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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Buddha)는 일반명사인가 고유명사인가? 붓다의 두 가지 의미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 8. 19:09

 

 

붓다(Buddha)는 일반명사인가 고유명사인가? 붓다의 두 가지 의미

 

 

왜 무서운가?

 

상윳따니까야 마라상윳따에서 악마가 이번에도 비가 내리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부처님 면전에 나타났다. 경에 따르면 잔뜩 공포를 주기 위하여 커다란 바위를 부수었다.(S4.11)”라 하였다.

 

악마가 무시무시한 코끼리와 뱀의 중간 형상을 한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매혹적으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서 부처님의 위없는 깨달음이 널리 전파 되는 것에 대하여 무력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번번히 패하고 만다. 부처님이 악마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실체가 들통날 때 마다 악마는 세존은 나에 대하여 알고 있다라며 알아채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그곳에서 즉시 사라졌다.(S4.10)”라는 정형구로 표현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무리 무서운 존재도 알고 나면 더 이상 무서운 대상이 아님을 말한다. 몰랐을 때가 무서운 것이다. 마치 깜깜한 방에 불을 켰을 때 순간적으로 환해지면 모든 것이 드러나듯이 무명으로부터 지혜가 생겨 났을 때 더 이상 두려운 대상은 없다.

 

깃자꾸따 산을 통틀어 뒤흔들더라도

 

이번에 나타난 악마는 부처님 면전에서 바위를 부수는 등 위력시위를 한다. 이에 부처님은 이것은 악마 빠삐만이다라고 알아채고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서 말씀 하셨다.

 

 

 

  

Pāsāasutta(바위의 경, S4.11)

  

빠알리어

Sacema kevala sabba

gijjhakūa caleyyasi,
Neva sammā vimuttāna

buddhāna atthi iñjitanti.

gijjhakūa

전재성님역

[세존]

그대가 모든 깃자꾸따 산을

통틀어 뒤흔들더라도

올바로 해탈한 깨달은 님은

결코 동요가 없다네.”

깃자꾸따 산

각묵스님역

그대 비록 이 모든 독수리봉을

통째로 흔들지라도

바르게 해탈한 부처님들은

결코 동요하지 않는다.”

독수리봉

빅쿠보디역

“Even if you make this Vulture Peak

Quake all over in its entirety,

The enlightened are not perturbed,

For they are are fully liberated.”

Vulture Peak

 

 

 

 

 

 

 

악마는 부처님 면전에서 바위를 부수는 등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에 부처님은 악마임을 알아채고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깃자꾸따산 전체를 흔들어 겁준다고 해도 절대 동요하지 않을 것이라 한다.

 

깃자꾸따(gijjhakūa)산은

 

깃자꾸따(gijjhakūa) 산은 한역으로 영취산(靈鷲山)이라 한다. 신령스런 독수리의 산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독수리 취()’자이다. 각묵스님은 독수리봉이라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Vulture Peak’라 하였다. Vulture독수리, 콘도르, 탐욕스런 사람을 의미한다. 깃자꾸따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왁깔리 경(S22.87)을 참고하라고 하였다.

 

영산회상(靈山會上)

 

초기경에서는 깃자꾸따산이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법화경에서는 깃자꾸따 산에서 설법한 것으로 되어 있어 매우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그것이 유명한 영산회상이다. 여기서 영산은 깃자꾸따산을 말한다. 법화경에 묘사 되어 있는 영산(깃자꾸따산)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의 기사굴산 가운데서 큰 비구 대중 1 2천 인과 함께 계셨다.

.

.

그 때 부처님께서는 미간의 백호상으로 광명을 놓으시어 동방으로 1 8천 세계를 비추시니, 두루 하지 않은 데가 없어 아래로는 아비지옥과 위로는 아가니타천에 까지 이르렀다.

 

(묘법연화경, 서품, 운허스님역)

 

 

경에서 기사굴산은 깃자꾸따산을 말한다. 이를 영취산이라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의 제자와 권속을 보면 우주적 스케일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인 아라한이 무려 1 2천 명이고, 관세음보살 등 제보살이 8만명이다. 제석천은 그의 권속 2만명과 함께 참여 하였다. 이외  여덟 용왕, 아수라왕 등이 총망라 되어 있다. 또 우바새, 우바이로 불리는 재가의 불자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수 많은 존재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처님은 신통을 보여 준다. 백호에서 광명이 나온 것이다. 그 광명이 비추는 곳이 지옥에서부터 천상까지 비추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였다. 이렇게 영취산에서의 부처님의 설법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한다.

 

영산회상은 음악으로도 알려져 있다. 영산회상은 고려 시대부터 내려오는 속악의 하나로서,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영산회의 불보살을 노래한 악곡이라고 설명된다.

 

대승경전에서 영취산은 매우 특별한 장소이다. 특히 법화경에서 영산회상 모임을 통하여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드러낸 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 불자들이 인도성지순례를 가면 반드시 찾아 가는 곳이 영취산이다.

 

불교TV나 불교방송의 프로에 따르면 영취산은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신 장소라도 설명한다. 하지만 초기경전에 따르면 영취산은 전우주적 스케일의 모임 장소가 아니다. 부처님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머물던 장소이다.

 

라자가하 주변에는 다섯 개의 산이 있는데

 

왁깔리경에 따르면 마침 세존 께서는 그날 하루를 보내고 그날 밤을 깃자꾸따 산에서 지냈다(S22.87)”라고 설명 되어 있다. 깃자꾸따 산은 라자가하 근교에 있는 산으로서 단지 무소유의 수행자가 일시적으로 머무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 당시 마가다국의 수도인 라자가하 인근에는 깃자꾸따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숫따니빠따 출가의 경에 따르면 성자는 탁발을 끝내고 그 도시 밖으로 나와 ‘여기에 나의 처소가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빤다바산 으로 향했습니다. (stn414)”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빤다바(Paṇḍava) 산은 라자가하 근교에 있는 산 이름 중의 하나이다. 이에 대하여 집에서 없는 곳으로, 출가의 경(Pabbajja Sutta, Sn3.1)(2013-05-24)’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경의 각주에 따르면 라자가하 주변에는 다섯 개의 산이 있었다. 다섯 산은 빤다바(Paṇḍava), 깃자꾸따(Gijjakuta), 베바라(Vebhara), 이시길리(Isigili), 베뿔라(Vepulla)산이다.

 

다섯 개의 산중에서 불자들에게 잘 알려진 산이 깃자꾸따(Gijjakuta)로서 영취산이라 한다. 대승경전 법화경의 무대가 된다. 이시길리(Isigili)은 고디까존자와 박깔리존자가 자결한 산으로 등장한다. 베뿔라(Vepulla)산은 윤회의 두려움을 상기 시켜 주는 뼈들의 산으로 묘사되어 있다.

 

윤회하여 죽을 때마다 남긴 뼈를 모아 놓으면

 

초기경에서 베뿔라산에 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일겁의 세월만 윤회하더라도

한 사람이 남겨놓는 유골의 양은

그 더미가 큰 산과 같이 되리라고

위대한 선인께서는 말씀 하셨네.

 

그런데 큰 산은 이처럼

베뿔라 산이라고 불리우니

깃자꾸따 산의 북쪽에 놓여 있고

그곳에 마가다의 산성이 있네.”(S15.10)

 

 

일 겁은 상상할 수 없는 오랜 시간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백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은 윤회하여 왔다. 그런데 죽을 때마다 뼈를 남겼다는 사실이다.

 

윤회하여 죽을 때마다 남긴 뼈를 모아 놓으면 얼마나 될까? 게송에 따르면 베뿔라산의 높이 만큼 될 것이라 한다. 그러나 한량 없는 세월 동안 윤회 하였다면 그 뼈무더기는 에베레스트 산 보다 더 높을 것이다. 그런 베뿔라산은 깃자꾸따 산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붓다라는 말에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Pāsāasutta(바위의 경, S4.11)에서 게송의 “Neva sammā vimuttāna buddhāna atthi iñjitanti”라는 구절이 있다. 전재성님은 올바로 해탈한 깨달은 님은 결코 동요가 없다네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바르게 해탈한 부처님들은 결코 동요하지 않는다라 하였다.

 

여기서 buddhāna에 대하여 깨달은 님(전재성님)’부처님들(각묵스님)’이라고 달리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The enlightened’라 하였다. 붓다(buddhā)에 대하여 왜 이렇게 달리 번역하였을까?

 

buddhāna에 대하여 PCED194 에서는 “buddhāna = ( buddhā + āna ) 字尾: ā<>āna 陰性%复数 與格,屬格이라 설명 되어 있다. 또한 붓다에 대하여 두 가지로 설명해 놓았다.

 

 

1) buḍḍha:

a. [=vuḍḍha] いたる, . aged; old

 

2) buddha:

a. m. [bujjhati pp.] った, めたる, せる; , , . -ānubuddha ってれる.

[pp. of bujjhati] known; understood; perceived. (m.), one who has attained enlightenment; the Enlightened one.

 

 

붓다에 대한 첫 번째 뜻은 형용사로서 늙은또는 나이 든의 의미가 있다. 영어로는 ‘aged; old’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붓다라는 말이 반드시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고유명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붓다에 대하여 두 번째 뜻은 과거분사형으로 하여 ‘known; understood; perceived’ 의 뜻이다. 사람을 지칭할 때는 정관사를 붙여서 ‘the Enlightened one(깨달은 자)’이라 하였다.

 

나이 든 자로서 붓다

 

PCED194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 붓다에 대하여 경전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나이 든 자와 관련하여  ‘D.II,162’를 참고 하라고 하였다.  이는 PTS본 디가니까야 2 162페이지를 보라는 것이다. 찾아 보니 마하빠리닙바나경(대반열반경, D16)이다. 관련된 페이지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Tena kho pana samayena subhaddo nāma buḍḍhapabbajito' tassa parisāya nisinno hoti. Atha kho subhaddo, buḍḍhapabbajito te bhikkhu etadavoca:" ala āvuso mā sovittha, mā paridevittha. Sumuttā maya tena mahāsamaena. Upaddutā ca homa ida vo kappati, ida vo na kappatī ti. Idāni pana maya ya icchissāma ta karissāma, ya na icchissāma na ta karissāmā"ti.

 

그런데 쑤밧다라고 하는 나이가 들어 출가한 자가 무리가운데 앉아 있었다. 그 나이가 들어 출가한 쑤밧다가 그 수행승들에게 말했다.

 

[쑤밧다]

벗들이여, 그만하시오, 슬퍼하지 마시오. 비탄해하지 마시오. 우리는 그 위대한 수행자에게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은 그대들에게 옳다. 이것은 그대들에게 그르다.’라고 간섭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완전한 열반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6,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열반에 들려 할 때 마지막 제자가 수밧다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표현이 나이가 들어 출가한 자라는 말이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가 ‘buḍḍhapabbajito’이다.

 

늦깍이라 번역한 각묵스님

 

여기서 buḍḍha의 뜻은 ‘aged; old’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붓다라는 단어가 반드시 깨달은 자를 지칭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초불연에서는 ‘buḍḍhapabbajito’에 대하여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각묵스님이 번역한 디가니까야 대반열반경을 보면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그때 수밧다라는 늦깍이가 그 외중에 앉아 있었다. 늦깍이 수밧다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이제 그만하십시오. 슬퍼하지 마십시오. 탄식하지 마십시오. 도반들이여, 우리는 이제 그러한 대사문으로부터 속 시원하게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은 그대들에게 적당하다. 이것은 그대들에게 적당하지 않다.’라고 늘 간섭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반열반경, 디가니까야 D16, 각묵스님역)

 

 

각묵스님의 번역에 따르면 ‘buḍḍhapabbajito’에 대하여 늦깍이이라 하였다. 이는 전재성님이 나이가 들어 출가한 자라고 원어 그대로 번역한 것과 대조적이다.

 

buḍḍhapabbajito‘buḍḍha(aged; old)+pabbajito(Having given up the world, having become a Buddhist monk)’의 형태이기 때문에 전재성님의 번역은 정확하다. 그럼에도 전재성님은 늦깍이라 하여 순수한 우리말로 의역 하였다.

 

빅쿠보디의 번역을 보면

 

늦깍이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나이가 꽤 들어서 어떤 것을 시작하거나 성공한 사람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각묵스님의 번역이 틀린 것은 아니다. 수밧다가 노년에 이르러 출가하였기 때문에 늦깍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빠알리어 ‘buḍḍhapabbajito’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그렇다면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LDB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다.

 

 

And sitting in the group was one Subhadda, who had gone forth late in life, and he said to those monks: 'Enough, friends, do not weep and wail! We are well rid of the Great Ascetic. We were always bothered by his saying: "It is fitting for you to do this, it is not fitting for you to do that!" Now we can do what we like, and not do what we don't like!'

 

(The Buddha's Last Days, LDB D16, 빅쿠보디역)

 

 

빅쿠보디는 ‘buḍḍhapabbajito’에 대하여 “who had gone forth late in life”라 하였다. ‘인생의 막바지에 들어간 자라는 뜻이다. 비교적 원어에 가까운 번역이라 본다. buḍḍha에 대하여 forth late in life’라 하여 늦은 나이라는 뜻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buḍḍha’라는 말은 나이가 든’이라는 뜻이 된다.

 

깨달은 자로서 붓다 

 

buḍḍha의 뜻이 늦은 나이또는 나이 먹은라는 뜻이 있다. 다음으로 깨달았다는 뜻으로서 붓다이다. 이때 붓다(buḍḍha)bujjhati에 대한 과거분사형이다.

 

bujjhati에 대하여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면 “[budh + ya] knows; understands; perceives; is awake.”라 되어 있다. ‘알다, 이해하다, 인식하다. 깨어 있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붓다라 하여 반드시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부처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PCED194에서는  bujjhati의 과거분사형으로서 buḍḍha에 대하여 ‘A.II,38’를 참고하라고 한다. PTS본 앙굿따라니까야 2 38페이지에 관련된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찾아 보니 세상의 경(A4.36)’이다. 세상의 경에 깨달은 자로서 buḍḍha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Seyyathāpi brāhmaa uppala vā paduma vā puṇḍarīka vā udake jāta udake savaḍḍha udaka accuggamma hāti anupalitta udakena. Evameva kho aha brāhmaa loke jāto loke savaḍḍho loka abhibhuyya viharāmi anupalitto lokena. Buddhoti ma brāhmaa dhārehīti.

 

 

[세존]

바라문이여, 예를 들어 청련화나 홍련화나 백련화가 물 속에서 생겨나 물속에서 자라지만, 물을 벗어나서 물에 젖지 않고 피어 있듯, 바라문이여, 이와 같이 나는 세상 속에서 생겨나 세상 속에서 자라지만,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물들지 않고 지냅니다. 바라문이여, 깨달은 님이라고 나를 기억하시오.”

 

(Doa(loka)sutta-세상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36, 전재성님역)

 

 

말미에 바라문이여, 깨달은 님이라고 나를 기억하시오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Buddhoti ma brāhmaa dhārehīti.의 번역어이다. 여기서 Buddha에 대하여 깨달은 님으로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붓다(Buddha)는 일반명사인가 고유명사인가?

 

붓다는 깨달음을 성취한 자를 말한다. 그래서 모든 존재, 인간과 신을 포함하여 가장 수승한 자를 말한다. 이와 같이 깨달은 자에 대하여 붓다라 한다. 그렇다면 초불연에서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대림스님이 번역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바라문이여, 예를 들면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이 물에서 생겨서 물에서 자라지만 물을 벗어나서 물에 젖지 않고 피어있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나는 세상에서 태어나서 세상에서 자랐지만 세상을 지배한 뒤 세상에 젖지 않고 머문다. 바라문이여, 그런 나를 부처(Buddha)라고 호지하라.

 

(Doa(loka)sutta-세상 경, 앙굿따라니까야 A4.36, 대림스님역)

 

 

대림스님은 “Buddhoti ma brāhmaa dhārehīti”에 대하여 그런 나를 부처(Buddha)라고 호지하라라고 번역하였다. 붓다에 대하여 괄호를 이용하여 부처(Buddha)’라고 번역한 것이다. 번역에서 괄호를 이용하여 한자어를 종종 접하지만 영어가 들어 간 경우는 거의 못하였다. 본문 번역에 영어가 들어간 경우를 처음 본다.

 

붓다에 대하여 부처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라고 하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연상하게 된다. 불자들이 부처님이라고 칭할 때 석가모니 부처님을 뜻하기 때문이다. 마치 고유명사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에서는 고유명사로서의 붓다가 아니라 일반명사로서의 붓다이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붓다에 대하여 부처라 번역하여 마치 석가모니 부처님을 의미 하는 것처럼 고유명사로 오해할 소지를 남기고 있다. 

 

깨달은 자로서 붓다에 대하여 PCED194에서는 The word Buddha is an appellative, not a proper name”라 하였다. 이는 붓다라는 말은 보통명사이지 고유명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초기경전에서 붓다라는 말은 보통명사이지 고유명사가 아님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고유명사는 같은 종류에 속하는 사람이나 사물 가운데 어느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고유의 기호를 붙인 이름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경전에서 붓다라는 말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라기 보다  깨달은 자를 지칭하는 보통명사, 즉 일반명사임을 알 수 있다.

 

불자들은 붓다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을 떠 올린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은 붓다에 대하여 반드시 깨달은 님이라는 일반명사를 사용하였다. 빅쿠보디 역시 The enlightened’라 하여 일반명사를 사용하였다. 다만 부처님을 지칭할 때는 The blessed one’이라 하여 달리 사용하였다. 그러나 초불연 번역에서는 붓다에 대하여 부처라고 일률적으로 적용하였다. 그러다 보니 보통명사와 고유명사의 구분이 불분명해지는 결과를 초래 하였다. 

 

왜 이런 번역이 되었을까? 이는 초불연의 경직된 번역 시스템에 기인한다. 예를 들어 초불연에서는 담마에 대하여 으로 통일하여 번역하고 있다. 담마라는 말이 수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법이라는 단어 하나만 고수하는 것이다. 또한 깜마에 대하여 으로 고수하고 있다. 이런 경직된 번역시스템에서 Buddha는 모두 부처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처가 석가모니 부처님을 뜻하는 것처럼 착각 되기도 한다. 이는 경직된 번역시스템과 함께 일반명사와 고유명사를 구별하지 않고 번역함에 따라 발생된 문제로 본다. 

 

부처님들이라 번역하였을까?

 

Pāsāasutta(바위의 경, S4.11)의 게송에서  “Neva sammā vimuttāna uddhāna atthi iñjitanti.구절에 buddhāna은 일반명사로서 붓다를 뜻한다. 즉, 깨달은 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에서는 부처님들이라 하여 복수로 번역 하였다. 붓다라는 말이 일반명사라면 단수이든 복수이든 모두 포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각묵스님은 왜  부처님들이라 번역하였을까? 이는 빅쿠보디의 번역 The enlightened are~”라는 구절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영어문장에서 복수를 뜻하는 동사 are 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들은이라고 번역한 것으로 보여진다.

 

표로 정리하면

 

붓다에 대하여 두 가지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이 가 들었음을 뜻하는 형용사적 의미로서 붓다가 그것이고, 또 하나는 깨달았다는 뜻으로 과거분사형의 의미로서 붓다가 그것이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나이 든 자로서 붓다

 

 

근거 경

빠알리어

buḍḍhapabbajito

Tena kho pana samayena subhaddo nāma buḍḍhapabbajito' tassa parisāya nisinno hoti.(D16)

전재성님역

나이가 들어 출가한 자

각묵스님역

늦깍이

빅쿠보디역

who had gone forth late in life

 

 

 

2) 깨달은 자로서의 붓다

 

 

근거 경

빠알리어

Buddhoti

Buddhoti ma brāhmaa dhārehīti.(A4.36)

전재성님역

깨달은 님

대림스님역

부처(Buddha)

빅쿠보디역

The enlightened

 

 

 

 

깨달은 님에게는 동요가 없다

 

Pāsāasutta(바위의 경, S4.11) 게송에서 올바로 깨달은 님은 결코 동요가 없다 (Neva atthi iñjitanti)”라 하였다. 여기서 동요가 없다와 관련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Dhp255에도 나온다고 하였다.

 

게송의 네 번째 구절과 동일한 내용이 법구경 255번 게송에 실려 있다 법구경 255번을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Ākāse pada natthi,

samao natthi bāhire,
Sa
khārā sassatā natthi,

natthi Buddhāna iñjita.

 

허공에는 발자취가 없고

수행자는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형성된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깨달은 님에게는 동요가 없다. (Dhp255, 전재성님역)

 

 

네 번째 구절을 보면 깨달은 님에게는 동요가 없다(natthi Buddhāna iñjitaṃ)라 하였다. 이는 S4.11올바로 깨달은 님은 결코 동요가 없다 (Neva atthi iñjitanti)”와 똑 같은 내용이다.

 

여기서 동요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주석에 따르면 존재의 세계는 희론에 매료 되어 있다. 그러나 여래는 희론을 여의었다. 희론은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 아래에서 완전히 소멸해 버렸기 때문이다.(DhpA.III.378)”로 되어 있다. 여기서 희론은 망상을 뜻한다.

 

게송에서 허공에는 발자취가 없고 수행자는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 주석에 따르면 가시적인 하늘에는 색깔이나 모양이 이러이러한 사람의 특별한 발자취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 밖에는 길(magga)과 경지(phala)를 획득한 수행자가 없다.(DhpA.III.378)”는 뜻이다.

 

깨달은 자에는 망상이 없어서 동요가 일어 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악마가 부처님 면전에서 바위를 부수며 무서운 기세를 보여도 부처님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악마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이다.

 

우린 이제 어쩌죠?” “나도 모르겠오

 

무엇이든지 몰랐을 때 두렵다. 미래가 불확실할 때 근심과 걱정이 생겨나는 것이다. 최근 영화 닥터 지바고’를 보았. 영화에서 지바고는 연인 라라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는 여러 우연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우연도 자주 일어나면 필연이 되는 모양이다. 이전에는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관계이었지만 영화 후반에서는 밀회의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지바고와 라라가 밀회 하는 장면에 대하여 어떤 이는 로맨스라 할 것이다. 반면 또 어떤 이는 불륜이라 할 것이다. 이를 두고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영화속에서 남녀관계는 분명히 불륜이다.

 

지바고와 라라가 사랑을 나누고 난 다음 대화가 있다. 이를 스마트폰 메모에 남겼다. 그리고 디카로 장면을 찍어 두었다. 그것은 대화가 의미 있었기 때문이다.

 

지바고와 라라가 사랑을 나누고 난 다음 한이불에서 라라가 우린 이제 어쩌죠?”라고 묻는다. 이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 하지만 지바고는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고, 라라는 전선에 붉은 군대의 사령관으로 있는 남편이 있고 더구나 딸과 같이 살고 있는 유부녀이다. 

 

유부남과 유부녀가 우연이 겹쳐 마침내 필연이 되어 육체적 사랑으로 발전 되었다. 그런데 영화에서 밀회를 마친후 라라가 우린 이제 어쩌죠?”라고 말하였다. 이에 지바고는 무어라 말했을까? 지바고는 곧바로 나도 모르겠오라 하였다.

 

 

 

 

 

 

 

영화에서 우린 이제 어쩌죠?”하였을 때 나도 모르겠오라 답한 것은 미래가 불확실한 것을 말한다. 미래가 불확실 하기 때문에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근심과 걱정이 생겨난다.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분명하다면 걱정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악마가 아무리 깃자꾸따 산을 들었다 놓을 정도로 겁을 주지만 악마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조금도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올바로 해탈한 깨달은 님은 결코 동요가 없다네라 한 것이다. 몰랐을 때 답답한 것이다.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2015-01-08

진흙속의연꽃