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사성제와 연기법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 16. 17:59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사성제와 연기법

 

 

 

물소일까 황소일까?

 

초기경전에서 악마(마라)는 깨달음을 방해 하는 존재로 종종 등장한다. 상윳따니까야 발우의 경에서도 악마는 물소의 모습을 하고 수행승들의 발우를 깨기 위하여 다가간다.

 

수행자들이 발우를 건조하려고 밖에 놓고 있을 때 물소가 다가 오자 한 수행승이 잔뜩 겁을 먹고 수행승이여, 수행승이여, 저 물소가 발우들을 부수려고 합니다.(S4.16)”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물소라 한 것은 ‘balivadda’로서 ‘an ox, , 牡牛의 뜻이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황소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Bhikkhu, bhikkhu! That ox may break the almsbowls."라 하여 ox로 번역하였다. ox, 황소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balivadda는 물소일까 황소일까?

 

물소에 대하여

 

한국에서는 소라 하면 대부분 황소를 말한다. 황소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큰 수소를 뜻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색깔이 누렀다고 하여 황소라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황소는 우리나라에서 기르는 소를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각묵스님은 ‘balivadda’황소라고 번역하였다.

 

인도에 우리나라 황소와 같은 타입의 소는 보기 힘들다. 우리나라의 황소와 달리 물소에 가깝다. 물소에 대한 사전을 보면 솟과에 속한, 물에서 사는 모든 짐승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인도종, 아프리카종이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물소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소목 솟과에 속한 포유류 짐승. 어깨 높이는 약 1.6~1.9미터, 몸길이는 2~2.8미터, 몸무게는 800~1,200킬로그램 정도이다. 회색 또는 잿빛을 띤 흑색이고 활 모양의 검고 긴 뿔이 있다. 머리는 비교적 길고 털은 짧고 거칠다. 강이나 호수 주변에 무리를 지어 살며 낮에는 풀이 무성한 곳에서 되새김질을 한다. 임신 기간은 10~11개월이며 보통 한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무리는 암컷과 새끼들이 중심이 되며 수컷은 홀로 또는 작은 무리를 이루어 그 주변을 서성거린다. 번식기에는 수컷이 여러 암컷을 거느린다. 원산지는 인도이며 미얀마, 타이, 필리핀, 중국, 대만 등지에 분포한다. 학명은 Bubalus bubalis이다.

 

(물소)

 

 

물소의 원산지는 인도라 한다. 또 색깔도 회색 등의 잿빛을 띠고 있고 뿔도 활모양이어서 우리나라 황소와는 모습이 다르다. 주로 강이나 호수 주변에서 모여 산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물소는 야생이라 볼 수 있다.

 

물소는 어떻게 생겼을까?

 

물소의 학명이 Bubalus bubalis라 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Water buffalo’라 하며 생긴 모습은 다음과 같다.

 

 

 

 

 

Female water buffalo and calf

 

 

 

사진으로 보면 물소는 한국의 황소와는 다른 모습이다. 우기와 건기가 뚜렷한 인도나 동남아시아 등에서 서식하기 때문이다. 물소가 서식하는 지역을 보면 다음 지도와 같다.

 

 

 

 

 

 

Global distribution of buffaloes in 2004

 

 

 

물소가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이 인도임을 알 수 있다. 지도의 설명에 따르면 인도에는 97백만 마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Water buffalo enjoy being in water

 

 

 

물소는 한 눈에 보기에도 험하고 거칠게 생겼다. 가축화된 한국의 황소처럼 온순한 이미지는 아니다. 그런 야생의 물소가 수행승들 앞에 나타났다. 마라가 물소로 변신하여 수행들이 탁발할 때 마다 들고 다니는 발우를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이에 잔뜩 겁을 먹은 수행승들이 물소가 점점 다가 오자 당황해 한다. 이 때 부처님이 수행승이여, 이것은 물소가 아니다. 이것은 너희들의 눈을 멀게 하기 위해 온 악마 빠삐만이다.(S4.16)”라고 말해준다.

 

부처님의 감동적인 법문에

 

악마 빠삐만이 물소로 변신하여 오기 전에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감동적인 법문을 해 주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Tena kho pana samayena bhagavā pañcanna upādānakkhandhāna upādāya bhikkhū4 dhammiyā kathāya sandasseti samādapeti samuttejeti sampahaseti.

 

한 때 세존께서는 싸밧티 시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에 관한 법문으로 수행승들을 교화하고 북돋우고 고무시키고 기쁘게 하셨다.

 

(Pattasutta -발우의 경, 상윳따니까야 S4.16, 전재성님역)

 

 

이 구문에서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를 한자어로 말하면 오취온이다. 빠알리어로는 ‘pañcanna upādānakkhandhāna이라 되어 있다.  각묵스님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디섯 가지 무더기들[五取溫]’이라 하여 대괄호치기와 한자어를 섞어서 길게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the five aggregates subject to clinging’라 하였다.

 

오취온(pañcupādānakkhandhā) 이란 무엇인가?

 

오취온은 초기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술어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S22.22 ‘짐 경을 참고하라고 하였다. 빅쿠보디는 별다른 각주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주석과 무관하게 길게 각주를 하였다. 오취온에 대한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pañcupādānakkhandhā :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은 오취온(五取溫)이라 한역된다. 존재의 집착다발이라는 의미는 존재의 다발[五溫]- 물질[ rūpa], 느낌[ vedana], 지각[ sañña], 형성[ sakhara], 의식[ viññāa]-나의 소유, 나의 존재, 나의 자아라는 유위법적 사유의 근본구조 속에서 나타날 때 성립한다.

 

(1073번 각주, 전재성님)

 

 

각주에 따르면 오취온은 오온이 나의 것이라고 사유할 때라 한다. 몸과 마음이 내 것이라고 여길 때 오취온의 상태로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더 자세한 설명이 MN.I.190-191에 나온다고 하였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Ajjhattikañce1 āvuso cakkhu aparibhinna hoti, bāhirā ca rūpā na āpātha āgacchanti, no ca tajjo samannāhāro hoti. Neva tāva tajjassa viññāabhāgassa pātubhāvo hoti. Ajjhattikañce1 āvuso cakkhu aparibhinna hoti, bāhirā ca rūpā āpātha āgacchanti, no ca tajjo samannāhāro hoti, nevatāva tajjassa viññāabhāgassa pātubhāvo hoti. Yato ca kho āvuso ajjhattikañce2 cakkhu aparibhinna hoti.

 

Bāhirā ca rūpā āpātha āgacchanti, tajjo ca samannāhāro hoti, eva tajjassa viññāabhāgassa pātubhāvo hoti. Ya tathābhūtassa rūpa, ta rūpūpādānakkhandhe sagaha gacchati. Yā tathābhūtassa vedanā, sā vedanūpādānakkhandhe sagaha gacchati. Ya tathābhūtassa saññā, sā saññūpādānakkhandhe sagaha gacchati. Ye tathābhūtassa sakhārā, te sakhārūpādānakkhandhe sagaha gacchanti. Ya tathābhūtassa viññāa, ta viññāūpādānakkhandhe sagaha gacchati.

 

So eva pajānāti: " eva kiramesa3 pañcanna upādānakkhandhāna sagaho sannipāto samavāyo hoti. Vutta kho paneta bhagavatā: 'yo paiccasamuppāda passati. So dhamma passati. Yo dhamma passati. So paiccasamuppāda passatī'ti.

 

Paiccasamuppannā kho panime yadida pañcupādānakkhandhā. Yo imesu pañcasupādānakkhandhesu chando ālayo anunayo ajjhosāna, so dukkhasamudayo. Yo imesu pañcasupādānakkhandhesu chandarāgavinayo chandarāgappahāna, so dukkhanirodho"ti. Ettāvatāpi kho āvuso bhikkhuno bahukata hoti.

 

 

벗들이여, 안으로 시각능력이 완전하더라도, 밖에서 형상이 시각영역에 들어오지 않고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것에 일치하는 의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벗들이여, 안으로 시각능력이 완전하고 밖에서 형상이 시각영역에 들어오더라도,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것에 일치하는 의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벗들이여, 안으로 시각능력이 완전하고 밖에서 형상이 시각영역에 들어오고,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것에 일치하는 의식이 나타납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물질이라는 것은 물질의 집착다발에 포섭되고, 이와 같은 상태에서 느낌이라는 것은 느낌의 집착다발에 포섭되고, 이와 같은 상태에서 지각이라는 것은 지각의 집착다발에 포섭되고, 이와 같은 상태에서 형성이라는 것은 형성의 집착다발에 포섭되고, 이와 같은 상태에서 의식이라는 것은 의식의 집착다발에 포섭됩니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참으로 이러한 것들은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에 포섭되고, 집합되고, 결합된다.’라고 이와 같이 잘 압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고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다발은 연기된 것입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다발에 욕망하고 집착하고 경향을 갖고 탐착하는 것은 괴로움의 발생입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다발에서 욕망과 탐욕을 제거하고 욕망과 탐욕을 버리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입니다. 벗들이여, 이렇게 되면 그 수행승들에게 많은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Mahāhatthipadopamasutta -코끼리 자취에 비유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28, 전재성님역)

 

 

이 경에서 중요한 말은 다섯 가지 집착다발은 연기된 것입니다 (Paiccasamuppannā kho panime yadida pañcupādānakkhandhā)라는 말이다. 이어지는 문구를 보면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다발에 욕망하고 집착하고 경향을 갖고 탐착하는 것은 괴로움의 발생입니다. (Yo imesu pañcasupādānakkhandhesu chando ālayo anunayo ajjhosāna, so dukkhasamudayo)”라 하였다.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이다.

 

고성제가 오취온이다

 

단지 경전을 읽는 것으로 그친다면 큰 것을 놓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고성제가 오취온이라는 말이다.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온갖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런 괴로움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초전법륜경 고성제에서는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S56.11)”라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서는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S56.11)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생노병사 등 모든 괴로움이 사실상 오취온으로 부터 시작 되었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고성제는 오취온이고 오취온은 고성제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이에 대하여 모든 것이 뜻대로? 오취온이 고성제인 이유(2014-10-22)’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고와 고의 소멸에 대한 이지(二支)연기법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하였다. 그런데 사성제는 다름 아닌 연기법에 근거한 법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고의 소멸이라는 이지(二支)연기법이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사성제와 연기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사성제

코끼리 자취에 비유한 큰 경(M28)

초전법륜경(S56.11)

고성제

다섯 가지 집착다발(오온)에 욕망하고 집착하고 경향을 갖고 탐착하는 것(M28)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S56.11)

멸성제

다섯 가지 집착다발(오온)에서 욕망과 탐욕을 제거하고 욕망과 탐욕을 버리는 것(M28)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S56.11)

 

 

 

사성제에서 고와 고의 소멸에 대한 것을 보면 키워드는 오온과 집착이다. 오온을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면 모든 괴로움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고성제라 한다. 그런데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 아니라고 집착을 놓아 버리면 그것을 멸성제라 한다. 이렇게 고와 고의 소멸에 대한 것은 이지 연기법에 해당된다.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코끼리 자취에 비유한 큰 경(M28)에서 오취온을 설명하는데 유명한 구절이 있다.그것은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yo paiccasamuppāda passati. So dhamma passati. Yo dhamma passati. So paiccasamuppāda passatī, M28)라는 말이다. 이 말은 매우 유명한 말이다. 부처님이 연기법을 발견하여 연기법을 설하였는데 사성제는 다름 아닌 연기법적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성제는 네 가지 진리를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부처님은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는자(yo paiccasamuppāda passati. So dhamma passati)”라고 선언하였다.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는 말은 다른 경전에서 찾아 보기 힘들다고 하였다. 이 구절에 대하여 주석을 인용하여 연기를 보는 자는 조건적으로 생겨난 사실(緣生法 paiccasamuppanne dhamme)을 보고, 조건적으로 생겨난 사실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는 뜻이다.(Pps.II.230)”라고 설명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연기법은 다름 아닌 조건법이라는 뜻이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조건에 따라 소멸한다

 

연기는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르기 때문에 조건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오취온을 예로 든다면 오온이라는 대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때 집착하는 것은 조건에 해당된다. 경에 따르면 고성제는 오온에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발생된다라고 설명 되기 때문에 집착이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연기법에 따르면 연기의 순관과 역관이 반드시 있다. 왜 그럴까? 조건이있기 때문에 그렇다. 조건에 따라 연기가 회전하지만 조건만 소멸하면 연기의 회전은 멈추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고성제는 이지연기의 순관에 해당되고, 멸성제는 이지연기의 역관에 해당된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였으므로 조건에 따라 소멸할 수 있다. 오온에 대하여 내것이라고 집착하였을 때 괴로움이 발생하지만, 오온에 대하여 내것이 아니라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괴로움은 소멸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다발에 욕망하고 집착하고 경향을 갖고 탐착하는 것은 괴로움의 발생입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다발에서 욕망과 탐욕을 제거하고 욕망과 탐욕을 버리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입니다.(M28)”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게송으로 말씀 하시기를

 

악마 빠삐만이 물소로 변신하여 수행승의 발우를 깨부스려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빠삐만임을 알아채고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Pattasutta(발우의 경, S4.16)

비고

빠알리어

Rūpa vedayita sañña

viññāa yañca sakhata,
Neso hamasmi neta
me

eva tattha virajjati.


Eva
viratta khematta

sabbasayojanātiga,
Anvesa
sabbahānesu

mārasenāpi nājjhagāti.

 

전재성님역

[세존]

물질도 느낌도 지각도

형성과 또한 의식도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니

이렇게 거기서 탐착을 벗어나네.

 

이렇게 탐착에서 벗어나 안온하게

모든 얽매임을 뛰어넘은 자는

어떠한 곳에서 찾더라도

악마의 군대를 발견할 수 없네.”

 

각묵스님역

물질과 느낌과 인식과

알음알이와 형성된 것들-

이것은 내가 아니거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로다.’

이와 같이 거기[오온에 대해서] 탐욕이 빛바래네.”

 

이처럼 탐욕이 빛바래고 안은하고

모든 족쇄 넘어선 자를

모든 곳에서 찾아 해매더라도

마라와 그의 군대는 발견하지 못하리.”

 

빅쿠보디역

"Form, feeling, and perception,

Consciousness, and formations'

1 am not this, this isn't mine:

Thus one is detached from it.

 

"Though they seek him everywhere,

Mara and his army do not find him:

The one thus detached, secure,

Who has gone beyond all fetters."

 

 

 

 

 

서로 다른 번역용어

 

첫 번째 게송을 보면 오온에 대한 명칭이 있다. 이는 물질[ rūpa], 느낌[ vedana], 지각[ sañña], 형성[ sakhara], 의식[ viññāa]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물질느낌에 대한 번역어는 전재성님과 같다. 그러나 sañña 에 대하여 인식이라 하였고, sakhara 에 대하여 형성된 것들이라 하였고, viññāa에 대하여 알음알이라 하여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오온

전재성님역

각묵스님역

빅쿠보디역

rūpa

물질

물질

form

vedana

느낌

느낌

feeling

sañña

지각

인식

perception

sakhara

형성

형성된 것들

formations

viññāa

의식

알음알이

consciousness

 

 

 

산냐()에 대하여 지각과 인식으로 각각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지각과 인식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사전에 따르면 지각은 perception, perceptivity, sensory perception’의 뜻으로 알아서 깨달음의 의미이다.

 

각묵스님은 산냐()에 대하여 인식이라 번역하였다. 인식은 recognize, awareness, perception, realize, understand의 뜻으로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아는 일을 말한다. 마치 한자어를 풀이해 놓은 듯한 설명이다. 분명한 사실은 대상에 대하여  안다는 것이다. 빅쿠보디는 perception이라 하여 전재성님이 지각이라 번역한 것과 유사하게 번역하였다

 

상카라()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형성된 것들이라 하여 복수로 번역하였다. 이는 아비담마에 따른 주석적 번역이라 볼 수 있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오온에 있어서 상카라는 50가지 마음부수라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수로 번역한 것이다. 이는 빅쿠보디가 formations라 하여 복수의 뜻으로 번역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윈냐나()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알음알이로 번역하였다. 알음알이라는 말은 순수한 우리말로서 그다지 잘 쓰이지 않는 말이다. 선가에서 주로 쓰이기 때문에 선불교와 관련된 용어라 볼 수 있다. 빅쿠보디는 consciousness라 하여 전재성님의 의식과 유사하게 번역하였다.

 

탐욕도 빛바랜다?

 

게송에서는 오온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함을 말하고 있다. 오온에 대한 집착은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 하여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온에 대하여 탐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탐착을 벗어나네(virajjati)”라 하였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탐욕이 빛바래네라 하여 약간은 낭만적으로 번역하였다.

 

탐욕도 빛바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천의 색깔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빛 바랠 수 있다라는 주석을 근거로 번역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초불연에서 탐욕이 빛바랜다는 말은 ‘virāgā를 번역한 말이다. 그래서 “Nibbinda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라는 정형구에 대하여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라 하였다. 여기서 탐욕이 빛바랜다는 말이 두 번 들어 간다. 한번은 virajjati에서 또한번은 virāgā에서 들어간다. 그래서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라 하여 마치 동어가 반복된 것처럼 번역하였다. 이 정형구와 관련하여 전재성님은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라고 번역하였다.

 

virajjati virāgā는 다른 말이다. virajjati‘detaches oneself; shows lack of interest in, 離貪의 뜻으로 싫어 하여 떠나다의 뜻이다. virāgā‘dispassionateness; absence of desire. 離貪의 뜻으로 탐욕에서 떠나다는 뜻이다. 비슷한 것 같지만 쓰임새는 다르다. 그래서 。virajjati싫어하여 떠나는 것이고  virāgā탐욕에서 떠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virajjati에 대하여 염오(厭惡)’라 하고 virāgā에 대하여 이욕(離欲)’이라 한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구분 없이 탐욕이 빛바래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동어가 반복 되듯이 번역되고 있다.

 

악마의 군대, 마라세나(魔軍, 마구니)

 

두 번째 게송을 보면 악마의 군대를 발견할 수 없네(mārasenāpi nājjhagāti)”라 하였다. 여기서 악마의 군대는 ‘mārasenā’이다. 한자어로 마군(魔軍)이라 한다. 한글로 마구니라고 한다.

 

오온의 집착에서 벗어나면 악마의 군대가 발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주석의 인용 없이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오취온]에서 벗어난 사람은 늙지도 죽지도 않기 때문에 사신(死神)인 악마가 찾을 수 없다.(1075번 각주)”라 하였다.

 

살아 있는 아라한을 찾지 못한다는데

 

죽음의 신이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세존께서는 마라는 살아 있는 아라한도 완전한 열반(반열반)에 든 아라한도 찾지 못한다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초불연 상윳따1 477번 각주)”라 하였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 본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다.

 

 

Spk: Though they seek him everywhere-in all realms of existence, modes of origin, destinations, stations of consciousness, and abodes of beings-they do not find him, do not see him. See v. 49 (= v. 105), 4:23 (I 122,1-13), 22:87 (III 124,1-13), and MN I 140,3-7. It seems that both the living arahant and the arahant after his parinibbana are intended.

 

(cdb 290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는 마지막 구절에서 It seems that both the living arahant and the arahant after his parinibbana are intended.”라 하였다. 이를 번역하면 살아 있는 아라한과 반열반후의 아라한을 의미하는 듯 하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악마의 군대는 오온에 집착하지 않는 아라한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각묵스님의 각주 세존께서는 마라는 살아 있는 아라한도 완전한 열반(반열반)에 든 아라한도 찾지 못한다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와 같다. 차이가 있다면 빅쿠보디는 It seems that~”이라 하여 “~인듯이 보인다라고 추정하고 있지만, 각무스님은 말씀 하시는 것이다라 하여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다르다.

 

비슷한 가르침을 찾아 보니

 

악마의 군대가 번뇌다한 아라한을 찾지 못한다는 것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v. 49 (= v. 105), 4:23 (I 122,1-13), 22:87 (III 124,1-13), and MN I 140,3-7”를 찾아 보라고 한다. 각묵스님의 각주에서는 비슷한 가르침이 본서 사밋디 경(S1:20)’, ‘있는 것이 아님의 경(S1:34)’, ‘고디까 경(S4:23)’, ‘왁깔리 경(S22:87’), ‘맛지마니까야 뱀의 비유 경(M22/i.140)’ 등에서도 나타탄다.(초불연 상윳따1 477번 각주)”라고 설명하고 있다. 빅쿠보디가 찾아 보라고 한 것과 똑 같다.

 

빅쿠보디가 찾아 보라고 한 것을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번역은 전재성님역이다.

 

 

[세존]

헤아림을 버리고 망상을 부리지 않고

세상의 명색에 대한 탐착을 버렸으니,

하늘 사람들과 사람들이 이 세상과 저 세상,

하늘나라와 모든 주처들에게도 그를 찾아도

속박을 끓고, 동요하지 않고,

욕심이 없는 그를 찾을 수 없으리.

만약 야차여, 당신이 안다면 말해 보시오.”(S1.20)

 

 

[세존]

헤아림을 버리고 망상을 부리지 않고(*266)

세상의 명색에 대한 탐착을 없애

속박을 끊고 동요하지 않고 욕심이 없다면

하늘사람이든 사람이든 금생에나 내생에나

하늘에서나 모든 존재의 세계에서나

널리 찾더라도 그를 발견할 수 없다네” (S1.34)

 

 

[빠삐만]

위와 아래와 옆과

사방과 팔방을 찾아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네.

고디까는 어디로 사라졌는가?”(S4.23)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죽음의 신인 악마 빠삐만이 훌륭한 아들 박깔리의 의식은 어디에 있을까?’라고 훌륭한 아들 박깔리의 의식을 찾고 있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훌륭한 아들 박깔리는 시설된 의식이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S22.87)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잘 설한 가르침은 분명하고, 열려 있고, 확실하고, 위선이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분명하고, 열려 있고, 확실하고, 위선이 없는 나의 가르침 가운데, 만약 수행승들이 거룩한 이로서 번뇌를 부수고 수행이 원만하고 해야 할 일을 해 마치고 짐을 내려놓고 이상을 실현하고 존재의 결박을 끊고 올바른 지혜를 얻어 해탈하면 그들에게 윤회는 시설되지 않는다.”(M22)

 

 

2015-01-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