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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을 먹고 사는 존재들, 이기적 행복 vs 이타적 행복 vs 진정한 행복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 22. 20:09

 

기쁨을 먹고 사는 존재들, 이기적 행복 vs 이타적 행복 vs 진정한 행복

 

 

 

빤짜살라마을에서

 

부처님이 마가다국에 있는 빤짜살라라는 바라문 마을에 있었던 일이다. 마침 마을에서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젊은 남녀가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S4.18)”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젊은 남녀는 청춘남녀, 즉 결혼을 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 축제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주석의 견해를 인용하여 젊은 남녀가 서로 좋아하게 되면 선물, 즉 꽃이나 과자를 교환하는 민속적인 축제를 말한다.(1084번 각주)”라 하였다. 이어서 “Dhp.200에 대한 주석 DhpA.III.257에도 나온다.”라 하였다.

 

열망

 

전재성님이 번역한 법구경을 찾아 보니 DhpA.III.257에는 Dhp199 Dhp200에 대한 것이다. Dhp199에 이런 게송이 있다.

 

 

Susukha vata jīvāma

ussukesu  anussukā
Ussukesu manussesu

viharāma anussukā.

 

,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열망하는 자들 속에서 열망을 여의고

열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열망을 여읜 자로서 지낸다. (Dhp199)

 

 

게송을 보면 열망이라는 말이 나온다. 열망이라는 말은 ‘ussukesu’에 대한번역이다. ‘ussukesu’는 영어로  ‘zealous; energetic’의 의미이다. 정열적인 사랑을 뜻한다. 좋아 하는 상대가 있을 때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근원적인 욕망을 말한다. 그래서 한자어 사전을 보면 變熱心的, 貪欲的이라 하였고, 일본어 사전에서는 熱心になる, 貪欲なる라 하였다.

 

오욕락이란?

 

갈애가 충만된 정열적인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묘사가 열망하는 자들 속에서 열망이다. 그러나 수행승들은 이런 열망을 버렸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오욕락]의 추구를 열망하는 자들 가운데 열망하지 않는 자들을 말한다. (DhpA.III.257)”라 하였다. 여기서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 즉 오욕락은 무엇을 말하는가? 전재성님의 역자주에 따르면 형상, 소리, 냄새, , 감촉의 오욕락이라 하였다. 흔히 세상에서 알고 있는 오욕락, 즉 식욕, 성욕,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과는 다른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오욕락은 눈과 귀 등 감각기관에 따른 오욕락을 말한다.

 

요즘의 발렌타인데이라는데

 

부처님당시 고대인도에서 젊은 청춘남녀들이 선물을 주고 받으며 사랑의 표시를 전하는 축제가 있었다. 이런 축제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주석을 인용하여 젊은 여성들이 그들이 좋아하는 젊은 남성들에게 선물을 보내면 젊은 남성들은 선물을 보낸 젊은 여성들에게 장신구를 선물하는 행사인데 장신구를 받지 못하면 꽃으로 만든 목걸이라도 만든 목걸이라도 보냈다고 한다..(SA.i.178)”라 하였다. 이어서 요즘의 발렌타인 데이(St. Valentine’s Day)와 비슷한 축제였던 듯하다.(KS1:143n.1)”라 하였다.

 

Kindred Sayings

 

여기서 KS는 무엇을 말할까? 초불연 상윳따에 약어표현이 있는데 찾아 보니 KS에 대하여 “Kindred Sayings(상윳따 니까야 영역, Rhys Davids, Woodward”라 되어 있다. ‘리스 데이비스라는 이름은 익숙하다. 그러나 ‘Kindred Sayings’라는 말은 처음 본다. 검색해 보니 책이름이다. 아마존에서 발간된 책 이름은 The Book of the Kindred Sayings’이다.

 

 

 

The Book of the Kindred Sayings(아마존)

 

 

 

저자는 Rhys Davids F.L. Woodward로 되어 있다. 리스 데이비드와 우드워드의 공동저작품이다. 영역으로 1500페이지에 달하고 2004년에 초판이라 되어 있다. 그렇다면 ‘Kindred Sayings’은 무슨 뜻일까? Kindred동류의, 일족, 혈연의 뜻이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면 동류의 이야기들이 된다.

 

Kindred Sayings에 대하여 위키백과에서는 상윳따니까야라 하였다. 상윳따니까야를 약어로 SN이라 하는데 영어로는 ‘Connected Discourses’ 또는 ‘Kindred Sayings’라 한다. ‘주제별로 모아 놓은 부처님의 설법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마존에서 발간된 The Book of the Kindred Sayings’는 리스 데이비스와 우드워드가 공동저작한 영역판 상윳따니까야임을 알 수 있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니

 

각묵스님의 각주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 청춘남녀들이 선물을 주고 받는 것에 대하여 요즘의 발렌타인데이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로 영역판 상윳따니까야를 들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어떻게 각주 하였을까? CDB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Se and Eel & 2 have kumārakāna as against Be kumārikāna, "of the young girls."

 

Spk explains that on this day-"a kind of St. Valentine's Day" (KS 1:143, n. I)-the young girls send presents to their sweethearts among the boys, and the boys send ornaments to the girls, even a garland of flowers if they can give nothing else.

 

( CDB, 293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니 초불연의 각주와 동일하다. 빅쿠보디 역시 ‘KS 1:143, n. I’의 근거를 들어 일종의 성발렌타인데이(St. Valentine's Day)’같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은 왜 빈발우로 되돌아 왔을까?

 

악마는 열망을 여의며 살아 가는 수행자들을 방해한다. 부처님이 빤짜살라 마을로 탁발하러 갔을 때 부처님은 악마의 방해로 발우에 음식을 채우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세존께서는 빤짜살라 바라문 마을로 탁발을 하러 들어 갈 때의 빈 발우를 그대로 들고 나오셨다.(S4.18)”라고 되어 있다. 부처님은 왜 빈발우로 되돌아 왔을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Srp.I.179에 따르면, 오백 명의 소녀들이 부처님에게 축제의 헌과를 바치려고 했다. 부처님께서 그들에게 가르침을 준 결과 흐름에 든 님[예류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악마는 그 소녀들이 부처님께 헌과를 바치는 것을 방해하려고 그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 결과 세존은 빈 발우로 돌아 왔다.

 

(1085번 각주, 전재성님)

 

 

경에서 빤짜살라라는 마을이름이 나온다. ‘빤짜다섯의 뜻이고, ‘살라가 꽃이름이므로 마을이름을 우리말로 표현하면 다섯살라나무꽃마을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마을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빤짜살라라는 마을이름이 오욕락을 은연중에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청춘남녀들이 축제에서 선물을 주고 받는 행위에 대하여 수행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열망에 따른 오욕락으로 보기 때문이다.

 

빤짜살라마을로 탁발을 나간 부처님은 빈발우로 돌아 왔다. 이는 오백명의 소녀들이 부처님에게 헌과 하려 하자 악마가 방해하였기 때문이다. 주석에서는 악마가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라고 표현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악마가 미소년으로 변신하여 소녀들의 호기심을 샀음을 알 수 있다. 눈으로 귀로 소녀들을 유혹하여 소녀들이 선물하게 만든 것이다. 그 결과 부처님은 빈발우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고 보여진다.

 

부처님을 망신주고자

 

빈발우로 되돌아 온 부처님의 면전에 악마 빠삐만이 나타났다. 빠삐만은 부처님에게 수행자여, 탁발음식을 얻었는가?”라고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빠삐만이여, 내가 탁발음식을 얻지 못하도록 그대가 하지 않았는가?”라고 답한다.

 

부처님은 악마 빠삐만의 행위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빠삐만은 부처님에게 그러면 존자여, 그대는 다시 빤짜쌀라 바라문 마을로 가라. 내가 그대에게 탁발음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하겠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을 망신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주에서는 주석을 인용하여 처음 방문해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자가 빈 발우를 들도 다시 찾아오는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비웃을 것이기 때문이다. (SA.i.179)”라고 설명하고 있다.

 

빈발우와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Mara made a false promise when he offered ‘to see to it’; that the Buddha would get alms. He actually wanted the Buddha to expose himself to ridicule by the village boys (for coming for alms a second time after leaving with an empty bowl).(cdb 294번 각주)”라 하였는데, 이는 초불연과 같은 내용이다.

 

부처님이 답송으로 말씀하시기를

 

마을에 탁발나간 자가 탁발하지 못하여 다시 마을로 나간 다는 것은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악마 빠삐만은 부처님에게 다시 마을로 나가 탁발하라고 한다. 이번에는 음식을 채울 수 있도록 도와 주겠다는 것이다. 이런 빠삐만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하신다.

 

 

  

Piṇḍasutta (발우의 경, S4.18)

  

빠알리어

Apuñña pasavī māro

āsajja na tathāgata,
Kinnu maññasi pāpima

na me pāpa vipaccati?.


Susukha
vata jīvāma

yesa no natthi kiñcana
Pītibhakkhā bhavissāma

devā ābhassarā yathāti.

 

전재성님역

[세존]

그대 악마는 이렇게 오신 님을 모욕하여

악한 과보를 초래했네.

빠삐만이여, 어떻게 죄악이

과보를 초래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네.

지극히 빛나는 하늘의 하늘사람처럼

희열을 자양으로 살아가리라.”

 

각묵스님역

그대 마라는 여래를 모욕하여

악덕을 짓는구나.

빠삐만이여, 이처럼 생각하는가?

나의 사악함은 과보가 없으리라.’라고.

 

그 무엇도 가지지 않았지만

그러기에 우리는 참으로 행복하게 사노라.

우리는 희열을 음식으로 살 것이니

마치 광음천의 신들이 그러하듯이.”

 

빅쿠보디역

“You have produced demerit, Mara,

Having assailed the Tathagata.

Do you really think, 0 Evil one,

‘My evil does not ripen’?

 

“Happily indeed we live,

We who own nothing at all.

We shall dwell feeding on rapture

Like the devas of Streaming Radiance.”

 

 

 

 

 

악마 빠삐만은 부처님을 모독하고 있다. 부처님을 어떻게 해서든지 망신을 주어서 사람들이 따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은 빠삐만의 악행에 대하여 어떻게 죄악이 과보를 초래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가? (na me pāpa vipaccati)”라 하였다.

 

‘iti’가 첨가되면

 

na me pāpa vipaccati 문구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악마가 독백한 것이다. 끝에 ‘iti’가 첨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1086번 각주)”라 하였다. iti라는 말이 붙으면 타인이 말한 것을 나타낸다는 표시이다. 그래서일까 각묵스님은 “‘나의 사악함은 과보가 없으리라.’라고.”라고 따옴표를 이용하여 번역하였다. 그런데 이런 번역방식은 빅쿠보디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빅쿠보디도 영역에서 따옴표를 이용하여 ‘My evil does not ripen’?”라 하였기 때문이다.

 

‘iti’가 첨가되면 인용문구가 된다. 대게 “~라고.”형식이 된다. 그래서 전재성님의 상윳따니까야 각주에는 빠알리어 게송이 모두 실려 있는데 이 부분과 관련하여 “na me pāpa vipaccatiti”라 하였다.

 

Vipaccati‘ripens; bears fruit’의 뜻으로 과보가 익는다의 뜻이다. 그런데 ‘Vipaccati+ti’‘Vipaccatiti’로 되면 “‘과보가 익는다라고라 번역된다. 그래서 ‘iti’가 첨가되면 인용문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na me pāpa vipaccatiti”라 하였다. 그러나 PTS본에서는 “na me pāpa vipaccati”라고 되어 있다. 문자 ‘i’가 빠진 것이 다르다.

 

빠알리 원문이 실려 있지 않은 번역

 

각묵스님역의 상윳따니까야에는 게송에 대한 빠알리어가 보이지 않는다. 전재성님의 경우 각주에 빠알리원문을 받드시 실어 놓았으나 초불연 번역에서는 각주에 빠알리 원문이 실려 있지 않아 원어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다 보니 한글로 번역된 것으로 밖에 판단이 되지 않는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전재성님의 번역이 매우 충실함을 알 수 있다.

 

“~참조할 것” “~보라 “~see”

 

부처님의 두 번째 게송을 보면 첫 번째 구절에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yesa no natthi kiñcana)라는 문구가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반면 각묵스님은 “ ‘그 무엇(kiñcana)’이란 욕망이라는 그 무엇(rāgar kiñca) 등의 오염원에 속하는 것(kilesa-jāta)을 말한다. (SA.i.179)”라고 각주 하였다. 이어서 그 무엇(무엇이 있는 것, kiñcana))이라는 용어가 오염원으로 쓰이는 것에 대해서는 본서 제4고닷따 경’ (S41:7) 12절과 주해을 참조할 것(483번 각주)”라 하였다.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종종 “~참조할 것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런 말은 명령어체이다. 니까야를 읽는 자들 중에는 빈부귀천이 없고 남녀노소가 구별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참조할 것라 한다면 고압적이다. 반면 전재성님의 경우 “~보라라고 하였다. 이 말 역시 명령어이지만 “~참조할 것라는 말 보다는 부드럽다. 빅쿠보디는 “see(보라)’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정중하게 표현 한다면 “~참고하십시오가 될 것이다. 그러나 각주가 경어체가 아니기 때문에 전재성님의 경우처럼  “~보라라고 하는 것이 무난할 듯하다.

 

까마부의 경(S41.6)에서

 

각묵스님은 ‘yesa no natthi kiñcanaṃ’문구에 대하여 고닷따 경’ (S41:7)을 참고 하라고 하였다. ‘그 무엇이라고 번역된 ‘kiñcana’에 대하여 S41:7을 참조하라고 알려 주었다. 이런 설명은 빅쿠보디의 각주에도 보인다. 빅쿠보디는 ‘kiñcana’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Spk explains kiñcana, in pada b, as "the various kinds of defilements such as the 'something' (called) lust, etc." on the use of kiñcana to denote defilements, see 41:7(IV 297,18-19).

 

(cdb 295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는 ‘see 41:7’라 하였다. 상윳따니까야 S41.7 ‘something’을 뜨솨는 빠알리어 kiñcana가 들어간 문구가 나온다는 것이다. 찾아 보니 다음과 같다.

 

 

[까마부]

존자여, 아무것도 없는 마음의 해탈은 무엇입니까? 존자여, 세상에 수행승이 이 한량없는 의식의 세계를 뛰어넘어 이와 같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아무 것도 없는 세계에 듭니다. 존자여, 그것을 아무것도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이라 부릅니다.

 

(까마부의 경2, 상윳따니까야 S41.6, 전재성님역)

 

 

이 문장은 한역으로 말하면 무소유심해탈에 대한 것이다. 번역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akiñcana cetovimutti)’라 하였다.

 

무소유심해탈(akiñcana cetovimutti)

 

그렇다면 무소유심해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빠알리어 ‘akiñcana cetovimutti’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akiñcana cetovimutti: 한역의 무소유심해탈을 말한다. Srp.III.99에 따르면, 여기에는 아홉가지 종류의 해탈이 있다. 무소유처해탈과 사향사과해탈이다. 무소유처는 대상으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소유이고, 사향사과에는 무언가 고통을 주거나 방해하는 오염이 없기 때문에 무소유이다.

 

(상윳따4 842번 각주, 전재성님)

 

 

한역에서는 akiñcana에 대하여 무소유로 번역하였다. 우리 말로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kiñcana는 무언가 있다는 뜻일까?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kiñcana‘something’의 뜻이다. 무언가 있다는 뜻이다. 그 무엇이란 무엇일까?

 

Akiñcana, 아무것도 없는 것

 

akiñcanakiñcana에 부정접두어 a가 붙어서 무언가 없다는 뜻이 된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두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하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오염원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특히 후자에 대하여 사향사과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번뇌가 다한 부처님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가 된다. 또 부처님은 출가하여 청정한 삶을 살고 있으므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자들이 부처님과 사향사과의 제자들이다. 그래서 게송에서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네. (Susukha vata jīvāma yesa no natthi kiñcanaṃ, S4.18)라 한 것이다.

 

열망을 여의었을 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 정말 행복할까? 물질적으로 부유함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들어 맞지 않는 말이다. 식욕, 성욕,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으로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많은 것을 소유해야만 행복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은 가능한 소유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을 때 매우 행복하다고 하였다. 왜 그럴까? 그것은 갈애를 버렸기 때문이다. 법구경에서는 , 우리는 안락하게 산다. 열망하는 자들 속에서 열망을 여의고 열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열망을 여읜 자로서 지낸다. (Dhp199)”라고 하였다. 열망을 여읜 것이다. 열망이 여의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Dhp199)”라고 하였다.

 

오욕락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청춘남녀들이 축제일에 선물을 주고 받는 행위는 오욕락에 따른 열망 때문이다. 그래서 선물을 주어서 기쁘고 또 받아서 즐겁다.

 

그러나 더 기쁘고 즐거운 것이 있다는 것이다. 열망을 하지 않았을 때 더 기쁘고 즐겁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이다. 무언가 소유하지 않았을 때 안락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 근심, 걱정 등 번뇌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 모든 탐진치로 대표 되는 오염원이 소멸 되었을 때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런 행복은 어떤 것일까? 아마 세속의 오욕락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경의 게송에서는 지극히 빛나는 하늘의 하늘사람처럼 희열을 자양으로 살아가리라. (Pītibhakkhā bhavissāma devā ābhassarā yathāti, S4.18)”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름 아닌 기쁨을 먹고 사는 것이다.

 

기쁨을 먹고 사는 존재들

 

기쁨을 먹고 살 수 있을까? 초기경에 따르면 기쁨을 먹고 사는 존재에 대한 표현이 있다. 디가니까야에서 “바쎗타여, 언제 어느 때인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이 세계가 괴멸하는 시기가 있다. 세상이 괴멸할 때에 대부분 뭇삶들은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에 태어난다. 그들은 거기서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로서, 기쁨을 먹고 지내고, 스스로 빛을 내고, 허공을 날며, 영광스럽게 오랜 세월을 산다. (D27)”라는 구절에서 이다. 여기서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abhassara)’는 광음천 또는 극광천이라 한다.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색계 2선천으로 수명이 8겁에 달한다. 색계선정수행을 한 공덕으로 태어나는 곳이다.

 

희열과 행복이 가득한 곳

 

(D27)의 표현에 따르면 기쁨을 먹고 사는 자의 특징이 있다.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라 한다. 또 스스로 빛을 내는 자라 한다. 이처럼 스스로 빛을 내고 정신으로 이루어진 존재는 마음대로 이동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허공을 나는 존재라 하였다.

 

빛이 나고 정신으로 이루어진 존재는 인간들처럼 먹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 남녀가 구분이 되어 있어서 갈애를 일으키는 존재가 아니라 남녀 구분이 없는 중성의 존재들이다.

 

스스로 빛을 내며 허공을 나는 존재는 인간들과 다른 존재임에 틀림 없다. 이런 존재가 사는 곳이 색계 2선천이다. 그런데 색계 2선천은 을 기본으로 한다. 빛이란 다름 아닌 기쁨 또는 희열을 뜻한다. 그래서 색계 이선천은 희열이 가득한 곳이다.

 

선정수행에서 2선의 경지는 어떤 것일까? 초기경에서는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사유와 숙고를 여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에 들고(S45.8)”라는 정형구로 표현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색계 2선천의 극광천에서는 희열과 행복이 가득한 곳이다.

 

안먹어도 배부를 때

 

안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이 있다. 칭찬을 들었을 때 이다. 때로 욕먹었을 때도 안먹어도 배부르다는 표현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커다란 성취를 이루었거나 즐거운 일이 생겼을 때 마음이 뿌듯하여 포만감을 느낀다. 안먹어도 배가 부른 것이다.

 

색계 2선의 경우 기본적으로 희열과 행복이 가득한 경지이므로 항상 희열에 차 있다. 이렇게 본다면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서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abhassara)’, 극광천에 산다면 먹지 않아도 배부를 것이다. 그것은 기쁨(희열)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똑 같은 게송이 법구경에도

 

경에서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네. 지극히 빛나는 하늘의 하늘사람처럼 희열을 자양으로 살아가리라.(S4.18)”라 하였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게송이 법구경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Susukha vata jīvāma

yesa no natthi kiñcana,
Pītibhakkhā bhavissāma

devā Ābhassarā yathā.

 

, 우리는 안락하게 산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결코 없어도

빛이 흐르는 하느님 세계의 하느님들처럼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리라.(Dhp200)

 

 

전재성님의 법구경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상윳따니까야 Piṇḍasutta (발우의 경, S4.18)와 유사하다. 그런데 빠알리원문을 대조 해 보니 똑 같다. 다만 문맥에 따라 달리 번역하였을 뿐이다.

 

법구경 200번 게송에서 가진 것이 없어도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리라라 하였다. 여기서 가진 것이 없다는 문구가 우리의 것이라고는 결코 없어도라는 뜻이다.

 

우리의 것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장애로서 작용하는 다양한 것들 가운데 감각적 쾌락의 욕망 등과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우리에게 발견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DhpA.III.258)”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무소유 뿐만 아니라 오염원도 가지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 무소유심해탈(akiñcana cetovimutti)’을 성취하였을 때 마치 색계 2선천의 극광천의 존재처럼 기쁨을 먹고 사는 존재와 같을 것이다.

 

비교해 보면

 

상윳따니까야 Piṇḍasutta(발우의 경, S4.18)과 법구경 199번과 200번 게송의 내용은 일치한다. 더구나 법구경 200번 게송의 인연담은 발우의 경의 내용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 이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경전문구

 

상윳따니까야

마침 빤짜쌀라 바라문 마을에서 젊은 남녀가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S4.18)

오욕락의 추구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네.

지극히 빛나는 하늘의 하늘사람처럼

희열을 자양으로 살아가리라.”

(S4.18)

무소유심해탈(akiñcana cetovimutti)

법구경

, 우리는 안락하게 산다.

열망하는 자들 속에서 열망을 여의고

열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열망을 여읜 자로서 지낸다.”

(Dhp199)

오욕락의 여읨

 

, 우리는 안락하게 산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결코 없어도

빛이 흐르는 하느님 세계의 하느님들처럼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리라.”

(Dhp200)

 

무소유심해탈(akiñcana cetovimutti)

 

 

 

 

비교표를 보면 가장 큰 차이가 오욕락이다. 오욕락을 추구하는 삶은 세속적이고 오욕락을 포기하는 삶은 출세간적이다. 그런데 출세간적 삶이 세간적 삶 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이는 무소유심해탈(akiñcana cetovimutti)’을 성취 하였을 때이다. 그래서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처럼 기쁨을 먹고 산다고 하였다. 마치 빛이 흐르는 하느님 세계의 하느님들처럼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리라라 하였는데, 이는 2선정에서 희열과 행복을 표현 것 이다.

 

사람들이 행복을 느낄 때

 

사람들은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대부분 물질적 행복을 이야기 한다. 많이 소유하면 행복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다가 좀 더 큰 평수로 이사하면 행복해 한다. 그러나 일시적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였을 때 현재 살고 있는 곳이 좁다고 느껴지면 목표를 좀 더 크게 잡는다. 더 큰 평수로 옮겨 가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소유함으로서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행복도 행복 나름이다. 그렇다면 어떤 행복이 가장 행복한 상태일까? 이에 대하여 프레시안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행복을 느낄 때를 다양하게 정의합니다. 7가지로 정의하기도, 10가지, 30가지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남녀가 사랑을 할 때, 돈을 많이 벌었을 때, 일의 성취가 있을 때,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등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때가 바로 남을 위해 무엇인가를 했을 때라고 합니다. 주말에 노인 요양시설에 봉사를 가서 하루 종일 빨래를 하고 귀가하는 내내 가슴 뿌듯한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지요. 개인적 성취나 쾌락에 의한 행복감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행복감은 이타적 사랑의 실천에서 온다는 것이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의 의견입니다

 

(세월호의 기억과 '사회적 삶'…잊으면 당한다, 프레시안 2014-11.30)

 

 

프레시안 기사에 따르면 행복에 대하여 크게 두 종류로 보고 있다. 하나는 이기적 행복이고, 또 하나는 이타적 행복이다.

 

이기적 행복과 이타적 행복

 

이기적인 행복은 소유함으로 인한 행복이나 개인적인 성취를 통한 행복을 말한다. 오욕락의 추구에 따른 행복도 이기적인 행복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런데 오로지 자기자신만을 위한 이기적 행복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소유하거나 성취 되는 순간 행복감은 급격하게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행복은 일시적이다. 그러나 이타적인 행복은 오래 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 봉사를 들고 있다. 봉사단체에서 하루 종일 봉사하고 집에 돌아 갈 때 느끼는 잔잔한 행복감은 꽤 오래 간다는 것이다. 이는 오욕락에 따른 육체적으로 느끼는 일시적 행복감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세 가지 행복을 비교해 보면

 

프레시안 기사에서는 이기적 행복감 보다 이타적 행복감이 훨씬 더 오래 감을 이야기 하였다. 그런데 이타적 행복감 보다 더 수승한 행복이 있다. 그것은 욕망을 여윔에 따른 무소유심해탈을 성취하였을 때 이다. 이 상태에 대하여 경에서는 기쁨을 먹고 산다라고 표현 하였다.

 

이기적 행복, 이타적 행복, 무소유심해탈에 따른 행복 이 세 가지에 대하여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이기적 행복

1)남녀가 사랑을 할 때,

2)돈을 많이 벌었을 때,

3)일의 성취가 있을 때,

4)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등

1)오욕락에 따른 일시적 행복

2)세속적 행복

이타적 행복

1)요양시설에서 봉사

2)봉사하는 삶

3)보시하는 삶 등

1)이타적 삶에 따른 잔잔한 행복

2)세속적 행복

진정한 행복

무소유심해탈

(akiñcana cetovimutti)

1)대상으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음(무소유처해탈)

2)고통을 주거나 방해하는 오염이 없음(사향사과해탈)

1)욕망을 여윔에 따른 진정한 행복

2)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

3)출세간적 행복

 

 

 

이기적 행복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선물을 주고자 한다. 왜 그럴까? 상대방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날을 별도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발렌타인데이 같은 것이다. 이는 열망이다.

 

열망으로 성취된 행복은 이기적 행복이다. 남녀간의 사랑, 일의 성취 같은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뿐이다. 성취 되고 나면 시들해진다. 마치 20평형대의 아파트에 살다가 30평형대로 이사 갔을 때 일시적으로 행복한 느낌이 일어나지만 오래 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절정에 이르면 내려올 일만 남아 있듯이 이기적으로 성취된 행복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래서 오욕락에 따른 행복에 대하여일시적 행복이라 본다.

 

이타적 행복

 

봉사하는 삶과 도덕적인 삶은 장려 된다. 이런 삶의 방식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공덕을 짓는 다고 한다. 공덕을 지으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남을 위해 봉사 하는 이타적인 삶은 공덕을 지을 뿐만 아니라 천상에 태어나게 되어 미래를 위하여 보험을 드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타적인 삶을 살게 되면 육체적 쾌락에 바탕을 둔 행복과 비교할 바 없는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잔잔한 행복이라 하였다.

 

진정한 행복

 

오욕락에 따른 이기적 행복이나 봉사하는 삶에 따른 이타적 행복은 모두 세속적이다. 욕망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타적 행복은 이기적 행복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이타적 행복과 비할 바 없는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놓아 버렸을 때 얻는 희열과 행복이다. 경에서는 욕망을 여읨에 따라 성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욕망을 내려 놓았을 때 아무 것도 가지지 않게 된다. 심지어 버려야 겠다는 마음까지 버렸을 때 하나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 상태가 무소유심해탈 (akiñcana cetovimutti)’, 즉 아무것도 없는 마음의 해탈이다. 이렇게 본다면 욕망을 여읨에 따라 기쁨을 먹고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 볼 수 있다.

 

 

 

2015-01-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