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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청년출가의 당위성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 28. 20:23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청년출가의 당위성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마라상윳따를 보면 악마 빠삐만은 변신에 매우 능하다. 이번에는 늙은 행려병자와 같은 수행자의 모습으로 수행승들 앞에 나타난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가 시작 된다.

 

 

Eva me suta: eka samaya bhagavā sakkesu viharati silāvatiya.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싸끼야 족이 사는 씰라바띠 마을에 계셨다.

 

(Sambahulasutta-많은 수행승들의 경, 상윳따니까 S4.21, 전재성님역)

 

 

경에서 씰라바띠(silāvati) 마을이 나온다. 그런데 싸끼야족이 사는 마을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싸끼야족의 거주지로 네팔 지역의 히말라야 산기슭에 위치했다. 씰라바띠는 경전가운데 오직 이 경과 다음 경에만 등장한다. ThagA.I.208에 의하면 반두라 장로의 출생지이다.(1105번 각주)”라 하였다. 여기서 ThagA는 성전협 번역서 부록에 실려 있는 약어표에 따르면 ‘Theragatha-Atthakatha’라 되어 있다. ‘장로게 주석서라는 뜻이다.

 

전재성님은 장로게주석서를 이용하여 실라바티가 히말라야 산기슭에 사는 사끼야족의 마을임을 밝혔다. 그러나 이 부분과 관련하여 초불연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빅쿠보디의 각주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삭까에서 실라와띠에 머무셨다라고 되어 있다. 삭까가 종족의 이름임에도 마치 지명처럼 사용되었다. 빅쿠보디의 번역을 찾아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On one occasion the Blessed one was dwelling among the Sakyans at Silavati.”라 번역하였다. 직역하면 어느 때 축복받은 이는 실라바띠에서 사끼얀들과 함께 머물러 있었다가 된다. 분명히 사끼야족들과 함께 있었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각묵스님은 삭까에서 실라와띠에 머무셨다라고 하여 고개를 갸웃하게만든다.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를 독려하며 머물고 있었다?

 

부처님이 싸끼야족의 마을에서 수행승들과 함께 머물렀다. 그런데 수행승들의 수행정진하는 모습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Tena kho pana samayena sambahulā bhikkhū bhagavato avidūre appamattā ātāpino pahitattā viharanti.

 

그 때 많은 수행승들이 세존께서 계신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있었다.

 

(Sambahulasutta-많은 수행승들의 경, 상윳따니까 S4.21, 전재성님역)

 

 

수행하는 모습에 대하여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있었다.”라 하였다. 이는 “appamattā ātāpino pahitattā viharanti”에 대한 번역이다.

 

세 번역자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세 번역자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appamattā ātāpino pahitattā viharanti

 

1)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있었다.(전재성님역)

2)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를 독려하며 머물고 있었다. (각묵스님역)

3) dwelling not(far from the Blessed one)-diligent, ardent, and resolute.(빅쿠보디역)

 

 

각묵스님은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를 독려하며 머물고 있었다.”.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이다. 특히 근면하고라는 말이 그렇다. 또 동어가 반복되어 있다.

 

Appamattā는 불방일의 뜻이다. Ātāpī‘Ardent, zealous, strenuous, active’의 뜻으로 열심인의 의미이다. Pahitattā Pahita로 설명될 수 있다. PCED194에 따르면 Pahitapahiāti의 과거분사형이다. 그래서 ‘sent(보낸)’의 뜻이다.

 

그런데 Pahita에 대한 또 하나의 뜻으로 한문과 일어사전에 따르면 熱心的, 努力的, 熱心なる, めた이라 되어 있다. 열심히 노력한다는 뜻이다.

 

한자어사전에 따르면 ‘-atta 自勵的, 專念, 精進.’라 되어 있다. 이는 Pahitaatta가 붙어서 Pahitattā를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Pahitattā自勵的이라 설명되어 있다.

 

自勵的을 우리말로 바꾸면 스스로 격려하여가 될 것이다. 각묵스님이 번역한 문구 중에 스스로를 독려하며와 일치 된다.

 

‘viharanti’는 머물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appamattā ātāpino pahitattā viharanti”를 있는 그대로 직역하면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노력하며 머물러 있다라는 뜻이 된다. 각묵스님의 번역과 유사하다. 그러나 매끄럽지 못하다. 반면에 전재성은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있었다.”라고 매끄럽게 처리하였다. 이 구문과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dwelling not far from the Blessed

One-diligent, ardent, and resolute.”라 하였다. 번역하면 근면하고, 열심이고, 의지가 굳게 머물고 있었다가 될 것이다.

 

각묵스님과 빅쿠보디는 빠알리어 viharanti에 대하여 머물다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후 초불연의 번역서에서는 머물다라는 많이 나오는데 이는 viharati에 대하여 직역하였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 보여진다.

 

이번에는 늙은 바라문 고행자의 모습으로

 

악마 빠삐만은 수행승들의 수행을 방해하기 위하여 갖가지모습으로 변신한다. 이번에는 어떤 모습으로 변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Atha kho māro pāpimā brāhmaavaṇṇa abhinimminitvā mahantena jaaṇḍuvena ajinakkhipanivattho jiṇṇo gopānasivako ghurughurupassāsī udumbaradaṇḍa gahetvā yena te bhikkhū tenupasakami.

 

그런데 그 때 악마 빠삐만이 한 성직자의 모습으로 몸을 나타내어 큰 상투를 틀고, 영양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늙어서 서까래처럼 된 등을 구부리고,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우담바라 나무로 된 지팡이를 들고, 수행승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Sambahulasutta-많은 수행승들의 경, 상윳따니까 S4.21, 전재성님역)

 

 

이 장면을 보면 불쌍한 고행자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것도 늙고 병들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비참한 모습이다.

 

경에 따르면 빠삐만이 성직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 여기서 성직자는 ‘brāhmaa’를 번역한 것이다. 전재성님은 번역서에서 브라흐마나에 대하여 성직자바라문두 가지로 번역하였다. 이에 반하여 초불연에서는 오로지 바라문으로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브라흐민(Brahmin)’이라 하였다. 이는 브라흐마나의 영어식 표현이 브리흐민이기 때문이디.

 

성직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빠삐만에 대한 묘사를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큰 상투, 영양 가죽 옷, 구부러진 등, 더구나 기침까지 하며 나무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에도 안쓰러운 것이다. 여기서 우담바라 나무로 된 지팡이가 있다. 이는 어떤 의미일까?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이 무화과나무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욕심이 적은 고행자를 나타내는 것이었다.(1108번 각주)”라 하였다.

 

젊었을 때 즐기라고

 

악마 빠삐만은 왜 늙고 병든 고행자의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daharā bhavanto pabbajitā susukālakesā bhadrena yobbanena samannāgatā pahamena vayasā anikīitāvino1 kāmesu, bhuñjantu bhonto mānusake kāme, mā sandiṭṭhika hitvā kālika anudhāvitthāti.

 

[빠삐만]

존자들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메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

 

(Sambahulasutta-많은 수행승들의 경, 상윳따니까 S4.21, 전재성님역)

 

 

악마 빠삐만은 비참한 고행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수행승들을 유혹하고 있다. 특히 나이가 젊은 수행승들에게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십시오. (bhuñjantu bhonto mānusake kāme)”라고 타락을 부추기고 있다. 더구나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젊었을 때 즐기라는 것이다.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

 

악마 빠삐만이 유혹하는 장면을 보면 마치 우리나라 노래 중에서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라는 구절이 연상된다. 또 육십년대에 한창 유행하였던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 피었다가 시들으면 다시 못 올 내 청춘. 마시고 또 마시어 취하고 또 취해서 이 밤이 세기 전에 춤을 춥시다.”라는 기타부기노래의 가사가 연상된다.

 

악마 빠삐만은 열심히 수행하는 수행승들 앞에 나타나 늙고 병들어 버린 자신의 비참한 몰골을 보여 주면서 젊었을 때 마음껏 즐기라고 말한다. 한번 간 시간은 돌아 오지 않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 병이 들면 즐기고 싶어도 즐기지 못함을 말한다. 마치 우리나라 유행가의 내용을 그대로 말하는 것 같다.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각묵스님은 위의 빠알리 문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존자들은 젊고 청춘이고 활기차며 머리칼이 검고 축복 받은 젊음을 구족한 초년의 나이에 감각적 욕망을 누려 보지도 못한 채 동진(童眞)으로 출가하였습니다. 존자들이여, 인간에게 풍족한 감각적 욕망을 누리시오. 목전에 분명한 것을 제쳐 두고 시간이 걸리는 것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Sambahulasutta-많음 경, 상윳따니까 S4.21, 각묵스님역)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전재성님과 느낌이 다르다. 약간 경직되어 있고 구족이나 동진과 같은 한자어가 많이 사용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마지막 구절을 보면 목전에 분명한 것을 제쳐 두고 시간이 걸리는 것을 추구하지 마십시오.”라 하였는데 목전이라는 말은 과도한 의역이라 본다. 

 

구족(具足)에 대하여

 

각묵스님이 젊음을 구족한이라 번역하였다. 구족이라는 말은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 말이다. ‘구족계라는 말이 있듯이 승가에서 주로 사용되는 말이다. 여기서 구족(具足)이라는 말은 빠짐없이 두루 갖추다라는 말이다. 빠알리어 ‘Samannāgata’를 번역한 것이다.

 

Samannāgata‘endowed with; possessed of’의 뜻이다. 한자어와 일본어 사전에는 具備, 具足的. 具備した, 具足라 되어 있다. 전재성님은 부여받다는 뜻으로 하여 청춘을 부여받았으나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endowed with the blessing of youth,”라 하여 청춘을 부여받은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젊은 수행승들의 청춘인 상태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럼에도 각묵스님은 구족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젊음을 구족한이라 하였는데 승가이외의 재가불자들에게는 낯선 표현이라 볼 수 있다.

 

? 동진출가라고?

 

같은 말이라도 한자어로 표현을 하면 고상하게보인다. 그래서일까 법률용어 대부분은 뜻을 알 수 없는 어려운 한자어로 많이 표현 되어 있다. 경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문경전이 대표적이다.

 

한문경전을 우리말로 번역해 놓은 것을 보면 한문용어 투성이다. 그런데 한문용어를 우리말로 풀어 놓으면 품위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한문으로 된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을 읽어야 독송하는 맛이 난다고 말한다.

 

아직까지 한문으로 된 예불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한문을 사용하면 고상하고 품위가 있다고 생각해서 일 것이다. 그런 한문용어 중에 동진이라는 말이 있다.

 

각묵스님은 번역에서 동진(童眞)으로 출가하였습니다라 하였다. 동진이란 무엇일까? 승가에서 스님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 신심있는 불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예불문에서 동진출가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산 혜연선사의 발원문에 “ 아이로서 출가하여 귀와 눈이 총명하고”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아이로서 출가한다는 말이 동진출가를 말한다. 

 

동진과 관련된 빠알리어가 ‘yobbanena’이다. Yobbanena‘youth’의 뜻이다. 한자사전에는 , 이라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Yobbanena라는 말은 동진이라  볼 수 없다.

 

일반적으로 동진출가라 하면 청소년 또는 이 이전인 아이일 때를 말한다. 이는 주경스님의 공포의 법랍이야기가 잘 말해 준다.

 

주경스님의 글 중에 공포의 법랍이야기가 있다. 같은 나이이지만 어려서 출가한 스님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수덕사에서는 일명 ‘공포의 법랍(스님이 된 후부터 세는 나이)’이라는 말이 있다. 워낙에 동진출가자(어려서 출가하는 스님)가 많아 스님들 나이에 비해 법랍이 많아서 생긴 말이다.

 

보통은 출가가 빨라도 고등학교를 마치는 20세 전후인데, 동진스님들의 경우 대개 13세에 계를 받는다. 이 동진출가자를 일명 올깨끼라고 한다. 이산 혜연 선사 발원문에 나오듯이 ‘아이로서 출가하여 귀와 눈이 총명하고 말과 뜻이 진실하며…’ 동진스님들은 뼛속부터 온전하게 승려의 생각과 모습, 행동을 갖추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주경 스님/서산 부석사 주지, 나의 도반 이야기,  불광에 연재된 글)

 

 

주경스님에 따르면 동진스님들의 경우 대개 13세에 계를 받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아이로서 출가한다는 동진출가자는 13세 이전의 미성년자이다. 더구나 변성기이전이다.

 

부처님 당시 미성년자의 출가도 있었다. 그러나 반드시 부모의 동의가 필요 하였다. 그렇다고 수행승들 모두가 아이로서 출가했다고 볼 수 있을까? 성년이 되어서 출가한 자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각묵스님은 동진(童眞)으로 출가하였습니다라 번역하였다.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설령 동진출가자가 있을지라도 출가자들 모두가 다 동진출가자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전재성님은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라 하여 단지 젊어서 출가 하였다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또 빅쿠보디는 “You, sirs, have gone forth while young”라 하여 젊음을 뜻하는 young’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을 뿐이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

 

악마 빠삐만의 말 중에 매우 난해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 (mā sandiṭṭhika hitvā kālika anudhāvitthāti)”라는 말이다. 이 말은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십시오.”라는 구절에 이어진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말라는 무슨 뜻일까? 먼저 시간에 매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와 관련하여 빠알리어 sandiṭṭhika이 있다.

 

sandiṭṭhika  ‘visible; belonging to this life, 現世, られたる, 現証, 自見.’의 뜻이다. hitvāして, てて, てて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sandiṭṭhika hitvā’의 뜻은 현재 나타내어진 것을 버리다의 뜻이 된다. 여기에 부정을 뜻하는 말 mā가 붙어 mā sandiṭṭhika hitvā”가 되었을 때 이는 현재 있는 것을 버리지 마시오라는 뜻이 된다.

 

다음으로 “kālika anudhāvitthāti”이다. 여기서 kālika‘temporal(시간의), belonging to time(시간에 속해있는), in time(제때에, 일찍)’의 뜻이다. Anudhāvitthāti‘Anudhāvi(ran after:쫒아 갔다 ) +vitthāti(lies:놓여있다, 달려 있다)’의 뜻이다. 그래서 “kālika anudhāvitthāti”때를 놓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라고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은 목전에 분명한 것을 제쳐 두고라고 의역하였다. 빅쿠보디는 in order to pursue what takes time”이라 하였다.

 

세 번역을 비교해 보면

 

빠삐만은 젊은 수행자를 유혹하고 있다. 머리가 칠흑같이 검을 때 마음껏 쾌락을 누려야지 젊은 나이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며 고행하는 것에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번역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bhuñjantu bhonto mānusake kāme,

mā sandiṭṭhika hitvā kālika anudhāvitthāti

 

1) 전재성님역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

 

2) 각묵스님역

인간에게 풍족한 감각적 욕망을 누리시오.

목전에 분명한 것을 제쳐 두고 시간이 걸리는 것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3) 빅쿠보디역

“Enjoy human sensual pleasures, sirs;

do not abandon what is directly visible in order to pursue what takes time.”

 

 

각묵스님역에서 인간에게 풍족한 감각적 욕망을 누리시오에서 인간에게 풍족한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풍족한이라는 말은  빠알리 원어에 보이지 않는다. 빠알리어 mānusake에서 mānusaka‘human’의 뜻이다. 그 어디에도 풍족하다는 뜻이 보이지 않는다.

 

인생사주기로 보았을 때

 

문장에서 핵심구절은 “mā sandiṭṭhika hitvā kālika anudhāvitthāti”이다. 두 가지 뜻으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때를 놓치지 말라는 뜻이다. 놀 때에는 놀고, 즐길 때는 즐겨야한다는 뜻이다. 시간은 한번 지나가버리면 영원히 돌아 오지 않기 때문에 젊었을 때 마음껏 쾌락을 즐겨야 한다는 뜻이다.

 

또 하는 인생사주기로 설명할 수 있다. 젊었을 때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는 것도 하나의 의무로 보는 것이다. 이는 바라문의 인생사주기로 설명될 수 있다. 그래서 초불연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한편 마라의 주장은 전통적인 바라문교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바라문교에서 출가자가 되는 것은 인생의 4단계 가운데서 마지막단계에 해당한다. 그들이 가르치는 네 단계의 인생은 1) 스승밑에서 학습하는 청년시절의 범행기(Brahmacariya), 2) 가정에서 생활하며 가장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가주기(garhastya), 3) 가정과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숲속에 들어가 은거하는 임서기(vanaprastha), 4) 숲속의 거처까지 버리고 완전히 무소유로 걸식하고 편력하는 생활에 들어가는 유행기(sannyasa)로 나누어진다.

 

(초불연 상윳따1 493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은 바라문의 인생사주기로 문장을 설명하고 있다. 주석의 인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각묵스님의 견해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문장과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어떻게 각주 하였을까? 찾아 보니 다음과 같다.

 

 

See 1:20. Here Mara appears as a proponent of the brahmanical idea that renunciation (sannyasa) must be postponed until after one has enjoyed a full married life. On how young bhikkhus, lads "in the prime of life, who have not dallied with sensual pleasures," can live the holy life without being overcome by sensual desire, see 35:127.

 

(cdb 303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 역시 바라문의 인생사주기에 입각하여 설명하고 있다. 악마 빠삐만이 늙은 바라문으로 나타나 젊은 수행승들에게 감각적 쾌락을 누리라고 말하는 것은, 바라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젊은사람이 자신의 의무를 다 수행하지 않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늙어서 출가해도 늦지 않다고

 

바라문의 인생사주기에 따르면 공부해야할 때는 공부를 하고, 공부가 끝나면 결혼을 하여 가업을 물려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오늘날이라 하여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 어느 사회에서나 청소년기에는 열심히 공부한다. 그래서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자 한다. 대학을 나오면 좋은 직장을 갖고자 한다. 그리고 결혼을 하여 사회의 일원이 된다. 이것이 전형적인 삶의 패턴이다.

 

고대인도에서 최상위 카스트인 바라문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청소년기에 공부를 하고 청년이 되면 결혼을 하여 가업을 이어 받아 사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정통바라문교에서는 자식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때 쯤이 되면 집을 나와 숲속에서 살았다. 비로소 출가하게 되는 것이다.

 

고대 정통바라문들은 젊었을 때 자신의 할 바를 다하고 출가 하는 것이다. 배울만치 배우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일을 함으로서 자신의 할 바를 다하고 출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주기인 유행기에는 숲속의 거처까지 버리고 완전히 무소유로 걸식하고 편력하는 생활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들의 출가는 이와 다르다. 인생사주기에서 학습기에 출가한 것이다. 이런 점을 빠삐만이 유행기의 브라만으로 변신하여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빠삐만은 젊은 수행승들을 나무라듯이 존자들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 말한다. 마치 자신의 할 바를 다 하지 않고 젊은 나이에 출가한 것에 대하여 못마땅해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안타깝게 여겨서 하는 말이다.

 

늙은 바라문으로 변신한 악마 빠삐만이 수행승들에게 젊었을 때 마음껏 감각적 쾌락을 누리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할 바를 다 하라는 말과 같다.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가업을 이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늙어서 출가해도 늦지 않음을 말한다.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유행기의 늙은 브라만이 말하자 젊은 수행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수행승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na kho maya brāhmaa sandiṭṭhika hitvā kālika anudhāvāma, kālikañca kho maya brāhmaa hitvā sandiṭṭhika anudhāvāma. Kālikā hi brāhmaa kāmā vuttā bhagavatā bahudukkhā bahūpāyāsā ādīnavo ettha bhiyyo.

 

[수행승들]

성직자여,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쫒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성직자여,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쫒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성직자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더 큰 것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 하셨습니다.

 

(Sambahulasutta-많은 수행승들의 경, 상윳따니까 S4.21, 전재성님역)

 

 

 

bhikkhu

 

 

수행승들이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쫒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이는 유행기의 브라만으로 변장한 빠삐만이 시간에 메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고 말한 것에 대한 대응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시간에 매인 다는 것

 

시간에 매인 다는 것은 인생사주기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공부해서 대학가고, 대학나와서 취직하고, 취직하고 나서 결혼하고, 결혼하고 나서 자식을 낳는 수순을 말한다. 마치 엘리베이터 타는 식으로 인생이 원할하게 올라 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인생스케줄은 시간에 매이는 것으로 본다.  

 

시간에 매이게 되면 때가 되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 때가 되면 공부를 해야 하고, 때가 되면 결혼을 해야 하고, 때가 되면 자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간에 매이는 것이다. 그래서 “mā sandiṭṭhika hitvā kālika anudhāvitthāti”라 하였는데, 이는 한마디로 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승들은 때를 무시하였다. 정통바라문교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인생사주기를 무시한 것이다.

 

현재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

 

정통바라문교에서 출가는 손자가 태어날 때쯤 이다. 그런데  학습기에 출가한다면 어떻게 될까? 가주기가 없게 되는 것이다. 바라문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전재성님역)”라거나,  목전에 분명한 것을 제쳐 두고 시간이 걸리는 것을 추구하지 마십시오.(각묵스님역)”라거나 do not abandon what is directly visible in order to pursue what takes time.(빅쿠보디역)”이라 한 것이다. 

 

이에 수행승은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쫒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na kho maya brāhmaa sandiṭṭhika hitvā kālika anudhāvāma)”라 하여 맞받아 치듯이 이야기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시간에 매인 다는 것은 인생사주기대로 사는 방식을 말한다. 그런데 수행승들은 사주기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학습기에 바로 출가해 버린 것이다. 그런 삶 자체가 현재를 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na sandiṭṭhika)”라 한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알 수 없기에

 

수행자들이 현재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음을 말한다. 과거나 미래에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만일 인생사주기대로 살아 간다면 인생스케줄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사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미래가 오리라는 보장이 없다.

 

인간의 수명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미래는 그 때 가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직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하여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 간다.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고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그런 삶을 거부하는 것이 수행승들이다. 어쩌면 한량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수도 없이 겪었을지 모른다.

 

수행승들은 더 이상 윤회하지 않기 위하여 이 생에서 멈추고자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제자들 앞에 고대 인도에서 카스트의 정점에 있었던 정통바라문의 늙은 유행자가 나타나 순리대로 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밤이 지났을 때 내일이 올지 내생이 시작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빠삐만은 젊었을 때 할 바를 다하고 즐길 것 다 즐기고 노년에 출가해도 늦지 않다는 식으로 말하는 달콤하게 유혹한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답하기를

 

늙은 바라문 고행자는 젊었을 때 자신의 할 바를 다하고 삶을 즐기라고 말한다,. 이에 수행승들은 또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Sandiṭṭhiko aya dhammo akāliko ehipassiko opanayiko paccatta veditabbo viññūhīti. Eva vutte bhante so brāhmao sīsa okampetvā jivha nillāletvā tivisākha nalāe nalāika vuṭṭhāpetvā daṇḍamolubbha pakkantoti.

 

[수행승들]

그러나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세존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Sambahulasutta-많은 수행승들의 경, 상윳따니까 S4.21,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요약한 말이다. 불법승 삼보 중에 법보에 대한 내용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1)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2)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3)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4)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5)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이런 가르침을 따르는 부처님의 제자들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 가지 않는다. 그것은 인생스케줄에 따른 삶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세 번역자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의 특징에 대하여 다섯 가지로 요약되었다. 이에 대하여 각번역자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빠알리어

전재성님역

각묵스님역

빅쿠보디역

sandiṭṭhiko

현세의 삶에 유익한 가르침이며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directly visible

akāliko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시간이 걸리지 않고

immediate

ehipassiko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는 것이고

inviting one to come and see

opanayiko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향상으로 인도하고

applicable

paccatta veditabbo viññūhī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다.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

to be personally experienced by the wise

 

 

 

표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이 sandiṭṭhiko’‘akāliko’ 에 대한 번역어이다. 이에 대하여 시간을 초월하는 부처님의 가르침 아깔리까(Akalika)(2014-09-18)’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일어 났을 때

 

부처님의 제자들은 괴로움과 윤회의 종식을 위하여 수행한다. 젊은 수행승들 앞에 기침을 콜록콜록 하며 늙어 브라만 유행자가 나타나서 때를 놓치지 말라며 젊었을 때 마음껏 감각적 쾌락을 즐겨야 한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인생스케줄대로 살아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수행승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더 큰 것이라 되받아 치듯이 말한다. 이는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꽃다운 젊은 나이에 출가한 수행승들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극복하는 것일까? 감각적 쾌락이 결과론적으로 보았을 때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라 하였는데 그럼에도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런 고민에 대한 것이 초기경에 도처에서 보인다.

 

고양이의 경에 이런 내용이 있다. 어느 날 수행승이 탁발하러 나갔다. 그러다가 어느 여인을 보았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했기 때문에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S20.10)”라고 되어 있다.

 

어머니로, 누이로, 딸로 보면 된다고

 

머리가 칠흑같이 검고 혈기가 왕성한 수행승이 몸매가 드러나게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을 보았을 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일어날 것이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에 빅쿠보디는 CDB 303번 각주에서 the holy life without being overcome by sensual desire, see 35:127.”라 하였다. 상윳따니까야 S35.127을 보라는 것이다. 열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우데나 왕]

바라드와자여, 이 수행승들이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 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목숨이 다 할 때까지 충만하고 깨끗하고 청정한 삶을 살면서 세월을 보낼 수 있는 원인은 무엇이고 조건은 무엇입니까?”

 

[바라드와자]

대왕이여, 알고 또한 보는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는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머니 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누이 같은 여인에 대하여 누이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딸 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왕이여, 이 수행승들이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 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목숨이 다 할 때까지 충만하고 깨끗하고 청정한 삶을 살면서 세월을 보낼 수 있는 원인은 이것이고 조건은 이것입니다.”

 

(바라드와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127, 전재성님역)

 

 

여기서 우데나 왕은 부처님당시 십육대국 중의 하나인 꼬삼비의 왕이다. 바라드와자는 부처님의 제자 중에 사자후를 지닌 자 가운데 제일이라 알려져 있다.

 

우데나 왕은 젊은 수행승들이 어떻게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며 지내는 것인지에 대하여 묻는다. 그래서 원인은 무엇이고 조건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여기서 원인과 조건은 연기법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왜냐하면 연기법은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인과 조건에 따라 결과는 그대로 나타난다.

 

바라드자와는 왕의 질문에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산다고 하였다. 여인에 대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일어 났을 때는 어머니로, 누이로, 딸로 보면 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어머니와 누이와 딸들은 범해서는 안되고 존중되어야 할 대상이다.(Srp.II.393)”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근친상간이 일어 날 수 없다. 그래서 여인을 보았을 때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가족으로 보아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머니 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누이 같은 여인에 대하여 누이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딸 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라고 말씀 하셨다는 것이다.

 

닭을 보면 통닭구이로 보인다는데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닭이 돌아 다니는 것을 보면서 군침을 흘렸다고 한다. 닭이 닭백숙이나 통닭으로 보이기 때문이라 한다. 이런 말을 듣고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당에 돌아 다니는 닭은 닭일 뿐인데, 닭을 보면 통닭구이를 발상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 되지 않은 것이다.

 

닭고기를 좋아 하는 사람들은 닭이 닭으로 보이지 않고 닭고기가 돌아 다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낚시 좋아 하는 사람은 광어를 보면 광어회가 생각날 것이다. 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소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소 떼를 보았을 때 소고기를 연상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여인을 성적대상으로 보았을 때

 

오래 전에는 식인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식인 풍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태평양의 섬이나 남미나 아프리카의 오지에서는 불과 몇 백년 전까지만 해도 식인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고대 마야에서는 인신공양을 하였고, 인신공양 풍습은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만약에 식인풍습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어떻게 될까? 한번 사람고기 맛을 보았을 때 그 고기맛을 잊지 못할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이 돌아 다닐 때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고기로 보일지 모른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여인을 보았을 때 대부분 여인 그 자체로 본다. 남자를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로 남자 그 자체로 본다. 그러나 일부는 여인을 보았을 때 또는 남성을 보았을 때 성적대상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 그렇게 볼지 모른다. 사회가 성적욕망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눈만 뜨면 TV나 인터넷 등 매스컴에서 성적욕망을 자극하는 것으로 가득하다. 그러다 보니 성이 상품화 되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여인을 볼 때 두 가지 타입이 있다. 여인이라는 인간으로 보는 것과 성적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특히 성적대상으로 볼 때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속된말로 나이가 많건 적건 간에 치마만 둘렀다 하면 모두 여자로 보인다는 말이 있다. 성적대상으로서의 여인은 나이와 관계 없는 것이다.

 

여인을 성적대상으로 보았을 때 이는 닭을 닭으로 보지 않고 닭고기로 보는 것과 같다. 또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인간고기로 보는 것과 같다. 이렇게 여인을 성적대상으로 보는 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여인을 가족이라고 알아차렸을 때

 

출가자에게 있어서 여인은 매우 위험한 존재라 본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출가한 자가 여인과 마주 쳤을 때 대략난감해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출가하면 심산유곡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사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하여 여인을 마주 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아무리 심산유곡이라 하더라도 여인생각이 난다면 몸은 비록 출가하였지만 마음은 세속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어떻게 여인을 대처해야 합니까?”어떻게 사띠(sati) 것인가(2013-01-30)’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에 따르면 아난다가 부처님에 물어 본다. 아난다가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여인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D16)”라고 물어 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여, 쳐다보지 않는 것이다.”라 하였다. 이어서 아난다는 “세존이시여, 보았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여, 말하지 않는 것이다.”라 한다. 그래도 아난다는 “세존이시여, 말했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여,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

 

출가수행자에게 있어서 여인을 대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탁발을 나갔을 때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말걸 때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럴 때 최종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여인을 보았을 때 알아차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무엇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일까? 그 구체적인 방법이 여인을 가족처럼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머니 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누이 같은 여인에 대하여 누이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딸 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라 하였다. 그래서 경에서는 원인은 이것이고 조건은 이것입니다라 하였다. 이렇게 원인과 조건을 알아 실천하면 결과로서 청정한 삶이 보장 된다고 하였다.

 

우스꽝스런 빠삐만의 반응

 

악마 빠삐만은 늙은 바라문으로 변장하여 젊은 수행승들 앞에 나타났다. 수행승들에게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 말한다. 이에 젊은 수행승들은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쫒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 것임을 다짐한다. 이렇게 말하자 빠삐만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Eva vutte bhante so brāhmao sīsa okampetvā jivha nillāletvā tivisākha nalāe nalāika vuṭṭhāpetvā daṇḍamolubbha pakkantoti.

 

이와 같이 말하자 악마 빠삐만은 머리를 떨어뜨리고 혀를 날름 거리며 이마에 삼지창 표시를 짓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그 자리를 떠났다.

 

(Sambahulasutta-많은 수행승들의 경, 상윳따니까 S4.21, 전재성님역)

 

 

이 문장은 악마 빠삐만이 물러 나는 장면을 희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혀를 날름 거렸다든가 이마에 삼지창 표시를 지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각묵스님은 빠삐만은 머리를 흔들고 혀를 축 늘어 뜨리고 이마를 찌뿌려 세 줄의 주름살을 짓고는 지팡이를 짚고 가버렸다라고 표현하였다. 빅쿠보디는 “Mara the Evil one shook his head, lolled his tongue, knit his brow into three furrows, and departed leaning on his staff.”라고 표현 하였다.

 

괴로움과 그 원인을 본 사람이 어떻게 감각적 쾌락에 빠지겠는가

 

부처님은 수행승들로부터 늙은 바라문 유행자 이야기를 들었다. 듣고 나서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성직자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들을 눈멀게 하려고 온 악마 빠삐만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Sambahulasutta (많은 수행승들의 경, S4.21)

 

빠알리어

Yo dukkhamaddakkhi yato nidāna

kāmesu so jantu katha nameyya,
Upadhi
viditvā sagoti loke

tasseva jantu vinayāya sikkheti.

Upadhi

전재성님역

[세존]

괴로움과 그 원인을 본 사람이

어떻게 감각적 쾌락에 빠지겠는가.

애착을 세상의 결박으로 알고,

사람은 그것을 끊기 위해 힘써야 하리.”

애착

각묵스님역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본 사람

그가 어찌 욕망으로 기운단 말인가?

이 세상에서 재생의 근거(소유물)가 곧 결박임을 알아

그것을 없애기 위해 공부지어야 하도다.”

재생의 근거(소유물)

빅쿠보디역

"How could a person incline to sensual pleasures

Who has seen the source whence suffering springs?

Having known acquisition as a tie in the world,

A person should train for its removal."

acquisition

 

 

 

 

2015-01-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