들이 말하는 나의 것은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것’]말하는 자들 가운데 나는 포함되지 않도다.

빠삐만이여, 그대는 이렇게 알아야 하나니

그대는 결코 나의 길을 보지 못할 것이로다.”

 

빅쿠보디역

“Those people going to the far shore

Ask what lies beyond Death's realm.

When asked, I explain to them

The truth without acquisitions.”

 

 

 

 

이 게송은 무아론에 대한 것이다. 악마 빠삐만이 유아론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아론으로 응수한 것이다.

 

아라한은 악마의 영역에서 벗어난 자

 

부처님은 게송에서 그들이 말하는 것은 나의 것아니고(Ya vadanti na ta mayhaṃ) 라 하였다. 이 구절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 그것은 나의 것이다.’에 대하여 나는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는 뜻이다. 부처님은 사람들이 말하는 유위법적인 세계에 속해 있지 않다.

 

(1147번 각주, 전재성님)

 

 

이는 주석에 근거 하지 않는 전재성님 개인적 견해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내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 한다. 이렇게 나가 있다고 보면 이미 집착된 것이다.

 

집착되어 있다는 것은 윤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제 막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에게 나라는 관념이 있을 수 없다. 선정삼매에 들거나 선정삼매에서 나와도 나에 대한 집착이 있을 수 없다. 나의 대한 집착이 없다는 것은 번뇌가 소멸되었다는 것이나 다름 없다.

 

번뇌가 소멸 된 자, 즉 아라한은 악마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결코 그대는 나의 길을 보지 못하리(na me maggampi dakkhasīti)”라 한 것이다.

 

갈려면 혼자서 길을 가라

 

악마 빠삐만은 부처님으로부터 무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영역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한다.

 

 

  

Sattavassasutta(칠년추적의 경, S4.24)

  

빠알리어

Sace magga1 anubuddha

khema amatagāmina,
Apehi gaccha tvameveko

kimaññamanusāsasīti.

 

전재성님역

[빠삐만]

만약 그대가 깨달았다면

안온과 불사에 이르는 길을 가라.

그대 홀로 가라.

그대는 왜 남을 가르치는가?”

 

각묵스님역

만일 크게 안은하고 불사로 인도하는

그런 길을 이미 찾아 내었다면

물러나라. 그대가 혼자서 가라.

그대 왜 남들에게 교계하고 있는가?”

 

빅쿠보디역

"If you have discovered the path,

The secure way leading to the Deathless, <271>

Be off and walk that path alone;

What's the point of instructing others?"

 

 

 

 

악마 빠삐만은 부처님이 불사의 진리를 깨달은 것을 비로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빠삐만은 갈려면 혼자서 길을 가라고 하였다. 혼자 깨달은 그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려 하는 것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왜 남을 가르치는가? (kimaññamanusāsasīti)”라고 말한다. 여기서 빠알리어 kimaññamanusāsasīti‘Kim (what?)+añña(Knowledge) +manusā (human)+sasīti(instructed)’의 뜻이다.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서

 

이 구문을 보면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서 빠삐만이 열반을 재촉하는 말이 연상된다. 악마 빠삐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빠삐만이여, 나의 이 청정한 삶이 풍요롭게 번영하고 널리 전파되어 많이 알려지고 유행하여 하늘사람과 인간에게 잘 선포 될 때 까지 나는 완전한 열반에 들지 않겠다.’라고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지금 세존의 청정한 삶은 이 풍요롭게 번영하고 널리 전파되어 많이 알려지고 유행하여 하늘사람과 인간에게 잘 선포 되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상의 존귀한 님께서는 지금 완전한 열반에 드십시요. 올바로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지금 완전한 열반에 드십시요. 세존이시여, 지금 완전한 열반에 드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완전한 열반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6,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악마 빠삐만은 부처님의 열반을 재촉하고 있다. 부처님이 늙어서 열반이 가까워 오자 어서 열반에 들라고 재촉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빠삐만이여, 그대는 관여하지 말라라고 말씀 하시면서 삼개월이 지난 뒤에 열반에 들 것임을 말씀 하신다.

 

디가니까야 완전한 열반의 큰 경을 보면 악마 빠삐만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하였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시고 난 이후 45년 동안 전법을 하면서 수 많은 사람들을 교화 시켰다.

 

나는 그들의 질문을 받고 대답할 뿐이네

 

빠삐만이 홀로 가라는 말을 무시하고 부처님은 게송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Sattavassasutta(칠년추적의 경, S4.24)

  

빠알리어

 

 

전재성님역

[세존]

저 언덕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불사의 세계에 관해 묻는다네.

나는 그들의 질문을 받고 대답할 뿐이네.

집착에서 벗어나는 진리를.”

 

각묵스님역

저 언덕으로 가는 사람들이

불사의 영역을 묻노라.

그들의 질문을 받아 나는 설하노니

재생의 근거가 없는 그러한 진리를.”

 

빅쿠보디역

"Those people going to the far shore

Ask what lies beyond Death's realm.

When asked, I explain to them

The truth without acquisitions."

 

 

 

 

이 게송에 대한 빠알리어가 인터넷 THE TIPITAKA사이트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공란으로 처리하였다.

 

우빠디(upadhi), 집착 vs 재생의 근거(소유물)

 

각묵스님역을 보면 재생의 근거라 하였다. 시어라기 보다 논장의 설명을 보는 것 같다. 이렇게 번역한 것에 대하여 여러 경전에서 열반은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 버림으로 설명되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기뻐함 경(S1.12)에서도 재생의 근거(소유물)’로 번역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각묵스님이 재생의 근거(소유물)’라고 주석적 번역을 한 것은 우빠디(upadhi)에 대한 번역이다. 십이연기에서 우빠다나와 동의어인 우빠디는 일반적으로 집착으로 번역된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집착에서 벗어나는 진리를라 하여 집착으로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집착의 뜻인 ‘acquisitions’를 사용하여 “without acquisitions”라 하였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우빠디에 대하여 다시 태어남(재생)의 근거가 된다는 주석의 설명을 중시하여 재생의 근거가 없는 그러한 진리를라고 주석적 번역을 한 것이다.

 

팔다리가 잘린 집게처럼

 

빠삐만과 부처님의 대화는 세 번에 걸쳐서 이루어져 있다. 처음에 빠삐만이 선정에 든 부처님에 대하여 번뇌가 가득한 것처럼 시비를 걸듯이 말하였고, 두 번째는 유아론을 말하면서 자신의 영역에 있음을 말하였다. 세 번째에서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인정하면서 홀로 갈 것을 종용한다.

 

그런데 빠삐만의 게송을 보면 대화 할 때 마다 입장이 조금씩 바뀐다. 나중에는 완전히 인정하게 된다. 그럼에도 게송에서는 반어법을 사용한다. ‘그대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그대라는 말은 아랫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세 번의 대화를 거친후 빠삐만이 부르는 호칭이 달라진다. 다음과 같이 세존이시여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패했음을 인정하게 된다.

 

 

[빠삐만]

예를 들어 세존이시여, 마을이나 읍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연못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게가 산다고 합시다. 세존이시여, 그때 많은 아이들이 그 마을이나 읍에서 나와 그 연못으로 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그 게를 잡아서 땅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게가 자신의 집게를 세우면 그 아이들은 나무나 돌멩이로 자르고 부수고 산산조각 내버립니다.

 

이와 같이 세존이시여, 그 게의 모든 집게가 잘리고 부서지고 산산조각 나면 다시 연못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존이시여, 이전의 굽은 것, 왜곡된 것, 삐뚤어진 것 등 어떤 것이든 모든 것들을 세존께서는 자르고 파괴하고 산산조각 나게 했으므로 이제 기회를 엿보아 다시 세존께 가까이 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Sattavassasutta-칠년추적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4, 전재성님역)

 

 

악마 빠삐만은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팔과 다리가 잘린 집게로 비유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역할에 대하여 굽은 것, 왜곡된 것, 삐뚤어진 것이라 하였다.

 

맛지마니까야에서도 집게의 비유가

 

초기경에서 악마 빠삐만은 부처님과 항상 반대편에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집게의 비유는 맛지마니까야에도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재성님과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맛지마니까야 MN.I.234에도 나온다고 하였다.

 

맛지마니까야에서 집게에 대한 비유는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M35)’에 나온다. 경에 따르면 니간타 교도 쌋짜까가 지닌 왜곡, 모순, 편견은 어떠한 것이든 세존에 의해서 완전히 잘려지고 부러지고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M35)”라 되어 있다. 악마 빠삐만이 니간타 교도 삿짜까로 치환되어 설명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상윳따니까야 칠년추적의 경(S4.24)’에 대응 되는 경은 맛지마니까야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M35)’이라 볼 수 있다.

 

굽은 것, 왜곡된 것, 삐뚤어진 것의 대명사 빠삐만

 

부처님의 반대편에 서서 항상 굽은 것, 왜곡된 것, 삐뚤어진 것을 주장하던 빠삐만은 팔과 다리가 잘린 게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왜곡, 모순, 편견의 상징과도 같은 빠삐만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고 부처님의 면전에서 사라진다.

 

 

[빠삐만]

기름칠한 색깔의 돌 주위에

까마귀 하나가 맴돌며 생각하기를

우리가 여기서 부드러운 것을 찾으면

뭔가 달콤한 것을 얻겠네.

 

그러나 아무런 달콤한 것을 얻지 못해

까마귀는 거기서 날아가버렸네.

바위 위에 앉아 있던 까마귀처럼

우리는 절망하여 고따마 곁을 떠나네.”

 

(Sattavassasutta-칠년추적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4, 전재성님역)

 

 

 

2015-02-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